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큰 아들이 섬기는 교회(westgate church) 담임목사님을 몇차례 뵈었는데 그 때마다 사려 깊음과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아들이 6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홀로 가스 공사를 하는데 가스가 새어나와 그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지금까지 마음 아파하시면서 가끔 이야기 하신답니다.

“내 아들이 죽어 갈 때 아빠를 불렀을 텐데… 내가 아무 것도 못해 주었네요.”

 

작은 아들이 치아가 안 좋아서 제가 언젠가 한 마디 했습니다.

“왜 이렇게 치아 관리를 못했니?”

아들도 스스로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답을 찾았습니다.

“제가 이가 아파 병원 가야할 때, 아빠가 안계셨는데요.”

그리고 보니 작은 아들이 한창 자라날 청소년 때에 제가 돌봐준 것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미국에서 아빠를 힘들어 찾았을 때, 저는 언제나 한국에 있었으니까요.

 

육신의 아버지가 살아 계시든 아니든 아버지 부재(fatherlessness) 현상은 이 땅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진통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런 아버지가 계십니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9)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무섭고, 슬프고, 아파서“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 언제나“내가 여기 있다”라고 대답하시고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펼치십니다.

휴가지에서의 밤은 깊어 갑니다.

끌어 안고 온 짐도 많고, 가서 펼쳐야 할 일도 많아 뒤척이다 일어났지만 “내가 여기 있다”의 아버지가 계시기에 그 모든 짐 몽땅 아버지께 맡기고, 저는 이제 다시 잠자리에 들려고 합니다.

 

“으아아아앙~~~~~~”

팝콘을 맛있게 먹던 하늘이가 손에 있던 팝콘을 놓고 갑자기 우는 것입니다.

한 손가락을 입에 넣고 입천장을 다급히 만지는 것을 보니 팝콘 끝의 얇고 달콤한 노란 딱지(?)가 입천장에 붙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늘이 옆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저희 부부와 사돈 부부가 화들짝 놀랐고 며느리가 급히 물을 가져다주며 물을 마시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는 가져다준 물을 마시지 않고 손가락을 넣은 채 계속 울다가 “칵칵”하며 마른기침을 몇 차례 하였습니다.

 

몇 분 동안의 소동 끝에 마침내 작게 녹아버린 그 달콤한 노란 딱지를 입에서 끄집어내며 큰 손녀 하늘이가 울음 섞인 소리로 한 말이 이것입니다.

“more popcorn please.”

 

모두 놀랐습니다.

그토록 고생시킨 팝콘을 입에서 꺼내자마자 또 달라 하는 아이의 어이없음에....

모두 들었습니다.

“죄를 후회하고도 그 죄를 반복해서 짓는 모습 같아요.”라는 며느리의 말을....

모두 보았습니다.

작은 아이의 모습 속에서 죄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고도 또다시 그 죄를 반복해서 짓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죄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게 합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죄보다 더 크신 분을 의지하면 됩니다.

아시죠? 그 분.


지난 주간 어느 모임에서 만난 l 목사님.

본인이 어려서부터 배운 기타 솜씨가 대단하였답니다.

그 탁월한 솜씨에 수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답니다.

대천해수욕장에서 멋들어지게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 그 솜씨에 놀란 젊은이 수십 명이 금방 모여드는 일은 일도 아니었답니다.

 

군대 제대하면서 스스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기타 치며 인기 끌어 인생을 멋지게 놀아보려는 꿈을 막 펼치려던 어느 날, 탈곡기 앞에서 장난하다 왼손이 끌려들어가 손가락들이 너덜너덜해졌답니다.

재활치료를 통해 왼손 모습은 돌아왔지만 그 손가락으로 더는 기타 코드를 잡을 수 없었답니다.

 

군대 생활 중에 만난 군목 목사님이 어렵사리 모은 돈을 봉투에 넣어 주면서 이것으로 신학 공부를 시작하라고 했건만 그 돈도 스멀스멀 다른 곳에 다 썼답니다.

 

l 목사님의“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라는 꿈은 산산이 깨어졌지만 그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신학의 길, 목회의 길로 이끄시어 기타로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람을 이끌게 하시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꿈이 깨어지는 것은 결코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축복의 길임이 분명합니다.


카작스탄 사람들은 이름을 두 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식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어렸을 적부터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입니다.

알마티 퀸즈장로교회의 알렉산더라는 남자 청년의 애칭은 샤샤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알마티 퀸즈장로교회를 출석했던 샤샤는 사춘기 때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 샤샤가 교회로 돌아 왔습니다.

어떻게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귀찮아서(?) 왔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돌아오라는 연락이 너무 귀찮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샤샤 형제의 의미 있는 답변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굴잔 전도사님(현지 예배와 단기선교팀 통역자)이 거들며 이야기 합니다.

“돌아 왔을 때 교회에서 찬양대원으로 봉사하라고 사명을 주었지요.

사명을 받고 나서부터는 교회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몇 년을 찬양대원으로 섬기던 샤샤는 지금 찬양대 지휘자이며 경찬팀의 리더입니다.

지난주일 알마티 퀸즈장로교회 26주년 기념 예배 때 샤샤는 러시아권 찬양대의 찬양을 지휘하였습니다.

단기선교팀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깊은 영성에 잠긴 찬양대는 찬양의 절반을 정확한 한국말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영 기뻐 찬양합니다....”

 

돌아온 샤샤는 악보도 없이 능숙하게 한국말로 스스로 찬양도 하고 또 찬양대를 지휘하기도 하였습니다.

단기선교팀을 돕기 위해 샤샤는 자기 일을 며칠 내려놓고 기쁨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돌아온 샤샤는 더 이상 시시하게 살고 있지 않답니다.


지난 11일, 화요일 저녁은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교회를 넘어서까지 이민 교회 역사(歷史)의 한 페이지가 기록된 날입니다.

우리 교회 서리집사 안수집사 시무장로의 사역을 잘 감당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신학 공부를 마치고 만 70세가 되는 해에 선교 목사로서 안수를 받으신 전성호 목사님.

그리고 다민족 선교의 꿈을 안고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걷다가 우리 교단 안에서, 아마도 다른 한인 이민교회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중국인 최초로 안수를 받으신 첸위지 목사님.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펼치신 이 새로운 역사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방향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 불과한 뉴욕의 한인 이민자라는 정체성에서 하늘의 복을 우리가 사는 땅과 저 열방에까지 흘려보내야 하는 하늘 소명자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깊은 의미로 기록된 지난 화요일의 역사 페이지는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모두 하늘 소명자로 새로운 역사를 계속 써나가야 합니다.

우리 앞에 어떤 어려움이 있고, 우리 안에 어떤 아픔이 있다 하여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늘 소명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분명합니다.

하늘 소명자의 이야기를 기록할 붓은 기도의 눈물, 수고의 땀, 그리고 희생의 피가 담긴 벼루에 적셔야만 써갈 수 있다는 것이.


지난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040 찬양부흥 집회가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마다 독특한 순서들이 있었습니다.

목요일 밤에는 이번에 큰 주제인“the one”의 이름을 딴 “one 특별찬양”팀의“즐거운 모임”이라는 짧은 뮤지컬이 있었습니다.

 

전체 기획부터 섬세한 부분까지 잘 준비되었고, 무대에서 보여준 “one 특별찬양팀”의 뮤지컬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준 작품이었습니다.

저도 그 뮤지컬에 당당히(?) 한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의 배역은 골리앗이었습니다. 저의 생김과 골리앗의 이미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교우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무튼 골리앗의 역할을 맡아 몇 번의 연습과 실제 공연에 참여하면서 골리앗의 눈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골리앗의 눈으로 보니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겁쟁이였습니다.

골리앗의 큰 목소리에 벌벌 떠는 것이었습니다.

“으하하하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맞아?”

골리앗의 조롱에 아무도 나서지 못하였는데 저기 조그만 다윗만이 내 앞, 골리앗 앞으로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골리앗의 눈에 기독교인들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인다면 세상은 온통 골리앗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3040 찬양부흥 집회에 함께하면서 다윗 같은 기개(氣槪)가 우리 3040 세대에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골리앗의 눈으로 보니 수많은 다윗들이 일어나 있는 것이 보여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참 기쁘셨을 것입니다.


“받았으니 주어야 해요.”

자기 가족 중에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받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받았으니 주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말은 이렇게 계속되었습니다.

“내 가족이 다른 이의 장기를 받아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받았으니 나도 남에게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받았으니 주어야 해요.”

큰 은혜를 받고도 거기서 머문 채로 사는 사람이 하도 많은지라 당연한 것 같은 그분의 말이 크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뜨거웠던 여름은 가고 거리마다 9월의 바람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 가을의 문턱에서 누군가의 물음도 우리 마음에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당신은 그분의 생명을 받으셨는데 당신은 다른 이에게 무엇을 주시나요?”

 

오늘 오후에는 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 이 취임식 예배가 있습니다.

장영춘 목사님은 32년 동안 학장님으로 신학교를 통해 후학들에게 사랑과 가르침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저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목사님이 섬겼던 자리를 이어 섬기면서 제게 꼭 필요한 말과 결단은 "받았으니 주어야 해요.”인 것 같습니다.


하트하트오케스트라를 아십니까?

발달장애 청소년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입니다.

지난 주일 밤, 카네기 홀에서 있었던 2018 세계찬양대합창제에 초대받아 한국에서부터 먼 길을 와서“나 같은 죄인 살리신”등을 연주하며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모든 청소년들 한명 한명이 자기의 악기를 진지하게 연주 했습니다만, 그 중에 팀파니를 치는 청소년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팀파니는 몇 개의 큰 북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주 중에 몇 차례 아주 짧게 참여합니다.

 

여태껏 보아 온 팀파니 연주자들은 가만히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화려하게 연주에 합류한 후, 또 한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달랐습니다.

자기가 직접 연주하는 시간이 아닐 때에도 허공을 치며 연주에 동참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허공을 쳤을지 궁금했습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친구들과의 호흡을 헤아리고 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 친구에게는 허공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보이는 팀파니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기(空氣)에게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다그치는 것도 같습니다.

곰곰이 보면 주님에 대한 사랑을 한 순간도 쉴 수 없다는 몸짓 같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카네기 홀의 허공을 치던 그 친구의 모습이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 몇 나라가 있는 줄 아십니까?

많은 분이 아시는 대로 54개 국가입니다.

그중에 53개 국가 정상들이 지난 3일과 4일에 중국 베이징에 모여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 정상회의”를 가졌습니다.

한 나라가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 나라의 이름은 스와질랜드(swaziland)입니다.

아니, 에스와티니 왕국(kingdom of eswatini)입니다.

얼마 전에 그 나라 왕 음스와티 3세가 자기 마음대로 나라 이름(그 이름에 소문자를 대문자 앞에 쓰는 것 좀 보세요)을 바꾸었습니다.

 

그 나라는 인구가 백만 명을 조금 넘는 나라인데 아프리카 54개 국가 중 중국과 수교하지 않고, 대만과 수교하여 지내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큰 나라 중국을 거절하고 작은 나라 대만을 선택한 것, 왕 맘대로입니다.

 

이번에 신학교 가을학기 개강부흥회 강사님으로 오신 분이 그 나라 eswatini medical christian university의 김인환 총장님입니다.

총장님에 따르면 그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왕 마음대로라고 합니다.

대학교 졸업식이 오전 10시에 열린다고 광고하여 다 모였어도, 그 왕 맘대로 오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정오 12시든 오후 1시든 그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명색이 왕이니까, 그 왕 맘대로 해도 국민들이 별로 뭐라고 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세상 왕 맘대로는 모든 것이 불안불안 합니다.

다분히 자기감정대로 움직이면서 국민들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왕, 영원한 우리 왕, 하나님이 맘대로 하시는 것은 언제나 옳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보다 그가 늦으시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보기에 큰 것보다 다른 것을 선택하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것이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왕 맘대로”그것이 최고의 선택임이 분명합니다.


누가 지혜론 사람입니까? 할 것과 말 것을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용감한 사람입니까? 할 것과 말 것을 결단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할 것과 말 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할 것을 하면 귀(貴) 해집니다.

할 것을 말면 천(賤) 해집니다.

말 것을 말면 정(淨) 해집니다.

말 것을 하면 추(醜) 해집니다.

 

기뻐하세요. 기뻐하면 열려요. 축복의 통로가

기대하세요. 기대하면 커져요. 하늘의 소망이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몰라요. 낙심의 탄식을

 

비교하지 마세요. 비교하면 열려요. 서글픈 미래가

염려하지 마세요. 염려하면 커져요. 불안한 마음이

불평하지 마세요. 불평하면 몰라요. 한없는 은혜를

 

할 것과 말 것을 혼돈(混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것과 말 것에 갈등(葛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것과 말 것도 타협(妥協)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 11:53)

그들은 할 것과 말 것을 구분하지 못하여 잘못된 것을 결단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행했고 암흑의 역사를 빚었답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할 것과 말 것을 구분하고, 결단하고, 실천하여

자신의 행복과 빛의 역사를 만드는 그들은.


지난주, 멀리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이었습니다.

만난 지는 십 수년, 통화한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전화하는 즉시 우리는 그 오랜 시간이 서먹하지 않게 함께 시간여행을 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물론 과거의 이야기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아직 녹슬지 않은 저의 '아재 개그'를 간간히 섞어 이야기하니 친구는 스마트폰이 깨지듯 웃었습니다.

 

그 친구는 노숙자 사역을 합니다.

그 친구가 위로해 줄 사람은 많아도 그 친구를 위로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힘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 날 친구와 함께 터뜨린 웃음은 분명코 한 겨울에 핀 봄날의 기쁨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박인수 씨가 부른 이 노래를 들었습니다.

 

많지 않아도

그리고 자주 만날 수 없어도

나에게 친구가 있음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멀리 있어도 가만히 이름 불러볼 수 있는

친구가 나에게 있음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내 좋은 친구를 만날 때면

웃음마다 봄날 기쁨입니다

보고픈 친구를 생각할 때면 그리움은

잔잔한 행복입니다

 

 

바쁘셔도 잠시 옛 친구에게 전화해 보세요.

그와 함께 웃노라면 한 겨울인데 봄날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2019.01.27 00:00

[2019-1-27] 후츠파

다음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빌 게이츠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

윌리엄 로젠버그 (던킨 도너츠 창업자)

 

같은 학교 선후배라고요?

같이 부자 동네 산다고요?

아닙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혁신적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느냐하면 어렸을 적부터 질문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겐 후츠파 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후츠파(הפצוח)는 무례, 당돌, 철면피 따위를 뜻하는 낱말입니다.

이 단어는 용기, 진취, 도전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무례할 정도로 묻고 또 물으면서 전혀 새로운 관점들과 실험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형식파괴, 질문권리, 상상력과 섞임, 위험감수, 목표지향, 끈질김, 실패학습 이라는 7가지 정신이 후츠파에 있습니다.

 

우리에겐 침묵을 미덕으로 여기며 궁금한 것도 없고 따라서 질문도 없이 지나치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요?

침묵이 그 자리에선 예의가 있어 보이지만 앞이 캄캄합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질문을 던지는 후츠파가 당시에는 무례하고 당돌하지만 환한 미래를 여는 중요한 열쇠라고 확신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2019.01.06 00:00

[2019-1-6] 첫 단추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단추를 꿸 곳이 없고 옷 모양새는 아주 우스워집니다.

새해의 첫 단추가 이상하면 올해의 전체도, 그 마지막도 이상하게 됩니다.

당신에게 새해의 첫 단추는 무엇입니까?

건강? 재물? 학위? 결혼?

 

“단지 15분”이라는 어느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장래가 유망한 청년이 박사논문을 제출하여 놓고는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진찰 결과 그는 15분 후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죽기 10분이 남았을 때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가져왔는데 억만장자인 그의 삼촌이 죽었으므로 와서 재산을 상속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9분이 남았을 때에 도착한 것은 박사학위 논문 합격 통지서였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애인에게서 결혼을 승낙하는 편지도 배달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15분은 다 되어 죽게 되었답니다.

 

새해에 사람마다 건강, 재물, 학위, 결혼 등등이 필요하지만 이 땅의 것들이 새해의 첫 단추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성도들에게 그럴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첫 단추는“위엣 것”이 되어야 합니다.

 

위엣 것을 첫 단추로 삼으면 올해의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뒷 순위의 가치를 첫 단추로 삼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가“위엣 것”은 밀리고 밀려 끝내 꿸 자리도 없을지 모릅니다.

당신이 새해에 입을 옷이 5개 구멍밖에 없는 옷이라고 합시다.

“위엣 것”은 당신의 몇 번째 단추입니까?


많이 슬픈데도 아름다운 아픔이 있습니다.

가슴앓이입니다.

가슴앓이해 보셨지요?

사랑하는 자가 몸이 아플 때 가슴앓이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너무 그리울 때 가슴앓이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시름시름 가슴앓이할 때도 가슴이 시리고 아픕니다.

 

한국에서 운전면허 시험을 2년 넘게 보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면허시험장을 찾던 할머니에게 직원이 왜 그렇게 운전면허를 따고 싶어 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용달차를 몰며 배달하던 아들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못 쓰게 되었는데 운전을 배워 그 아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답변을 하셨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노(老) 어머니의 가슴앓이는 더 이상 가슴만 쓸어내리지 않고 운전면허를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갖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식은 것이 있습니다. 굳은 것이 있습니다.

아예 잃어버리고도 찾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가슴앓이입니다.

나에겐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없다는 듯이 가슴앓이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찾아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 사랑을 찾기까지 얼마나 가슴앓이하실까요.

이 가을에 펼쳐질 행복에의 초대를 예수님의 가슴앓이를 내 아픔으로 삼고 참여한다면 쉽게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가 불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많이 바쁘시지요?

그래도 질문해야 합니다. 가을에는 질문해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가을이 오면 이렇게 물어보겠다고 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이 가을, 우리는 지금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까?

행복에의 초대를 앞두고 우리에겐 이런 질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에?”

 

그 사람의 물리적 위치를 넘어 영적인 자리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 부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 배우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 자녀는, 내 형제는, 내 친구는, 내 이웃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확실히 천국 가는 길을 걷고 있는지, 지옥의 나락(奈落)인지.

아무리 봐도 전자(前者)가 아니라 후자(後者)라면

이 가을 펼쳐지는 행복에의 초대는 그를 위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아버지가 많이 기다리셨어요.

오시기까지 힘드신 일이 한둘 아니셨죠?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기고 아버지 집으로 오셨으니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며 우리의 길고 긴 아픈 이야기도 들어주시고 우리의 깊고 깊은 상처도 만져 주실 것입니다.

 

처음이어서 낯설고 오랜만이어서 어색해도 들여다만 보시고 지나가지 마세요.

여기가 아버지 집, 곧 당신의 집이랍니다.

 

가장 아픈 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고독(孤獨)이라는 병이 가장 아픈 것 같아요.

제겐 울 일이 적지 않은데 같이 울어줄 사람이 없고 제겐 웃을 일이 많은데 같이 웃어줄 사람이 없다면 못 견딜 것 같아요.

 

곧 윙윙 찬바람이 불고 펑펑 함박눈이 쏟아질 추운 겨울이 올 텐데,

또다시 그 겨울을 외롭게 지내지 마세요.

“겨울 속의 고독!”생각만 해도 너무 시리고 슬프지 않나요.

“아버지 집에서 함께!”생각만 해도 너무 따뜻하고 기쁘지 않나요.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모두의 아버지 집으로, 정말 잘 오셨습니다.


벌써 10월입니다.

가을의 깊은 향취(香臭)가 반가우면서도 뭔가 초조한 시간입니다.

올해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니 화들짝 놀랄 시간인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지”하면서도 올해도 연초의 결심을 적당히 포기하고 싶기도 합니다.

스스로 궁금합니다.“결심”은 강한데“뒷심”은 왜 이리 약(弱)한 지?

 

약한“뒷심”탓을 하며 남은 두어 달을 보내려 하는데 다가온 글자가 있었습니다.

again!

“다시”라는 글자가 선명히 제게 다가온 것입니다.

얼마 전“다시 복음 앞에”라는 복음 성가를 들었습니다.

 

많은 이들 말하고 많은 이들 노래는 하지만 정작 가진 않는 길

두려운 생각보다 많이 힘들고 험한 길 보단 그저 말로만 가려기에

점점 멀어져만 가네 내게 생명 주었던 그 길

점점 이용하려 하네 내게 사랑 주었던 그 길

다시 복음 앞에 내 영혼 서네 주님 만난 그때

나 다시 돌아가 주님께 예배드리며

다시 십자가의 길 걸으리

 

다시, 다시, 다시로 이어지는 단어가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어려운 가운데 다시 일어 난 많은 교우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10월 마지막 주일 있을 “행복에의 초대”주제를“again”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도 다시 일어나 연초(年初)의 결심을 이루고, 장결자들도 다시 일어나 주님 품 안으로 돌아오고, 불신자들이 다시 일어나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렇습니다.

“again”이라는 단어는 모두에게“희망”이라고 읽혀집니다.


연말이 점점 가까워오며 바쁜 일들은 더 몰려오지만 문득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한 해를 어떤 걸음을 걸었는가....

모든 걸음에는 발자국이 남는데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가....

남긴 발자국을 뒤돌아 볼 자신이 없었지만 살짝 돌아보았습니다.

 

한 동안 머뭇거린 발자국, 샛길로 갔다 온 발자국, 거기서 쓰러졌던 것이 분명한 작은 발자국을 덮은 큰 몸 자국, 그래도 다시 일어나 걷고 또 걸어온 발자국.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조선 시대의 이양연 문인이 지은 시(詩)입니다.

짧은 시가 나의 발자국은 나의 것만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되돌아가 그 발자국을 지우고 싶지만, 그리고 다시 반듯하게 걸은 발자국을 남기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다시 걸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이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발자국, 뒷사람이 따라오다가 실망하지 않을 나의 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일 모레가 11월 19일, 오는 목요일이 21일이네요.

11월 19일 케이프코트만(灣) 경유(經由), 11월 21일 프로린스타운에 입항(入港).

1602년 9월 16일 영국 잉글랜드 항구도시 프리머스에서 102명의 청교도를 태우고 출발했던 배가 미국 땅에 다다르던 날자와 장소 입니다.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 fathers)이라고 일컫는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 앞에는 바다의 파도부터 시작하여 온갖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는 이듬해 봄에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그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결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역경 앞에 그들이 외쳤던 말은“힘들다, 죽겠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였습니다.

감사는 어떤 역경도 이깁니다.

역경 중의 감사가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습니다.

탱큐, pilgrim fathers!


10가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두 아들 장례식에서 10가지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전도하다 순교당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7가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신앙의 자유를 찾았던 청교도들이 혹독한 어려움 가운데 7가지 감사를 드렸습니다.

 

80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였지만 그런 배라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합니다.

폭풍으로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

고통스러운 삼 개월 항해 중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었음을 감사합니다.

 

그들은 극심한 고통의 자리에서도 감사에 감사,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넘어서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았기에 그토록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들이었다면 몇 가지를 감사할 수 있을지 스스로 궁금합니다.


Board Pagination Prev 1 ... 6 7 8 9 10 11 12 13 14 15 ... 25 Next
/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