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여성들이여, 관계에서 성공합시다”라는 주제로 여선교회 연합 수련회가 quality inn 에서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가졌던 작년과 달리 오랜만에 외부에서 갖는 수련회이어서 그런지 모두 새로운 분위기 속에 은혜롭고 즐거운 2 박 3 일의 일정을 보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강사 정정숙 전도사님의 네 차례에 걸친 말씀은 모든 여선교회 회원들에게 매우 유익한 교훈이요 지침이었습니다.

사실, 강사 전도사님의 줄기찬 외침은 하나였습니다. 모든 성공적인 관계는 나의 변화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의미 있게 회자(膾炙)되던 말이 있었습니다.

“내 탓이요”라는 단 네 글자의 짧은 구절입니다만 그 구절이 끼친 선한 영향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내 탓이오’라는 뜻은 영어로는 ‘my fault’로 표현하고 라틴어로는 ‘메아 쿨파/mea culpa’라고 말합니다.

‘내 탓이오(메아 쿨파)’는 문제의 원인을 다른데서 찾지 않고 자기성찰(自己省察)로부터 출발하는 태도로서 사회를 한결 밝게 해주었습니다.

 

젊은이들의 즐겨 부르는 ‘나로부터 시작되리’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그 가사의 마지막 부분은 ‘주의 꿈을 안고 일어나리라 선한 능력으로 일어나리라 이 땅의 부흥과 회복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가사는 교회부흥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가정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밝게 만들고, 교회도 부흥시키는 비결에는 모두 “내”가 담겨 있습니다.

“네 탓이다”하면 모두 무너지지만 “내 탓이오”하면 같이 살아납니다.

자, 이제 그대는 모두 무너지는 길로 가시겠습니까, 같이 살아나는 길로 가시겠습니까?

너무 고민 마시고 오늘 배운 라틴어 그 한 마디를 외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렇게 말이죠.

“메아 쿨파!”


어느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이상한 욕을 듣고 살게 되었답니다.

간암 말기 진단을 받은 그는 3 개월 밖에 못 산다는 최후통첩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시한부 인생임을 자신도 주변의 모든 사람도 다 알고 눈물로 하루하루 지내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를 보고 “살 놈!”이라고 외치고 지나 간 것입니다.

놈이란 욕을 들어 언짢았으나 그 앞에 있는 수식어에 너무 감동이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곧 “죽을 놈!”이라고 여기며 지내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말은 안 해도 자기와 똑같은 시각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뜬금없이 “살 놈!”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이 시한부 인생의 시각은 그 때부터 바뀌었습니다.

“나는 죽을 놈이 아니다.

나는 살 놈이다.

나는 살 수 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삶에 대한 뜨거운 용기를 가지고 말이나 태도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없이 들어도 좋은 나는 “살 놈!”

 

그 시한부 인생에게 “살 놈!”이라고 욕(?)하신 분은 다름 아닌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시한부 인생에게 “살 놈!”이라고 욕한 것이 아니라 “샬롬!”이라고 인사한 것입니다.

평안을 기원한다는 “샬롬”을 “살 놈”으로 잘 못 들었으나 아무튼 그는 교회도 다니고 기도도 하면서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샬롬”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로 화목의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미안한 표현이긴 합니다만 우리 모두는 “살 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크게 이해를 간구하며 인사합니다.

오해 없이 들어주십시오.

하지만 그 내용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살 놈이여 샬롬!


내일부터는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자 고난주간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지만 그 너무나 힘겨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이토록 아름다운 일곱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첫째 말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고통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품으신 용서의 십자가여!

 

둘째 말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지옥 갈 도적을 천국으로 초청한 구원의 십자가여!

 

셋째 말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26,27)

새로운 가족 관계, 교회를 탄생시킨 사랑의 십자가여!

 

넷째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

내 죄 때문에 하나님께 대신 버림받은 희생의 십자가여!

 

다섯째 말씀: 내가 목마르다 (요 19:28)

주님의 목마름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사명의 십자가여!

 

여섯째 말씀: 다 이루었다 (요 19:30)

맡으신 일들을 온전히 이루신 승리의 십자가여!

 

일곱째 말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모든 것을 의탁할 아버지를 알게 해 준 안식의 십자가여!

 

생각해 보니 이천년 전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울려 퍼진 일곱 말씀은 모두가 우리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애절한 그 사랑의 말씀이 너무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아 시린 가슴을 눈물로 쓰다듬어 봅니다.

 

스펙은 제품설명서를 뜻하는 specification 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펙이 좋다는 것은 남다른 기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펙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남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궁금해 하고 스펙이 많고 다양한 사람일수록 대단히 여기는 풍토가 있습니다.

 

스펙으로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의 화려한 스펙보다 더 찬란한 스펙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두바이에는 세계 최고의 칠성급(七星級)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최고의 호텔이었던 5 성급 호텔을 누른 7 성급 호텔이 탄생했다면 그 언제가 9 성급 호텔도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라 스토리입니다.

스토리는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스토리가 쏟아져도 걱정하거나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스토리를 빼앗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시간과 장소는 스펙처럼 특별한 곳과 특정한 때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日常) 속에서도 남다른 특이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낫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펙의 사람이고, 남들과는 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토리의 사람입니다.

스펙을 지향할 것인가 스토리를 지향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은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스펙보다 스토리가 자신을 더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조금 더 다가가면 모든 일상 속에서 나의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간다면 위대한 영적 스토리–간증까지 생긴답니다.

스펙의 시대에 스펙이 없어도 당당함을 뛰어 넘어 압도하는 사는 길, 스토리의 삶입니다.


일주일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2015 년 사순절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한 걸음씩 내디딘 걸음이 머잖아 부활절을 지날 것이요, 그 언젠가는 주님의 존전 앞에도 이를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으실 질문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기철 목사님은 이런 글을 옥중에서 남기셨습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른 것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이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리이까?”

목사님은 주님께서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할까를 늘 생각하면서 이 땅을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목사님은 5 년의 옥고(獄苦)를 치르면서도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시고 47 세이시던 1944 년 4 월, 가장 아름다운 고난의 잔, 순교(殉敎)로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아흔 여섯 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2015 년 삼일절을 맞고 있습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그 해 열일곱 살 꽃다운 나이의 여학생 유관순은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소망의 미래로 일깨우기 위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조선의 해방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다 함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나는 대한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 만 18 세가 되기도 전(前)인 1920 년 9 월 순국(殉國)한 어린 소녀의 마지막 말은 이랬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스펙은 제품설명서를 뜻하는 specification 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펙이 좋다는 것은 남다른 기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펙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남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궁금해 하고 스펙이 많고 다양한 사람일수록 대단히 여기는 풍토가 있습니다.

 

스펙으로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의 화려한 스펙보다 더 찬란한 스펙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두바이에는 세계 최고의 칠성급(七星級)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최고의 호텔이었던 5 성급 호텔을 누른 7 성급 호텔이 탄생했다면 그 언제가 9 성급 호텔도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라 스토리입니다.

스토리는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스토리가 쏟아져도 걱정하거나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스토리를 빼앗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시간과 장소는 스펙처럼 특별한 곳과 특정한 때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日常) 속에서도 남다른 특이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낫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펙의 사람이고, 남들과는 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토리의 사람입니다.

스펙을 지향할 것인가 스토리를 지향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은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스펙보다 스토리가 자신을 더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조금 더 다가가면 모든 일상 속에서 나의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간다면 위대한 영적 스토리–간증까지 생긴답니다.

스펙의 시대에 스펙이 없어도 당당함을 뛰어 넘어 압도하는 사는 길, 스토리의 삶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서로 인사할 때 “마라나타!”라고 외쳤습니다.

원문 성경 고린도전서 16 장 22 절에 나오는 “마라나타”는 우리 성경이 번역한 대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제 곧 우리 주님이 오십니다.

어떤 어려움도 잘 참고견딥시다.”라는 의미로 마라나타를 그들의 인사로 삼은 것입니다. 

오늘날은 초대 교회의 상황이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외칠 것도 마라나타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요한계시록을 강해합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에도 마라나타를 풀어 쓴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22:20)라는 간절한 외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나타의 신앙을 일깨워 줄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잘 이해하시고 요한계시록 전체를 읽으시며 사순절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험한 세상을 넉넉히 이기시는 모든 교우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1-3 장에는 서론과 일곱 교회 이야기가 있다 

4 장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 예배 광경이 보인다

 

5,6 장에는 일곱 인이 떼어진다 

7 장에는 많은 무리가 예배드리는 광경이 있다

 

8,9 장에는 일곱 나팔 이야기가 있다 

10 장에는 일곱 우레 소리가 있다

 

11 장에서는 두 증인이 죽는다 

12 장에는 용과 여자의 싸움이 나온다

 

13 장에는 666 숫자가 나온다 

14 장에는 144,000 명이 나온다

 

15 장에는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가 있다 

16 장에는 일곱 대접이 부어진다 

17 장에서는 음녀가 망한다 

18 장에서는 바벨론이 망한다

 

19 장에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있다 

20 장에는 천년왕국 이야기가 있다 

21 장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인다 

22 장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우리 모두가 가슴 저미게 외치고 외칠 그 말, 마라나타! 마라나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오늘 우리는 교회 설립 41 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위대한 사도행전의 역사를 재현하는 교회가 되게 하자”는 기치를 들고 중단 없이 달려왔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이민 땅에서 많은 교회가 넘어지고 흩어지는 가운데 우리 교회는 그 초점을 잃지 않았기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초점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동안 절대 진리인 성경의 자리를 대신하여 이성(理性) 또는 과학(科學)이 절대 진리인 것처럼 행세하여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왔습니다만 이제는 그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절대 진리에 대한 관심보다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세상의 “절대 진리”에 대한 태도는 무관심이 아니라 실망에 가깝습니다.

오늘에 지친 삶에 대한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하고, 현대의 혼돈스런 삶을 조금도 변화시켜 주지 못하는 진리에 더 이상 소망을 두고 싶지 않다는 애절한 절규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진정성을 보여 준다면 세상은 다시 그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그 말씀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간다면 초점 없이 상대주의에 빠져 살던 사람들이 다시 귀를 쫑긋일 것이며 눈의 초점을 그 하나에 모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라는 목표는 그렇게 세워진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변화시킬 진리를 기다려 왔습니다.

척박한 이민 땅에서 우리 교회의 41 년이 “사도행전 역사의 재현”이라는 선명한 초점에의 승리였다면, 상대주의가 편만한 시대에서의 지속적 승리를 위해 “말씀으로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라는 초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른 초점과 그 초점을 향한 타협 없는 헌신을 보여주신 우리교회 1 세대의 어른들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다음 장(章)의 역사를 힘 있게 쓰기 시작한 새로운 세대(世代)에게 뜨거운 사랑을 전합니다.


아니~ 벌써~♬

2 월이 되었습니다. 신년하례 예배 드리고, 제직수련회 지나고, 청년수련회 잠간 갔다 왔더니 한 달이 훌쩍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이 시간입니다. 농부들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더 빠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아직 겨울이지만 농부들의 마음은 밭으로 나가 있겠고 파종을 하기 위한 여러 준비를 할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파종 했다고 그의 일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부터 바쁜 일이 진짜 시작되는 것입니다.

농부는 수시로 밭을 드나들며 심은 작물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 둘러볼 것입니다.

만일 어느 농부가 게을러서 밭을 둘러보지 않는다면 그의 가을 들녘에서는 부를 노래가 없을 것입니다.

후회의 탄식과 눈물이 볼품없이 자란 작물에 뚝뚝 떨어질 것입니다.

부지런히 돌본 농부의 밭은 자신이 먹기에 넉넉함은 물론 그 풍부함을 함께 누릴 이웃들의 존경어린 눈길을 받을 것입니다.

 

이 땅의 밭이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예민합니다.

돌보지 않고 가꾸지 않는 영혼은 겉으로는 잘 표시가 나지 않는 것 같지만 곧 비틀거리다가 조그마한 시련에도 쓰러질 것이요,

잘 돌본 영혼은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영적 열매를 함께 나눌 것입니다.

 

2 월은 영혼을 부지런히 돌볼 계절입니다. 이번 주면 제자훈련과 영성훈련이 시작됩니다.

사순절도 2 월에 시작됩니다.

영혼 가꾸는 일, 나중에 해도 괜찮으려니 하다가는 자신의 육신도 거하기 싫다고 외칠 황폐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영혼을 부지런히 가꾸세요. 영혼을 가끔 돌보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 삼지 마십시오.

너무 빠르게 다가온 2 월, 그나마 2 월은 삼일 먼저 도망가니 영혼을 잘 가꾸어 거두셔서 풍성한 2 월의 가을을 만들어 봅시다.


 

사순절, 기도의 계절이 다가 왔습니다.

기도는 항상 해야 하지만 사순절은 구약의 미스바 성회처럼 우리 온 교회가 하나님께 나아가 전심으로 부르짖는 특별한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사순절 기도는 개인의 회복, 가정의 축복, 교회의 부흥, 선교의 확장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은 세 사람이 함께 조를 짜서 참여하는 삼겹줄 중보기도회로 진행 할 것입니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많은 분들이 삼겹줄 중보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먼저 세 사람이 한조를 짜서 그 이름을 교역자에게 제출해 주시면 됩니다.

유의하실 것은 한 사람은 꼭 한 그룹에만 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쁘실 테니까

겹치기 출연은 삼가 주세요.

 

중요한 것은 사순절 동안 세 사람이 자주 만나 서로 격려하고 서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만남이란 의미는 새벽기도회 시간에 꼭 같이 앉으라는 것이아닙니다.

매일 새벽기도회 후에 친교실에서 베이글과 커피를 앞에 두고 만나실수 있고, 밖에서 만나셔서 삼겹줄 중보기도모임답게 삼겹살, 삼계탕, 삼선짬뽕 또는 삼합 등 ‘삼’자가 들어간 음식을 먹는 것도 참 좋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을 불러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8b)"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깨어 기도하라”는 명령이 이번 삼겹줄 중보기도에 참여하는 우리 모든 교우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졸지마시고, 포기마시고, 안 된다고 하지 마시고 깨어 기도합시다.

깨어 기도할 때 나 자신도 깨어나고, 내 가족도 깨어나고, 교회도 세상도 깨어날 것입니다.

세 사람의 중보기도, 세 사람은 물론 세상을 새롭게 바꿀 기적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b).”

그렇습니다.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내 힘들다”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길은 힘듭니다.

더구나 우리 모두는 이 거친 미국 땅에서 이민자요 나그네들 아닙니까?

턱까지 차올랐다 쏟아지는 탄식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한 번 읽어보세요.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으면 “다들 힘내”입니다.

올해도 온갖 힘겨움을 넘어 12월에 이르셨는데 이제는 2015년도의 마지막 고지(高地)가 뚜렷이 보이지 않습니까.

“다들 힘내”십시오.

 

추운 겨울, 나 자신에 대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때이기도 하지만 둘러보시면 우리 교회 안에도 나보다 조금 더 힘든 길을 걷는 자들이 있습니다.

늦게 이민 생활에 뛰어들었는데 길을 잘 못 찾거나, 가까운 사람 그 누구를 잃었거나, 건강이 악화되었거나, 홀로 되어 외롭거나, 오랜 기도 제목이 올해도 응답 안 되는 것 같아 상심하거나, 재정이 파탄되었거나, 가정에 우환(憂患)이 있거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나보다 조금 더 힘든 길을 걷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의 위로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상투적이지 않은 따뜻한 말 한마디, 정감 어린 카드나 카톡, 가벼운 허그(hug) 속에 담긴 묵직한 격려, 커피 한잔이나 짜장면 한 그릇으로도 우리는 훌륭한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프랜시스의 기도처럼 내가 먼저 위로 받기보다는 나보다 조금 더 힘든 길을 걷는 자들에게 위로자가 되어 준다면 참 뜻 깊은 성탄절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사랑의 눈을 열어 잘 둘러보세요.

어디선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남몰래 닦고 있는 사람이 있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내 위로가 꼭 필요한 그 사람이 거기서 많이 아파하고 있답니다.

곧 다가갑시다.

더 미루지 말고요.


12월 27일, 마지막 주일입니다.

서둘러 한해를 마감하고 싶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직 올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28일, 29일, 30일, 31일. 이렇게 4일이나 남았습니다.

4일을 자투리 시간처럼 여기고 덧없이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사실, 올해의 진정한 승부수(勝負手)는 남은 4일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남은 올해의 4일은 충분한 시간입니다.

 

4일은 회개(悔改)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미국은 샤워문화이지만 한국은 목욕문화입니다.

샤워는 흐르는 물에 가볍게 몸을 닦는 것이지만 목욕은 몸을 탕 속에 담갔다가 묵은 때를 벗겨내는 일입니다.

신년이 되기 직전 동네 목욕탕은 북새통을 이루곤 했습니다.

묵은 때를 벗기고 새해를 맞겠다는 것이지요.

새해를 묵은 죄와 더불어 맞이하긴 좀 그렇지 않습니까?

4일이 남았습니다.

회개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4일은 용서(容恕)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한 해를 돌이켜 보니 나도 누군가에게 많은 잘못을 했고 누군가도 나를 많이 힘들게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많이 이해가 됩니다.

나라도 그렇게 했겠다고 이해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이제 이해되건 이해가 안되건 남은 4일 동안에 용서라는 선물을 만들어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에게 보낸다면 훗날, 나의 2015년도 마지막 4일은 아름다웠다고 분명히 회고할 것입니다.

 

4일은 역전(逆轉)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지난 11월 19일 일본 도쿄돔에서 한국 대표팀과 일본 대표팀이 프리미어12 야구 결승 진출을 앞두고 맞붙게 되었습니다.

한국 대표팀은 8회까지 0-3으로 지고 있었습니다.

남은 것은 단 9회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경기는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 대표선수들은 포기하지 않고 9회 초에 대거 4점을 내어 경기를 4-3으로 역전시켰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9회 초, 단 하나 남은 찬스를 놓치지 않아 경기를 뒤집었듯이 남은 4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내 인생도 역전됩니다.

 

아직 4일이나 남았습니다.


예술(藝術)은“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갖고 있습니다.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가진 예술은 막강한 힘이 있어 많은 사람들을 각 예술이 표현하는 아름다움의 대상 앞으로 이끕니다.

 

자신의 예술이 b급임을 자처하는 가수 싸이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예술관을 가지고“강남 스타일,”“젠틀맨”을 비롯 최근 발표된“나팔바지,”“대디” 등의 뮤직 비디오를 통해 수억, 수십억의 사람들을 흔들고 노는 곳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헨델은“메시야”라는 작품을 통해 예수님을 너무 아름답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로 예수님에게 이끌어 마침내 예수님을 “king of kings” 로 찬송하게 하였습니다.

헨델의 “메시야”는 혼탁한 세상 속에 빛나는 탁월한 예술입니다.

 

사람은 예술과 분리되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통속적 예술에 취하여 삶이 점차 저급해지거나 참된 예술을 만나 삶을 계속 고양(高揚)시키게 됩니다.

오늘 오후에는 우리 찬양대가 지난 9월부터 준비한 메시아 연주가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몹시 힘들었을 찬양대원들이 맑은 영을 가지고 주일 저녁마다 모여 4개월을 연습하였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주일 밤 본당에는 그들만 있었습니다.

오늘은 아니지요?

진짜 예술을 만나는 자리, 그 예술이 하나님께는 예배가 되고 우리에게는 감동이 될 자리에서 못 뵙는 성도들은 없겠지요?

여러분을 믿쉽니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허스키한 목소리의 서유석씨가 부르던 노랫말입니다.

아무도 가는 세월을 잡지 못하여 어느 덧 우리 모두는 2015년 12월 중순을 같이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힘써 일했는지 올해를 자평(自評)한다면 어떤 점수를 줄 수 있겠습니까?

 

“일 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12월 13일이 기어코 왔듯이 일하고 싶어도 일 할 수 없는 인생의 밤도 머잖아 올 것입니다.

요나는 주님의 일을 피하다가 거친 풍랑을 맞기도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흔들림 없이는 아름다운 꽃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흔들어 댄다고 피어오르는 꽃이기를 거부하고 비열하게 땅에 묻혀 살지 마십시오.

 

오늘은 각 선교회 총회의 날입니다.

지난 회기에 수고하신 모든 회장단과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 왕의 주실 상급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오늘“내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소명의 외침이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19개 선교회 총회 장소에서 아름답게 울려 퍼지길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교회 어느 부서에 지도자로 쓰임 받는다는 것은 내 생애 큰 축복입니다.

축복을 버리고 추구하는 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일을 결코 다시 할 수 없는 밤이 정말 속히 옵니다.


저는 지금 교회를 떠나 휴스턴에 있습니다.

이곳 교회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오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리인 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몇 날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 사역이 끝나면 그 열매는 주님께 맡기고 오늘 밤 다시 뉴욕으로 돌아갑니다.

제 가슴을 늘 뛰게 하는 퀸즈장로교회로요.

 

저는 지금 아내를 멀리 떠나있습니다.

여러분이 눈치채신 정도가 아니라 분명히 아시겠지만 저는 허술한 면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더 더 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요.

삼십여 년 동안 그 많은 부족한 부분을 아내가 말없이 감싸 주었습니다.

그런 아내가 지난 목요일 갑상선 수술을 했습니다.

교우들의 기도 가운데 악성 종양이 아닌 것 같아 감사할 뿐입니다.

제 손길이 삼십 년 만에 꼭 필요할 때 이처럼 멀리 떠나 있어서 아내에게 진 빚은 계속 못 갚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교 현장에서 교회와 아내를 그토록 오래 떠나 계시면서도 묵묵히 그 소임을 다하시는 임정 장로님이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유로 남편 없이 아내 없이 오랜 세월을 지내시면서도 외롬을 외롭다, 힘듦을 힘들다 하지 않으시고 교회를 꿋꿋이 섬기시는 교우들도 생각나 이래저래 눈물지어 보는 가을입니다.


한국에“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여 “사람은 죽어서 이야기를 남긴다”고 해도 무방(無妨)할 것 같습니다.

 

1927년 태어나 지난 22일 서거하신 김영삼 전(前) 대통령, 그는 많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중학교 때 대통령의 꿈을 갖고 어떻게 그 과정을 걸었는지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서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 마지막까지 어떻게 사셨는지, 사람마다 해석은 다르지만 그의 이야기가 다시 회자(膾炙) 되고 있습니다.

서거하시기 얼마 전 가족과 모였을 때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를 부르자고 하셨다는 이야기도 남기셨습니다.

 

前 대통령의 서거에 다소 묻히긴 했으나 지난 25일이 탄생 100년째 날이라는 고(故) 정주영 현대회장, 그도 숱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지금도 리더십의 교범(敎範)이 될 만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권사 며느리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생애 끝자락에 세례를 받았고,“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복음송을 즐겨 불렀고,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물이나 권력이 아니라“믿음, 오직 믿음”이라고 강조한 이야기도 남기셨답니다.

 

몇몇 사람만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야기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남기는 사람일까요?

하나님과 그의 영광만을 생각한 사람,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환히 보면서 살았던 사람, 언제나 희망을 심고 어디서나 소망을 노래한 사람, 부르심을 향해 주저 없이 달렸던 사람, 아니면 매사에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닌 사람, 헌신의 시간에 핑계가 많았던 사람...

 

감사하게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우리들을 위해, 더 미뤄서는 안 될 적은 기회가 아직은 남아 있답니다.


언제 미국에 오셨습니까?

그 날 누가, 그리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저는 1994년 5월 21일 토요일에 꿈에 그리던 미국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날 케네디 공항에서 따듯이 맞아 주시던 분들은 미국에 앞서 와 사시던 가족들과 몇몇 교역자님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그 날 처음 참석한 행사는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교회 결혼식이었습니다.

 

미국의 첫 이민자라 할 수 있는 영국 청교도 102명이 신앙의 박해와 바다의 위험을 거쳐 미국 땅에 처음 도착한 것은 1620년 11월 9일 메사추세츠 주 케이프 코드 였습니다.

그곳 상황이 열악하여 그들은 그곳 건너편의 플리머스에 정식으로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추위와 질병, 배고픔과 인디언들이었습니다.

몇 개월 안에 절반의 사람이 죽고 말았습니다.

청교도들은 아파도 하고 울기도 하였지만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영국에서의 위협과 바다에서의 위험에서도 그러했듯이 미국에서의 위기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견고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1621년 봄, 사랑하는 가족들을 눈물로 묻은 땅 옆에 소망을 품은 씨앗들을 뿌렸습니다.

마침내 그 해 가을, 감격적인 첫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 미국의 첫 이민자들이 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첫 추수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날, 청교도들은 처음으로 거둔 곡식과 과일에 칠면조를 잡아 식탁을 꾸미고 인디언들을 초청해 함께 감사의 만찬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11월 마지막 목요일이 미국의 추수감사절로 지켜지다가 1941년에 11월 넷째 목요일로 조금 조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오는 우리 교회의 11월 넷째 목요일의 추수감사예배와 추수감사만찬은 청교도들의 첫 추수감사절 내용과 형식을 많이 닮고 있습니다.

11월 넷째 목요일의 추수감사절, 누군가는 꼭 지켜가야 할 신앙적 전통이며 성경적 문화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작곡가인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항상 그가 작곡한 악보 맨 위에 j.j를 써 놓았고 그 악보 끝에는 sdg를 적어 놓았습니다.

j.j는 라틴어 jesu, juva 의 이니셜로서 “예수님, 나를 도우소서”의 뜻입니다.

sdg는 역시 라틴어 soli deo gloria의 약어로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흐는 그의 신앙을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음악에는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모두를 향한 심오한 신학까지 담겨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성경의 또 다른 번역처럼 살아낸 바흐의 모든 출발은 j.j 였고 모든 마침은 sdg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적고 나의 한계가 분명해도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도우신다면 말입니다.

한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시작하는 것 같아도 예수님이 돕지 않으시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시작한 일은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열매를 맺을 것이고 또 맺어야만 합니다.

 

오늘은 11월 1일, 벌써 한해의 끝자락이 보이는 시간입니다.

무엇으로 올 한해를 시작하셨습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한 해를 마감하시려 하십니까?

우리의 모든 시작도 j.j가 되고 그 끝도 sdg가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j.j의 시작과 sdg의 마침 사이에는 어떤 삶이 있을지 즐겁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연필로 무엇이든지 처음이라면 j.j를, 마지막이라면 sdg를!


싹이 이 땅에 살포시 얼굴을 내민 이후 줄기로 자라 푸른 잎을 내다가 마침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히는 그럴듯한 나무가 되기까지 언제나 그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이 있습니다.

뿌리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뿌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연약한 싹이 아름드리 나무되기까지 그를 안아도 주었고 버텨도 주었습니다.

열매마다 나무마다 뿌리와 얽힌 이야기를 듬뿍 품고 있습니다.

 

나무가 뿌리의 수고를 기억하고 고맙다고 외친다면 나무가 서 있는 온 산마다 천둥소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는 바람 소리는 있을 뿐 뿌리야 고맙다는 나무 소리는 없습니다.

참 뻔뻔한 나무.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언제나 함께해주시면서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나를 붙잡아 주신 분이 있습니다.

내 생명의 근원이요 내 성장에 은총을 부으신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거두어 간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흉측한 존재입니다.

 

사람마다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표현하면 온 땅은 큰 화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날마다 끓어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계절에도 온 땅은 적막하여 작은 들썩임조차 없습니다.

뿌리의 은혜를 모르는 나무만 참 뻔뻔하다고 혀를 찰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 둘 떨어지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부쩍 외로움을 느끼는 가을.

날씨가 점점 추워져가면서 뭔가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가을.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 옛 누군가를 기다리는 가을.

그래서인지‘가을을 탄다’는 말이 옛 부터 있었나 봅니다.

 

가을을 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을을 타는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가을을 타는 사람들을 초청하는 소리, “그렇다면 가을 새벽 부흥회에 오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가을 새벽 부흥회

“두나미스, 능력을 주옵소서!” 10월 19일(월)-24일(토) 매일 새벽 5시 45분

 

두나미스!

능력이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두나미스를 받으면

아무리 가을이 깊어져도 쓸쓸하거나

의기소침해질 수 없습니다.

 

두나미스는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남의 것을 빌릴 수도 없기에 직접 오셔서 받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가을을 타지 않으니 안 가도 되지요?”하는 사람들에겐 더욱 필요한 가을 새벽 부흥회입니다.

왜냐구요?

가을을 안 타는 사람들도 진짜 매서운 겨울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나미스는 이 가을은 물론 다가 올 겨울을 넉넉히 이길 하늘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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