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이제 막 들어선 11월도 빨리 지나가겠죠.

오래 붙잡고 싶어도 뿌리치듯 달아날 11월이 분명합니다.

부질없이 가지 말라고 말하기 보단 지나가는 11월을 수채화로 그려 내 마음의 벽장에 오래 걸어 두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흙색 물감으로 한창 땅을 파고 있는 새정전 앞마당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웬일이죠? 제 눈에 뭐가 꼈나요?

그 마당의 흙색이 가을 단풍마냥 형형색깔로 보여요.

붉은 김치색, 노란 튀김색.... 지난 10월 건축바자에서 봤던 수십가지 색상들이 앞마당 흙색깔에 섞여 있어요.

 

그토록 어려운 이민 땅에서 본당과 교육관을 묵묵히 세우시더니만 건너편 새성전을 함께 지어가시는 교우들을 생각하니 11월의 수채화는 물감으로 도화지에 그려지기 전에 제 얼굴에 눈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 눈의 눈물은 말라도 결코 마르지 않을 사랑의 물감을 각양각색으로 뿜어내는 성도들 때문에 앞마당 흙색은 화려한 색깔이 되어 놀라운 11월의 수채화를 그리게 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 모두에게는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있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1954년,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시골 작은 교회의 젊은 목사님 부부가 낡은 교회의 이곳저곳을 고치며 성탄을 준비하고 있는데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센 바람이 그 마을을 휘몰아치면서 교회의 강단 뒷벽에 큰 구멍을 내었습니다.

목사님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시장에서 아주 싼 가격에 오래된 금빛과 아이보리색의 레이스를 가진 테이블 덮개를 샀습니다.

덮개로 강단 뒷벽의 큰 구멍을 잘 덮을 수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성탄절 이브 예배가 있는데, 그날 낮 젊은 목사님은 교회 앞 추운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나이 든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버스가 오려면 멀었으니 교회에 들어와 계시라고 했습니다.

그 마을에 일자리 인터뷰를 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교회 안에 들어온 여인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강대 뒤에 걸려 있는 테이블 덮개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이건 내 것입니다.

예전에 내 남편이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이지요.

전쟁 때에 남편과 헤어졌는데 훗날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 테이블 덮개를 가져가라는 목사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여인은 떠났습니다.

 

그 날 저녁 성탄 이브 예배를 마친 후 나이 든 마을 남자가 목사님에게 다가와 “저 강대상 앞에 걸려 있는 것은 아내를 위해 내가 만들었던 것입니다.

전쟁 때 헤어졌는데 이제는 하나님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로 죽은 줄 알았던 부부는 살아 있었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탄의 이야기는 언제나 소망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오후, 헨델의 성탄 이야기를 꼭 들으러 가요.

그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꾼 이야기, 그가 만난 메시아 이야기는 우리 찬양대의 찬양으로 아름답게 펼쳐질 것이랍니다.


“마이 달링”이란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my darling (나의 사랑)

can i call you darling (내가 당신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darling darling darling (사랑, 사랑, 사랑)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저의 칼럼 제목은“마이 달링”이 아닙니다.

“마이 달랑”입니다.

달랑 한 장 남은, 나의 달력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매월 초(初) 하나하나 내 손에 의해 아프게 뜯겨져 나간 달력들.

주어진 한 달에 대한 부끄러움은커녕 대단한 한 달을 산 것 마냥 그것을 교만히 뜯곤 했던 내가, 마지막 달랑 남은 달력 앞에 겸손히(?) 서 있습니다.

여유(餘裕)는 사라지고 초조(焦燥)가 깃든 달랑 한 장 남은 달력 앞입니다.

한껏 가벼워진 한 장 달력이 한 해의 마지막이라는 부담으로 매우 무겁게 보입니다.

 

미안하오. 2019년 달력들이여.

지금까지 열한 장의 그대들에게 매우 무례했음을 고백하오.

이제라도 마지막 한 장 달랑 남은 당신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사랑하겠소.

마이 달랑, 마이 달링이여!


사실, 저도 꿈꾸었었죠. 크리스마스에 눈이 와서 온 세상이 하얗게 되기를.

그래서 이 감미로운 노래를 좋아하곤 했답니다.

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

그러나 성탄절을 하얀 눈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혹시, 가보셨나요.

성탄절 전후로 록펠러 센터 앞으로.

크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번쩍이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아무리 멋있어도 크리스마스트리로 성탄절을 바꿀 수 없지요.

 

간혹, 참여해 보셨나요.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에.

딸랑딸랑 종소리를 좇아가 이웃을 돕는 마음을 담는 것은 좋습니다.

그래도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성탄절을 바꾸는 것은 아니랍니다.

 

많이, 기쁘셨나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서.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준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정말로 성탄절을 선물을 주고받는 계절로 바꾸자고 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비장(悲壯)한 날입니다.

성탄절은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내가 꼭 안아야하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전무후무(前無後無) 날입니다.

성탄절은 구원이라는 인류 최대의 소망(所望)이 임한 날입니다.

 

엿 장수 맘대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고귀한 성탄절을 엿 장수가 맘대로 엿을 바꾸어 주듯 더 이상 다른 것과 함부로 바꾸지 말아요..


“결론은 나중에 냅시다.”

이런 말이 잦으면 그 누구도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결론을 미룰 수도 없습니다.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데 올해의 결론을 어떻게 미룬단 말입니까?

 

올해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은혜입니다.

봄의 은혜, 여름의 은혜, 가을의 은혜, 겨울의 은혜가 다 달랐고 넘쳤습니다.

고난도 은혜, 평안도 은혜였습니다. 약함도 은혜, 강함도 은혜였습니다.

 

올해의 또 다른 결론은 이것입니다.

감사입니다.

고맙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가슴이 뭉클한 시간, 눈시울이 붉어진 시간, 콧잔등이 시큰한 시간.

우리 교역자, 우리 장로님, 우리 성도들이 만들어 주신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

 

올해의 결론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준비입니다.

올해 찾아온 여러분의 죽음.

가족들도 사랑하고 우리 모두도 사랑하던 분들.

올 한 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우리 곁을 떠나면서 들려준 외침.

“준비하라. 준비하라. 준비하라. 하나님 만나기를.”

 

그렇습니다. 은혜, 감사, 준비는 미룰 수 없는 올해의 세 가지 결론입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그 날, 뭔가 좋은 결과를 얻는 사람들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시상대 위에서 상 받는 그 날의 모습을 그리며 연습했고, 근육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건강한 그 날을 상상하며 운동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이후에 주님 뵈올 날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맡긴 일은 어떻게 하였느냐?”

아무도 숨김없이 대답해야 할 그 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긴 훈련의 시간을 묵묵히 감당하고 오늘 귀한 임직감사예배를 드리는 임직자들이여, 축하도 드리지만 오늘 직분을 맡긴 그분 앞에서 결산할 날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날이 있습니다.

지난 일 년도 함께 걸어오며 울고 웃었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회계(會計)의 그날이 회개(悔改)의 그 날이 아니라 상 받는 그 날이 되도록 오늘도 아름다운 수고와 동행을 멈추지 말아요.    


올해가 77세이신 아버지는 건강하셨답니다.

급작스런 아버지의 담도암 소식을 듣고 황급히 한국으로 날아갔습니다.

일주일간 간호해드리는데 어느 토요일 아침 그의 눈앞에서 아버지는 떠나신 것입니다.

목사님이신 아버지의 죽음.

많은 일을 하셨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의외로 짧았습니다.

“천국에서 만나자”

 

장례식이 예배로 가득 찼답니다.

하루에도 20번 정도의 예배가 드려진 장례식.

많은 분들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한결 같았습니다.

“네 아버지는 훌륭하셨다.”“네 아버님은 좋으신 분이셨지.”“네 아버지는....”

 

장례식을 다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 온 그는

아름다운 삶을 남기신 아버지의 죽음 앞에 자기의 삶을 돌이켜 보게 되었답니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세상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좋다고 먹고 마셨던 것들이 다 부질없었어.”

“천국에서 아버지를 어떻게 뵐까.”

 

그에게도 아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자기 아들이 사람들에게 들을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 아버지는....”“네 아버님은....”“네 아버지는....”

훗날 천국에서 만날 아버지. 훗날 자신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를 들을 아들.

두 시간 가까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 갖게 된 상념을 나직이 말한 던 그가, 스스로 밝힌 나이는 올해 50입니다.

50세면 삶을 바꾸기에 늦은 것일까요?


습관은 버릇이 되고 버릇은 점차 익숙한 것이 됩니다.

습관도 버룻도 버리기 힘든데 익숙한 것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익숙의 영역은 다양합니다. 보는 것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만 보려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대한 발전은 더딥니다.

 

10년 20년을 같은 길을 다녀도 그곳에 언제나 있었던 가게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다가“이런 가게가 여기 있었어?”하고 놀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익숙한 것만 보이는 안타까움의 현장입니다.

 

1990년 지구궤도에 발사된 허블우주망원경이 있습니다.

지상의 우주망원경과는 달리 더 높은 해상도의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 허불망원경이 관찰하는 행성은 익숙한 것만 관찰합니다.

로버트 윌리암스는 허블망원경의 각도를 틀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방향을 관찰해 보자고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방향을 주시하고 주시하였더니 그동안 물랐던 아름다운 은하계를 발견한 것입니다.

1995년의 일입니다.

 

성경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들인데, 성경 전체를 읽긴 읽어도 익숙한 이야기만 보면서 그 수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지나쳐 가곤 합니다.

익숙함을 넘어설 때 우리의 삶과 신앙은 더욱 풍성해 질것입니다.

저는 지금 멀리서 익숙함을 넘어서는 성경 읽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죄가 사람에게 안겨준 것은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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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저 외로움을 견디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요?

여리고 성에 살던 삭개오는 외로웠습니다.

돈은 있었지만 친구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비난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도 뽕나무 위에서 싸늘히 흐르는 고독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런 자기에게 다가와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신 분이 있으셨습니다.

그분은 삭개오에게 구원과 공동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애에 언제나 나를 품어주는 공동체,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어디선가 외로움에 지쳐 울고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신학교가 개강했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첫 삼일 동안 개강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개강 부흥회에는 y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높으신 연세에도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월요일 첫날에 목회 중에 있으셨던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른 교단 교회에 잠시 파송 사역을 하시게 되었답니다.

아주 젊으셨을 때였죠. 그런데 그 교회 제직들이 희한(稀罕)했다는 것입니다.

맥주도 마시고, 고스톱도 치고, 사교(社交) 댄스도 추는....

원래 정치운동 색깔이 짙은 교회였지만“이것은 결코 아닌”제직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사교댄스를 추려던 그들에게 y 목사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셨답니다.

“댄스든지 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시오.”

그들이 잠시 의논한 후 답을 가져왔답니다.

“우리는 댄스를 택하겠습니다.”

 

쿵짜작 짝짝~~

음악과 함께 사교댄스를 추는 그들에게 목사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등짝을 때리면서

“들어가시오”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댄스는 멈춰지고 목사님은 집으로 돌아 오셨답니다.

그날 저녁,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 전화를 많이 받으셨답니다.

성도들이“목사님, 잘하셨습니다. 도대체 제직들이 그게 무슨 짓입니까?”

그 후 교회는 변화되었고, 그 제직 가운데 사역자들도 나오게 되었답니다.

 

“우리는 댄스를 택하겠습니다.”

“들어가시오”

저와 젊은 신학도(神學徒)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노(老) 목사님의 목회 단상(牧會斷想)이셨습니다.


숨이 막혀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미세먼지 때문에 한국에서 울려 퍼지는 탄식입니다.

유치원에 가는 어린아이들까지 마스크를 쓰여 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 오가는 사람이 없어 장사를 할 수 없다는 상인들의 마음은 참담하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먼지들은 교육, 경제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심각하게도 사람들에게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거나 그 목숨을 앗아 갑니다.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한국을 다녀오시는 많은 분들이 뉴욕의 공기가 이렇게 좋다는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공기가 맑고 좋은 곳을 청정지역이라고 합니다.

조사(調査)를 통해 보니 뉴욕은 미세먼지 농도가 낮은 청정(淸淨) 도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난날 뉴욕도 최악의 미세먼지로 시달렸으나 그런 먼지들을 방출(放出)하는 원인들을 꾸준히 퇴출(退出)시킨 결과입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입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영적 미세먼지도 있습니다.

마귀의 변함없는 전략은 영적 미세먼지입니다.

마귀는 사소(些少)한 이유들로 영적 미세먼지를 빚어 성도들의 기도를 조금씩 틀어막다가 마침내 치명적인 영적 손상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날 기도의 호흡이 전혀 막히지 않는 최고의 영적 청정지역은 어디일까요?

더 이상 마귀의 영적 미세먼지 전략이 조금도 먹히지 않는 곳입니다.

내일 새벽에 이 시대에 최고의 영적 청정지역이 어디인지 볼 수 있을까요?


겨우내 닫아 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창 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던 봄이

왜 이제야 문을 여느냐는 듯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봄은 따스함입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녹이는 따스함입니다.

봄은 소리입니다.

아니 함성입니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예쁜 꽃들의 함성입니다.

 

봄은 희망입니다.

각양 씨앗들이

녹은 땅을 찾아들어 희망을 싹 틔우려고 들썩이고 있습니다.

 

봄은 향기입니다.

살짝 머리 아픈 샤넬 파이브가 아닌

가슴까지 싱그러운 자연산 향기입니다.

 

봄은 그대 앞에 와 있습니다.

봄의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봄과 함께 사순절의 여정을 즐기십시오.

 

벌써 봄이 그대 앞에 와 있는데

왜 아직 겨울 자락을 덮고 있습니까?

이제는 그렇게 춥지 않잖아요?

어서 겨울 자락을 거두고 우리 같이 봄을 노래해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수년 전에 높은 시청률을 보였던 프로그램 제목입니다.

유아들의 여러 문제들을 고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아이들의 문제는 아이들 자신보다 부모의 문제가 더 크다는 전체 결론이 기억됩니다.

 

“내 몸이 달라졌어요”

누구나 외치고 싶은 말입니다.

모두가 군더더기 살 대신에 근육질 몸매가 되고, 골골했던 몸이 회복을 넘어 강건하게 되길 고대하지만 거기에 걸맞는 운동을 꾸준히 하는 자를 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내 영이 달라졌어요”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영적 약골(弱骨)이 즐비한 시대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한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근육질 사람은 가끔 보았는데 이제는 깊은 영의 사람, 강한 영의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사순절이 2주가 지났습니다.

내 영이 변화되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닙니다만 내 영이 변화되는 강력한 조짐을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그동안에 동참했던 분들은 꾸준히, 아직 참여하지 않은 분들은 아무도 늦지 않았으니 내일부터라도.

그리하여 부활절을 절기로만 맞지 말고, 실제 내 영이 변화되어 가슴 벅찬 그 날을 모두 맞이합시다.

 

황금률(golden rule) 아시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이 황금률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거울입니다.

거울은 결코 먼저 웃지 않습니다.

거울을 바라보는 자가 먼저 웃을 때 거울도 따라 웃습니다.

거울 앞에서 찡그려 보세요. 여지없이 거울도 나를 향해 찡그립니다.

거울 속의“나”는 결코 다른“나”가 아닙니다.

 

어렸을 적에 엄마와 아빠가 다투었는데 엄마가 집을 나가겠다며 보따리 싸고 나서면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하였답니다.

“넌 필요 없어. 난 네 형이면 돼.”

엄마에게 거절당한 상처를 수십 년 안고 살아가던 분을 보았습니다.

 

나를 향해 더 이상 상처를 말하지 마세요.

그 상처 치유 안 됩니다. 그 상처가 나의 진짜는 아니잖아요.

나를 향해 부정적인 태도 던지지 마세요.

일그러진 자화상으로 살게 됩니다. 그 자화상이 내 본 모습 아니잖아요.

그런 모습을 거울에 비추지 마시고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해 보세요.

“너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작품, 난 널 좋아해. 자랑스럽고.”

곧 거울이 나를 행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작품, 난 널 좋아해. 자랑스럽고.”


2019.03.03 00:00

[2019-3-3] 기대하라

“고도를 기다리며”는“고도(高度)를 기다리며”가 아닙니다.

“고도(godot)를 기다리며”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제목입니다.

이 책에서는 두 친구가 날마다“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고도”라는 사람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서“고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紛紛)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어떤 대상을 말한다고도 하지만 그러나 원작의 제목에 쓰인 단어를 유심히 보면 “고도(godot)”는“신(god)”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을 기다리지 말라, 그는 결코 오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기대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가졌기 때문일까요, 기다려보았자 별것 없기 때문일까요.

이런 세태를 거슬러 가야 합니다.

“기대하라”는 오는 3월 11일 월요일부터 시작될 올해 사순절의 주제입니다.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서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6주간 동안 진행될 사순절에 6개의 소주제가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기대하라.

지금, 어떤 상황이든지 기대하라.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라.

여기, 어떤 곳이든지 기대하라.

놀라운 회복과 기적을 기대하라.

십자가를 기대하라.

 

사무엘 베케트는“고도(godot)”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고 슬퍼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대하는 모든 자에게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한 영국 시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는 무엇을 져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나를 돌보셨습니다.

나는 누구를 돌보아야 하겠습니까?

 

 

 

..................

 

나도 묻고 대답해야 하는데,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빌바오가 죽었습니다.

빌바오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빌바오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빌바오는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스페인 북부의 자그마한 도시 이름입니다.

 

중공업의 발달로 한 때 찬란함과 부유함을 자랑했던 도시 빌바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전 세계 중공업이 쇠퇴하면서 찬란했던 빌바오의 영광도 함께 쇠락했습니다.

사람들은 떠나고, 기업들은 철수하고... 그러던 빌바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의 세 번째 해외 미술관을 유치하면서 죽어있던 도시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산업 중심의 도시가 문화 예술의 도시로 거듭난 것입니다.

 

“빌바오 효과 (bilbao effect)”라는 말도 생겼으니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살아난 빌바오는 떠났던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계속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구겐하임을 받아들인 빌바오가 다시 일어났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죽었던 그 누구도 다시 살아납니다.

죽은 도시는 빌바오처럼 다시 살아나고, 죽은 사람은 나사로처럼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저는 지금 로드아일랜드에 있습니다.

여기서 로드아일랜드 중앙한인교회 부흥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부흥이란 단어를 들으시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저에게 부흥이란 교회를 깨우는 것이며 지옥불로 끌려가는 자들을 건져내려는 영적 싸움입니다.

 

이 악한 시대, 지옥불로 수많은 자들이 줄 대어 달려가는 이때에 교회가 깊이 잠들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나 부흥은 일어나야 합니다.

부흥회라는 방법은 아니더라고 부르짖고 사모하면서 부흥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많은 것들이 바뀝니다.

성경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는 변화의 넘치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유약했던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도 그렇고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이 가져온 큰 변화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의 기도가 있기에 그제도 어제도 말씀을 증거 할 수 있었고 오늘 낮에도 저녁에도 계속 복음을 외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립습니다.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높임을 받으소서

내가 밟는 땅 주님의 땅이니

하늘이 주의 이름 높이 올리며 넓은 바다가 주를 노래해

내 평생에 주의 이름 높이며 어느 곳에서든지 주님을 예배하리라

내가 밟는 모든 땅 아버지의 영광이 선포 되어야 하리

 

청년들의 찬양이 울려 퍼졌습니다.

장로님들이 함께 나와 손에 손을 잡았습니다.

교역자들은 앞으로 나와, 성도들은 그 자리에 서서 함께 손을 들어 축복하였습니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있었던 전성호 선교사님 파송 기도의 풍경이었습니다,

일흔한 살의 선교사님은 그렇게 성도들의 기도를 뒤로하고 선교지로 떠나셨습니다.

 

71세. 무엇인가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입니다.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사는 것이 삶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나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도전입니다.

 

인생의 크기는 도전의 크기입니다.

도전하는 자는 아름답습니다.

도전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밟는 모든 땅, 아버지의 영광이 선포되길 도전하는 사람들이 또 일어나야 합니다.

 

도전은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아들 독수리가 먹잇감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오랜 비행 끝에 좋은 먹이를 발견하였습니다.

한 동안 굶주렸기에 잡은 먹이를 막 먹으려던 차에 엄마 독수리가 생각났습니다.

“좀 갔다 드릴까?.... 아니야. 나 먹기도 부족한데.... 엄마는 알아서 잡아 드시겠지.”

아들 독수리는 잡은 먹이를 혼자 잘 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 독수리가 아들 독수리를 맞이합니다.

“어딜 그리 오래갔다 왔니?

너무 안 들어와서 많이 걱정했다.

어서 씻고 이리 와라.

이 어미가 먹이를 잡았는데 너와 같이 먹으려고 한참 기다리고 있었단다.

자 어서 먹자꾸나”

 

내리사랑은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일컫습니다.

어떻게 자녀가 부모의 끝없는 사랑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치사랑이 있습니다. 내리사랑의 반대입니다.

“치”라는 단어는“치솟다”처럼 무엇인가 아래에서 위로 끌어올린다는 뜻입니다.

치사랑은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을 사랑하는 것인데 특히 자녀가 부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주변에 정말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시는 효자 효녀를 많이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치사랑이 내리사랑을 이기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 어떤 자녀도 부모의 나실 제 괴로움과 기를 제 애씀을 다 알지 못하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 어느 자녀도 자식이 잘 되길 바라며 모든 것을 쏟아부은 부모의 소원과 희생을 다 깨닫지 못합니다.

 

정말이지, 저 위의 아들 독수리는 자기 먹이를 위해 비행(飛行)은 잘했으나, 저속한 행동의 비행(卑行) 독수리였습니다.

그 아들 독수리가 우리를“친구야”라고 부르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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