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하나

 

"하나"의 가치는 소중합니다.

힘들 때 들었던 찬양 한 곡이 위로와 희망을 부어주어 다시 힘 있게 일어서게도 합니다.

살포시 건네받은 장미꽃 한 송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저 먼 등대에서 비추이는 하나의 빛이 풍랑의 바다 속에서 갈 방향을 알려줍니다.

그 사람의 입에 번진 한번의 미소가 서러운 이민생활을 잘 이기게 해줍니다.

한 사람의 겸손과 섬김을 보며 나도 참 제자의 길을 걷겠노라 다지고 새겨봅니다.

"I have a dream" 한 사람의 하나의 꿈이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합니다.

 

51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시간이 아닙니다.

한 걸음으로부터 걷고 또 걸었던 인내의 시간이 만들어낸 역사입니다.

주저주저하다가 첫 걸음을 내딛지 않았다면 오늘의 퀸즈장로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나를 출발시키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 "하나"는 무엇입니까?

바울의 생애를 새롭게 시작시킨 "하나"요, 끝까지 자랑이요 힘이었던 "하나"가 있었습니다.

평생 그의 가슴을 뛰게 했던 "십자가" 였답니다.

 

2월은

 

어제 2월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달은 적어도 30일인데,

2월은 길어야 29, 그것도 4년에 한 번.

대부분 28일로 묶어 놓았답니다.

 

2월은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체성도 잃은 채 애매히 살아가지 않습니다.

얼었던 강물이 풀리고 다시 흐르는 계절.

2월은 희망을 노래합니다.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임도 오겠지

임은 안 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임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51년 전 하나님께서 2월 마지막 주일에 우리 교회를 세워주셨을 때

짧아서 억울합니다, 겨울도 봄도 아니어서 애매합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짧은 달이니만큼 더욱 부지런히 주님과 교회를 섬겼고,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임도 오겠지----”

우리 교회 생일이 있는 2월은 더욱 부지런히, 더욱 희망차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 보이지 않아도 GO!

 

예수님을 믿으라고요? 예수님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 존재를 믿으라는 것이죠?”

예수님을 보여주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는 자들의 항변(抗辯)입니다.

 

전기(電氣)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전기는 보이지 않아도 그 존재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전기는 수많은 힘들을 만들어 문명의 발달을 이루어 왔습니다.

 

공기(空氣)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공기는 보이지 않아도 그 존재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공기가 생명을 보존할 힘을 갖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예수님을 뵌 적이 없지만 그분의 존재는 확실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은 다가와 늘 새 힘을 주셨습니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나를 일으켜 힘든 산도 오르고, 거친 바다도 건너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날에는 예수님을 선명히 뵈올 터이니 지금 보이지 않아도 GO

새해에도 예수님의 존재와 날 사랑하심과 큰 힘 주심을 의심하지 말고 GO!

 

 

 


새해에 이렇게 삽시다.

 

신앙은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알고 믿는 것이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아는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야 참된 신앙입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2025년도 제직수련회가 오늘까지 계속됩니다.

강사 이용걸 목사님께서는

새해에 이렇게 삽시다라는 주제로 귀한 말씀을 전해주고 계십니다.

 

삶이 함께하지 않는 신앙생활, 제직생활이라면

아무리 새해가 되고 새로운 직분을 맡아도 하나님께 감동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새해, 새로운 다짐으로 새로운 삶이 있는 신앙생활, 제직생활을 해야겠습니다.

강사 목사님의 외침은 새해에 이렇게 살자고 우리를 깨우고 있습니다,

 

평탄한 길 갑시다.

버리고 갑시다.

이렇게 삽시다.

아름답게 삽시다.

기본으로 돌아갑시다.

 

한 해를 수고하실 사랑하는 제직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살수 있고,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용하고 싶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시며 무한하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자로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사용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부족함 투성의

우리를 사용하시려는 뜻은 놀랍고 기이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뜻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하시기에 부르심을 피해 도망가던 요나를 끝까지 쫓아가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피할 길 없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사명 끝에는 하나님의 따듯한 위로와 엄청난 상급이 있습니다.

충성의 사명자는 결산의 시간에 부끄러움과 책망을 받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토요일과 주일에 이어질 제직 수련회는

사명자의 마음을 새롭게 해줄 것입니다.

결산의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평가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25:21)

 

 


얼마나 좋으랴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에 무엇이 새로워지면 좋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부정적인 생각, 경솔한 생각, 안될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그만.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란 말이 있듯이

생각은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행동은 생각을 거쳐 나오는 것이니

긍정적인 생각, 신중한 생각, 될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생각할 것과 생각하지 말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구분해 주었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1b-2)

위에는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가장 존귀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깊이 그리고 새롭게 생각하는 한 해로 함께 살아가면 어떨까요.

우리 구주 예수님을 생각할수록 2025년의 우리 영성은 더 깊어질 것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마지막 한 마디

 

2024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평범했을 남은 몇날도 마지막이란 관점으로 보니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올해도 무수(無數)한 말을 주고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 말 가운데 위로가 되는 말도 있었고 상처를 안긴 말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가르쳤던 D. L 무디는 마지막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

프랑스의 이교도(異敎徒) 볼테르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소!----나는 지옥으로 갈거요.----”

그 마지막 말이 소망으로 가득찬 사람도 있고, 절망의 언어인 사람도 있습니다.

 

일년내내 불평과 탐심의 언어를 쏟던 사람의 마지막 말이 은혜롭긴 어렵습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삶을 살던 사람의 마지막 말이 험악(險惡)할리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한 마디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감동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감사합니다는 필경(畢竟) 감동의 언어 가운데 앞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 감사해요.” “교우님, 감사해요.”

 

늦지 않도록, 후회하지 않도록, 2024년도가 저물어가기 전에 말해보아요.


잃어버린 주인공을 찾아서

 

심리학 교수 한 분이 40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상테스트를 하였습니다.

성탄절이라는 단어를 주고 생각나는 것을 하나씩 적으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의 대답에는 추리, 선물, 휴일, 캐럴, 산타클로스등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40개의 대답 가운데 예수님이란 단어는 없었답니다.

아무도 성탄절의 진정한 주인공을 몰랐던 것입니다.

 

주인공을 잃어버린 잔치이야기, 그 학생들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성탄절의 거리를 걸어보십시오.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치장이 성탄절을 앞두고 거리를 메우고 있지만

정작 성탄의 주인공은 외롭고 쓸쓸한 거리.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의도하여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음받은 존재이고, 지으신 이의 의도가 있는 존재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내 인생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연말연시, 가짜 주인공들로 들뜨기 쉬운 성탄절.

이 세상이 잃어버린 주인공을 찾아뵙는 성탄절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는 25, 교회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성탄의 진짜 주인공을 만나보아요.

 

 

 

 

 


왕이 나셨도다

 

세상에는 가짜 왕이 너무 많습니다.

왕이 되려는 싸움이 치열합니다.

“내 것은 내 것이다, 네 것도 내 것이야.”

우리도 이런 싸움판에 한명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말합니다.

“내 방, 내 컴퓨터, 내 옷....”

착각입니다. 부모님이 그 값을 지불했지 자녀들이 지불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쓰고 있을지언정 자기들의 소유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위탁받은 것을 사용할 뿐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요 통치하는 왕이 단 한 분 있습니다.

그 이름 예수.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왕노릇하면 안 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왕이 나셨습니다. 놀라운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을 송축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동방의 작은 나라

 

동방의 작은 나라. 오랜 역사 가운데 수많은 외침(外侵)이 있었고

가난과 온갖 우상숭배와 공산당의 침략으로 가슴 아팠던 나라.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아주 쓰러진 것 같아도 다시 일으켜 주시어

오늘날의 경제(經濟)대국, 문화(文化)대국으로 세워 주신 나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넘치게 받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아직도 거짓과 인본주의 죄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라.

 

우리의 선진(先陣)들이 기도로 풍전등화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듯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또 다시 절절히 필요한 나라.

이러한 기도와 찬송이 있습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의 끝까지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며 주님만 섬기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의 주님 교회 위에 하늘의 생기 부어 주소서

열방을 치유하는 주 백성 주님의 군대를 일으켜 주소서

 

성령의 새 바람 이 땅에 불어오소서 주의 영 그 생기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땅에 하나님 영광 거하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열방에 하나님 영광 비추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살리사 하나님만 높이고

복음으로 열방을 치유하는 선교(宣敎)대국 되게 하소서.

 

 

 

 

 

 

 

 

 

 

 


마지막 한 달은

 

202412월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큰일을 하는 교회라는 표어로 출발한 한 해였습니다.

벌써 마지막 달이 되었습니다.

 

정녕 믿음으로 살아온 한해였던가.

어떤 도전을 하였으며,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가.

아쉬움이 큽니다.

 

마지막 한 달이 남았습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년을 기약하며 주저앉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2024년도의 센 물살이 여전히 우리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물살에 떠내려갈 것 같은 두려움도 있지만

믿음으로 발을 내딛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면

마지막 한 달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데 충분한 시간입니다.

 

 

 

 

 


진정한 축복

 

미국은 청교도들의 세운 나라입니다.

1620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으로부터 항해 끝에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

항해 길에 위험과 도착한 땅의 어려움 가운데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감사였습니다.

 

그들에겐 황량한 환경이 크게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이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신앙이 청교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풍요해진 강대국 미국이지만 감사는 초라해지는 것은 아닌지요.

청교도 나라 미국이 가장 먼저 회복해야 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입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고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진정한 축복은 감사드리는 자들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받은 은혜 잊지 말고 감사하며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성찬과 세례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성찬과 세례,

당연한 것인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성찬과 세례가 있는 것입니다.

 

성찬과 세례의 집례,

당연한 것인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집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찬과 세례를 당연히 여겼던 죄악을 회개하며

눈물과 감사로 예수님이 베푸신 생명의 식탁에 나아갑니다.

 

하늘의 양식을 먹은 답게 세상을 넉넉히 이기겠습니다.


입맛은 그대로

 

어느 마을에 가난한 감사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습니다.

고기가 드시고 싶어 정말 오랜만에 마음을 가지고 소고기 반근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들고 가시다가 길바닥에 떨어뜨리셨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개가 귀한 고기를 물어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광경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있으셨습니다.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무엇이 감사하시냐고 물었습니다.

"감사하지요. 비록 고기는 없어졌으나, 입맛은 그대로 있으니까요. 하하하"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시는 할아버지의 감사를 꺾을 것은 없었습니다.

 

감사의 달입니다.

올해 살아오면서 잃은 것도 적잖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러보십시오. 얻은 것과 남아 있는 것에 풍성함이 보일 것입니다.

입맛은 그대로 있어 감사하신 할아버지처럼, 영적인 입맛이 남아 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영적인 입맛은 기도의 갈망입니다.

나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에 대한 갈망입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내게 하나님께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여전히 끓어오르십니까.

 

그렇다면 두려워할 것도 염려할 것도 전혀 없습니다.


11

 

어느덧 11월이 되었습니다.

나뭇잎도 떨어지고 들판의 곡식도 추수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11이라는 숫자를 가만히 보면 결코 외로운 시간이 아닙니다.

112달 중에 이렇게 멋진 숫자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리로도 저리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동일한 숫자 11,

동행의 시간, 11.

 

외로우십니까?

힘드십니까?

내 옆에 계신 분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좋은 친구이신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

내 맘이 아플적에 큰 위로 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11, 많은 것들이 보이고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는 시간일터인데

친구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묵상하며 걷는다면

잊지 못할 2024년도의 멋진 11월이 될 것입니다.

 

 

 

 


덩실 덩실

 

 

 

나비는 사이로 다니면서 멋진 춤을 춥니다.

 

벌도 꿀을 만나면 신나게 춤을 춥니다.

 

고래도 칭찬을 들으면 묘기에 가까운 시원한 춤을 춥니다.

 

아버지도 아들이 돌아오자 풍악에 맞춘 춤의 자리를 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 자녀들이 기뻐 춤추는 모습을 여러번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덩실 덩실 춤을 추신 적이 있으십니까?

 

성경을 보다 너무 좋아서, 주님을 묵상하다 너무 감격해서 나홀로 춤을 춘적이 가끔 있습니다.

 

오늘도 춤추는 날이 아닐까요.

 

오랜만에 형제자매를 만나니 즐거워서

 

어떤 분은 주안에서 처음 만나기도 하니 반가워서 어깨가 들썩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무엇이 기쁜지 밤새 이상한 춤을 춘다고 합니다.

 

새벽에는 공허와 고통만을 남겨주는 허탈한 춤을.

 

 

 

즐거움이 없는 것인지, 즐거움을 표현 못하는 것인지  진정한 춤이 멈추어진 시대입니다.

 

가장 즐거움인 구원의 즐거움을 덩실 덩실 춤으로 표현하시지 않겠습니까?

 


괜찮다를 넘어

 

아버지는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기다림이 바로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탕진한 아들이었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한 가지가 있었답니다.

놀랍게도 아버지의 기다림, 아버지의 사랑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것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기다리던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체면을 차리지 않고 달려가 맞았습니다.

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어찌 이렇게 되었느냐?”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며 얼싸안고 입을 맞춘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아들에게 용서이상의 것을 주었습니다.

괜찮다, 아들아. 괜찮다.”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넘어입니다.

네가 돌아와 너무 기쁘다, 같이 즐기자하며 큰 잔치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아버지는 실패한 아들에게 잔치를 열어주며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어 준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행복에의 초대 주일입니다.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집밖으로 나간 아들만 탕자가 아니었습니다.

집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아들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집 안팎의 탕자에게 괜찮다넘어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나는 너희들을 여전히 사랑한다. 너희들을 기뻐한다.

일어나라. 다시 시작이다.”

 

 


가불

 

가불은 월급날에 앞서 미리 그달의 봉급을 일부 또는 전부를 받아가는 것입니다.

돈을 사정이 급하기 때문에 가불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시절에 사례비를 가불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재정이 갑자기 필요했었기에 가불을 신청했고

흔쾌히 허락을 받아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가불이란 제도는 남용하면 어려워 지기도 하지만 적절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불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재정" 가불이 아닌 "염려" 가불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 6:34a)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는 염려하지 않지만 매일 매일 먹고 살아갑니다.

들에 백합화는 염려하지 않지만 매일 매일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신뢰하는 자는 염려대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새와 꽃도 하나님을 신뢰하건만 사람은 신뢰대신 염려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재정의 가불은 간혹 필요하겠지만 염려의 가불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염려는 주권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요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평생 염려 가불 금지!!!


반드시 해야 할 일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인 가을은 우리로 겸손케 만듭니다.

무엇인가를 정리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도 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제 새벽에도 황계덕 권사님이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우리의 남은 날을 잘 계수해야 할 숙연한 계절입니다.

 

남은 시간, 우리 앞에는 세 종류의 일이 놓여 있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기에 봄이나 여름처럼 무엇인가 여유롭게

이것 저것 선택하며 지낼 시간이 없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제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할 일에 함께 마음과 정성을 모았습니다.

 

베드로전서 47절부터는 마지막 때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일러줍니다.

정신 차리고 기도하라.

뜨겁게 사랑하라.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

마지막 고지가 보이는 가을, 기도하며 사랑하며 봉사하며 걸어요.

 

 

 


그대들은 누구이십니까?

 

눈물이 말라버린 세대에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그대들은 누구이십니까?

 

건축바자회가 엿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바자회가 오는 토요일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온 교우들이 함께 기도하고 준비하고 수고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

놀라움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을 위한 일도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온 열방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7:9-10)

 

주님이 기뻐하실 하늘나라 다민족 예배의 웅대한 비전을 가슴에 품고,

다민족이 모여 사는 이민 땅에서 그런 예배가 드려지게 하옵소서 기도하며,

플러싱 한 모퉁이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건축바자의 길을 걸으며,

마음과 얼굴을 감동의 눈물로 적시게 하는 그대들은 누구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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