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그 날이 있습니다.

그 날, 뭔가 좋은 결과를 얻는 사람들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시상대 위에서 상 받는 그 날의 모습을 그리며 연습했고, 근육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건강한 그 날을 상상하며 운동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이후에 주님 뵈올 날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맡긴 일은 어떻게 하였느냐?”

아무도 숨김없이 대답해야 할 그 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긴 훈련의 시간을 묵묵히 감당하고 오늘 귀한 임직감사예배를 드리는 임직자들이여, 축하도 드리지만 오늘 직분을 맡긴 그분 앞에서 결산할 날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날이 있습니다.

지난 일 년도 함께 걸어오며 울고 웃었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회계(會計)의 그날이 회개(悔改)의 그 날이 아니라 상 받는 그 날이 되도록 오늘도 아름다운 수고와 동행을 멈추지 말아요.    


“결론은 나중에 냅시다.”

이런 말이 잦으면 그 누구도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결론을 미룰 수도 없습니다.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데 올해의 결론을 어떻게 미룬단 말입니까?

 

올해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은혜입니다.

봄의 은혜, 여름의 은혜, 가을의 은혜, 겨울의 은혜가 다 달랐고 넘쳤습니다.

고난도 은혜, 평안도 은혜였습니다. 약함도 은혜, 강함도 은혜였습니다.

 

올해의 또 다른 결론은 이것입니다.

감사입니다.

고맙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가슴이 뭉클한 시간, 눈시울이 붉어진 시간, 콧잔등이 시큰한 시간.

우리 교역자, 우리 장로님, 우리 성도들이 만들어 주신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

 

올해의 결론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준비입니다.

올해 찾아온 여러분의 죽음.

가족들도 사랑하고 우리 모두도 사랑하던 분들.

올 한 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우리 곁을 떠나면서 들려준 외침.

“준비하라. 준비하라. 준비하라. 하나님 만나기를.”

 

그렇습니다. 은혜, 감사, 준비는 미룰 수 없는 올해의 세 가지 결론입니다.


사실, 저도 꿈꾸었었죠. 크리스마스에 눈이 와서 온 세상이 하얗게 되기를.

그래서 이 감미로운 노래를 좋아하곤 했답니다.

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

그러나 성탄절을 하얀 눈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혹시, 가보셨나요.

성탄절 전후로 록펠러 센터 앞으로.

크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번쩍이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아무리 멋있어도 크리스마스트리로 성탄절을 바꿀 수 없지요.

 

간혹, 참여해 보셨나요.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에.

딸랑딸랑 종소리를 좇아가 이웃을 돕는 마음을 담는 것은 좋습니다.

그래도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성탄절을 바꾸는 것은 아니랍니다.

 

많이, 기쁘셨나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서.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준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정말로 성탄절을 선물을 주고받는 계절로 바꾸자고 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비장(悲壯)한 날입니다.

성탄절은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내가 꼭 안아야하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전무후무(前無後無) 날입니다.

성탄절은 구원이라는 인류 최대의 소망(所望)이 임한 날입니다.

 

엿 장수 맘대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고귀한 성탄절을 엿 장수가 맘대로 엿을 바꾸어 주듯 더 이상 다른 것과 함부로 바꾸지 말아요..


“마이 달링”이란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my darling (나의 사랑)

can i call you darling (내가 당신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darling darling darling (사랑, 사랑, 사랑)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저의 칼럼 제목은“마이 달링”이 아닙니다.

“마이 달랑”입니다.

달랑 한 장 남은, 나의 달력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매월 초(初) 하나하나 내 손에 의해 아프게 뜯겨져 나간 달력들.

주어진 한 달에 대한 부끄러움은커녕 대단한 한 달을 산 것 마냥 그것을 교만히 뜯곤 했던 내가, 마지막 달랑 남은 달력 앞에 겸손히(?) 서 있습니다.

여유(餘裕)는 사라지고 초조(焦燥)가 깃든 달랑 한 장 남은 달력 앞입니다.

한껏 가벼워진 한 장 달력이 한 해의 마지막이라는 부담으로 매우 무겁게 보입니다.

 

미안하오. 2019년 달력들이여.

지금까지 열한 장의 그대들에게 매우 무례했음을 고백하오.

이제라도 마지막 한 장 달랑 남은 당신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사랑하겠소.

마이 달랑, 마이 달링이여!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 모두에게는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있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1954년,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시골 작은 교회의 젊은 목사님 부부가 낡은 교회의 이곳저곳을 고치며 성탄을 준비하고 있는데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센 바람이 그 마을을 휘몰아치면서 교회의 강단 뒷벽에 큰 구멍을 내었습니다.

목사님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시장에서 아주 싼 가격에 오래된 금빛과 아이보리색의 레이스를 가진 테이블 덮개를 샀습니다.

덮개로 강단 뒷벽의 큰 구멍을 잘 덮을 수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성탄절 이브 예배가 있는데, 그날 낮 젊은 목사님은 교회 앞 추운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나이 든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버스가 오려면 멀었으니 교회에 들어와 계시라고 했습니다.

그 마을에 일자리 인터뷰를 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교회 안에 들어온 여인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강대 뒤에 걸려 있는 테이블 덮개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이건 내 것입니다.

예전에 내 남편이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이지요.

전쟁 때에 남편과 헤어졌는데 훗날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 테이블 덮개를 가져가라는 목사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여인은 떠났습니다.

 

그 날 저녁 성탄 이브 예배를 마친 후 나이 든 마을 남자가 목사님에게 다가와 “저 강대상 앞에 걸려 있는 것은 아내를 위해 내가 만들었던 것입니다.

전쟁 때 헤어졌는데 이제는 하나님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로 죽은 줄 알았던 부부는 살아 있었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탄의 이야기는 언제나 소망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오후, 헨델의 성탄 이야기를 꼭 들으러 가요.

그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꾼 이야기, 그가 만난 메시아 이야기는 우리 찬양대의 찬양으로 아름답게 펼쳐질 것이랍니다.


이제 막 들어선 11월도 빨리 지나가겠죠.

오래 붙잡고 싶어도 뿌리치듯 달아날 11월이 분명합니다.

부질없이 가지 말라고 말하기 보단 지나가는 11월을 수채화로 그려 내 마음의 벽장에 오래 걸어 두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흙색 물감으로 한창 땅을 파고 있는 새정전 앞마당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웬일이죠? 제 눈에 뭐가 꼈나요?

그 마당의 흙색이 가을 단풍마냥 형형색깔로 보여요.

붉은 김치색, 노란 튀김색.... 지난 10월 건축바자에서 봤던 수십가지 색상들이 앞마당 흙색깔에 섞여 있어요.

 

그토록 어려운 이민 땅에서 본당과 교육관을 묵묵히 세우시더니만 건너편 새성전을 함께 지어가시는 교우들을 생각하니 11월의 수채화는 물감으로 도화지에 그려지기 전에 제 얼굴에 눈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 눈의 눈물은 말라도 결코 마르지 않을 사랑의 물감을 각양각색으로 뿜어내는 성도들 때문에 앞마당 흙색은 화려한 색깔이 되어 놀라운 11월의 수채화를 그리게 될 것입니다.


10가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두 아들 장례식에서 10가지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전도하다 순교당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7가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신앙의 자유를 찾았던 청교도들이 혹독한 어려움 가운데 7가지 감사를 드렸습니다.

 

80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였지만 그런 배라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합니다.

폭풍으로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

고통스러운 삼 개월 항해 중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었음을 감사합니다.

 

그들은 극심한 고통의 자리에서도 감사에 감사,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넘어서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았기에 그토록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들이었다면 몇 가지를 감사할 수 있을지 스스로 궁금합니다.


내일 모레가 11월 19일, 오는 목요일이 21일이네요.

11월 19일 케이프코트만(灣) 경유(經由), 11월 21일 프로린스타운에 입항(入港).

1602년 9월 16일 영국 잉글랜드 항구도시 프리머스에서 102명의 청교도를 태우고 출발했던 배가 미국 땅에 다다르던 날자와 장소 입니다.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 fathers)이라고 일컫는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 앞에는 바다의 파도부터 시작하여 온갖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는 이듬해 봄에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그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결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역경 앞에 그들이 외쳤던 말은“힘들다, 죽겠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였습니다.

감사는 어떤 역경도 이깁니다.

역경 중의 감사가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습니다.

탱큐, pilgrim fathers!


연말이 점점 가까워오며 바쁜 일들은 더 몰려오지만 문득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한 해를 어떤 걸음을 걸었는가....

모든 걸음에는 발자국이 남는데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가....

남긴 발자국을 뒤돌아 볼 자신이 없었지만 살짝 돌아보았습니다.

 

한 동안 머뭇거린 발자국, 샛길로 갔다 온 발자국, 거기서 쓰러졌던 것이 분명한 작은 발자국을 덮은 큰 몸 자국, 그래도 다시 일어나 걷고 또 걸어온 발자국.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조선 시대의 이양연 문인이 지은 시(詩)입니다.

짧은 시가 나의 발자국은 나의 것만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되돌아가 그 발자국을 지우고 싶지만, 그리고 다시 반듯하게 걸은 발자국을 남기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다시 걸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이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발자국, 뒷사람이 따라오다가 실망하지 않을 나의 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벌써 10월입니다.

가을의 깊은 향취(香臭)가 반가우면서도 뭔가 초조한 시간입니다.

올해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니 화들짝 놀랄 시간인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지”하면서도 올해도 연초의 결심을 적당히 포기하고 싶기도 합니다.

스스로 궁금합니다.“결심”은 강한데“뒷심”은 왜 이리 약(弱)한 지?

 

약한“뒷심”탓을 하며 남은 두어 달을 보내려 하는데 다가온 글자가 있었습니다.

again!

“다시”라는 글자가 선명히 제게 다가온 것입니다.

얼마 전“다시 복음 앞에”라는 복음 성가를 들었습니다.

 

많은 이들 말하고 많은 이들 노래는 하지만 정작 가진 않는 길

두려운 생각보다 많이 힘들고 험한 길 보단 그저 말로만 가려기에

점점 멀어져만 가네 내게 생명 주었던 그 길

점점 이용하려 하네 내게 사랑 주었던 그 길

다시 복음 앞에 내 영혼 서네 주님 만난 그때

나 다시 돌아가 주님께 예배드리며

다시 십자가의 길 걸으리

 

다시, 다시, 다시로 이어지는 단어가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어려운 가운데 다시 일어 난 많은 교우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10월 마지막 주일 있을 “행복에의 초대”주제를“again”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도 다시 일어나 연초(年初)의 결심을 이루고, 장결자들도 다시 일어나 주님 품 안으로 돌아오고, 불신자들이 다시 일어나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렇습니다.

“again”이라는 단어는 모두에게“희망”이라고 읽혀집니다.


잘 오셨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아버지가 많이 기다리셨어요.

오시기까지 힘드신 일이 한둘 아니셨죠?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기고 아버지 집으로 오셨으니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며 우리의 길고 긴 아픈 이야기도 들어주시고 우리의 깊고 깊은 상처도 만져 주실 것입니다.

 

처음이어서 낯설고 오랜만이어서 어색해도 들여다만 보시고 지나가지 마세요.

여기가 아버지 집, 곧 당신의 집이랍니다.

 

가장 아픈 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고독(孤獨)이라는 병이 가장 아픈 것 같아요.

제겐 울 일이 적지 않은데 같이 울어줄 사람이 없고 제겐 웃을 일이 많은데 같이 웃어줄 사람이 없다면 못 견딜 것 같아요.

 

곧 윙윙 찬바람이 불고 펑펑 함박눈이 쏟아질 추운 겨울이 올 텐데,

또다시 그 겨울을 외롭게 지내지 마세요.

“겨울 속의 고독!”생각만 해도 너무 시리고 슬프지 않나요.

“아버지 집에서 함께!”생각만 해도 너무 따뜻하고 기쁘지 않나요.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모두의 아버지 집으로, 정말 잘 오셨습니다.


많이 바쁘시지요?

그래도 질문해야 합니다. 가을에는 질문해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가을이 오면 이렇게 물어보겠다고 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이 가을, 우리는 지금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까?

행복에의 초대를 앞두고 우리에겐 이런 질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에?”

 

그 사람의 물리적 위치를 넘어 영적인 자리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 부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 배우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 자녀는, 내 형제는, 내 친구는, 내 이웃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확실히 천국 가는 길을 걷고 있는지, 지옥의 나락(奈落)인지.

아무리 봐도 전자(前者)가 아니라 후자(後者)라면

이 가을 펼쳐지는 행복에의 초대는 그를 위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많이 슬픈데도 아름다운 아픔이 있습니다.

가슴앓이입니다.

가슴앓이해 보셨지요?

사랑하는 자가 몸이 아플 때 가슴앓이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너무 그리울 때 가슴앓이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시름시름 가슴앓이할 때도 가슴이 시리고 아픕니다.

 

한국에서 운전면허 시험을 2년 넘게 보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면허시험장을 찾던 할머니에게 직원이 왜 그렇게 운전면허를 따고 싶어 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용달차를 몰며 배달하던 아들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못 쓰게 되었는데 운전을 배워 그 아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답변을 하셨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노(老) 어머니의 가슴앓이는 더 이상 가슴만 쓸어내리지 않고 운전면허를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갖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식은 것이 있습니다. 굳은 것이 있습니다.

아예 잃어버리고도 찾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가슴앓이입니다.

나에겐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없다는 듯이 가슴앓이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찾아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 사랑을 찾기까지 얼마나 가슴앓이하실까요.

이 가을에 펼쳐질 행복에의 초대를 예수님의 가슴앓이를 내 아픔으로 삼고 참여한다면 쉽게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가 불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2019.01.06 00:00

[2019-1-6] 첫 단추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단추를 꿸 곳이 없고 옷 모양새는 아주 우스워집니다.

새해의 첫 단추가 이상하면 올해의 전체도, 그 마지막도 이상하게 됩니다.

당신에게 새해의 첫 단추는 무엇입니까?

건강? 재물? 학위? 결혼?

 

“단지 15분”이라는 어느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장래가 유망한 청년이 박사논문을 제출하여 놓고는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진찰 결과 그는 15분 후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죽기 10분이 남았을 때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가져왔는데 억만장자인 그의 삼촌이 죽었으므로 와서 재산을 상속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9분이 남았을 때에 도착한 것은 박사학위 논문 합격 통지서였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애인에게서 결혼을 승낙하는 편지도 배달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15분은 다 되어 죽게 되었답니다.

 

새해에 사람마다 건강, 재물, 학위, 결혼 등등이 필요하지만 이 땅의 것들이 새해의 첫 단추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성도들에게 그럴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첫 단추는“위엣 것”이 되어야 합니다.

 

위엣 것을 첫 단추로 삼으면 올해의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뒷 순위의 가치를 첫 단추로 삼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가“위엣 것”은 밀리고 밀려 끝내 꿸 자리도 없을지 모릅니다.

당신이 새해에 입을 옷이 5개 구멍밖에 없는 옷이라고 합시다.

“위엣 것”은 당신의 몇 번째 단추입니까?


2019.01.27 00:00

[2019-1-27] 후츠파

다음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빌 게이츠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

윌리엄 로젠버그 (던킨 도너츠 창업자)

 

같은 학교 선후배라고요?

같이 부자 동네 산다고요?

아닙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혁신적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느냐하면 어렸을 적부터 질문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겐 후츠파 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후츠파(הפצוח)는 무례, 당돌, 철면피 따위를 뜻하는 낱말입니다.

이 단어는 용기, 진취, 도전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무례할 정도로 묻고 또 물으면서 전혀 새로운 관점들과 실험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형식파괴, 질문권리, 상상력과 섞임, 위험감수, 목표지향, 끈질김, 실패학습 이라는 7가지 정신이 후츠파에 있습니다.

 

우리에겐 침묵을 미덕으로 여기며 궁금한 것도 없고 따라서 질문도 없이 지나치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요?

침묵이 그 자리에선 예의가 있어 보이지만 앞이 캄캄합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질문을 던지는 후츠파가 당시에는 무례하고 당돌하지만 환한 미래를 여는 중요한 열쇠라고 확신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난주, 멀리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이었습니다.

만난 지는 십 수년, 통화한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전화하는 즉시 우리는 그 오랜 시간이 서먹하지 않게 함께 시간여행을 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물론 과거의 이야기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아직 녹슬지 않은 저의 '아재 개그'를 간간히 섞어 이야기하니 친구는 스마트폰이 깨지듯 웃었습니다.

 

그 친구는 노숙자 사역을 합니다.

그 친구가 위로해 줄 사람은 많아도 그 친구를 위로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힘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 날 친구와 함께 터뜨린 웃음은 분명코 한 겨울에 핀 봄날의 기쁨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박인수 씨가 부른 이 노래를 들었습니다.

 

많지 않아도

그리고 자주 만날 수 없어도

나에게 친구가 있음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멀리 있어도 가만히 이름 불러볼 수 있는

친구가 나에게 있음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내 좋은 친구를 만날 때면

웃음마다 봄날 기쁨입니다

보고픈 친구를 생각할 때면 그리움은

잔잔한 행복입니다

 

 

바쁘셔도 잠시 옛 친구에게 전화해 보세요.

그와 함께 웃노라면 한 겨울인데 봄날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누가 지혜론 사람입니까? 할 것과 말 것을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용감한 사람입니까? 할 것과 말 것을 결단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할 것과 말 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할 것을 하면 귀(貴) 해집니다.

할 것을 말면 천(賤) 해집니다.

말 것을 말면 정(淨) 해집니다.

말 것을 하면 추(醜) 해집니다.

 

기뻐하세요. 기뻐하면 열려요. 축복의 통로가

기대하세요. 기대하면 커져요. 하늘의 소망이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몰라요. 낙심의 탄식을

 

비교하지 마세요. 비교하면 열려요. 서글픈 미래가

염려하지 마세요. 염려하면 커져요. 불안한 마음이

불평하지 마세요. 불평하면 몰라요. 한없는 은혜를

 

할 것과 말 것을 혼돈(混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것과 말 것에 갈등(葛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것과 말 것도 타협(妥協)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 11:53)

그들은 할 것과 말 것을 구분하지 못하여 잘못된 것을 결단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행했고 암흑의 역사를 빚었답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할 것과 말 것을 구분하고, 결단하고, 실천하여

자신의 행복과 빛의 역사를 만드는 그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몇 나라가 있는 줄 아십니까?

많은 분이 아시는 대로 54개 국가입니다.

그중에 53개 국가 정상들이 지난 3일과 4일에 중국 베이징에 모여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 정상회의”를 가졌습니다.

한 나라가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 나라의 이름은 스와질랜드(swaziland)입니다.

아니, 에스와티니 왕국(kingdom of eswatini)입니다.

얼마 전에 그 나라 왕 음스와티 3세가 자기 마음대로 나라 이름(그 이름에 소문자를 대문자 앞에 쓰는 것 좀 보세요)을 바꾸었습니다.

 

그 나라는 인구가 백만 명을 조금 넘는 나라인데 아프리카 54개 국가 중 중국과 수교하지 않고, 대만과 수교하여 지내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큰 나라 중국을 거절하고 작은 나라 대만을 선택한 것, 왕 맘대로입니다.

 

이번에 신학교 가을학기 개강부흥회 강사님으로 오신 분이 그 나라 eswatini medical christian university의 김인환 총장님입니다.

총장님에 따르면 그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왕 마음대로라고 합니다.

대학교 졸업식이 오전 10시에 열린다고 광고하여 다 모였어도, 그 왕 맘대로 오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정오 12시든 오후 1시든 그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명색이 왕이니까, 그 왕 맘대로 해도 국민들이 별로 뭐라고 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세상 왕 맘대로는 모든 것이 불안불안 합니다.

다분히 자기감정대로 움직이면서 국민들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왕, 영원한 우리 왕, 하나님이 맘대로 하시는 것은 언제나 옳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보다 그가 늦으시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보기에 큰 것보다 다른 것을 선택하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것이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왕 맘대로”그것이 최고의 선택임이 분명합니다.


하트하트오케스트라를 아십니까?

발달장애 청소년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입니다.

지난 주일 밤, 카네기 홀에서 있었던 2018 세계찬양대합창제에 초대받아 한국에서부터 먼 길을 와서“나 같은 죄인 살리신”등을 연주하며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모든 청소년들 한명 한명이 자기의 악기를 진지하게 연주 했습니다만, 그 중에 팀파니를 치는 청소년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팀파니는 몇 개의 큰 북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주 중에 몇 차례 아주 짧게 참여합니다.

 

여태껏 보아 온 팀파니 연주자들은 가만히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화려하게 연주에 합류한 후, 또 한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달랐습니다.

자기가 직접 연주하는 시간이 아닐 때에도 허공을 치며 연주에 동참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허공을 쳤을지 궁금했습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친구들과의 호흡을 헤아리고 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 친구에게는 허공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보이는 팀파니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기(空氣)에게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다그치는 것도 같습니다.

곰곰이 보면 주님에 대한 사랑을 한 순간도 쉴 수 없다는 몸짓 같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카네기 홀의 허공을 치던 그 친구의 모습이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받았으니 주어야 해요.”

자기 가족 중에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받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받았으니 주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말은 이렇게 계속되었습니다.

“내 가족이 다른 이의 장기를 받아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받았으니 나도 남에게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받았으니 주어야 해요.”

큰 은혜를 받고도 거기서 머문 채로 사는 사람이 하도 많은지라 당연한 것 같은 그분의 말이 크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뜨거웠던 여름은 가고 거리마다 9월의 바람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 가을의 문턱에서 누군가의 물음도 우리 마음에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당신은 그분의 생명을 받으셨는데 당신은 다른 이에게 무엇을 주시나요?”

 

오늘 오후에는 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 이 취임식 예배가 있습니다.

장영춘 목사님은 32년 동안 학장님으로 신학교를 통해 후학들에게 사랑과 가르침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저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목사님이 섬겼던 자리를 이어 섬기면서 제게 꼭 필요한 말과 결단은 "받았으니 주어야 해요.”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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