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우한 폐렴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사망자의 수와 확진자의 수가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고

두려움과 공포, 경계와 배척도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습니다.

작은 수산물시장에서 출발했다는 바이러스가 세상을 다 잡아 먹을 기세입니다.

가히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전염병인 것 같습니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던 세계보건기구(WHO)도 지난 1월 30일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非常事態)”를 선포하였습니다.

국제적인 방역, 피해지역에 대한 지원, 치료제 개발 등이 뒤따를 것입니다.

 

이 땅에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교회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세상 사람들처럼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떨거나,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잘 씻거나, 정부나 세계보건기구에서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가 할 일은 다 한 것일까요?

이 땅에 전염병이 유행할 때 교회가 할 일을 하나님이 친히 일러주셨습니다.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3b-14)

 

전염병이 유행 할 때 교회가 할 일은 회개하고 겸손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번 바이러스의 근원지로 여겨지는 우한의 수산시장만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그 보다 더 무서운 미움, 거짓, 악담 같은 영적 악성 바이러스를

많이 퍼뜨렸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비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전염병이 유행하는 국제적 비상사태 속에서 교회는 두려워말고 흔들리지 말고

교회다운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고통당한 자들에게 사랑의 손을 펴는 것입니다. 


여러날 출타를 하였다가 돌아왔습니다.

출타를 할 때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짐입니다.

한정되어 있는 가방에 무엇을 넣어갈 것인지가 고민입니다.

그리고 될 수 있는대로 가볍게 짐을 가져가면 좋습니다.

저에게는 가장 가벼운 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가장 무겁습니다.

무거우면서 가벼운 짐, 무엇인지 아십니까?

책입니다.

 

책은 어떤 짐보다 무겁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많은 책이라도 들고 다닐 수 있습니다.

열권쯤은 식은 죽 먹기이고 스무권, 아니 그 이상도 끄떡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제가 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책은 제게 짐이 아닙니다.

한권 한권 보물과도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습니다.

매일 큰 가방에 책을 잔뜩 넣고 다녔습니다.

전도사 시절, 어느 교회 중등부 수련회를 며칠 인도하러 가면서

이민 가방을 가지고 간적이 있는데 거기에 절반 정도는 책이었습니다.

 

올해 받은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 한가지여도 일년내내 무거운 짐이 될수 있고

여러 사명을 받았어도 가벼울 수 있습니다.

그 사명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오래전 이야기 같습니다.

2020년 제직 수련회가 끝난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벌써 다 잊으신 것은 아니시지요.

제직 수련회 때 주어진 말씀 중 어떤 말씀이 잊혀지지 않으십니까.

제겐 “엎드리면”이라는 말씀이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엎드리면, 앞서고

 엎드리면, 사람이 안 보이고

 엎드리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엎드리면”의 축복은 놀랍습니다.

성경에는 엎드려 눈을 감고 기도하면 일어나는 일들을 이같이 말씀합니다.

 

“….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민 24:3b-4)

 

분주한 자가 아니라 엎드리는 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가한 자가 아니라 엎드리는 자가 미래를 볼 수 있고,

달리는 자가 아니라 엎드리는 자가 최후 승리를 합니다.

 

새해에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불확실의 안개가 우리 앞에 자욱합니다.

하지만 엎드리면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짙은 안개 너머도 볼 수 있습니다.

엎드리면 마침내 모든 자 앞에 있게 됩니다.

엎드림의 놀라운 축복, 놓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인데도 공부 성적에는 차이가 꽤 있었습니다.

수우미양가(秀優美良可)로 나눠진 성적표는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 때 도시락에도 다름이 있었습니다.

도시락에 계란 후라이, 진주햄 쏘세지 반찬을 가져온 친구는 늘 부러웠습니다.

고등학교 때 확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생긴 것도, 성격도, 취미도, 또 진로에 대한 생각도 다 다르다는 것을.

 

그런데 그 모든 차이를 잊게 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다양한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걸을 때였습니다.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걸을 때는 어떤 차이도 느껴지지 않았고,

세상의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 됨과 용기를 가져다주었던 어깨동무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어깨동무는 한국인의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디언들에게도 그와 유사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뒤에서 걷지 말라. 나는 그대를 이끌고 싶지 않다.

 내 앞에서 걷지 말라.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옆에서 걸으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겐 서로의 어깨가 필요합니다.

외롭기에.

힘들기에.

서럽기에.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신 주님과

서로 사랑하라고 모아주신 교우들과 2020년, 함께 걸어요.

그 옛날,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걸었던 것처럼 함께 걸어요.


그 당시엔 있었죠. 동네 곳곳에 큰 공터가.

그 동네 빈 공터에 이삼일 뚝딱거리면 큰 텐트가 세워집니다.

이제 곧 있을 서커스 공연을 홍보하는 쿵작거림이 온 동네를 몇 차례 돕니다.

아버지를 졸라 들어간 서커스 공연이 드디어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분장한 사람들이 나와 재미있는 말과 행동을 보여주다가 점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연을 이어갑니다.

그 중에 압권은 공중돌기입니다.

몇 바퀴를 도는 공중돌기 묘기를 보이는 사람은 영웅과도 같았습니다.

훗날, 아주 훗날에 알게 되었습니다.

공중돌기에서 진정한 영웅은 도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붙잡는 사람이라는 것을.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런 공연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공중 도는 사람은 붙잡아 주는 사람을 신뢰하며 휙휙 도는 것입니다.

 

“네 손 잡아 주리라”

우리 손을 붙잡아 주시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벌벌 떨다 아무 것도 못한다 하면서 한 해를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놀라운 묘기(?)를 보이며 한 해를 사시겠습니까?

이 말씀을 품고 공중 높이 솟구쳐 휙휙 날아도 됩니다.

공중 도는 우리 손을 실수 없이 붙잡아 주시겠다는 그 분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지난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신학교 개강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강사로 오신 김풍운 목사님은 귀한 말씀으로 신학생들에게 큰 도전과 깊은 감동을 주셨습니다.

신학생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능력을 나타내는 것보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집을 나서다 자기 아들과 이웃집 아들이 다투는 장면을 보았답니다.

자기 아들에게 이웃집 아들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 아빠는 시장님과 친해!”

그 말을 들은 자기 아들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우리 아빠는 예수님과 친해!”

그 아버지는 출근길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자녀들이 볼 때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요?

“예수님과 친한 아빠!”“예수님과 친한 엄마!”

자녀로부터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 아닐까요.

교우들이 볼 때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요?

“저분은 예수님과 친해!”

다른 이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최고 명예로운 말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친해지는 가을, 그리고 그 가을이 깊어질수록 예수님과의 친함도 더 깊어지고 싶습니다.


맨해튼에 우뚝 솟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29년 착공되었고 1931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건축가에게 물었습니다.

이 건물을 짓는데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냐고.

그로부터 주저 없는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초공사였습니다.”

 

어느 건물 공사나 건물이 완성된 후 기초공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공사가 가장 힘들고 가장 중요하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왜 건물뿐 이겠습니까? 모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소홀히 하기 쉬운 기초.

그 기초에서 이미 모든 승부(勝負)가 결정됩니다.

 

지난 주간에 국제전도폭발 지도자 임상 훈련이 우리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준비위원들과 여러 분야의 봉사자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합심하여 아름다운 행사를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전도폭발의 그 유명한 두 가지 진단 질문은 신앙의 기초를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는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는가를 묻습니다.

이런 신앙의 기초가 흔들린다면 신앙의 높은 경지는 난망(難望)할 것입니다.

 

착공 감사예배를 드린 새 성전은 곧 기초공사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을 기초공사가 잘되어지면, 그 위에 다민족과 다음 세대의“하늘의 문, 세상의 빛”이 될 새 성전이 잘 세워질 것입니다.

오는 토요일의 건축 바자를 위한 손길과 발길이 새 성전의 보이지 않는 기초를 든든히, 보이는 건물을 아름답게 만들리라 기대합니다.


손님이 되어 본적이 많으시지요?

따듯한 환대(歡待)가 좋으세요, 차가운 한대(寒待)가 좋으세요?

20년 전 전도폭발 지도자 임상 훈련에 참여하였을 때 낯선 곳에서 받은 따듯한 환대는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우리 교회에는 많은 손님들이 오셔서 몇 날을 머물다 가십니다.

국제전도폭발 지도자 임상 훈련에 오시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겐 모든 공간, 모든 사람들이 낯설 것입니다.

정중한 영접과 친절한 도움이 그들에게 주어진다면 낯섬이 편함이 되어 오래 동안 잊지 못하실 것입니다.

 

“알로하(aloha)!”

8년 전 하와이에 갔을 때 목에 꽃목걸이를 걸어주던 분이 들려주었던 인사말이었습니다.

그 뜻이 단순히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를 넘어선 인사랍니다.

“당신의 삶을 이해합니다.

저도 함께 무엇인가 나누고 싶습니다.” 라는 의미도 담고 있답니다.

제겐 아직까지 알로하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사인 “welcome!”이 그분들에게 따듯한 환대를 담은 웰컴이요, 알로하 정신을 품은 웰컴으로 기억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달력을 보고 안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원 심방 길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보고 알았습니다.

가을이 살포시 우리 곁으로 걸어온 것입니다.

단기선교와 전교인 수련회로 뜨거웠던 여름, 그 작별의 아쉬움이 가을과의 만남으로 달래어집니다.

 

가을에는 구름이 높아집니다.

하늘을 향해 눈을 더 높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하늘을 향한 기도의 계절입니다.

 

가을에는 낙엽이 떨어집니다.

세상을 향해 몸을 더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세상을 향한 섬김의 계절입니다.

 

가을에는 호수가 파래집니다.

자신을 향해 더 깨끗해지자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자신을 향한 성찰의 계절입니다.

 

가을에는 철새가 날아갑니다.

목표를 향해 나래를 펴고 날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목표를 향한 전진의 계절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반가운 계절입니다.


누구나 다 행복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행복한 삶보다 더 차원(次元) 높은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놀라는 삶입니다.

놀라움을 한자로 표현하자면 경이(驚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러보면 모든 것에 다 하나님의 경이로움이 가득 차 있는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의 행복만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경이로움이 우리 교회에서도 흘러넘칩니다.

21일, 오는 토요일도 그렇습니다.

오전 7시에는 새 성전 착공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날 오전 10시에는 킹스 아카데미 개교 예배를 드립니다.

다민족을 위한 새 성전도 몇 년 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킹스 아카데미도 몇 년 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각각 몇 년의 기도가 같은 날에 매듭짓게 됨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비전은 안 보이는 것을 보는 힘입니다.

눈에는 안 보였지만 다민족과 다음 세대를 향한 같은 비전을 품고 함께 달려오신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1일은 시작의 비전이 성취되는 날이며 완성의 비전이 새롭게 시작되는 날입니다.

 

전도서 3장에서의 말씀처럼 모든 것에 다 때가 있습니다.

잠잠할 때도 있고 놀랄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는 토요일은 놀랍고 놀라운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날에 그 놀라움을 함께 모여 뜨거운 찬양과 절절한 감사로 표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까요?


마샤 자매는 신학생입니다.

마샤는 찬양을 잘합니다.

마샤는 교회 봉사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마샤가 울었습니다.

 

알마티에서 신학교 강의를 하는 가운데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뜻밖에 마샤는 자기를 영적인 고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네가 한 일 돌이켜 보라. 지금 행동을 보라.

너 같은 자를 누가 좋아하겠냐? 하나님은 이미 널 버렸어.”

 

우리의 하나님 자녀 됨은 나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우는 마샤 같은 자들이 많기 때문에 단기 선교팀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오늘도 온 땅을 두루 다니며 고아처럼 사는 또 다른 마샤들에게 외칩니다.

“울지 마, 마샤”

 

-사랑하는 성도들의 기도가 생생히 들리는 것 같은 선교 현장에서-


가난한 청년이 돈 많은 귀족을 찾아가 학비를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귀족이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그 다음은?”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귀족이 그 청년에게 또 물었습니다.

“그 다음은?”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졸업하여 훌륭한 법관이 되겠습니다.”

귀족의 그 청년을 향한 질문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청년의 대답도 계속되었습니다.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미겠습니다.”

 

귀족의 그 청년을 향한 질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은?”

그들의 대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집니다.

청년이 곤혹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러다 늙겠지요.”

끝났는가 싶은 귀족의 질문은 또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청년은 마지막 답이다 싶어 말합니다.

“그리고 죽지요.”

“그 다음은?”귀족의 질문.

“---------”청년의 침묵.

“청년, 그 다음에는 영원한 세계가 있다네.

그 영원을 준비하게.”

 

우리 자녀들, 새 학년을 맞아 학교로 돌아가거나, 처음 겪을 캠퍼스로 떠납니다.

모두 공부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지식만 쌓는 공부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다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가오는 9월에도 우리는 무엇인가 얻기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문제는“그 다음은?”입니다.

나의 삶이 나의 야망을 성취하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다음은?”이라는 물음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답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빨리빨리”입니다.

모든 것이 빨리 되었으면 합니다.

성장도 빨리되고, 성공도 빨리되고, 회복도 빨리되길 원합니다

.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십시오.

열매가 익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어둠이 물러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 시간이 있습니다.

“차츰차츰”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결코 제자리 걷기가 아닙니다.

“걷고 걸었는데 결국 그 자리야”이렇게도 탄식합니다.

아닙니다. 그 자리처럼 보일 뿐입니다.

믿음의 길은 광야의 길이기 때문에 매일매일 사방을 둘러보아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광야 가운데서도 흐르는 시간, 소망의 단어“차츰차츰”을 잊지 마십시오.

 

이렇게 노래 부르는 이들도 있답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지난 주일 저녁 카작스탄 사역을 마치고 키르기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

알마티를 출발한지 4시간 가까이 되어 국경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모두 15명이었습니다.

퀸즈장로교회 9명, 키르기스탄 선교를 돕겠다고 나선 알마티 퀸즈장로교회 6명이었죠.

짐을 가지고 걸어서 통과해야 하는 국경을 서너 그룹으로 나누어 넘었습니다.

앞선 그룹들이 넘어와서 한참 기다리는데 마지막 그룹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그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알마티 교회 교사 중 한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넘어설 줄 알았던 국경을 통과하지 못하고 다시 알마티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교사는 자신의 여권이 지난 7월로 만기된 것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한편 그 마지막 그룹에게 까다로운 국경 경비원이 선교 짐들에 대해 시비를 걸었답니다.

놀랍게도 검색대 컴퓨터가 그 때에 작동하지 않아 모든 짐이 그대로 통과할 수 있었답니다.

 

국경에서 생긴 일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우리의 철저한 준비를 요구한 국경이었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체험한 국경이었습니다.

 

천국문 앞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그곳을 엉뚱한 것을 가지고 통과하려는 사람은 없는지요.

우리의 모든 것을 덮어주시는 은혜가 있는 자리가 천국문 앞인 것을 잊은 사람은 없는지요.

확실히 그 날의 국경은, 훗 날의 천국문 모형이었습니다.


여름 더위가 만만치 않습니다.

여름 더위에 짜증나는 일은 피해야 하겠습니다.

그 누군가와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싸우지 않는 비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지난 수련회 때 강사님이 교훈이 담긴 유머를 들려 주셨는데 들으신 분들은 다시 한 번, 안 들은 분들은 잘 들어 보십시오.

 

람보(실베스터 스탤론이 출연한 영화 주인공)와 이소룡(중국 무술 영화 주인공)이 같이 짜장면을 먹을 때 일어난 일이랍니다.^^

단무지가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자 람보가 이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

“서로 한 대씩 때려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 남은 단무지를 먹자” 그래서 이소룡이 먼저 람보를 때렸습니다.

람보는 아팠지만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잘 참았습니다.

이제 람보가 이소룡을 때릴 차례입니다.

그 때 이소룡이 람보에게 말합니다.

“나 때리지 말고 너 먹어.”그리고 이소룡은 주방을 향해 외칩니다.

“아줌마, 여기 단무지 한 접시 더 주세요.”

 

맛있는 짜장면 먹으면서 단무지 때문에 얼굴 붉히며 싸울 필요 없습니다.

어느 중국집이나 짜장면을 다 먹을 때까지 단무지는 무한리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더 갖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자원(資源)이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니까 싸워서 내가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무한히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내가 더 많이 갖겠다고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무한(無限) 공급자 하나님을 생각하니 감사가 넘쳐흐릅니다.

유한(有限)한 가운데도 최선을 다해 전교인 수련회를 아름답게 섬겨주신 모든 분들에게 생각하니 기쁨이 넘쳐흐릅니다.

더운 여름, 싸우지 말고 시원하게 삽시다.


 

“뚫어!”

그 구성진 외침이 동네 구석구석을 울리며 누볐습니다.

굴뚝이나 싱크대, 배수관 등 무엇인가 집안에 막힌 것을 뚫으라는 것입니다.

집안이 무엇인가로 막혀있다면 머잖아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뚫어!”

누군가에게 막힌 혈관을 뚫어야 한다는 의사들의 소견(所見)이 있곤 합니다.

막힌 혈관을 뚫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시술(施術) 또는 수술(手術)을 하지요.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운동일 것입니다.

힘든 일을 만나지 않으려면 혈관을 뚫어야 합니다.

 

“뚫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려워질 때“뚫어!”가 필요합니다.

소통이 막히면 삶은 점점 피폐(疲弊)해 질 것입니다.

소통이 아닌 일방통행의 사람 주변에 누가 있던가요.

 

“뚫어!”

진짜 뚫려야 할 곳이 있습니다. 하늘입니다.

지난 월요일, 마치 하늘이 뻥 뚫린 것 같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 뚫린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복을 받는 인생은 얼마나 좋을까요.

이 땅의 것을 끌어 모으려고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이 뚫리면 하늘의 것이 내려옵니다.

하늘을 뚫는 방법 잘 아시죠?

기도 외에는 하늘을 뚫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아리조나, 중국, 캄보디아, 차례차례 불편한 먼 길을 기쁨으로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저 분은 바쁜데, 이 분은 아픈데, 저 청년은 힘든데, 이 학생은 약한데....”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모두가 다 그 길을 떠나지 않을 충분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 그 복음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구원의 길이 없기에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기 위해 말없이 떠나는 뒷모습이 왜 이렇게 가슴 시리도록 숭고(崇高)한지요.

 

그 뒤를 이어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길 이들이 준비하고 있군요.

필라델피아, 카작스탄, 케냐, 키르키스탄, 온두라스, 에디오피아, 할렘.... 그 누군가 익숙한 자리, 편안한 자리를 떠나는 그 뒷모습을 남겨야 여기 교회도 살고, 저기 세상도 산다면, 우리 교회에서 뒷모습을 남기는 이들의 줄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선교는 사랑인가 봅니다. 선교는 눈물인가 봅니다.

저들이 힘 있게 복음을 전하고 건강하게 돌아오기까지 사랑으로 바리바리 무엇인가 싸서도 보내고 그 무엇인가를 싸던 두 손을 모아 눈물로 기도도 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런 뒷모습이 향기가 되는가 봅니다.


어렸을 적에 “가위 바위 보”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묵찌빠”라고 부르기도 했죠.

이것을 통해 승부(勝負)를 결정짓습니다.

“내가 주먹을 낼 테니 너는 보를 내라”고 심리전을 펴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고는 “가위 바위 보”놀이를 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만 어릴 때 작은 손으로 만들었던 가위 바위 보자기의 모습에 많은 교훈이 있음을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가위”는 자르는 것입니다.

가위는 가차 없이 자릅니다. 나도 자를 것은 잘라야지.

가위는 좌우로 가르면서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도 분명히 결단해야지.

 

“바위”는 땅 위에도 있고 흐르는 강물 속에도 있습니다.

땅 위의 바위는 견고합니다. 나도 흔들리지 않아야지.

흐르는 강물 속의 바위는 매일 자기를 씻습니다.

나도 날마다 성령으로 씻어야지.

 

“보”는 손을 다 펴는 것입니다.

보자기의 모습을 보입니다. 나도 사는 동안 감싸는 인생이 되어야지.

펼친 손은 사람이 이 땅을 떠날 때의 모습입니다.

나도 모든 것을 놓는 연습해야지.

 

우리는 옛 친구들과 “가위 바위 보”놀이를 언제 다시 할 수 있을까요?


솔직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 목회자는 더욱 자기의 아픔이나 상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강사 목사님은 매우 열려있고 솔직합니다.

그 상처와 아픔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는 정말 은혜롭습니다.

 

깊이 있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본문일지라도 강사 목사님은 아주 신선하게 풀어갑니다.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졸리기는커녕 벌써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났나 합니다.

깊은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린 시원한 물 같은 강사님의 말씀은 매우 깊이 있습니다.

 

경륜 있다.

전통적인 서울 충현 교회 부목사, 새로운 시도가 많았던 안산 동산 교회 부목사,

보수적인 서울 창신교회 담임을 역임하시고 현재 새로운 모델의 예수향남교회 담임.

다양한 형태의 교회를 섬기면서 쌓은 경력들이 벌써 묵직한 경륜이 되었습니다.

 

관심 있다.

자기 교회만을 위한 목회가 아님은 충분히 보아 왔습니다.

둘러 살피며, 지역 그리고 이 땅의 많은 교회가 함께 숲을 이루기를 시도해왔습니다.

강사 목사님의 관심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아주 관심이 큽니다.

 

위의 내용과 그 밖에 쏟아질 은총들은 이번 여름 전교인 수련회에 참석하시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수련회를 마치고 위의 내용이 기대만큼은 아니었다고 느껴지시는 분들에게 수련회비를 전액 되돌려 드릴 계획은 아직 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기에.


 

 

 

“아! 목마르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목말라합니다.

“물 마셔!”

아이가 어이가 없어 말합니다.

 

 

 

물이 가득 있는데, 입만 열면 그 물을 실컷 마실 수 있는데 계속 목마르다고 힘들어한다면 도대체 누구의 탓일까요?

“물속의 물고기도 목이 마르다”는 안타까운 제목의 책에서 본 그림입니다.

오늘부터 전교인 여름 수련회가 시작됩니다.

우리 주님이 준비하신 은혜의 강가입니다.

목마르십니까?

입을 열어 자신의 마른 목만 잠시 축일 것이 아니라 은혜의 강이 나를 통해 계속 멀리멀리 흘러가도록 우리 모두 입을 크게 열어 벌컥벌컥 마셔요.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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