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원래 한 나라였습니다.

나라가 둘로 깨어지고 오랫동안 서로에 대한 반목과 갈등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들에겐 평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평화를 만들 수 있는 분은 한 분이셨습니다.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겔 37:19)

 

그 평화를 위해서 왕이 둘이 되면 안 되었습니다.

두 왕이 있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겔 37:22)

 

진정한 평화는 무엇보다 먼저 각자 더러운 우상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겔 37:23)

 

그리고 그들만의 평화가 최종 목적으로서는 부족했습니다.

그들만의 평화를 넘어 더 중요한 목표가 있어야 했습니다.

서로 하나되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평화의 궁극적 방향이어야 했습니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겔 37:26)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뜨와리 뚜와^^)”

저는 지금 그 노래의 장소인 나성(la)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내의 언니와 형부를 만나 오랜만에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니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30여 년 전에 갓 태어난 아이와 함께 언니 가족이 la에 이민을 왔는데 그 아이가 두 살을 넘긴 즈음인 어느 주일날 아침, 교회를 갈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너무 아파 남편에게 아이와 함께 교회에 다녀오라고 하고 자신은 화장실로 들어갔답니다.

거기서 자궁외임신이 되었던 둘째 아이가 유산되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귀로는 소리가 다 들리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언니는 실신한 사람처럼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답니다.

화장실에 들어간 아내를 보고 아이와 함께 교회를 가려던 남편이 그때 마침 울린“따르릉”전화 벨소리를 듣고, 나가다 말고 그 전화를 받았답니다.

한국에서 오래전에 알긴 알았지만, 전혀 친하지도 않았고 평생 전화도 한 통 없었던 어떤 사람이 수소문해 전화번호를 알았다며 뉴욕에서 전화를 걸어온 것입니다.

보통 통화와는 다르게 긴 통화를 마친 남편이 다시 교회를 가려다가 화장실에 들어간 아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겨 화장실 문을 열어 보았고, 피를 하염없이 흘리며 쓰러진 아내를 발견하여 급히 911을 불러 병원으로 옮겨가 극적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 날 전화가 없었다면, 그 날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그 날 통화를 짧게 했더라면, 남편과 아이는 교회로 곧바로 떠났을 것이고 언니는 홀로 죽었을 것이랍니다.

놀라운 것은 그날 전화를 건 사람은 그 이전에도 전화를 건 적이 없었지만,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전화 온 적도 없고 다시 연락도 안 되었답니다.

그 날 그 시간에“따르릉”하고 전화를 건 어떤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삶에도“따르릉”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손가락을 헤아려 보세요.

열 개이지요?

손가락이 왜 열 개인지 생각해 보셨나요?

그런 생각도 안 해보셨고 또 그 이유도 잘 모르시겠지요?

함민복 시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보셨네요.

 

아기의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열 달 수고를 헤아리는 손가락 열 개.

뱃속에서처럼 어머니의 수고를 헤아리며 산다면 그 어머니 앞에서 아무렇게나 살 자녀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열 손가락을 다시 펴고 또 펴도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이 찬송을 지은 분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시고 독생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손으로도 헤아릴 수 없고, 붓으로도 기록할 수 없다면 그 하나님 앞에서 아무렇게나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몇 년 전 뉴욕에서 땅콩 회항 사건이 있었습니다.

“땅콩 회항?

뭔 말이여?”

모르시는 분들에게 상세한 답변을 이 지면을 통해 드리기가 사정상 어려우니 정말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건의 여동생이 최근 어느 미팅에서 자기의 질문에 답변을 못 했다고 그 상대방 얼굴에 물을 뿌렸다고 합니다.

“땅콩”언니에 이어“물”동생도 사법처리를 받을 듯합니다.

 

상대방을 업신여기면 마침내 그 대가를 치르고, 상대방을 존중하면 나 또한 존중함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이 길을 갑니다.

얼마쯤 가다가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업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가만 계셔도 될 것을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나 무거워요?”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응, 무거워.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 깔았지, 간땡이는 부었지, 가벼울 리가 있나?”

그렇게 갔던 길을 돌아올 때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업어 달라고 하고 등에 업혀 물었습니다.

“나 무거워?” 할머니가 대답합니다.

“무겁긴요, 하나도 안 무거워요.

너무 가벼워요.

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쓸개는 빠졌지....”

 

봄입니다.

심은 대로 가을에 거두지만, 이 진리는 저 멀리 가을에서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계속 확인되는 진리이니 좋은 것을 심고 좋은 것을 거두시는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가치를 존중해 주십시오.

말이나 태도로 그를 존중해 주시면 격조 높은 대접을 나 또한 받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누가 하신 말씀일까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예수님”네, 맞았습니다.

답을 잘 아시는군요.

이제 그렇게 살면서 대접받을 일만 남았습니다.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 깔았지....”

말해놓고 “나 무거워?”라고 물으면 안 되는 것 아시지요?


삼월이 되었습니다.

삼월의 하늘은 어떤지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늘이 제 눈에 보이기 전에, 한 노래가 제 귀에 울려 퍼졌습니다.

어린 시절, 뭔지도 잘 모르면서 목이 메게 불렀던 그 노래였습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3.1운동을 주도하였다가 만 18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 땅의 삶을 마감한 꽃다운 소녀.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민국 만세!

대한독립 만세!

 

“다른 사람이 당신을 그리워할 수 있도록 살라”

그 소녀는 선교의 삶을 살다가 29세 청년의 나이로 주님 품에 안긴 robert murray mccheyne 의 이 말을 알았는지 그 소녀가 떠난 지 오래 되었는데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 소녀가 그립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고 또 불러봅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싶으십니까?

최고의 선물을 소개해 드립니다. 다름 아닌“관심”입니다.

그분에게 관심을 가지세요. 그분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마르틴 부버가 주창했던“나와 너”의 삶이 아닌 “나는 나, 너는 너”의 삶이 팽배해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누가 어려움을 당해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물론 아는 사람의 아픔에도 눈을 감고 사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관심하셨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끝없는 관심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영생과 축복과 앞으로 누릴 영원한 유업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오는 주간은 날 위해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 발자취를 따르는 고난주간입니다.

설마 예수님의 고난에는 무관심하지는 않으신가요?

사순절 서원 새벽기도회 마지막 한 주간,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을 찾아오신 고난의 예수님께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함께 새벽기도회에 나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고난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 진정한 예수님 사랑임이 분명합니다.


anon이라는 작가의 짧은 글,“긴 침묵(the long silence)”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힘들었던 과거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저런 억울한 사연들로 항변합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심판할 하나님이 사람들의 이런 사정을 아시기나 하냐면서 하나님에 대해 의구심과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심판의 내용을 말씀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내용을 말씀하시는 대신 길게 침묵하셨습니다.

그“긴 침묵”은 어떤 말보다, 어떤 심판보다 더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긴 침묵”으로 말해보십시오.

긴 침묵은 어떤 웅변보다 강할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지혜보다 빛날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행동보다 바를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시간보다 멋질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감정보다 깊을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변명보다 찰질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책망보다 아플 것입니다.

 

오늘날, 수다쟁이(talkative)는 많아도“긴 침묵”의 사람은 드뭅니다.

사순절(四旬節), 묵언(黙言)의 계절(季節).

긴 침묵을 훈련하기에 더없이 좋은 절기(節氣)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억울해도, 어이없어도, 예수님처럼, 긴 침묵으로만 말하며 사순절을 걷고 또 걸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수요일은 예고된 대로 폭설이 바람과 함께 쏟아졌습니다.

그 날 예정되었던 선교회 헌신예배와 지도원 성경공부 등을 연기하고 교역자들과 몇몇 성도들이 모여 수요 기도회를 했습니다.

저는 그날“폭풍우 속의 은혜”에 대해 말씀을 전하였고 또 같은 주제로 토론도 하였습니다.

 

폭풍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마르지 않았음을 서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물의 밝은 면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풍경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도 창조하셨습니다. 힘든 것도 그가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 속에서도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이사야 45:7)

 

그 날 기도회가 끝나고 로비에서 헤어지는 시간에 그 날 헌신예배를 드리려던 선교회회원이 그 날 폭설로 헌신예배가 연기된 것에 대해 한 마디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회 헌신예배를 연기하셨네요.

미루어지는 것은 싫은데”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교회 헌신예배를 연기하셨네요.

우리의 준비가 덜 되었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다면 믿음의 눈이 확실히 열려있는 것입니다.


2월 첫날, la 한인 타운 인근 한 중학교에서 12세 여학생이 총격을 가해 15세 남학생이 중태에 빠졌고 15세의 여학생은 손목에 총을 맞았다고 합니다.

1월에만 하더라도 한국 밀양의 한 병원의 화재로 적잖은 사상자가 있었습니다.

작년 12월에는 제천의 목욕탕에서 큰 화재가 있었습니다.

11월엔 텍사스의 한 교회에서 총기사고로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월에는 라스베가스의 한 광장에서 미국 최대의 총기 사건이 있었습니다.

살펴 올라가자니 끝이 없습니다.

 

이렇듯 세상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집이든, 길이든, 공공장소든....

교회도 안전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준비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보스턴의 한 경찰 서장은 어려울 때 이런 수칙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run(피하라), hide(숨으라), fight(싸우라)”

 

run: 어려움이 있을 때 밖으로 피할 길을 미리 알아 두어야 합니다.

hide: 밖으로 피하지 못할 상황이면 적당한 곳에 자신을 잘 숨겨야 합니다.

fight: 안전을 해치는 적들과 싸움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rhf는 안전을 위한 수칙일 뿐 아니라 죄의 공격에도 유효한 방식입니다.

run: 죄의 유혹을 피하라.

hide: 피난처이신 주님 품에 숨으라.

fight: 죄와 끝까지 싸우라.

 

험한 세상, 우리 모두 rhf!


오늘은 우리 교회 설립 4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44년 동안 우리 교회에 베푸신 은총은 44년의 천배, 만 배의 시간이 주어져도 다 헤아릴 수 없는 은총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눈물로 교회를 섬겨 오신 선진(先進)들의 수고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원로목사님과 모든 믿음의 선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뜻 깊은 날에 우리의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의 화합의 장(場)이 되어야 할 올림픽이 시작부터 그러하더니 마지막까지 점점 더 국론(國論)이 분열되는 양상(樣相)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 조국이 일제의 강점기 아래 신음할 때 교회와 성도들은 분연(奮然)히 일어나 3.1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6.25 남침으로 우리 조국이 공산화가 되어가려 할 때 부산 초량교회에 모인 교역자와 성도들은 우리 대한민국을 공산화(共産化)에서 건져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구국(救國)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의 주제로 진행되는 사순절 둘째 주간입니다.

99주년 삼일절도 이 주간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설립되던 해인 1974년도를 비롯해 몇 차례 대한민국을 사랑으로 찾아가 복음을 전하셨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장례식도 이 주간에 있습니다.

44세의 퀸즈장로교회가 이 주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자명(自明)합니다.

표류(漂流)하는 조국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퀸즈장로교회여!

조국을 위해 울라.


사순절을 앞둔 최근에 여러 차례 들으면서 마음에 감동이 된 “너는 결단하라”는 제목을 가진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내가 도적처럼 왔을 때 너는 자신 할 수 있느냐

내가 한밤중에 왔을 때 너는 나와 갈 수 있느냐

말씀의 등불이 네 삶에 꺼져 있진 않느냐

성령의 기름이 오래전 말라 있지는 않느냐

너는 결단하라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너는 그 자리에서 다시 거듭나야 한다

너는 결단하라 세상 소리를 닫고 말씀의 불을 켜야 한다

불을 가진 자만이 그 날에 그 날에 나와 간다

 

내일부터 사순절 서원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이번 주간에도 플로리다 고교에서 17명이 총기로 사망하는 등 세상의 어려움은 멈추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의 기도가 멈추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기도 무릎이 강해지면 모든 어려운 상황이 역전(逆轉)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에 우리가 힘쓸 일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합심 기도의 위력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성경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 44년의 여정 속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순절 새벽 기도, 결단하셨습니까?

내일부터 시작인데 아직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교우들은 없으시겠지요?

그 결단의 실행을 우리 주님이 내일 새벽부터 매일 보실 수 있으시겠지요?

당장 내일부터 결단의 사람들에게 역전승의 은혜가 쏟아지리라 확신합니다.


이민 땅에서는 대부분 잊고 지내는 설날이 이번 주(16일)에 있습니다.

하얀 겨울 눈꽃의 고향, 자식들이 찾아올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던 부모님을 향해 두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가 교통체증으로 다섯 시간, 여섯 시간 걸려도 아버님 어머님을 뵐 설레는 마음으로 또다시 가곤 하던 설날.

 

한 손에 부모님께 드릴 새로 나온 내의를 곱게 들고 갖다가 올 때는 양손이 모자랄 정도로 부모님이 싸주신 보따리를 바리바리 들고 오던 설날이 생각나십니까?

 

이제는 그 부모님이 이 세상에 안 계시기도 하고 계셔도 갈 수 없는 이민 땅의 우리들.

우리 하나 잘 되는 소원 가지시고 삶의 현장에서 온갖 서러움과 눈물을 삭이시고 희생하신 부모님 생각이 물밀 듯 떠오릅니다.

 

부모님이 이 땅에 계시든 천국에 계시든 우리가 힘들어도 이민 땅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듣고 보신다면 직접 찾아가 세배드리는 것보다 더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설날, 찾아갈 고향도, 찾아뵐 부모님도 안 계시지만 천국 본향이 있고 그날에 뵈올 부모님이 그곳에 계심을 알기에 결코 슬프지 않은 날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설날은 그날입니다.


키 153m, 몸무게 48kg.

40대까지만 해도 몸이 허약해 골골했던 출판 편집자.

무언가 제대로 할 수 없던 자신의 바닥난 체력이 부끄러워 시작한 운동을 매일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하다가 지금은 50살이 넘어 철인 3종(옥외수영, 사이클, 마라톤) 경기를 취미 삼게 된 이영미 씨의 이야기를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강연 프로그램)에서 들었습니다.

 

그의 강연 가운데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운동하라는 말이 너무 와닿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체력 약한 그 누구도 몸짱으로 만들어 주는 보석 같은 세 단어들입니다.

매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운동한다면 모두의 몸 안에 깊이 잠자고 있던 건강이 조금씩 깨어나 마침내 놀라운 강인함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언젠가 제주도에 있는 세계적인 분재정원(盆栽庭園)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수십 년 전 돌로 가득했던 척박한 땅이 아름다운 나무들로 가득한 정원으로 바뀌는 과정에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이였음을 기억합니다.

 

지금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영적 성장이든,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직장 생활이든, 가정을 돌보든, 아니면 건강을 회복하려거든 매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해보세요.

그 어떤 분야이든 극심한 스트레스 없이 머잖아 견고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저부터 매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최근에 언제 날아가는 새를 보셨나요?

저는 지난 목요일 청년대학부와 함께 겨울수련회 가는 길에서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새떼를 보았습니다.

그들에겐 방향과 속도에 있어서 모두가 함께하는 감탄할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또 중요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어느 새도 뒤돌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인이 이미 갈파한 대로 새는 날아가면서 결코 뒤돌아 보지 않습니다.

사도바울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3:13)

롯의 아내가 뒤돌아보다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한 해가 다 저물어 갑니다. 마지막 시간과 함께 아쉬웠던 것도, 잘못된 것도, 꽤 괜찮았던 것도 다시 오지 못할 과거로 점점 사라져 갑니다.

앞으로 날아가는 새처럼 뒤돌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사라지는 것들 다시 보겠다고 뒤돌아 보다가 우리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묶여있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또 비바람이 몰려올 것입니다.

때때로 먹구름이 펼쳐지기도 할 것입니다.

앞으로 만날 일들이 저만큼 오고 있는데 뒤만 돌아보고 땅을 칠 겨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희망의 날개를 활짝 펴서 높이 치솟아 앞으로 날아 갑시다.

우리 앞의 어떤 먹구름이나 비바람도 점 같이 보이다가 점점 지나가도록.

 

파가니니를 아십니까? 니콜로 파가니니.

10대 초 이전의 연주기법을 다 마스터하고도 계속 하루 10시간 이상 격심한 연습으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17세에 큰 명성과 부를 이루었던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그런 일찌감치의 성공이 오히려 파국에 이르게 했다가 다시 일어난 사람.

 

그에게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의 연주회 때 바이올린 줄이 하나씩 끊어지면서 마지막 한 줄이 남았지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 남은 줄 하나로 화려한 연주를 마쳤다는 이야기.

 

11월 달력을 뜯어내셨다면 이제 달랑 한 장만 남아 있는 달력.

그 한 장 남은 달력을 바라보며 “올해도 이렇게 아쉽게 끝나네....”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달력 한 장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 올해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달력 한 장으로 멋진 올해의 마무리를 하십시오.

그렇다면 보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2018년 피날레를.

 

가나 혼인 잔치가 큰 어려움에 빠져 낭패의 잔치로 막을 내릴뻔 했으나 거기 계신 한 분 예수님 때문에 happy ending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잊지 마십시오.

한 줄 바이올린 줄도 소망이 되고, 한 장 달력도 소망이 될 수 있다면, 한 분 주님은 가장 확실한 소망이심을.


지금은 21일, 금요일 이른 새벽입니다.

창밖에 비를 동반한 바람 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요란합니다.

저는 방 안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한 겨울에 불어대는 저 비바람을 밖에서 직접 맞이한다면 누구라도 많이 서럽고 두렵고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일정한 범위 밖에 있는 자들을 아웃사이더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이름이나 처한 위치는 무언가 소외되고 어딘가 힘겨움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사는 어느 곳이든 아웃사이더는 존재합니다.

이천 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때 베들레헴 지역 밖에서 한 밤을 보내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에 그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인류 최대의 소식이 들려졌습니다.

한 밤에, 밖에 있던 그들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천사로부터 직접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구주를 급히 찾아뵙고 돌아가는 길에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들이 성탄 새벽송의 효시(曉示)였을 것입니다.

나는 아웃사이더라고 주눅 들고 슬퍼할 일만이 아닙니다.

세상 나라의 아웃사이더가 하늘나라의 인사이더가 되는 것이 성탄이기 때문입니다.

 

컬럼은 다 써가는 데 비바람은 유리 창밖으로 더 거세집니다.

문득 박인환 시인의“세월이 가면”이 생각나는군요.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그 옛날, 겨울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분주하곤 했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 때문이죠.

겨울나기 준비의 최고봉은 역시 김장김치를 담그는 것이었습니다.

식구 수에 따라 100포기 200포기, 또 그 이상을 담그게 됩니다.

잘 담근 김장 김치는 온 겨울을 든든하고 행복하게 해주었지요.

밥에는 물론, 칼국수, 수제비 같은 밀가루 음식에도 제격이었답니다.

 

김장김치를 만드는 전(全) 과정에 참여해 본 적은 없지만 오가며 김장김치 만드는 것을 보면서 잘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배추 절임과 김장 속 버무림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친 김장김치들이 장독 속에 들어가고 땅에 파묻혔다가 적절한 때에 꺼내져 한 포기씩 또는 반 포기씩 상위에 얼굴을 내밀게 됩니다.

 

겨울나기 김장김치에만 아니라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절임과 버무림입니다.

절임이란 배추로 더 이상 뻣뻣하지 않고 부들부들하게 만듭니다.

우리 각자가 배추 절임처럼 겸손해져야 합니다.

버무림이란 여러 김치 속 재료들을 함께 섞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가 함께 너도나도 없이 어울려져야 합니다.

 

절임과 버무림이 잘 되면 인생 겨울나기 준비는 ok입니다.

이렇게 한 번 외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절여지고 우리는 버무려진다.


“벌컥 벌컥”제가 물을 마실 때 나는 소리입니다.

저는 평생 이렇게 물을 마시면서 감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변에 얼마든지 있는 물을 가져다가 벌컥 벌컥 마시는 것이 제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물이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물을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감사할 일인지 최근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여름, 그동안 말로만 듣던 아프리카의 열악한 물 사정을 실감 나게 깨닫고 나서 전교인 수련회에서 전 성도들이 아프리카에 우물 파주기 특별 헌금을 드렸고, 그 헌금으로 이미 두 개의 우물을 팠으며 또 한 개의 우물 파기와 큰 물탱크를 설치하는 일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 모금의 물도 없던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답니다.

 

지난 목요일 밤, 아내와 함께 보스턴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암 치료 중인 남위홍 집사님과 그를 간호하고 있던 남편 석뢰 교우님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치료하는 과정 중에 식도가 많이 상하게 된 남 집사님은 사람들이 물 한 모금 먹는 것이 너무 부럽다며 그 물 한 모금에 감사하지 못했던 지난 삶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나직이 말했습니다.

 

“한 모금 물”도 없는 곳....“물 한 모금”의 감사를 잃은 자....

지난 주일 있었던 행복에의 초대에 km, em, cm, rm에 나온 90명 가까운 새 신자들에게는 한 모금의 물이 아닌 풍성한 성령의 생수로 다시는 갈함이 없고, 그동안 물 한 모금의 감사를 잃었던 저와 또 저와 비슷한(?) 자들에겐 뜨거운 감사가 회복되는 감사의 달 11월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없다 song을 아십니까?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 20:6下)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처한 환경을 둘러보며 이곳에 다섯 가지나 없다고 외칩니다.

 

영국의 조지 허버트라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의 마음에 없는 한 가지를 이렇게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한 가지만 더 주시옵소서

감사하는 마음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면 “환경”에 있는 “그 어떤 것들”이 아니라 “마음”에 꼭 있어야 할 “감사”가 아닐까요?


죽기를 연구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삶이 너무 힘들었을 때 죽기를 살짝 생각해 본 적이 있으셨을지는 몰라도 그 누구도 본격적으로 죽기를 연구해 본 적은 없으실 것입니다.

 

며칠 전 찾아가 만난 분이 몸이 아픈 것을 비관하여서 한 달 이상을 본격적으로 죽기를 연구하였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담담하고 상세하게 일러 주셨는데, 병실에서 뛰어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머리를 벽에 세게 부딪히는 것 등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몸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어~어~ 이제는 살아야 하나?”를 생각하셨답니다.

 

아직 그분은 몸의 한 부분이 아프십니다.

그 아픈 곳을 부여잡고 여전히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날 저는 말씀을 전하면서 그분의 안 아픈 곳을 하나하나 집어가면서 물었습니다.

“여기 아프세요?” “아뇨.”

“여기는 어떠세요?” “괜찮아요.”

“여기는요?” “안 아픈데요.“

“안 아프신 곳이 훨씬 많으시군요?” “....그렇네요.”

 

그분은 이제 죽기를 연구하길 포기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대신 잘 살기를 각오하였음을 보았습니다.

“빨리 나아서 교회 갈게요.”

교회와 담쌓고 살던 그분이, 그의 병실을 나서는 우리에게 아픈 곳을 잡고 있던 그 손으로 사랑의 표시를 몇 차례 하였습니다.

그분의 병실 창문 밖에는 올해의 첫눈이 하얗게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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