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가장 멀리 어디까지 가보셨습니까?

다음 빈칸에 여러분이 가보신 가장 먼 곳을 떠올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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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게 먼 길이 있어요.

저 남미도 아니에요, 유럽도 아니고 아프리카도 아니지요.

머리에서 마음, 그리고 마음에서 입술까지가 참 멉니다.

 

 

하나님에 대한 머리의 생각들이 마음으로 내려와 하나님 사랑이 되고, 마음의 하나님 사랑이 입술의 하나님 찬양이 되기가 왜 이렇게 멀고 먼지.

 

오는 수요일, 그리고 목요일 찬양 집회가 있는 것 아시죠?

평일, 찬양 드리러 나오시기가 너무 먼 거리이신가요?

혹시 마일리지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가 먼 것은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시기까지 참 멀었는데.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한 걸음으로 내려오셨는데.

 

머리에서 마음이, 마음에서 입술이, 그리고 우리 집에서 교회가, 이렇게 먼 줄 몰랐어요.


지난 수요일과 목요일 청장년 찬양 집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 번의 집회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이민 생활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우리 청장년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위로해 주시고 또 새롭게 해주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강사로 오신 정유성 목사님은 목요일 새벽에 “상처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모든 상처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 그리고 허리에 난 상처가 우리를 위한 구원의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듯이 우리의 상처마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살펴보실래요?

당신은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으신지.

들려주실래요?

당신의 상처가 갖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바울은 자신의 상처이름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의 상처에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겐 과거의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꿈도 있습니다.

강사님은 목요일 저녁 말씀을 통해 우리의 꿈이 크지 않더라도 그 꿈 끝에 반드시 예수님이 계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은 과거의 상처와 예수님이 그 끝에 기다리고 계신 미래의 꿈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을 보셨습니까?

군인 출신의 아버지 아래서 군대식으로 키워지던 7명의 자녀가 그 가정의 가정부로 온 마리아에 의해 변화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이기에 많은 노래가 불리고 있는데, 그중에 그 가정의 큰딸이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난 열여섯 살, 열일곱 살이 되죠(i am sixteen going on seventeen)”

자기에게는 무엇을 할지 일러줄 나이도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필요하다고 노래합니다.

“i need someone older and wiser telling me what to do.”

 

우리 자녀들에게도 계속 변화가 필요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지 일러 줄 지혜로운 분도 필요합니다.

우리 교사들이 이 일을 위해 예수님 안에서 늘 수고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힘을 다해 우리 자녀들에게 진정한 변화와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일깨워 주고 있답니다.

 

이번 금요일(6일)과 토요일(7일), 청소년 할렐루야 대회가 우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요셉은 17세 청소년 때에 이미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있었고, 힘든 이국(異國) 땅에서 꿋꿋이 살았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이 힘든 땅에서 예수님이 주신 꿈을 품고 꿋꿋이 살길 기도하면서 집회 자리에 꼭 데리고도 나오시고 또 뒤에서 열렬히 응원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10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이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도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열 드라크마 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고 낙심한 여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3과 완전을 나타내는 7의 합산인 10이라는 숫자는 성경적으로 너무 중요한 숫자임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어 중에 이렇듯 중요한 10을 상징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의외로 가장 작은 단어인 요드(י(입니다.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어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 중국교포부가 설립된 지 10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중국교포부 설립 10주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겸손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교회를 섬겨 오신 중국교포부 모든 분과 지도자들에게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

이들과 함께 행복한 교회를 일구어 오신 모든 성도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져가는 모습을 중국교포부 설립 10주년을 통해 보면서, 이후에 펼쳐질 더 벅찬 미래를 기대하게 됩니다.

 

중국교포부!

그대들의 함께 함이 우리 모두에게 큰 축복입니다.


몇 달 전, 다소 멀고 복잡하고 처음 가는 길을 운전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 따라갔습니다.

한 번도 헷갈리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한 마디로 no problem!

 

오는 길이었습니다.

가는 길을 잘 갔으니 오는 길은 더 빠르게 오겠다며 두 개의 내비게이션을 켰습니다.

차에 장착된 내비게이션,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

둘을 바라보는데 약간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길을 잘못 들어서면서 결과적으로 big problem!

 

종말의 내비게이션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복잡한 종말, 성경만이 분명하고 안전하고 완전하게 우리의 길을 안내합니다.

내일부터“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주제의 가을 새벽 부흥회입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은 종말을 일컫는 징조입니다.

종말의 내비게이션이 확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성경을 열면 종말의 내비게이션이 선명히 보입니다.

 

내일부터 일주일간, 종말을 헤쳐 나갈 말씀을 집중적으로 전하려고 합니다.

종말의 때에 다른 것들은 환희 켜고 성경은 덮어 놓으면 점점 헷갈리다가 큰일을 만납니다.

5시 45분부터 시작되어 피곤하시니까

그대로 성경 덮고 주무실래요, 그래도 성경 들고 나오실래요?

 

그때 왜 그랬을까?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책상에 금을 그어 놓고 평소 내 짝꿍이라고 부르던 친구가 팔꿈치 끝이라도 넘어오면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왜 호들갑을 떨었을까?

 

그때 왜 그랬을까?

우리 집도 가난하면서 맛있는 찐빵 장사 집의 아들인 친구에게 왜 무안을 주었을까?

 

그때 왜 그랬을까?

아무런 감정도 없던 친구였는데 다른 옆 친구들의 응원(?) 속에 “너, 나하고 뜰래(싸울래)”하고 왜 세지도 않은 주먹을 내밀었을까?

 

이 가을에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옛 친구들 생각이 나는데 같이 있었던 그때 왜 잘 대해 주지 못했는지 혼자 부끄러워하며 노래 불러 봅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지난 수요일, 교회 앞 도로가 새롭게 포장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시작된 공사가 오후 늦게 마치었고 그동안 울퉁불퉁 고르지 않았던 도로가 평탄하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인들도 불편했고, 임직 예배에 많은 분이 찾아오실 때 고르지 않은 곳을 지나오시겠다는 안타까움도 있던 차에 도로공사가 멋지게 끝난 것입니다.

 

이런 노래가 있는 것 아세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길목에 서서....

그대를 맞으리.... 사뿐히 밟으며 와주오”

사랑하는 이를 맞이하기 위해 주단을 준비하여 마음에 깔아 놓았으니 사뿐히 밟으며 와달라고 합니다.

흥,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연인은 참 좋겠어요.

마음에 주단을 깔아 맞이하겠다니까요.

사뿐히 거닐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 신랑, 우리 주님은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면서 그것은 고르지 않은 곳을 평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임직예배에 오시는 분들이 평탄하게 오시도록 교회 앞 도로공사는 끝났는데 주님이 거니실 내 마음은 여기저기 패이고 고르지 않아 울퉁불퉁 한 것은 아닌가요.

누구는 주단 위를 사뿐히 거니는데, 우리 주님은 거니시기를 난감해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겸허한 기도와 한 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

가을이 점점 깊어져 가는데 우리의 기도와 한 분을 향한 사랑도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겸손한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만난 자리가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예수님의 자기 부인의 겸손한 기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흐르던 곳이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성공, 나의 건강, 나의 재산, 나의 명성.....

끝없이 이어지는“나”가 멈추어지고 아버지 하나님만이 가장 큰 갈망이 된다면 우리의 가을도 자기를 비우는 겸허한 기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계절이 될 것입니다.


최근에 갈대밭을 거닌 적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갈대처럼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 흔들림이 오래될 때 본인에겐 힘겨움을, 주변 사람들에겐 염려를 자아냅니다.

 

신앙생활의 흔들림은 빨리 안정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간혹 누가 흔들린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일에 지쳐서, 따듯한 돌봄이 없어서, 변화가 없어서, 예배에 집중이 안 돼서, 애들이 걱정되어서....

사실, 한 번 흔들리면 모든 것이 다 흔들림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흔들리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담임목사로서 여러 생각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흔들리는 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겠다고 약속도 하고, 누구를 내보내고 누구를 초청하고, 환경을 개선하고, 제도를 바꾸고....

하지만 압니다.

이런 방법들이 결코 흔들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아휴, 정말 답답해.

목사님은 우리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

흔들리는 사람들이 이같이 말씀하신다면 저는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그리스도인은“그리스도의 충족성”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변화의 요구하는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예수님만이 견고함의 유일한 근거임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식당에서 남들은 맛있게 식사를 하는데 금식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렇게까지 식사하는 분들에게 부담을 주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았습니다.

며칠 전 뉴저지에서 몇몇 목사님들과 만남이 있었습니다.

모두 주문하는데 한 분 목사님은 주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 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들어보니 금식할만한 큰 제목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마다 금식의 이유가 많겠지만 자신을 위한 이유를 뛰어넘어 식당에서까지 금식하시는 모습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날, 제가 시킨 대구지리를 쉽게 삼킬 수 없었습니다.

가시가 많아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받은 감동에 목이 멘 것도 있고, 그가 붙잡은 진리를 흔드는 자들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자들이라는 불편한 사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의 싸움의 대상은 저 마귀들인데....

우리끼리 싸워서는 안 되는데....

그동안 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감사절 주간을 지나며 우리 교회 안에, 우리 노회 안에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다는 것에도 큰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침묵하라. 그렇지 않으면 침묵보다 나은 말을 하라.”

 

우리는 말을 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침묵보다 못한 언어가 있고, 침묵보다 나은 언어가 있습니다.

 

침묵보다 나은 언어는 감사입니다.

침묵보다 못한 언어는 불평입니다.

침묵보다 나은 언어는 진리입니다.

침묵보다 못한 언어는 거짓입니다.

 

행복은 감사를 통해 들어오고 행복은 불평을 통해 나갑니다.

살리는 것은 진리이고 죽이는 것은 거짓입니다.

 

감사의 계절입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세요.

주변을 둘러보세요.

우리가 태어날 때 싸 들고 나온 것이 하나라도 있던가요.

그 모든 것 일체가 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침묵보다 나은 언어인, 아니 결코 침묵하면 안 되는 언어인 감사가 넘치는 계절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해요.”


그제 아침, 11월 달력을 천천히 뜯어내었습니다.

그 장면을 못내 아쉬워하던 마지막 달력 한 장이 원망의 눈초리로 저를 응시하더군요.

처음에 받았을 땐 많은 친구와 함께 제법 으스대던 달력이 하나 둘, 친구를 떠나보내다가 이제는 홀로 벽에 남게 되었습니다.

문득, 그 모습이 내 모습 같았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결국 혼자가 된다는....

 

마지막 달력이 내게 묻는 듯합니다.

“자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남은 시간에 뭘 할 건데?”

정말, 내 인생의 마지막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폐암 말기를 지내고 계신 목사님이 최근에 여러 지인들에게 보낸 글이 있었는데 목사님은 이 시간에 무엇을 가장 아쉽다고 하시는지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여러 일을 하다 보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남이 보기에는 괜찮았을지라도 하나님과 단 둘이 갖는 깊은 대화의 시간들이 점점 줄어졌다....”

목사님의 글을 다시 보니 그동안 너무 분주하게 주님의 일을 하시다가 정작 주님과는 친밀하게 지내시지 못하셨음을 크게 아쉬워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다 떠나도 12월 마지막 달력이 결코 외롭지 않은 것은 25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운 우리들을 향해 “내가 너와 영원히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주님이 찾아오신 그 날이 마지막 달력에 빨간 글씨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젠 외로워하지 말고 남은 시간,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과 친밀하게 지내는데 보내자고 마지막 달력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며칠 전 사진 한 장 보았습니다.

우리 캄보디아 선교지의 담 안에 심어진 한 그루 나무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함께 보시던 분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목사님, 이 넓은 땅에 우리 교인들이 한 그루씩 나무를 심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확정된 사업은 아니지만 저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만약 나무를 심는다면 그냥 심지 말고 조경(造景)을 생각하고 심어, 훗날 멋진 수목원(樹木園)이 되면 좋겠네요.”

차가운 12월에“나무와 숲”이야기를 나누니 뭔가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오늘, 각각 나무 같은 다섯 개 교회가 함께 숲을 이루며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란 이름으로 두 번째 찬양 축제를 합니다.

다섯 교회 모임을 바라보시던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교회가 나뉘고 분열하는 이때, 서로 성향이 다른 다섯 교회가 함께 모여 성탄찬양 축제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놀라운 일입니다.”

 

또 하나의“나무와 숲”이야기가 쓰일 것입니다.

오늘은 그동안 각각 수고하고 활동하던 30대 선교회가 청장년부란 이름으로 함께 처음 모이는 날입니다.

각자“나무”로도 멋졌지만, 이젠 함께하는 아름다운“숲”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펼치시던 30대, 혼자가 아닌 형제들 그리고 자매들과 함께 숲을 이루어 사역하시던 30대. (눅 8:1-3)

그 예수님을 따라 30대 나무들


오늘, 본당 앞을 보셨나요?

화분마다 솟아 오른 빨간 포인세티아를.

겨울 꽃, 크리스마스의 꽃으로 알려진 포인세티아는 “내 마음은 불타고 있다”

“축복합니다”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력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포인세티아는 그 줄기에서 나오는 흰 액이 “해열제(解熱劑)”로 쓰인다고 합니다.

 

저 앞의 작은 화분에는 아름답고 유용한 포인세티아가 피어올랐는데 내 인생의 화분에는 어떤 꽃이 피었는지 궁금합니다.

색깔은 무엇인지, 향기는 있는지, 모양은 어떤지, 필요는 한지. 아니면 아예 아무 것도 없는 빈 화분인지.

 

곰곰 생각해 보니 몇 주 있다가 사라질 화분, 겨울에 잠깐 피는 꽃이라고 포인세티아를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포인세티아 같은 꽃만 피어도 너무 괜찮은 화분이 되겠더라고요.

 

“내 마음은 불타고 있다” - 내 마음도 예수님을 향해 불타고 싶다.

“축복합니다” - 나도 만나는 사람에게 복이 되고 싶다.

“강력한 아름다움” - 내 짧은 삶도 강력한 아름다움으로 살다 지고 싶다.

“해열제” - 나도 여러 일로 열 받은 사람에게 꼭 필요하고 싶다.

 

꽃아 피어라, 내 인생의 화분에서.

비록 겨울을 사는 인생이지만, 겨울에 피는 꽃도 있더라.

겨울 꽃 포인세티아를 보니 참 멋지더라.

내 인생의 화분에서, 꽃아 피어라.


어느 미국 형제가 한눈에 반한 한국 자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who are you?)”

“나는 유입니다(i am yu).”

그 자매는 유씨 성(姓)을 가졌기에 당연히 자기의 last name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너무 깜짝 놀랐고 너무 감격했습니다.

그 자매의 대답이“i am you(나는 당신입니다).” 라고 들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형제는 그 자매에게 프러포즈하였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당신입니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사고로 죽은 사람의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이 죽음으로 비로소 살게 된 사람의 이야기, “안녕하세요.

나는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입니다”

이 말은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요?

그 말을 듣는다면 상대방이“이게 무슨 말인가”하고 가슴도 뛸 것이고, 목도 멜 것이고, 눈물도 쏟아질 것입니다.

 

성탄절의 흥분 속에 나를 위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나의 진정한 생명이며, 주인이신 것을 잊은 것은 아닌지요,

동방박사들이 보배 합을 열어 아기 예수님께 최고의 예물을 드렸듯이 이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런 선물을 예수님께 드릴 수는 없을까요?

“예수님, 저의 생명은 예수님 것입니다.”


1944년 8월,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러시아 전선으로 떠나는 독일 군인 클레멘스는 아내와 딸에게 크리스마스까지 돌아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독일의 패배로 클레멘스는 25년 형을 받고 러시아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클레멘스는 탈출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장교 카메네프에게 잡히면서 이 두 사람은 도망과 추적, 잡힘을 반복합니다.

추적과 잡힘 뿐 아니라 수많은 여러 역경이 계속되었지만, 클레멘스는 가족을 떠난 지 10년 후의 크리스마스 때에 약속대로 남편과 아내를 기다리고 있던 가족의 품으로 마침내 돌아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독일 영화“마지막 한 걸음까지”의 줄거리입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결코 잊지 못할 장면이 나옵니다.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마지막 한 걸음까지” 포기하지 않은 클레멘스를, 10년이나 추적하던 카메네프가 그 추격을 포기하는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마지막 한 걸음까지”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마지막까지 다 이루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서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마지막 한 걸음까지”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를 포기시키려던 마귀가 그 시도를 포기할 것입니다.

 

올해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나 가족,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내가 한 약속들을 생각해 보시고 “마지막 한 걸음까지”포기하지 마신 후, 새해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새해 특별새벽기도회 마지막 날, 기도회가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거리에는 눈보라가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휘몰아쳤습니다.

그 날 저는 그 눈보라가 한창 심할 때 밖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앞이 잘 안 보일 정도이고, 누구도 앞서 걷지 않은 눈길을 걸으면서 문득 언젠가 읽었던 책이 생각났습니다.

높은 산을 오를 때 리더들의 역할과 책임을 기록하여 비즈니스 ceo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 한,“극한의 리더십”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교회 와서 책을 다시 보니 책 제목 앞에 작게 쓰여 있는 글씨가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두려움 없는 극한의 리더십

 

어떤 상황에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몇 가지 유익한 교훈을 일러줍니다.

“죽음을 수용하라” “나만 잘되려는 이기심을 버려라” “현실에 유연하라”

“협력하라-자신만 높아지려는 고독한 영웅주의를 버려라”

“용기-진실에 눈을 감지 말라” “끈기-현재에 안주하려는 비겁함을 버려라”...

 

리더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어떤 상황에도 두려움 없는 삶의 비결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46:1-3)

 

꿈을 품고만 있으면 그 꿈은 그저 꿈으로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꿈을 말하기 시작하면 그 꿈이 현실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내일은 martin luther king day 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꿈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꿈을 꺼내어 말했습니다. 외쳤습니다.

i have a dream! 나는 꿈이 있습니다!

그의 꿈은 많은 자의 반대를 일으켰지만, 더 많은 자의 뜨거운 행동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꿈을 말로 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 꿈을 몰랐을 것이고 그 꿈이 세상을 바꾸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도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꿈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창 37:5-6)

말로 표현된 그의 꿈 때문에 그는 형들의 미움을 받았지만, 그의 꿈은 마침내 이루어져 세상을 살렸습니다.

 

매년 5월이 되면 우리 교육부 자녀들에게 꿈을 말해 보라고 합니다.

그들을 대표해 이십여 명의 친구들이 묵직한 꿈, 재미있는 꿈, 가슴을 뛰게 하는 꿈, 전혀 예상치 못한 꿈들을 그 꿈의 옷을 입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말들이 씨앗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 꿈이 되길 기원한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어린이부터 청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꿈을 꾼다고 했는데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온 세상에 당신의 꿈이 울려 퍼질 때 저도 당신의 그 벅찬 꿈을 듣고 싶습니다.


my turn,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오래전, 한국에서 사역할 때 왼쪽 다리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맨 처음 끊어졌을 때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손은 허공을 무수히 헤집었고 몸은 데굴데굴 구르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치료의 때에 아내는 제게 살아있는 지팡이였습니다.

아내를 의지해 일어났고, 아내를 의지해 걸었고, 아내를 의지해 머리도 감았습니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몸도 고달팠겠지만, 마음도 많이 서럽고 아팠을 것입니다.

 

이젠 my turn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오른쪽 다리뼈를 다친 후, 이젠 제가 아내의 지팡이가 되어 있습니다.

거의 그런 기억이 없는데 이번에 깊은 밤.

아내 옆에서 아내가 뭐가 필요할까 바라보다가, 쪽잠을 자다가 하면서 아내가 무엇인가 요청하면 이것저것을 챙겼습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여러 섬김을 받는 데 익숙해 있던 제게는 섬기며 돕는 일이 쉬워 보였는데 섬김은 상대방의 진정한 필요를 깊이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몸의 수고와 마음의 정성이 함께 부어져야 하는 고난도의 사역임을 짧은 몇 날 동안 체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의존해야 살 수 있고 또 서로 사람끼리 의존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과 달리 사람들의 의존은 줄 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받기만 해서도 안 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부부 사이가 아니어도 서로 어려울 때 your turn, my turn....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며 사람 사는 공동체인가 봅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차는 일본의 자기부상열차“마그레브”라고 합니다.

시험주행에서 시속 603km로 달렸다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상황에 따라 700~900km, 기차보다 조금 더 빠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시속 1675km로 함께 날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자전 속도입니다.

너무 빨리 달리고 있어서인지 아무도 그 빠른 속도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월에도 속도가 있습니다.

시편 90편에는 평생을 순식간이라 표현하고 있고, 일생을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세월은 그냥 날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엄청난 변화를 몰고 다닙니다.

세월과 함께 심겨진 씨앗이 열매를 맺고, 홍안(紅顔)이 노안(老顔)이 됩니다.

“내 청춘 돌려도!”

아무리 외쳐도 세월은 싱긋 웃고 여전히 제 갈 길 갈 것입니다.

세월이 제아무리 빠르다 하여도 세월에 질질 끌려갈 수는 없는 법.

세월의 속도로 세월과 동행하며 살아야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서점에서 일할 때 책값을 묻는 손님에게 1달러라고 답했습니다.

그 손님이 책값을 깎아 달라고 했을 때 그는 1달러 15세트라고 했습니다.

어찌 책값이 더 올라가느냐는 손님의 항변에 “당신이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변하였답니다.

 

2018년, 1월의 시간이 다 지나고 있습니다.

시속“1675km”로 달리는 지구에서, 평생을“순식간”으로 날아가는 세월을, 불필요한 것에 소비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시간에서 잘 살아야 영원에서도 잘 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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