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이제 플러싱은 한인들이 새롭게 이주해 모이는 곳이 아니라 하나 둘 떠나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플러싱에 있습니다.

교회도 한인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아니면 좀 더 쾌척한 곳으로 이사 갈 수 있겠지만 아직 우리가 복잡한 플러싱에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부족하지만 퀸즈장로교회가 이곳에서 여전히 한인 성도들의 버팀목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날, 낯선 미국 땅에 도착한 많은 한인들이 그 이민 생활의 첫발을 시작한 곳이 플러싱입니다.

거주지가 꼭 플러싱은 아니었어도 삶에 지치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한인들이 퀸즈장로교회에 함께 모여 예배도 드리고 교육도 하고 선교도 하고 교제도 하면서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한인들 누구든지 새로 오기에 편하고, 계속 오기에 익숙하고, 다시 오기에 고향 같도록 이 자리에 있으려 합니다.

 

우리가 플러싱을 떠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다민족이 함께 어우러진 예수 공동체, 진정한 교회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플러싱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이 사는 곳입니다.

자기 민족만 잘 모이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일까요? 아닙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7:9-10).”

마침내 완성될 천상의 다민족 공동체를 지상에서 우리 교회가 그 모습을 앞서 보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오늘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과 크신 은혜 가운데 러시아어권 설립예배가 드려지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시작케 하신 주님이 그 날까지 이 일을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내일은 또 전교인 한마음 축제의 날이기도 합니다.

한어,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회중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하나임을 서로 돌아볼 날입니다.

다민족 공동체에는 언어, 문화, 관습 등의 차이는 있지만 한 성령 안에서 한 믿음으로 한 주님을 섬기기에 다양성 속에 하나 됨이라는 성경적 역동성이 있습니다.

 

여전히 버거운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한인 성도들이 기댈 곳, 그리고 다양한 민족들이 한마음으로 어울릴 곳으로 이 시대의 아름다운 예수 공동체를 일구어가는 우리 퀸즈장로교회는 여전히 플러싱에 있답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교단 총회에 다녀왔습니다.

여러 차례의 예배, 늦은 밤까지의 회의,“삼손”이라는 뮤지컬 관람 등이 있었습니다.

수요일 밤 교단 선교사 파송 예배에는 글로리아 싱어스의 아름다운 찬양 시간도 있었습니다.

총회와 우리 교회 참석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신 모든 교우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목요일 새벽기도회 때에 미시간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은혜로운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 날 목사님의 말씀 제목은“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닮아라”였습니다.

설교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설교자 목사님이 달라스 지역을 방문하셨을 때, 그 지역 어느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슴하셨답니다.

“마른 것들이 더해!”

덧붙인 말씀은 달라스 지역에 120도의 뜨거운 날씨에도 여전히 땀 흘려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더 이상 뺄 것도 없는“마른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운동이 필요한 사람들은 덥다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운동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마른 사람들이 살 빼겠다고 더 운동하고... 설교 하시던 목사님이 정작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있으셨습니다.

 

“기도할 것이 많은 우리들은 기도하지 않는데 기도할 필요가 없으셨던 예수님은 더 기도하셨습니다.”

 

짧은 총회에 참석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가장 많이 본 것은 예수님 앞에서의 저의 부끄러운 민낯이었습니다.

“마른 것들이 더해!”라는 짧은 구절과 그 뒤의 교훈적인 말씀들이 저의 건강을 챙기는 일에 경종(警鐘)을 주기도 하였고 기도생활에 대한 깊은 자성(自省)도 갖게 하였습니다.


놀라셨죠?

사실 저 쌍둥이예요.

제가 형님이죠.

 

대전에 같이 있었는데 제가 뉴욕으로 다시 올 때 동생도 따라 왔어요.

쌍둥이 동생을 자주 만납니다.

어쩜 그렇게 저와 똑같을까요.

 

쌍둥이 동생 이름이 있어요.

저와 같이 “성”자를 돌림자로 안 써요.

제 쌍둥이 동생이름은 “거울”이여요.

 

거울을 볼 때면 거기에 저와 똑 같은 쌍둥이 동생이 있답니다.

제가 웃으면 “거울”이도 따라 웃고, 밝게 말하면 밝게 말해요.

제가 찡그리면 “거울”이도 따라 찡그리고, 어둡게 말하면 어둡게 말해요.

 

아시는 대로 제가 한 춤 하잖아요.

제가 춤을 출 때 동생도 따라 춤추는데 얼마나 잘 추는지 제가 늘 감탄해요.

그런데 제 동생 거울이가 저보다 먼저 하는 것은 하나도, 하나도 없어요,

 

놀랐어요.

제 동생 이름이 거울인데,

제 동생과 똑같이 거울이란 이름을 자녀로 둔 분들이 많이 계시더라고요.

 

제 동생 거울이가 저를 꼭 따라 하듯,

자녀라는 거울이도 자기 부모님을 따라 그대로 한대요.

부모가 웃으시면 그 가정의 거울이도 함께 웃고, 우시면 거울이도 함께 운대요.

 

자녀는 부모의 거울,

결코 먼저 웃지 않는 거울이래요.


“....나는 잊어도 좋다 어둠처럼 까맣게 잊어도 좋다”

이현주 목사님의 詩, “뿌리가 나무에게”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나무를 받쳐주는 뿌리의 끝없는 희생을 노래한 시입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네가 여린 싹으로 터서 땅 속 어둠을 뚫고 태양을 향해 마침내 위로 오를 때 나는 오직 아래로 아래로 눈먼 손 뻗어 어둠 헤치며 내려만 갔다.”

 

그렇습니다.

나무는 태양의 조명 아래 폼을 잡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면서 잘난 척 하지만 그 나무를 대지 위에 반듯하게 세운 것은 저 어둠 속의 뿌리입니다.

뿌리는 나무가 잘되기만 바랄 뿐 자기는 잊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우리 생애에 뿌리와 같은 존재는 스승이십니다.

우리에게 자양분을 주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신 우리 선생님들.

어찌나 순종을 잘하는지 우리는 그 분들의 말씀대로 그들을 잊고 오늘까지 살았습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 더 이상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다음 세대가 우뚝 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가길 기도하며 어둠 속의 뿌리와 같이 희생하며 살아가시는 무명(無名)의 교회학교 선생님들과 우리를 성경으로, 삶으로 가르쳐주신 모든 어른들에게 우리는 스승을 잊지 않고 있노라고 노래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 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

아아, 고마워라 ♬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


“웃음이면‘수상한 그녀’이고, 눈물이면‘친정엄마’입니다.

”올해 여선교회연합수련회에서 상영할 영화를 추천하시던 분들의 마지막 제안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어머니 영화, 정말 눈물 많이 나옵니까?”

 

눈물을 다짐받고(?) 드디어 지난 화요일 점심식사 후 팝콘을 하나씩 들고 영화 관람에 들어갔습니다.

그건 영화인데도, 나는 남자인데도 눈물이 막 나려고 할 때 실제 상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던 분 중에 두 분이 거의 뛰어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전도사님 한 분이 뒤좇아 가셨습니다.

무슨 일일까 잠시 생각했지만, 다시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데 전도사님이 돌아와 제게 밖으로 잠시 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해주고 위로해줄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뒤로하고 나가 보았더니 영화에서처럼 얼마 전 병을 앓던 자녀를 먼저 보낸 어머니가 함께 나갔던 친구 옆에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우시고, 또 저렇게 눈물을 자아내게 하십니까?

 

저 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어머니”라는 것이.

아브라함 링컨의 전기(傳記)작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링컨에게 위대한 사람이 되는 조건을 한 가지도 주지 않으셨다.

다만 그에게 빈곤과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를 주셨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여, 위대한 어머니를 가지게 하라.

그리하면 위대한 자녀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위대한 어머니.

그것은 한 국가가 소유한 보물 가운데 최대의 보배이다.”

 

이 4월에, 저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땅에 묻힐 때 여섯 살 반, 철모르던 제가 개나리와 진달래를 손에 들고 뛰어다녔다고 훗날 어른들이 들려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와 저도 다른 친구들처럼“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집에는 어머니도 그리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경적인 어머니를 소망하며 오는 4월 25일 월요일부터 27일 수요일까지“어머니 학교” 가 우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그 날들 중에 하나님은 영화 때문이 아니라 실제 때문에 우는 어머니들을 분명히 품어 주실 것입니다.

이름도 잃어버리고, 밥도 대충 먹고, 남편 때문에 애들 때문에 한없이 속도 끓이고, 친정 엄마 친정 식구 보고 싶어 남몰래 흐느껴 우는.

어머니, 당신은 누구시길래...


차가운 날씨 속에 머물러 있다 더디게 온 봄이 자기를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들을 몇 번 둘러보더니만 짐도 풀지 않고 떠날 심사(深思)입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으세요?”

물어보아도 봄날은 그저 웃고 저만치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는 봄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이 봄이 다 사라지기 전에 오래 머물 추억을 마음속에 새겨 놓을 수는 있습니다.

 

가고 있는 봄날의 끝자락에 아름다운 추억을 주님 안에서 함께 만들기 위해 저 한국에서 시애틀에서 버지니아에서 뉴져지에서 그리고 뉴욕에서 아름다운 여성들이 모이셨습니다.

“어머니 학교”라는 이름으로 내일부터 삼 일간 펼쳐질 봄날의 거룩한 여성 축제가 슬쩍 부러워집니다.

가는 봄날과 함께 서러운 이민 땅 어머니들의 눈물과 상처와 아픔도 함께 떠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회복된 자존감과 새로운 사명감의 나무들이 심겨 졌으면 좋겠습니다.

 

살짝 엿본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봄날이 될 오는 30일 토요일에 있을 “응답하라 4150 콘서트”의 연습장면을요.

재미있고 멋있던데요.

40대, 가장 세상적일 나이의 저들이 가장 신앙적이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가슴 시리게 아름다워서 눈물이 납니다.

저들이 펼칠 이야기와 밴드연주, 노래, 무용, 그리고 음식을 기대하며 몸도 마음도 여전히 40대와 다름없는 저도 꼭 참석하여 마지막 봄날을 만끽하려고 합니다.

 

봄날은 가도 누구나 이날들의 그리움은 남길 수 있고 이날들에서 시작된 변화는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봄날이 가는 것이 마냥 아프지만은 않습니다.

 

자기의 봄날도 바쁘실 터인데 우리의 봄날을 찬란하게 수놓아 주시려고 모든 것 내려놓으시고 멀리서 찾아오신 귀한 손님들, 어머니 학교의 한은경 본부장님과 임은경 진행자님, 송현옥 개설팀장님을 비롯 모든 스태프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슬픈 이야기, 기쁜 이야기, 안타까운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등 모든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이야기와 같은 감정을 갖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야기는 듣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도 많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모든 이야기는 그 앞에 걸맞는 형용사를 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최근에 놀라운 이야기가 우리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다민족 선교와 다음 세대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고, 일년에 적지 않은 단기선교팀을 파송하는 우리 교회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선교현장에서 다양한 언어로 복음을 체계적이며 효과적으로 전하고 가르칠 수 있을까?”이였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일을 몇년 전부터 준비해 주셨습니다.

베트남의 한 선교사님이 “어떻게 베트남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시다가 성경에서 72 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wonderful story 라는 이름의 책을 예쁜 그림과 함께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제작 기간과 많은 재정이 들어갔지만 현장에서 선교적 교육적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wonderful story는 한국어 영어 중국어 캄보디아어 그리스어 시리아어 러시아어 등등....수십개 언어로 제작 되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베트남의 그 선교사님은 이 책에 대한 저작권과 판권을 일체 포기하시고 어느 나라 누구나 복사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지난 주 우리 교회 교사세미나에 오셔서 설교와 강의 마치시고 실제적인 강의를 몇몇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가운데 그 wonderful story 의 교육적 선교적 다양한 활용성에 지도자들은 놀랐고, 선교사님은 우리 때문에 놀라셨습니다.

자기들이 만든 책, wonderful story 를 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다민족과 다음세대 지향 교회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의 비전을 놀랍게 엮어주신 하나님의 크시고 섬세하신 은혜가 놀라울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이야기는 여기서 저기서 계속 얽혀져 이어질 것입니다.


지난주, 잠깐이었지만 열쇠를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살핀 적이 있었습니다.

열쇠를 잃어버리고 고생했던 몇 가지 일들이 떠올라서인지 두 꾸러미에 달린 십여 개의 열쇠들을 찾아들고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만약 내 손에 들고 있는 많은 열쇠 중에 가장 중요한 것 단 한 개만 고르라면 어떤 열쇠를 고를까 생각했습니다.

열쇠들이 그때마다 필요하긴 하지만 딱히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시간과 돈이 들뿐 다시 만들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다시 만들 수 없는 열쇠.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름 아닌 “천국의 열쇠”입니다.

 

“천국의 열쇠”는 오래전에 읽었던 a. j. 크로닌의 소설 제목이기도 합니다.

신부와 그의 친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일상의 현장, 선교의 현장, 고통의 현장에서 빚어가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천국의 열쇠”인지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겠고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희생적 삶을 사는 불신앙인의 손에도 결국 “천국의 열쇠”가 쥐어질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너그러운 사상(思想)입니다. 당연히 “objection!”

 

이 세상 성공의 문을 활짝 여는 어떤 열쇠들을 가졌든지, 이 세상 사는 동안 “천국의 열쇠” 를 갖지 못한다면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은 천국을 열 수 없는 열쇠를 “천국의 열쇠”로 생각하고 나름대로 안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열흘 전 즈음에 임정 장로님이 캄보디아 예배당 앞에 붙일 성경 구절을 부탁해 왔습니다.

며칠 생각과 기도 끝에 보내드렸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만이 유일한 “천국의 열쇠”임을 선포하시고 일깨워 주십니다.

아무도 착각이 없으시길. 그리고 꼭 “천국의 열쇠” 만큼은 잠시라도 잃어버리지 마시길.


생명의 호흡을 보내소서 메마른 영혼 마른뼈에게

죽어진 우리를 살리소서 권능의 말씀으로

우릴 회복하소서 다시 한 번

 

회복의 말씀을 보내소서 흩어진 영혼 마른뼈에게

하늘의 군대를 삼으소서 주님의 영광 위해

우릴 사용하소서 다시 한 번

 

성령님 마른 뼈들을 살려주소서

성령님 마른 뼈들을 살려주소서

 

사랑하는 교우들과 함께 성령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걸어온 사순절이 어느 덧 3주간이 흘러, 오늘 그 반환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 회복의 일어남을 보게 됩니다.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도 보입니다.

 

반환점 건너에 사순절 끝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순절의 남아 있는 3주간은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줄 것입니다.

교회 안팎에 쓰러져 있던 모든 사람, 모든 가족, 모든 부서가 다시 일어나 절망을 모르고 패배를 모르는 하늘 군대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남은 3주간 동안 또 부르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따스한 성령님 마른 뼈들을 살려주소서!

따스한 성령님 마른 뼈들을 살려주소서!

 

이제 무엇인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잘 들어 보십시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예수님을 따라 함께 걸어온 사순절, 가슴 벅차고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습니다.

혼자 걷기도 힘든 여정에도 여러 분야에서 수고한 봉사자들, 아이들을 깨워 함께 나오던 부모들, 다정한 말로, 물질로, 빵으로 서로 격려하며 나누던 교우들, 늘 수고를 아끼지 않던 교직원들을 생각하며 깊은 감동에 젖어 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이끌어 주신 따스한 성령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이제는 긴장을 푸시고 다음에 소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맞춰 보세요.

 

(1) 그의 영문 이름 이니셜은 j.c

(2) 그의 평소에 하는 일은 목수

(3)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 나이는 33세

(4)“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는 말을 한 사람

 

많은 분들은 (1)번부터 (3)번까지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이심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4)번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아리송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은 안 하신 것 같은데... 맞습니다.

그런 말을 예수님이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사시긴 하셨어도...

 

j.c

직접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영화“passion of christ”에서 예수님 역을 맡은 제임스 커비즐(james carvizel)입니다.

그가 그 영화를 촬영할 때 나이가 33세였고 평소에는 목수의 일도 하였답니다.

그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배우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게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과 천국을 증언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려는 사람은 결코 일주일에 한 번만 연습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천국 가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나서야 되겠냐고 일갈(一喝)도 하였습니다.

 

그의 인터뷰 가운데“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얻은 자유.

그 자유 속에 거룩한 사명이 담겨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자유를 그렇게 사용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선물로 받은 자유를 그렇게 사용한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오호 자유!


내일부터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고난주간 직전, 돌연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

주님의 질문 앞에 5년의 옥고(獄苦)를 묵묵히 견디시다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글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날 위해서 십자가 지고 그 고통 다 당하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 체하겠습니까?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른 것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이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리이까...

 

주기철 목사님은 훗날“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 고 물으실 주님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셨습니다.

목사님은 그 잔을 외면하시거나 쏟아붓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그 잔을 마시고 주님 앞으로 가셨기에 벌써 주님 앞에서 잘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도“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답을 준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을까요?

 

“주님의 쓴잔을 맛보지 않으면 주님의 쓴잔을 모르리 주님의 괴로움을 당하지 않으면 주님의 고통을 모르리 주님의 십자가를 져보지 않으면 주님의 죽으심을 모르리…”

 

우리에게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즐거움이 많습니다.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좋으나 훗날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의 잔에 대한 주님의 질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날에“내 종아, 내가 너에게 준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실 터인데...

 

고난주간이 되니 더 생각이 많아집니다.


march는 3월의 이름입니다.

march는 “행진하다”라는 뜻입니다.

march는 그냥 행진이 아니라 승리자들을 위한 화려한 행진입니다.

 

문득, 애굽의 포로가 된 에디오피아의 공주 아이다와 애굽의 청년장교 라다메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 “아이다”에서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유명한 “개선 행진곡(grand march)”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애굽의 승리는 역사 속에 사라졌기에 화려한 선율의 오페라 “개선 행진곡”에는 쓰라린 슬픔과 차가운 공허가 얹혀 있음이 들립니다.

 

우리는 지금 march 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우리 예수님과 함께 승리자의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진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꿰뚫으면서 계속 위풍 당당히 걸어갈 것입니다.

우리의 행진이 사순절을 지나 부활절 오후에 이르를 때 준비된 개선 행진곡이 승리자들을 위해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 개선 행진곡의 이름은 임마누엘 찬양대를 중심으로 준비하는 “증인들의 고백”입니다.

그 시작은 슬픔 같으나 환희로 가득 찬 노래.

사순절 승리자들의 개선을 기다리는 그 날 그 노래를 향해 우리는 march 합니다.

그 후에도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에 장애를 두려워말라

성령이 너를 인도하시리니 왜 지체를 하고 있느냐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 나가세 천성문만 바라고 나가세

모든 천사 너희를 영접하러 문 앞에 기다려 서있네

 

그 곳에는 이 땅 승리자들을 기다리는 천사들이 트럼펫을 들고 있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march 합니다. 천성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사람들은 오늘을 슈퍼 선데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미식축구 결승전인 “슈퍼볼” 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올해로 50번째 맞는 슈퍼볼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덴버 브롱코스와 캐롤라이나 펜서스 팀이 우승을 다투게 될 터인데 올해 입장권 평균 가격이 거의 5천 불에 이르고 경기가 가장 잘 보이는 스위트룸은 50만 달러라고 합니다.

광고료는 30초당 500만 달러이고 올해 예상되는 tv 시청자 수는 1억1천5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 날 머물렀던 산호세에서 오늘 슈퍼볼이 열립니다.

슈퍼볼을 환영하는 대형문구들이 산호세 공항을 비롯해 시내 곳곳에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호세로 몰려올 때 저는 과감하게(?) 산호세를 떠나왔습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 밤 11시 넘어서 다소 연착된 비행기를 타려고 케이트로 가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는데 그중 누군가“덴버”하고 거듭 외치자 나머지 사람들이“예~~예~~”로 거듭 화답하며 자기들의 도시 덴버가 50회 슈퍼볼에서 승리하기를 염원했습니다.

오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은 공 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고 치킨을 뜯으며 환호하고 탄식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순절 새벽 서원 기도회는 올해로 29회를 맞이합니다.

비록 슈퍼볼보다 21 년 뒤진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위력은 슈퍼볼이 결코 견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작은 공이 아니라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la 나 다른 도시가 아닙니다. 어둠의 세력들입니다.

사순절에 참여하면서 누가 이길까 마음 졸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당해낼 세력은 이 땅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교회는 기도 없는 1억 명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축제가 그렇듯이 50회 슈퍼볼의 열기도 오늘을 정점으로 타올랐다가 몇 날도 못되어 사그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40일 동안 타오를 29회 사순절 기도는 사라지지 않고 그 후에도 응답에 응답으로, 변화에 변화로, 축복에 축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사순절은 하늘의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슈퍼볼, 너 오늘 50회라며?

우리 올해 사순절은 29회야!

오늘은 잔뜩 드시겠네?

우린 커피와 베이글을 한 번만 먹는 게 아냐.”


한 나라가 세워지고 발전하기까지는 많은 자들의 눈물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각 나라 정부는 그 일에 헌신했던 자들을 잊지 않고 그 이름들을 찾아 기리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도 미국을 위해 세계 각처에서 싸우다 죽어간 자들의 유해를 찾으러 가면서 이렇게 다짐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조국은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저는 파운데이션(foundation)이란 단어를 영어 시간에 배우지 않았고 누님들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파운데이션이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위한 기초 화장품인 것을 보면서 자랐기에 그 단어의 뜻이 “기초”라는 것을 일찍이 알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초, 파운데이션은 아름다움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견고함에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필라(pillar)라는 단어는 “기둥”이라는 뜻입니다.

기둥은 파운데이션 위에서 그 견고함을 유지하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마음껏 만들어 가는 데 쓰이는 아주 요긴한 것입니다.

 

설립 42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에는 파운데이션 같은 분들, 필라와 같은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걸으면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파운데이션의 희생과 필라의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하시어 오늘의 퀸즈장로교회를 일구어 오신 분들이 많이 계신 것입니다.

42년 동안의 파운데이션과 필라들이여!

퀸즈장로교회는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또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또 다른 필라들이 우리 교회에 세워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모든 임직자들이 견고한 기둥들이 되어 지난 42주년의 역사를 잘 이어가고 새로운 미래를 그 기둥 위에 펼쳐 가시길 기대합니다.

새로운 임직자들이 다음과 같은 찬양을 목 놓아 부르면서 함께  나아간다면 훗날의 교회도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2016년에 세워졌던 필라(기둥) 들이여!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그 자리들을 견고히 지키셨나요.

우리는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함께 목 놓아 부를 찬양은요...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내 생명 다하기까지 늘 봉사합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byron)이 케임브리지대학 재학시절 “종교학”기말고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논하라”는 문제였습니다.

시험 시간 내내 아무것도 쓰지 않던 바이런은 답안지를 내야 할 마지막 순간에 다음과 같은 답을 적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더라(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가나 혼인 잔치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첫 번째 기적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입니다.

그 잔치에는 흥겨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변화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신 그 잔치에서 예수님이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셨을 때 물이 변화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 변화를 바이런은“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더라”라고 멋지게 표현하였습니다.

 

다음 주일에 우리 교회에는 큰 잔치가 있습니다.

교회설립 42주년도 맞이하고, 그동안 수고하신 두 분 장로님의 아름다운 은퇴식도 있고, 장로 집사 권사 임직식도 있습니다.

외부 손님도 적잖이 오실 가슴 설레게 기다려지는 잔치입니다.

이 잔치를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꼭 있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변화”입니다.

 

2,000여 년 전 가나에서 예수님을 모신 잔치에 있었던 변화처럼 우리 잔치에도 변화가 있길 소원합니다.

그 잔치에 우리만 있으면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계시지 않으면 우리만의 번잡함만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의 주인은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주인만 되신다면 모든 임직자는 물론 우리 모두도 그 주인을 만나 얼굴이 붉어지는 변화를 체험할 것입니다.

잔치를 통해 변화된 사람들이 그 임직식 이후 또 큰 변화를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일으킬 것입니다.

 

바이런 시인이여! 하늘에서 다음 주일에 있을 우리 잔치를 눈여겨보시고 다음 질문에 답을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2016년 2월 28일, 퀸장의 잔치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적을 논하라”


세상은 반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절대 기준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일례로 동성애 허용을 보면 인권이나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기 소견 좋을 대로 살 뿐입니다.

 

세상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핵무기의 위협이나 개성공단 폐쇄 같은 극한 대립이 이어집니다.

여기저기서 살상과 자살과 파괴가 일상화 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암울한 시대의 적합한 지도자라고 나서는 자들은 많으나 그들과 희망의 날개를 펴기에는 현실 앞에 절망의 나락이 더 깊어 보입니다.

 

세상은 포기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삼포(三抛) 시대라고 합니다. 청년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하는 대로 먹고 산 것은 옛일입니다.

“아메리카 드림”은 커녕 생존의 위협 앞에 떨고 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아메리카 드림”길을 찾기보다 직장생활 나아가 이민생활 자체를 포기하려는 고민도 작지 않습니다.

 

반항과 절망과 포기는 마귀의 영입니다.

마귀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분탕(焚蕩)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포기시키지만 자기의 일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영적 비상사태입니다.

마귀의 궤계를 섬멸시킬 강력한 무기를 꺼낼 때입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은 위대한 행동이 필요할 때입니다.

가장 위대한 행동은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천 년 동안 어려운 상황에서 사용했던 무기인데 놀랍게도 기도는 그 시대마다 가장 강력한 신병기(新兵器)였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대로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세상을 쑥대밭 만들고 있는 “반항과 절망과 포기”는 마귀와 함께 꺾일 것입니다.

기도의 함성이 곧 승리의 외침이기에,

사순절!

온 교회에 영적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기도의 총동원령을 내립니다


주화씨를 아시나요?

송주화씨.“용서”라는 신학적 주제를 다룬 영화“밀양”의 제작에도 참여하시고 현재는 한국에서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계신 목사님.

잘 모르실 것입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분이 참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목회자 월간지인“목회와 신학”12월호에 쓴 글을 보았습니다.

제목이 조금 깁니다.

“성도들과 함께하면 좋은 크리스마스 영화들.”그는 그의 글에서 성탄절에 볼만한 영화들,“멋진 인생”,“크리스마스 캐롤”,“작은 아씨들”,“메리 크리스마스”,“34번가의 기적”,“내티비티 스토리-위대한 탄생”등 여러 편의 영화를 간단한 해설과 함께 친절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친절은 친절을 베푸는 자에게 기쁨을, 친절을 받는 사람에게는 유익을, 그리고 그 친절을 받은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신비함이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주화씨가 친절히 소개한 영화를 보게 되면 저는 그 감동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아직 그 영화들을 못 보았지만 친절이 전달되는 짧은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도로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가 길가에 쓰러진 청소년을 일으켜 주고, 그 청소년은 무거운 짐을 든 나이 드신 여자 분을 도와주고, 그 여자 분은 자동차를 파킹하고 미터기에 넣을 동전이 없어 쩔쩔매는 사람에게 동전 몇 개를 건네주고, 그 사람은 지갑을 떨어뜨린 자의 지갑을 집어 전해주고....

이어지는 친절을 받은 마지막 사람이 맨 처음 친절을 베풀었던 공사장 인부에게 물을 친절히 전달해 주는 것으로 끝나는 영상이었습니다.

 

이 12월이 친절을 주고받는 날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왕 예수님이 절망으로 쓰러진 우리를 찾아오셔서 친절히 일으켜주셨는데, 사랑의 왕의 이름으로 다른 자들을 친절히 도와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왕을 친절히 소개해 주고, 그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사랑의 왕께 찬양을 아주 친절한(kind) 목소리로 올려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니 또 일 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새해로 건너가시기 전, 올해를 잠시 돌이켜보세요. 어떤 단어가 떠오르시는지요?

제게는“도전”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돌이켜보니 사계절(四季節)마다 도전이 있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 있었던 임직식을 지나 “응답하라 4150”이라는 제목으로 문을 연“선교회의 밤”은“우리가 중심이다” “bravo my new life” “great dreamer” “삼삼한 밤” 참신한 도전이었습니다.

 

여름

러시아권 설립예배, 여름 비 오는 주일 오후, 다양한 퍼포먼스와 다양한 언어로 복음을 전한 노방전도,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 열방을 향한 여름단기 선교 뜨거운 도전이었습니다.

 

가을

낙엽이 곱게 물들어 가던 가을, 10월 23일“행복에의 초대”가 있었습니다.

“집으로”라는 주제 아래 수백 명의 다민족이 몰려왔던 그 날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겨울

가을에 시작된 연습, 12월 11일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성탄칸타다“사랑의 왕” 12월 18일은 처음 시도된 다섯 교회의“성탄연합찬양축제” 비범한 도전이었습니다.

 

새해에도 또 다른 도전은 계속될 것입니다.


성탄절이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곤 하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도 아니고, 예수님을 장사지낸 아리마대 요셉도 아닙니다.

요한나바드의 요셉입니다. 홍요셉.

잘 모르시겠다고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적잖은 분이 아실 것입니다.

 

홍요셉, 그 분은 우리 교회 출신 홍황식 선교사님입니다 .

제가 부교역자시절 함께 동역하셨던 선교사님.

기도하시고, 기도하시고 또 기도하시던 선교사님.

다른 데는 관심이 없으시듯이 묵상하듯 감은 눈을 아래로만 향하시던 선교사님.

 

근황이 궁금하던 차에 한 청년이 전해 준 선교사님의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책 제목은“요한나바드에서 학교하기”입니다.

요한나바드는 파키스탄의 최대 기독교 마을이면서 가난, 문맹, 술, 담배, 마약도 유통되는 도시입니다.

 

선교사님은 2009년 1월 23일, 가족들과 함께 이민 가방 10개를 끌고 그곳에 도착한 후 1년의 준비기간을 보내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50명의 임직원과 1,000명의 학생들이 함께하는 기독교학교를 세우셨고 또 그 너머를 향해 전진하고 계십니다.

 

그 책 첫 page에는‘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이 쓰여 있었고 다음 page에는“현장에서의 첫 걸음”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현장,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해 처절히 살아가는 그 삶의 현장에 누군가가 함께 살아주면서 위로하고 보담아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기”부터 “골고다에서 대신죽기”까지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위로하시고 보담아 주셨던 예수님 이야기처럼, “요한나바드에서 학교하기”는 가장 성탄(聖誕)스러운(?) 요셉 이야기였습니다.


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여 높은 산에 올라 외치라.

유대 고을마다 고하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오 예루살렘 딸들아 보라 왕이 네게 오셨네.

머리 들라.

너의 머리를 들어라.

영광의 왕이 들어오신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전능의 왕이 다스리시네...

 

지난 목요일 밤, 맨해튼 fifth avenue에 있는 saint thomas church에서 소년 합창단의 메시야 공연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헨델의 메시야 공연에 여러 차례 참석해 보았지만 소수의 남성과 소년들로 구성된 합창단의 공연은 처음 경험해 보았습니다.

소수의 찬양대원들이 왕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며 미성(美聲)으로 부르는 찬양 속에서 겸손하신 왕, 진짜 왕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두 시간이 훌쩍 넘는 연주회가 끝나고 들어 올 때보다 다소 추워진 맨해튼 거리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코트 깃을 한껏 세우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여러 블록을 걸었습니다.

높은 건물에서 화려한 조명들이 춤추는 모습에 눈은 휘둥그레 해졌지만 그 화려함 뒤에 숨어있는 성탄의 일그러진 상업화에 마음은 아팠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고을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맨해튼에도 오셨습니다.

맨해튼에는 예수님이 진짜 왕이라며 그 분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자들도 있고, 나의 진짜 왕은 성탄절 매출을 올려줄 손님들이라며 그들에게만 문을 활짝 여는 자들도 있습니다.

맨해튼의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2천 년 전의 유대 고을 베들레헴 사람들처럼 진짜 왕 예수님에게 “내겐 당신을 맞을 빈 방이 없네요.”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는 오늘 오후 플러싱 퀸즈장로교회 찬양의 자리에 오실 “사랑의 왕”을 맞이하실 방은 있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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