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웃음이면‘수상한 그녀’이고, 눈물이면‘친정엄마’입니다.

”올해 여선교회연합수련회에서 상영할 영화를 추천하시던 분들의 마지막 제안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어머니 영화, 정말 눈물 많이 나옵니까?”

 

눈물을 다짐받고(?) 드디어 지난 화요일 점심식사 후 팝콘을 하나씩 들고 영화 관람에 들어갔습니다.

그건 영화인데도, 나는 남자인데도 눈물이 막 나려고 할 때 실제 상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던 분 중에 두 분이 거의 뛰어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전도사님 한 분이 뒤좇아 가셨습니다.

무슨 일일까 잠시 생각했지만, 다시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데 전도사님이 돌아와 제게 밖으로 잠시 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해주고 위로해줄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뒤로하고 나가 보았더니 영화에서처럼 얼마 전 병을 앓던 자녀를 먼저 보낸 어머니가 함께 나갔던 친구 옆에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우시고, 또 저렇게 눈물을 자아내게 하십니까?

 

저 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어머니”라는 것이.

아브라함 링컨의 전기(傳記)작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링컨에게 위대한 사람이 되는 조건을 한 가지도 주지 않으셨다.

다만 그에게 빈곤과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를 주셨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여, 위대한 어머니를 가지게 하라.

그리하면 위대한 자녀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위대한 어머니.

그것은 한 국가가 소유한 보물 가운데 최대의 보배이다.”

 

이 4월에, 저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땅에 묻힐 때 여섯 살 반, 철모르던 제가 개나리와 진달래를 손에 들고 뛰어다녔다고 훗날 어른들이 들려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와 저도 다른 친구들처럼“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집에는 어머니도 그리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경적인 어머니를 소망하며 오는 4월 25일 월요일부터 27일 수요일까지“어머니 학교” 가 우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그 날들 중에 하나님은 영화 때문이 아니라 실제 때문에 우는 어머니들을 분명히 품어 주실 것입니다.

이름도 잃어버리고, 밥도 대충 먹고, 남편 때문에 애들 때문에 한없이 속도 끓이고, 친정 엄마 친정 식구 보고 싶어 남몰래 흐느껴 우는.

어머니, 당신은 누구시길래...


예수님을 따라 함께 걸어온 사순절, 가슴 벅차고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습니다.

혼자 걷기도 힘든 여정에도 여러 분야에서 수고한 봉사자들, 아이들을 깨워 함께 나오던 부모들, 다정한 말로, 물질로, 빵으로 서로 격려하며 나누던 교우들, 늘 수고를 아끼지 않던 교직원들을 생각하며 깊은 감동에 젖어 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이끌어 주신 따스한 성령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이제는 긴장을 푸시고 다음에 소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맞춰 보세요.

 

(1) 그의 영문 이름 이니셜은 j.c

(2) 그의 평소에 하는 일은 목수

(3)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 나이는 33세

(4)“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는 말을 한 사람

 

많은 분들은 (1)번부터 (3)번까지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이심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4)번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아리송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은 안 하신 것 같은데... 맞습니다.

그런 말을 예수님이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사시긴 하셨어도...

 

j.c

직접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영화“passion of christ”에서 예수님 역을 맡은 제임스 커비즐(james carvizel)입니다.

그가 그 영화를 촬영할 때 나이가 33세였고 평소에는 목수의 일도 하였답니다.

그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배우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게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과 천국을 증언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려는 사람은 결코 일주일에 한 번만 연습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천국 가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나서야 되겠냐고 일갈(一喝)도 하였습니다.

 

그의 인터뷰 가운데“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얻은 자유.

그 자유 속에 거룩한 사명이 담겨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자유를 그렇게 사용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선물로 받은 자유를 그렇게 사용한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오호 자유!


내일부터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고난주간 직전, 돌연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

주님의 질문 앞에 5년의 옥고(獄苦)를 묵묵히 견디시다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글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날 위해서 십자가 지고 그 고통 다 당하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 체하겠습니까?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른 것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이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리이까...

 

주기철 목사님은 훗날“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 고 물으실 주님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셨습니다.

목사님은 그 잔을 외면하시거나 쏟아붓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그 잔을 마시고 주님 앞으로 가셨기에 벌써 주님 앞에서 잘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도“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답을 준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을까요?

 

“주님의 쓴잔을 맛보지 않으면 주님의 쓴잔을 모르리 주님의 괴로움을 당하지 않으면 주님의 고통을 모르리 주님의 십자가를 져보지 않으면 주님의 죽으심을 모르리…”

 

우리에게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즐거움이 많습니다.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좋으나 훗날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의 잔에 대한 주님의 질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날에“내 종아, 내가 너에게 준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실 터인데...

 

고난주간이 되니 더 생각이 많아집니다.


march는 3월의 이름입니다.

march는 “행진하다”라는 뜻입니다.

march는 그냥 행진이 아니라 승리자들을 위한 화려한 행진입니다.

 

문득, 애굽의 포로가 된 에디오피아의 공주 아이다와 애굽의 청년장교 라다메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 “아이다”에서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유명한 “개선 행진곡(grand march)”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애굽의 승리는 역사 속에 사라졌기에 화려한 선율의 오페라 “개선 행진곡”에는 쓰라린 슬픔과 차가운 공허가 얹혀 있음이 들립니다.

 

우리는 지금 march 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우리 예수님과 함께 승리자의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진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꿰뚫으면서 계속 위풍 당당히 걸어갈 것입니다.

우리의 행진이 사순절을 지나 부활절 오후에 이르를 때 준비된 개선 행진곡이 승리자들을 위해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 개선 행진곡의 이름은 임마누엘 찬양대를 중심으로 준비하는 “증인들의 고백”입니다.

그 시작은 슬픔 같으나 환희로 가득 찬 노래.

사순절 승리자들의 개선을 기다리는 그 날 그 노래를 향해 우리는 march 합니다.

그 후에도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에 장애를 두려워말라

성령이 너를 인도하시리니 왜 지체를 하고 있느냐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 나가세 천성문만 바라고 나가세

모든 천사 너희를 영접하러 문 앞에 기다려 서있네

 

그 곳에는 이 땅 승리자들을 기다리는 천사들이 트럼펫을 들고 있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march 합니다. 천성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생명의 호흡을 보내소서 메마른 영혼 마른뼈에게

죽어진 우리를 살리소서 권능의 말씀으로

우릴 회복하소서 다시 한 번

 

회복의 말씀을 보내소서 흩어진 영혼 마른뼈에게

하늘의 군대를 삼으소서 주님의 영광 위해

우릴 사용하소서 다시 한 번

 

성령님 마른 뼈들을 살려주소서

성령님 마른 뼈들을 살려주소서

 

사랑하는 교우들과 함께 성령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걸어온 사순절이 어느 덧 3주간이 흘러, 오늘 그 반환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 회복의 일어남을 보게 됩니다.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도 보입니다.

 

반환점 건너에 사순절 끝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순절의 남아 있는 3주간은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줄 것입니다.

교회 안팎에 쓰러져 있던 모든 사람, 모든 가족, 모든 부서가 다시 일어나 절망을 모르고 패배를 모르는 하늘 군대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남은 3주간 동안 또 부르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따스한 성령님 마른 뼈들을 살려주소서!

따스한 성령님 마른 뼈들을 살려주소서!

 

이제 무엇인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잘 들어 보십시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한 나라가 세워지고 발전하기까지는 많은 자들의 눈물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각 나라 정부는 그 일에 헌신했던 자들을 잊지 않고 그 이름들을 찾아 기리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도 미국을 위해 세계 각처에서 싸우다 죽어간 자들의 유해를 찾으러 가면서 이렇게 다짐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조국은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저는 파운데이션(foundation)이란 단어를 영어 시간에 배우지 않았고 누님들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파운데이션이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위한 기초 화장품인 것을 보면서 자랐기에 그 단어의 뜻이 “기초”라는 것을 일찍이 알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초, 파운데이션은 아름다움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견고함에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필라(pillar)라는 단어는 “기둥”이라는 뜻입니다.

기둥은 파운데이션 위에서 그 견고함을 유지하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마음껏 만들어 가는 데 쓰이는 아주 요긴한 것입니다.

 

설립 42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에는 파운데이션 같은 분들, 필라와 같은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걸으면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파운데이션의 희생과 필라의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하시어 오늘의 퀸즈장로교회를 일구어 오신 분들이 많이 계신 것입니다.

42년 동안의 파운데이션과 필라들이여!

퀸즈장로교회는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또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또 다른 필라들이 우리 교회에 세워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모든 임직자들이 견고한 기둥들이 되어 지난 42주년의 역사를 잘 이어가고 새로운 미래를 그 기둥 위에 펼쳐 가시길 기대합니다.

새로운 임직자들이 다음과 같은 찬양을 목 놓아 부르면서 함께  나아간다면 훗날의 교회도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2016년에 세워졌던 필라(기둥) 들이여!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그 자리들을 견고히 지키셨나요.

우리는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함께 목 놓아 부를 찬양은요...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내 생명 다하기까지 늘 봉사합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byron)이 케임브리지대학 재학시절 “종교학”기말고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논하라”는 문제였습니다.

시험 시간 내내 아무것도 쓰지 않던 바이런은 답안지를 내야 할 마지막 순간에 다음과 같은 답을 적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더라(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가나 혼인 잔치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첫 번째 기적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입니다.

그 잔치에는 흥겨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변화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신 그 잔치에서 예수님이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셨을 때 물이 변화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 변화를 바이런은“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더라”라고 멋지게 표현하였습니다.

 

다음 주일에 우리 교회에는 큰 잔치가 있습니다.

교회설립 42주년도 맞이하고, 그동안 수고하신 두 분 장로님의 아름다운 은퇴식도 있고, 장로 집사 권사 임직식도 있습니다.

외부 손님도 적잖이 오실 가슴 설레게 기다려지는 잔치입니다.

이 잔치를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꼭 있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변화”입니다.

 

2,000여 년 전 가나에서 예수님을 모신 잔치에 있었던 변화처럼 우리 잔치에도 변화가 있길 소원합니다.

그 잔치에 우리만 있으면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계시지 않으면 우리만의 번잡함만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의 주인은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주인만 되신다면 모든 임직자는 물론 우리 모두도 그 주인을 만나 얼굴이 붉어지는 변화를 체험할 것입니다.

잔치를 통해 변화된 사람들이 그 임직식 이후 또 큰 변화를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일으킬 것입니다.

 

바이런 시인이여! 하늘에서 다음 주일에 있을 우리 잔치를 눈여겨보시고 다음 질문에 답을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2016년 2월 28일, 퀸장의 잔치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적을 논하라”


세상은 반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절대 기준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일례로 동성애 허용을 보면 인권이나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기 소견 좋을 대로 살 뿐입니다.

 

세상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핵무기의 위협이나 개성공단 폐쇄 같은 극한 대립이 이어집니다.

여기저기서 살상과 자살과 파괴가 일상화 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암울한 시대의 적합한 지도자라고 나서는 자들은 많으나 그들과 희망의 날개를 펴기에는 현실 앞에 절망의 나락이 더 깊어 보입니다.

 

세상은 포기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삼포(三抛) 시대라고 합니다. 청년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하는 대로 먹고 산 것은 옛일입니다.

“아메리카 드림”은 커녕 생존의 위협 앞에 떨고 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아메리카 드림”길을 찾기보다 직장생활 나아가 이민생활 자체를 포기하려는 고민도 작지 않습니다.

 

반항과 절망과 포기는 마귀의 영입니다.

마귀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분탕(焚蕩)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포기시키지만 자기의 일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영적 비상사태입니다.

마귀의 궤계를 섬멸시킬 강력한 무기를 꺼낼 때입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은 위대한 행동이 필요할 때입니다.

가장 위대한 행동은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천 년 동안 어려운 상황에서 사용했던 무기인데 놀랍게도 기도는 그 시대마다 가장 강력한 신병기(新兵器)였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대로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세상을 쑥대밭 만들고 있는 “반항과 절망과 포기”는 마귀와 함께 꺾일 것입니다.

기도의 함성이 곧 승리의 외침이기에,

사순절!

온 교회에 영적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기도의 총동원령을 내립니다


사람들은 오늘을 슈퍼 선데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미식축구 결승전인 “슈퍼볼” 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올해로 50번째 맞는 슈퍼볼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덴버 브롱코스와 캐롤라이나 펜서스 팀이 우승을 다투게 될 터인데 올해 입장권 평균 가격이 거의 5천 불에 이르고 경기가 가장 잘 보이는 스위트룸은 50만 달러라고 합니다.

광고료는 30초당 500만 달러이고 올해 예상되는 tv 시청자 수는 1억1천5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 날 머물렀던 산호세에서 오늘 슈퍼볼이 열립니다.

슈퍼볼을 환영하는 대형문구들이 산호세 공항을 비롯해 시내 곳곳에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호세로 몰려올 때 저는 과감하게(?) 산호세를 떠나왔습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 밤 11시 넘어서 다소 연착된 비행기를 타려고 케이트로 가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는데 그중 누군가“덴버”하고 거듭 외치자 나머지 사람들이“예~~예~~”로 거듭 화답하며 자기들의 도시 덴버가 50회 슈퍼볼에서 승리하기를 염원했습니다.

오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은 공 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고 치킨을 뜯으며 환호하고 탄식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순절 새벽 서원 기도회는 올해로 29회를 맞이합니다.

비록 슈퍼볼보다 21 년 뒤진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위력은 슈퍼볼이 결코 견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작은 공이 아니라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la 나 다른 도시가 아닙니다. 어둠의 세력들입니다.

사순절에 참여하면서 누가 이길까 마음 졸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당해낼 세력은 이 땅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교회는 기도 없는 1억 명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축제가 그렇듯이 50회 슈퍼볼의 열기도 오늘을 정점으로 타올랐다가 몇 날도 못되어 사그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40일 동안 타오를 29회 사순절 기도는 사라지지 않고 그 후에도 응답에 응답으로, 변화에 변화로, 축복에 축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사순절은 하늘의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슈퍼볼, 너 오늘 50회라며?

우리 올해 사순절은 29회야!

오늘은 잔뜩 드시겠네?

우린 커피와 베이글을 한 번만 먹는 게 아냐.”


저는 지금 산호세의 한 숙소에 아내와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

“교회를 여러 날 떠나 계시려면 큰 아드님이 계신 곳이 좋겠습니다”라는 조언도 있으셨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여 큰아들이 가까이 있는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당회의 배려, 교직원들의 협조, 성도들의 기도, 그리고 주치의의 권고 가운데 쉼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급작스럽게 이런 시간을 가지고자 하여 스케쥴을 조정하였는데 교회 안팎의 일정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브레이크 없는 기차와 같은 사역이 멋진 줄 알았습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저의 “약한 부분”을 애써 외면하고 너무“강한 척”한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아무런 스케쥴 없이 성경과 책을 읽고 기도하고 사색하고 반성하고 잠자고 적당히 운동하고 적절히 식사하며 그동안 익숙지 않았던 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스케줄은 없지만 분명한 목표는 있습니다.

“회복!”

 

저는 지금“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 6:31)는 예수님 말씀 가운데는“잠깐”쉬고 몸도 마음도 새롭게 하여 앞으로 힘 있게 사역하라시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하며 지금의 쉼을 단순한 저 자신의“회복”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앞날”을 위한 시간으로도 보내고 싶습니다.

 

교우 여러분. 기도해 주시고 계시지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저를 위해.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지난 목요일 노방 전도에 앞서 어느 환우를 심방하기 위해 한 건물의 엘리베이터에 교역자들이 올라타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잽싼(?) 저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공간이지만 함께 했던 교역자들이 나름대로 몸을 축소(?)시켜 드디어 다 탈 수 있었고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올라가지 않았고 문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몰랐습니다.

먼저 한 일은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의 숫자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교역자와 아내까지 열넷이었습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몇 명이 탈 수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몇 명인지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전체 2000파운드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열넷이 합하면 2000파운드가 된다 안 된다는 주장이 엇갈린 가운데 누군가 911에 연락하자고 했습니다.

번거로운 일이라고 제가 말렸습니다.

 

밖에 있던 사람들과 큰 소리로 대화하는 가운데 5분 있으면, 또 5분 있으면 오신다던 건물 supervisor는 계속 오시지 않고... 시간은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껴입었던 외투를 벗어야 할 정도로 땀은 나고...

공기가 희박해질지 모르니 숨을 조금씩 쉬라고도 하고...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불렀던 마지막 찬송이 무엇이었는지 묻는 자도 있고...

 

마침내 911을 부르니 쏜 살같이 달려와서 우리 열넷을 구해주었습니다.

몸을 추스려 올라가니 누워 있어야 할 환우가 우리를 걱정하며 일어나 맞아 주었습니다.

예배 후, 늦었지만 둘둘 셋씩 노방전도 길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자성(自省)했습니다.

건물 안에 갇힌 사람을 구조하는데 911이면 충분한데 처음에 왜 내가 말렸을까.

 

그렇습니다.

죄에 갇힌 사람을 구조하는데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열넷만이 아니라 십사만사천 명도, 그리고 무수한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의 큰 무리도.


히브리어“카바나”는“집중”다르게 풀어 쓰면“내면의 참여”란 뜻입니다.

사실“집중”이나“내면의 참여”라는 말로는“카바나”의 진짜 무게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카바나는“집중”을 넘어“집중”의 대상을 향한“심장의 방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카바나는 쉽지 않지만 그 열매는 아주 풍성합니다.

카바나에는 평범한 것을 탁월한 것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예술가가 자기의 예술을 연마(硏磨)할 때나 표현 할 때 카바나가 있다면 틀림없이 격(格)이 다른 예술가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카바나입니다.

예배에 카바나가 있다면 예배는 진동할 것입니다.

기도에 카바나가 있다면 기도는 하늘에 이르를 것입니다.

만물을 카바나로 본다면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업이나 공부에도 카바나가 있다면 사뭇 다른 결과를 자아낼 것입니다.

 

카바나 life!

올해만이 아니라 평생의 life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유사품(類似品)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카니발 life!

단어는 비슷하지만 내용은 정반대랍니다.

먹고 마시고 취하고 춤추자는 육(肉)적인 카니발과 건강한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영(靈)적인 카바나를 결코 혼돈하지 마시기를!


새해를 출발하고 벌써 열흘이 되었습니다.

잘 출발하셨는지요? 그리스도인의 출발은 “자기부인(自己否認)”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내가 언제 어디서든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나자신죽기”로 한 해를 시작한다면 결코 손해 보는 한 해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한 해가 될 것입니다.

 

“나자신죽기”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그것을 펼쳐보면 그리스도를 닮아갈 내용들이 나옵니다.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나자신죽기”를 다음과 같이 펼쳐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을

자람을

신실을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생애, 곧 그의 겸손하게 태어나심, 균형 있게 자라나심, 변치 않으시는 신실하심,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죽으심을 잘 기억하며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입니다. 저는 지난 3년간 송구영신 예배 때마다 말씀 내용을 한 구절로 정리하곤 했습니다.

다음은 그 한 구절과 그 말씀 내용들입니다. 다시 새기고 꼭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지은평(2014)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고 평강 주신다.

기찬믿음(2015)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찬송으로 하루를 지내며 믿음으로 하루를 마친다.

나자신죽기(2016)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그의 나심을, 자람을, 신실을, 죽음을 기억하라.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happy new year!”

한국에서는 새해 첫날을“설날”이라고 합니다.

“설”의 뜻은“낯설다”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제 낯 설은 날을 시작으로 2016년 새해를 걷고 있습니다.

이 낯 설은 새해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依支)입니다.

의지(依支)는 무엇인가에 기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낯선 새해에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매일 지팡이를 의지해야 하듯이 새해의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우리가 날마다 의지해야 할 분이 있습니다.

누구를 의지하며 새해를 걸어갈까요?

“....의지하세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찬송가 536장의 후렴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주님을 의지해야만 이 낯선 새해를 살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도 의지(意志)입니다.

의지(意志)는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에게 의지가 없다는 것은 그에게 이룰 목표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높은 목표가 없는 사람에게는 거기에 걸맞는 꾸준한 행동도 없습니다.

성경을 통독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 어찌 꾸준히 매일 성경을 펴겠습니까?

체중을 조절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 어찌 꾸준히 매일 30분씩 운동하겠습니까?

그 자신에게 그 어떤 의지도 없는데 누가 도운들 무슨 선한 열매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라.

그리고 자신의 의지(意志)를 가지라.

이 두“의지”가 있는 사람의 낯선 새해는 실패할 리가 없습니다.

신년벽두(新年劈頭)부터 의지(依支)와 의지(意志)로 걸어가면 반드시 남다른 2016년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12월 27일, 마지막 주일입니다.

서둘러 한해를 마감하고 싶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직 올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28일, 29일, 30일, 31일. 이렇게 4일이나 남았습니다.

4일을 자투리 시간처럼 여기고 덧없이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사실, 올해의 진정한 승부수(勝負手)는 남은 4일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남은 올해의 4일은 충분한 시간입니다.

 

4일은 회개(悔改)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미국은 샤워문화이지만 한국은 목욕문화입니다.

샤워는 흐르는 물에 가볍게 몸을 닦는 것이지만 목욕은 몸을 탕 속에 담갔다가 묵은 때를 벗겨내는 일입니다.

신년이 되기 직전 동네 목욕탕은 북새통을 이루곤 했습니다.

묵은 때를 벗기고 새해를 맞겠다는 것이지요.

새해를 묵은 죄와 더불어 맞이하긴 좀 그렇지 않습니까?

4일이 남았습니다.

회개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4일은 용서(容恕)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한 해를 돌이켜 보니 나도 누군가에게 많은 잘못을 했고 누군가도 나를 많이 힘들게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많이 이해가 됩니다.

나라도 그렇게 했겠다고 이해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이제 이해되건 이해가 안되건 남은 4일 동안에 용서라는 선물을 만들어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에게 보낸다면 훗날, 나의 2015년도 마지막 4일은 아름다웠다고 분명히 회고할 것입니다.

 

4일은 역전(逆轉)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지난 11월 19일 일본 도쿄돔에서 한국 대표팀과 일본 대표팀이 프리미어12 야구 결승 진출을 앞두고 맞붙게 되었습니다.

한국 대표팀은 8회까지 0-3으로 지고 있었습니다.

남은 것은 단 9회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경기는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 대표선수들은 포기하지 않고 9회 초에 대거 4점을 내어 경기를 4-3으로 역전시켰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9회 초, 단 하나 남은 찬스를 놓치지 않아 경기를 뒤집었듯이 남은 4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내 인생도 역전됩니다.

 

아직 4일이나 남았습니다.


예술(藝術)은“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갖고 있습니다.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가진 예술은 막강한 힘이 있어 많은 사람들을 각 예술이 표현하는 아름다움의 대상 앞으로 이끕니다.

 

자신의 예술이 b급임을 자처하는 가수 싸이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예술관을 가지고“강남 스타일,”“젠틀맨”을 비롯 최근 발표된“나팔바지,”“대디” 등의 뮤직 비디오를 통해 수억, 수십억의 사람들을 흔들고 노는 곳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헨델은“메시야”라는 작품을 통해 예수님을 너무 아름답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로 예수님에게 이끌어 마침내 예수님을 “king of kings” 로 찬송하게 하였습니다.

헨델의 “메시야”는 혼탁한 세상 속에 빛나는 탁월한 예술입니다.

 

사람은 예술과 분리되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통속적 예술에 취하여 삶이 점차 저급해지거나 참된 예술을 만나 삶을 계속 고양(高揚)시키게 됩니다.

오늘 오후에는 우리 찬양대가 지난 9월부터 준비한 메시아 연주가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몹시 힘들었을 찬양대원들이 맑은 영을 가지고 주일 저녁마다 모여 4개월을 연습하였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주일 밤 본당에는 그들만 있었습니다.

오늘은 아니지요?

진짜 예술을 만나는 자리, 그 예술이 하나님께는 예배가 되고 우리에게는 감동이 될 자리에서 못 뵙는 성도들은 없겠지요?

여러분을 믿쉽니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허스키한 목소리의 서유석씨가 부르던 노랫말입니다.

아무도 가는 세월을 잡지 못하여 어느 덧 우리 모두는 2015년 12월 중순을 같이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힘써 일했는지 올해를 자평(自評)한다면 어떤 점수를 줄 수 있겠습니까?

 

“일 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12월 13일이 기어코 왔듯이 일하고 싶어도 일 할 수 없는 인생의 밤도 머잖아 올 것입니다.

요나는 주님의 일을 피하다가 거친 풍랑을 맞기도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흔들림 없이는 아름다운 꽃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흔들어 댄다고 피어오르는 꽃이기를 거부하고 비열하게 땅에 묻혀 살지 마십시오.

 

오늘은 각 선교회 총회의 날입니다.

지난 회기에 수고하신 모든 회장단과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 왕의 주실 상급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오늘“내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소명의 외침이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19개 선교회 총회 장소에서 아름답게 울려 퍼지길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교회 어느 부서에 지도자로 쓰임 받는다는 것은 내 생애 큰 축복입니다.

축복을 버리고 추구하는 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일을 결코 다시 할 수 없는 밤이 정말 속히 옵니다.


“내 힘들다”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길은 힘듭니다.

더구나 우리 모두는 이 거친 미국 땅에서 이민자요 나그네들 아닙니까?

턱까지 차올랐다 쏟아지는 탄식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한 번 읽어보세요.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으면 “다들 힘내”입니다.

올해도 온갖 힘겨움을 넘어 12월에 이르셨는데 이제는 2015년도의 마지막 고지(高地)가 뚜렷이 보이지 않습니까.

“다들 힘내”십시오.

 

추운 겨울, 나 자신에 대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때이기도 하지만 둘러보시면 우리 교회 안에도 나보다 조금 더 힘든 길을 걷는 자들이 있습니다.

늦게 이민 생활에 뛰어들었는데 길을 잘 못 찾거나, 가까운 사람 그 누구를 잃었거나, 건강이 악화되었거나, 홀로 되어 외롭거나, 오랜 기도 제목이 올해도 응답 안 되는 것 같아 상심하거나, 재정이 파탄되었거나, 가정에 우환(憂患)이 있거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나보다 조금 더 힘든 길을 걷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의 위로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상투적이지 않은 따뜻한 말 한마디, 정감 어린 카드나 카톡, 가벼운 허그(hug) 속에 담긴 묵직한 격려, 커피 한잔이나 짜장면 한 그릇으로도 우리는 훌륭한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프랜시스의 기도처럼 내가 먼저 위로 받기보다는 나보다 조금 더 힘든 길을 걷는 자들에게 위로자가 되어 준다면 참 뜻 깊은 성탄절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사랑의 눈을 열어 잘 둘러보세요.

어디선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남몰래 닦고 있는 사람이 있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내 위로가 꼭 필요한 그 사람이 거기서 많이 아파하고 있답니다.

곧 다가갑시다.

더 미루지 말고요.


한국에“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여 “사람은 죽어서 이야기를 남긴다”고 해도 무방(無妨)할 것 같습니다.

 

1927년 태어나 지난 22일 서거하신 김영삼 전(前) 대통령, 그는 많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중학교 때 대통령의 꿈을 갖고 어떻게 그 과정을 걸었는지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서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 마지막까지 어떻게 사셨는지, 사람마다 해석은 다르지만 그의 이야기가 다시 회자(膾炙) 되고 있습니다.

서거하시기 얼마 전 가족과 모였을 때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를 부르자고 하셨다는 이야기도 남기셨습니다.

 

前 대통령의 서거에 다소 묻히긴 했으나 지난 25일이 탄생 100년째 날이라는 고(故) 정주영 현대회장, 그도 숱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지금도 리더십의 교범(敎範)이 될 만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권사 며느리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생애 끝자락에 세례를 받았고,“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복음송을 즐겨 불렀고,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물이나 권력이 아니라“믿음, 오직 믿음”이라고 강조한 이야기도 남기셨답니다.

 

몇몇 사람만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야기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남기는 사람일까요?

하나님과 그의 영광만을 생각한 사람,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환히 보면서 살았던 사람, 언제나 희망을 심고 어디서나 소망을 노래한 사람, 부르심을 향해 주저 없이 달렸던 사람, 아니면 매사에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닌 사람, 헌신의 시간에 핑계가 많았던 사람...

 

감사하게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우리들을 위해, 더 미뤄서는 안 될 적은 기회가 아직은 남아 있답니다.


언제 미국에 오셨습니까?

그 날 누가, 그리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저는 1994년 5월 21일 토요일에 꿈에 그리던 미국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날 케네디 공항에서 따듯이 맞아 주시던 분들은 미국에 앞서 와 사시던 가족들과 몇몇 교역자님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그 날 처음 참석한 행사는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교회 결혼식이었습니다.

 

미국의 첫 이민자라 할 수 있는 영국 청교도 102명이 신앙의 박해와 바다의 위험을 거쳐 미국 땅에 처음 도착한 것은 1620년 11월 9일 메사추세츠 주 케이프 코드 였습니다.

그곳 상황이 열악하여 그들은 그곳 건너편의 플리머스에 정식으로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추위와 질병, 배고픔과 인디언들이었습니다.

몇 개월 안에 절반의 사람이 죽고 말았습니다.

청교도들은 아파도 하고 울기도 하였지만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영국에서의 위협과 바다에서의 위험에서도 그러했듯이 미국에서의 위기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견고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1621년 봄, 사랑하는 가족들을 눈물로 묻은 땅 옆에 소망을 품은 씨앗들을 뿌렸습니다.

마침내 그 해 가을, 감격적인 첫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 미국의 첫 이민자들이 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첫 추수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날, 청교도들은 처음으로 거둔 곡식과 과일에 칠면조를 잡아 식탁을 꾸미고 인디언들을 초청해 함께 감사의 만찬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11월 마지막 목요일이 미국의 추수감사절로 지켜지다가 1941년에 11월 넷째 목요일로 조금 조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오는 우리 교회의 11월 넷째 목요일의 추수감사예배와 추수감사만찬은 청교도들의 첫 추수감사절 내용과 형식을 많이 닮고 있습니다.

11월 넷째 목요일의 추수감사절, 누군가는 꼭 지켜가야 할 신앙적 전통이며 성경적 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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