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은혜의 강물이 넘쳐 흐르게하라

사랑하는 우리 교우들의 기도 가운데 저는 우리 교단 제 39회 총회를 총대 장로님들과 함께 잘 다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라질 이과수 지역에서 열린 총회는 지역 분위기와 맞게 그 주제도 "은혜의 강물이 넘쳐 흐르게하라"였습니다.

 

모든 회의가 그렇지만 일 년에 한번 모이는 교단총회에는 산적한 안건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대부분의 안건이 많은 논의를 거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총회의 주제처럼 은혜의 강물이 넘쳐 흘러서 수년 동안 갈등을 겪고 있던 노회가 하나 되는 일도 있었고 많은 교단의 발전적인 결론들도 도출되었습니다.

 

이번에 우리 교단의 세계선교대회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두 명의 선교사 파송 식도 있었습니다.

한 분은 캠퍼스 사역을 하시게 되고 다른 한분은 아마존 강을 타고 다니시며 선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위험한 정글 속에 펼쳐진 아마존 강도 언젠가는 은혜의 강물이 되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총회 중 회의를 잠시 정회하고 총대들이 이과수 폭포를 다녀왔습니다.

듣던 대로 이제껏 보았던 폭포들과는 규모가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 웅장한 이과수 폭포의 물줄기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넘치게 흘러왔고 앞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흘러올 은혜의 강물과 견주어 생각해 보니 아주 초라한 물줄기에 불과해 보였답니다.


어느덧 5 월 31 일이 되었습니다.

5 월, 가정에나 교회에는 물론 개인이나 나라에서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월요일만 해도 전교인 한마음 축제, 어제는 함께하는 선교 바자회가 있었습니다.

모든 교구와 선교회에서 마음을 모아 주었기에 풍성한 은혜를 나누며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에 뜻을 힘 있게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함께한 모든 분들의 수고와 정성에 감사를 드립니다.

 

역사 속의 5 월은 늘 그렇지는 않았는가 봅니다.

슬픈 5 월을 보내고 6 월을 맞이하여서도 힘겨웠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그 주인공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느 해 일기”에 따르면 그분의 5 월과 6 월 초는 이랬습니다.

 

5 월 5 일 오전: 세인트 앤 교회에서 설교. 그들의 반응 “가서 다시 오지 마시오!”

5 월 12 일 오전: 세인트 유다 교회에서 설교. 다시는 그곳에 갈 수 없음.

5 월 12 일 오후: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설교. 다시 쫓겨남.

5 월 19 일 오전: 세인트 앤드류 교회에서 설교. 다시 오지 말 것을 요청받음.

5 월 19 일 오후: 거리에서 내쫓겼음.

5 월 26 일 오전: 초원에서 설교. 풀어 놓은 황소에게 쫓김.

6 월 2 일 오전: 마을 변두리에서 설교. 경찰에게 추방당함.

6 월 2 일 오후: 어느 목장에서 설교. 일만 명의 사람들이 참석!!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6 월 2 일 오전에 “이만하면 됐다.

내가 이토록 복음을 위해 노력해도 사람들은 몰라주고 내 마음과 몸만 고달프니 전도자의 삶을 이제는 포기하자.”라고 했다면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삶과 기독교의 역사가 아름답게 바뀌지 못했을 것입니다.

6 월 2 일 오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요한 웨슬레 목사님에게 대반전의 시간이 찾아 왔습니다.

일만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설교를 듣고 그 삶을 주님께 의탁했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 사역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6 월 2 일 오후는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잊지 말고 끝까지 견뎌야 하겠습니다.

6 월 2 일 오후까지는 말입니다.

어? 그리고 보니 내일모레가 6 월 2 일이네요!


그날, 그 시간의 조짐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1941 년 12 월 7 일 오전 7 시 50 분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전투기가 하늘을 덮고 날아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해 수많은 미군 전함과 비행기를 폭파했고 2 천 명이 넘는 군인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하와이 공격은 아무 조짐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본이 미국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제보도 있었고, 진주만 연안의 일본 상선들이 스파이처럼 보인다는 첩보도 있었고, 진주만 연안 200 마일 지점에 잠수함이 있다는 정보도 있었고, 심지어 그날 아침 7 시에 미군 레이더에 수백 개의 새까만 점이 미국을 향해 오고 있다는 다급한 보고가 있었어도 그 모든 경고를 받은 자들마다 그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레이더에 포착된 새까만 점들은 진주만을 폭격하려는 일본 전투기였는데 그 보고를 받은 당직 장교의 말은 이랬습니다.

“별거 아냐, 신경 꺼! (well, don't worry!)”

 

신(神)도 가라앉힐 수 없다고 큰소리치며 출항한 타이타닉호에 다른 배의 선장으로부터 전문(電文)이 왔습니다.

‘타이타닉호 선장께.

서쪽으로 향한 증기선들이 북위 42 도, 서경 49~51 도 사이에 빙산과 작은 얼음덩이 및 얼음 벌판을 보고하고 있음. – 바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타이타닉호의 무전사들이 무시하다가 몇 번씩 계속 오는 전문에 마지못해서 그것을 선장에게 갖다 주었고, 선장이 그 배의 소유주에게 그 전문을 건네주었을 때 그는 그것을 꾸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습니다.

별거 아닌 줄 알고 신경을 껐으나 타이타닉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사람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괜찮겠지 뭐”하는 정부의 허술한 초기대응과 “나 하나쯤이야”하는 시민들의 안일한 보건의식이 한국에서 전염병 메르스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첫 이유로 꼽히는 데는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눅 21:11),”마지막 심판이 이르기 전의 징조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온 세상에서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목격되고 있는데“별거 아냐, 신경 꺼! (well, don't worry!)”의 태도가 내게는 없는지요?

퀸즈장로교회가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있음을 오늘 단기선교사 파송예배를 통해 드러내고자 합니다.

전염병의 확산보다 더 빠르게 복음의 확산이 있도록 우리 모두 분연히 일어나 헌신합시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는 사도행전 8 장 4 절 같은 삶은 누가복음 21 장 11 절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캄보디아 시엠립에는 우리 교회가 지은 건물이 있습니다.

드넓은 땅에 이 층으로 지어진 건물은 예쁘고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일행을 맞아 주었습니다.

이곳에서 현재 주일 예배가 드려지고 있고 주 중에는 영어 교육이 진행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유치원 사역을 곧 시작할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오후, 우리 선교지에서 20 분 가까이 떨어진 곳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사역을 하고 계신 선교사님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였고 그 질문을 뛰어넘는 유익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9년째 캄보디아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는데 2 년은 프놈펜에서 언어를 배웠고 7년은 시엠립에서 한국에서부터 그토록 하고 싶으셨던 어린이 선교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외가 거의 없다시피 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는 어린이들을 모아 성경 말씀도 가르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독신 여성으로서 잘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운영하는 곳은 우리 건물과 달리 10년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유치원 초등학교가 있는 곳에는 망고나무가 많이 있엇고 그 땅 주인이 매년 수확기가 되면 따서 내다 팔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간간이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올해는 아이들이 유난히 많이 망고 열매를 따서 먹었다고 합니다.

땅 주인이 선교사님에게 문제로 삼아 항의와 경고를 하였답니다.

선교사님이 너무 속이 상하셔서 아이들을 전체 조회로 불러 세우셨답니다.

 

아이들이 망고가 심겨 있는 이 땅의 무서운 주인을 떠올리며 겁에 질려 대답할 것을 예상하며 “이 땅이 누구 땅입니까?”라고 다그쳐 물었답니다.

어린이들이 합창하듯 대답한 내용은 선교사님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땅이요!”

저는 그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뻔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이 땅에서 기독교 유치원 교육을 꼭 그리고 잘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다졌습니다.


알마티 퀸즈장로교회에는 21 년 동안 교회를 섬겨오신 따시아 알렉산드리아 권사님이 계십니다.

교회의 모든 일에 아무 말 없이 봉사하시고 기도에 앞장서신 권사님이십니다.

권사님이 아프신데 그 자녀들이 저와 선교팀이 와서 기도해 주었으면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목요일 오전 김관중 선교사님 내외분과 우리 선교팀이 권사님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말없이 봉사하시는 이유는 조용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기도 하지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집으로 심방해 보니 신장도 안 좋고 혈압도 높고 발은 퉁퉁 부어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살림은 매우 궁색해 보였지만그의 믿음만은 부요했습니다.

 

그의 딸 이리나 니깔라예보나는 장애인이 많은 알마티 퀸즈장로교회에서 수화 통역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장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도 십일조만은 철저히 드린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 간증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쎄리게이 니꼴라예보치는 권사님의 아들인데 이혼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술로 마음의 상처를 달래곤 하던 그는 교회의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신학을 공부하여 알마티 퀸즈장로교회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권사님의 외손주들이자 이리나 니꼴라예보나의 아들들은 교회의 찬양팀을 열심히 섬기고 있었습니다.

따시아 알렉산드리아 권사님의 말 없는 봉사는 대를 이어 알마티 퀸즈장로교회를 강건케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 안에 말 없는 봉사만큼 아름다운 봉사는 없는 것 같고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교육만큼 강력한 신앙교육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잘 안 지켜지는 약속들이 여럿 있으시지요?

그중에 “언제 같이 한 번 식사해요.”라는 약속이 앞자리를 차지할 것 같습니다.

잘 안 지켜지는 약속이지만 적어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표현이며 더 나아가 좋은 우정을 맺고 싶다는 의사(意思) 표시입니다.

식탁(食卓)은 서로를 향한 열림의 자리요, 회복의 자리요, 친밀의 자리요, 기쁨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식탁의 교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그 식탁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식탁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베푼 디베랴 호숫가 식탁의 자리에서처럼 용서의 표현이시기도 하고, 죄인들과의 식사자리에서처럼 그들과 친구 되고 싶으시다는 강력한 메시지의 나눔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훌륭한 식탁을 준비하시어 초청하십니다.

내일부터 있을 전교인 여름 수련회의 성찬(盛饌)입니다.

시편 23 편 5 절에 보면 다윗이 만난 목자(牧者)는“내게 상을 차려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 수련회에서 내가 꼭 먹어야 할 양식을 잘 차려 주실 것입니다.

그 양식으로 영적 강건함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반전(反轉)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무튼, 식사초청장을 이 지면으로 제가 대신 전하오니 넓은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초청장

이박삼일간 믿고 먹는 영적 산상 뷔페!

식재료: 하늘産

2015년 여름특선요리를 위해 특별 요리사 한국에서 초빙!

안와서 후회 말고 알아서 후히 먹자!

초청인 "너의 선한 목자, 예수"


한 사람이 주어진 낱말을 설명하면 다른 사람이 그 설명만을 듣고 원래 주어진 낱말을 맞추는 게임이 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주어진 낱말을 보았습니다.

“천생연분”이라는 네 글자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만만하게 한평생 자기와 같이 살아온 할머니에게 설명하십니다.

“당신과 나 사이를 뭐라고 하지?”할머니가 주저 없이 대답하십니다.

“웬수!”이상한 답변에 당황한 할아버지는 재차 설명하십니다.

“이봐, 당신과 나 사이를 네 글자로 뭐라고 하냐고?”

할머니는 이제야 제대로 알았다는 듯이 힘주어 외치십니다.

“평생웬수!”수년 전 대한민국을 초토화 시켰던 실제 방송 프로그램 이야기입니다.

 

몸만 같이 살아가는 곳은 결코 가정이 아닙니다.

그런 곳은 그저 건물의 기능을 가진 집일뿐입니다.

평생 같이 살아도 서로 원수같이 사는 가정이 많습니다.

부부 사이가 그렇고 부모 자녀 사이가 그렇습니다.

세상의 위기는 가정의 위기입니다.

가정 안에 진정한 권위도 없고 참다운 방향도 없으며 진실한 소통도 없음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가족이 서로를 향해 무례한 태도를 일삼고 폭력적 언어를 쏟아 붓는 것은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닙니다.

짙은 어둠의 가정에 밝은 빛이 들어와야 합니다. 거의 해체 수준에 이른 가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꽤 괜찮아 보이는 가정도 분명한 토대 위에 서 있지 않으면 그 미래를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이번 전교인 여름 수련회 때 강사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 가정예배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기본에 충실한 지혜로운 교회”가 진정으로 맞는다면 “예배가 있는 가정”은 연초부터 기본으로 강조했었어야 합니다.

올해의 반환점을 도는 때에 “가정예배”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라도 그 말씀에 우리 교회가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생원수”같은 위기의 가정을 극복하여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소망한다면 “예배가 있는 가정”이 그 유일한 길입니다.

이미 이 길을 성실하게 걷는 가정도 있지만 이제 우리 교우들의 모든 가정이 “예배가 있는 가정”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일단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지속적으로 반복해봅시다.

좋은 길이든 나쁜 길이든 길은 계속 반복되는 곳에 만들어진다는 강사 목사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아브라함 링컨의 말입니다.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어느 곳에서 각자 살 것인지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롯은 삼촌보다 앞서 선택하였습니다.

눈으로 볼 때 물도 넉넉하고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롯과 자녀들의 삶은 잠시 맛난 음식을 먹고 화려한 옷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재앙, 그 자체였습니다.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죄악이 그 가정에 진을 쳤고 그 후손은 탄식을 쏟으며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머문 땅에서 예배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에게 목숨보다 중요하게 가르친 것 또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예배를 선택한 것을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그 가정을 대대로 축복하셨습니다.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선택은 자녀들의 재앙이나 축복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가정에서 제사장 역할을 제대로 못 하면 하나님은 그 제사장직의 박탈은 물론 그의 자녀들도 잊어버리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 4:6b).

 

아버지의 선택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가정예배를 선택하는 아버지와 예배를 빼놓은 그 밖의 다른 것을 선택하는 아버지입니다.

자녀들을 위한 아버지의 가장 탁월한 선택은 가정예배임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 아버지가 되시겠습니까?

성경은 아버지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가정예배 시간 외에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더 좋은 방법을 알고 계신 아버지가 계시면 저에게 꼭 알려 주십시오.

정말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굳이 매주일 가정예배 드린 분들 손 들어 보시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가벼운 흙먼지를 날리며 택시가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적잖은 체중의 한 부인이 지팡이를 의지하며 한참 만에 마당에 내려오셨습니다.

그 마당에서 부엌을 향해 놓인 계단은 불과 다섯 개의 짧은 계단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그 계단으로 오르시려다가 끝내 포기하시고 경사진 곳으로 돌아가 부엌 안으로 사라지셨습니다.

중국 도착 첫날, 운남 성에서 오고 있는 현지 지도자들을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 눈에 비친 그 부인의 모습은 오랫동안 몸 관리를 제대로 안 하셔서 큰 불편을 겪으시는 수양관 여주인이셨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운남성에서 출발하신 분들이 도착하셨고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들과 함께 교회지도자 세미나는 시작되었습니다.

사역이 자유롭지 못한 현장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참석한 현지 지도자들이 세미나가 진행되는 몇 날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회복의 시간을 갖는 것을 여실히 보았습니다.

 

다른 선교팀보다 앞서 귀국하기 위해 지난 목요일 밤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제 숙소로 돌아오려 할 때에 그 마당까지 나와서 제게 기도부탁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그 부인이었습니다.

첫날 이후 간간이 몇몇 사람들과 식사 준비를 하던 그분을 뵈곤 하였는데 그는 결코 자기관리가 소홀했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몇 달 전 그 부인의 가족이 탄 차가 교통사고를 당하였을 때 그 자리에서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부인은 마음도 몸도 깨어진 어려운 상태에 있다가 이번 세미나 앞에 몸과 마음을 추스려 지팡이를 의지하여 일어나 그 불편한 부엌을 드나들며 우리를 섬겼던 것입니다.

제가 첫날 쉽게 판단했던 그 마당에서 그 부인을 가운데 두고 우리 단기선교팀이 둘러섰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니 그 부인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왜 저렇게 밖에 못하는 거야?”라고 우리가 쉽게 판단하던 그 사람은 서는 것도 기적이요 걷는 것도 기적일 수 있고, 흐르는 눈물을 남 몰래 닦으며 나름대로 생명을 다해 교회를 섬기는 아름다운 분일 수도 있음을 깨달은 그 마당이었습니다.


큰아들이 있는 산호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장 크게 들어왔던 성경 구절은 사도행전 11 장의 29 절 마지막과 30 절 처음에 이어지는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저 이방 땅에 세워진 지 얼마 안 되는 안디옥 교회가 큰 흉년을 만난 유대 지역의 성도들을 돕겠다고 작정하였고 또 실행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선한 작정이 아름다운 실행으로 이어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님을 저 자신에게서 많이 보았습니다. 항상 실행을 작정 가까이에 두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첫 손녀를 받아든 제 손과 품은 가슴, 그리고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이 가득 차 있었으나 실상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 아이, 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 아이, 아니 제게 귀찮은 손길을 계속 요청하는 그 아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 아이를 향한 사랑은 아직 짝사랑일 뿐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어린아이 같은 저를 끝없이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저미게 느껴졌습니다.

 

좋은 날씨를 자랑하는 캘리포니아 지역은 실상(實相) 오랜 가뭄에 지쳐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산호세에서 자동차로 1 시간 40 분쯤 떨어진 napa 로 가는 길에 허수아비를 보았습니다.

낡은 옷을 입고 들녘에 초라하게 서 있었지만 실상 허수아비는 어떤 환경에도 한 마디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일군이었습니다.

napa 지역에는 포도나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차에서 지나가면서 바라볼 때는 아무런 열매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차에서 내려서 가까이 가 보니 실상 나무마다 포도송이가 잘 맺혀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 실상이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휴가 동안 묵상하고 있는 예레미야 말씀에는 예레미야와 함께 하나냐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렘 28:10)"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둘 다 선지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다 말을 할 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하나냐는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였던 것뿐입니다.

설교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하는 것이 있음을 다시 가슴에 새겼습니다.


만남은 설렘입니다. 만남을 통해 새로움은 물론 깊은 감동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 누구를 만나 보셨나요? 저도 몇몇 사람을 만나보았습니다.

 

del augusta 목사님: 젊은 흑인 목사님이십니다.

어머니를 네 살 때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 이야기는 없는 거의 고아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비뚤게 자랄 가능성이 컸지만 주님을 만나 사역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가 한국 이민교회에서 사역할 때에 편견과 차별로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제는 가정에서와 한국 교회에서 받은 상처를 씻고 밝고 바르게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기도와 삶이 일치한다면 너무 좋을 것이라는 뼈있는 말과 함께 “만일 세상의 모든 교회마다 한 교회가 한 명의 고아를 돌본다면 이 땅에 슬픈 고아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라는 자신의 아픈 삶에서 우러난 말도 아프게 들려주었습니다.

 

윤동주 시인: 산타 쿠르즈는 산타 크로스의 동생이 아닙니다.

큰아들 집에서 40 분쯤 떨어진 바닷가 지역 이름입니다.

그 바닷가에서 밤에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영롱한 별들이 있었습니다.

별들을 보며 너무 오랫동안 그들을 잊고 산 무심함에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 밤에 "별 헤는 밤"의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별 하나하나에 아름다운 말을 붙여 가던 그 윤동주는 자신이 그 별 하나, 아니 별 무리에 붙여도 좋을 아름다운 사람임을 잘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은 세상은 별 같은 영롱함이 있을 것입니다.

 

강 집사님: 고등학교 때 이민을 와서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일식집 주인.

갑자기 돌아가신 누님의 사업을 떠안았을 뿐, 그는 현재 토목에 관련된 공무원이기도 하였습니다.

식당은 퇴근 후 저녁에만 나와 돌본다고 하는데 토목공사에 깃든 미국의 가치관을 우리 식탁에 앉아 오랜 시간 역설하셨습니다.

토목공사가 미래를 위한 것이 있고 현재를 위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를 위한 공사는 자기들이 누리기 위해 빨리 진행하지만 미래에의 무책임은 물론 자신들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반면에, 미래를 위한 공사는 현재의 사람들이 계속 불편함을 겪으나 견고한 미래를 건설해 간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토목공사는 대부분 미래를 위한 공사라고 합니다.

그 만남에서“미래를 위한 공사”를 다시 가슴에 새겼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편재(遍在)해 계시지만 그중 어떤 곳에는 임재(臨在)하십니다.

편재를 하나님의 일반적인 존재하심이라고 한다면 임재는 하나님의 특별하게 함께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에는 하나님의 구별된 사랑과 관심과 보호와 능력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특별한 곳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님은 찬양이 있는 곳에 강하게 임재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시 22:3),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 149:3-4).

그렇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찬양하는 자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아름다운 일을 행하십니다.

 

뜨거운 여름의 끝자락에 있을 오는 8월 30일 주일 오후, 모든 사람들이 지쳐 쉬고 싶어 할 그 시간에 우리 교회에서는 찬양축제가 열립니다.

이 축제를 앞두고 열 개의 찬양부서가 정성껏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재하심에만 만족하며 지나갈 평범한 시간을 일깨워, 하나님의 임재하심까지 갈망하며 나가는 찬양축제는 열 개 부서만의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중에 찬양 안 해도 괜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찬송하는 사람들을 제지하려 할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b)

그렇습니다.

침묵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돌들에게 찬양의 특권과 축복을 빼앗길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우 모두가 함께하는 찬양축제를 통해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날이 되시기를....


서른 명의 교우들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잘 다녀왔습니다.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신 교회와 가족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저에게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감격과 충격의 시간이었습니다.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일정은 순간순간 숨이 막히는 감격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땅은 몹시 더운 곳이었고 태어나신 자리는 아주 더러운 자리였습니다.

더운 거리와 좁은 자리에서 예수님의 겸손에 감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사역하셨던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스스로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는 자괴감의 그늘에 앉아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외치신 자리에서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였습니다.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책망하시지 않고 아침을 지어 먹이신 자리에서 예수님의 용서에 감격하였습니다.

모든 자리마다 감격이 아니고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받은 것은 숨막히는 감격뿐이 아닙니다.

질식할 것 같은 영적인 갑갑함 때문에 충격도 받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끝 모를 싸움뿐 아니라 유대인 사이에도 "종교인"이라 불리는 유대인과 "세속인"이라 불리는 유대인의 심각한 갈등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 2 천 년 전에 구원자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자리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감격과 충격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가볍게 지나칠 땅이 아니었습니다. 영성의 첫 자양분과 선교의 마지막 절실함이 공존하고 있는 독특한 땅입니다.

그 영성과 선교를 위해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함께 걸어야 할 땅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 오후부터 수요일 오전까지 뉴욕노회 목회자 가족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장영춘 목사님 내외분과 저희 부부가 참석했습니다.

노회원 목사님 부부와 노회 파송 아프리카 선교사님이 함께 모여 말씀과 친교와 회의(會議)의 시간을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들은 부부, 선교사님은 혼자 참석하셨는데 모(某) 목사님 내외분은 아들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저와 연배가 비슷한 목사님이 데리고 온 아들은 다섯 살 남짓의 아주 어린 아이였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볼 때 오래 전에 그 모(某) 목사님과 나누었던 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오래 전에 그 목사님을 만났을 때 자기에게 늦둥이가 하나 있는데 그 아이 때문에 아주 즐겁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 기억난 것입니다.

 

그 아이가 뛰어 다니는 것을 보고 옆에 앉아 계시던 어느 목사님께 알면서도 물었습니다.

“저 아이가 모(某) 목사님의 늦둥이죠?”

그 목사님이 대답해 주셨습니다.

“네, 맞아요. 모(某) 목사님의 늦둥이가 맞아요.

그런데 진짜 목사님 아이는 아니예요. 미혼모의 아이를 입양한 것이여요.”

저는 더운 여름에 잠시 얼음같이 되었습니다.

오래 전 그 모(某) 목사님의 늦둥이 자랑에 조금은 주책처럼 여겼는데 노회 수련회에서 그 목사님이 미혼모의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신다는 것을 알고는 얼음 같은 순간에서 벗어나 “아~~” 탄식과 함께 그 목사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급히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 아이는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을 “아빠 아빠” 부르면서 응석을 부리기도 하고 즐겁게 뛰어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바쁘신 목회에, 다 키운 아이들이 있으신 상황에 그 누구를 입양(入養)할 필요가 전혀 없으셨던 목사님과 사모님 얼굴에는 피곤과 후회가 아니라 진정한 기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 내외분의 밝은 얼굴에서 우리를 양자(養子) 맞아 주시고 기뻐해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목사님의 늦둥이는 아픔 가운데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사랑 가운데 무럭무럭 자라날 것입니다.


9 월이 들어선 어느 날, 새벽 기도를 마치고 키세나 park 을 찾았습니다.

큰 호수를 돌기도 하였고 벤치가 있는 숲을 거닐기도 하였습니다.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

 

8 월을 막 보내고 9 월을 맞이하는 키세나 공원은

박인환 시인(詩人)의 “세월이 가면”의 시구,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이

그대로 펼쳐진 듯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절절히 고백했던

우리의 8 월 30 일 찬양축제는 이제 옛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사랑은...

박인환 시인의 사랑처럼 가지 않았습니다.

나뭇잎처럼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9 월에도 이어 부를 사랑의 노래가 있답니다.

8 월 30 일 그 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노래가 다양했듯이

9 월의 노래도 많을 것입니다.

살펴보면 멀지 않은 주변에 있을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을 찾아 걸으며

당신만의 사랑 노래를 불러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남자끼리 떠났던 1박 2일, 남선교회 연합수련회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 시간이었습니다.

남자 자신들이 잘 몰랐던 남자에 대해 성경적인 관점을 갖게 된 것은 이번 수련회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습니다.

아들로서의 남자, 아버지로서의 남자, 남편으로서 남자가 어떻게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말씀과 예화를 통해 일깨운 메시지는 남선교회 회원들의 마음을 회한(悔恨)으로 흔들어 놓았고 결단(決斷)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이 설교 중에 들려주신 자신의 이야기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1남 1녀의 자녀들 두신 목사님에게 사춘기 딸은 힘들기만 했답니다.

목사님이 외국에 나가 계실 때 사모님으로부터 딸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심란한 소식에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는데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네 자식 중에 탕자는 몇 명이니?”

두 자녀 중에 한 명이 속을 썩이고 있는 터라 목사님은“한 명입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생각 못했던 내용이었습니다.

“내게는 탕자가 아주 많단다...”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하면서 눈시울을 붉힌 것은 강사님만이 아니었습니다.

애먹이는 자식 한둘도 힘겨워하는 우리들인데 수많은 탕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감사하고도 죄송해서 설교 중에 함께 눈물을 흘린 남자는 저 말고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마다 아픔이 있습니다.

아내 몰래 자녀 몰래 아픈 가슴 부여잡고 울기도 합니다.

나만 아픈 줄 알았습니다.

우리만 우는 줄 알았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그렇게 많이 아파하시는 줄은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앞으로도 여러 차례 드릴 말씀인 줄 알면서도 하늘 아버지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어 이렇게 나지막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젠 그만 속 썩일게요.”


“악!”지난 목요일 피츠버그팀의 강정호 선수가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 중 외마디와 함께 쓰러졌습니다.

2루에서 수비를 보던 강정호 선수를 향해 컵스의 1루 주자가 거칠게 슬라이딩하면서 그에게 큰 부상을 안겨 준 것입니다.

피츠버그 구단은 강정호선수가 왼쪽 정강이 골절과 십자인대 부상으로 수술했고 6~8개월의 재활 기간이 필요하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올해 신인왕 후보이기도 하고 포스트 시즌에서 맹활약을 기대케 했던 터라 염려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미국 언론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cbs의 스포츠 기자는 컵스팀 선수의 슬라이딩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분석했고, espn의 칼럼니스트는 컵스 팀 선수가 2루 베이스가 아닌 강정호 선수를 향해 달렸고 이것은 역겨운 장면이었다고 비난했습니다.

같은 상황에 대한 해석이 극명( )하게 갈린 것입니다.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자는 물론 그 해석을 듣는 자들에게 전혀 다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새가 운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새가 노래한다”고도 말합니다.

물 반 잔을 보고 어떤 사람은 물이“반 밖에 없네”로 표현하고 어떤 사람은 물이“반이나 있네”로 표현합니다.

누가 소망을 주며 누가 밝게 살지는 분명합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애굽에 팔려와 숱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해석(창45:7-8)하여 위기의 가정을 살려냈습니다.

강정호 선수 부상에 대해 espn의 해석이 더 맞을 것 같은데도 정작 그 자신은 “상대방 선수는 해야 할 플레이를 했다. 나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자신한다” 고 말했답니다.

확실히 인생은 일어난 사건 보다 그 사건에 대한 해석으로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강정호 선수는 홈런 치는 것도 멋있고 수비하는 것도 멋있는데, 고통을 준 사람에 대한 해석은 더 멋있습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메이저 리그 선수, 아니 인생의 따스한 해석자 강정호 씨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느껴지시나요?

우리 교회 예배와 교육에는 뭔가 촉촉함이 있다는 것이. 왜 그런 줄 아세요?

우리 예배당과 교육관에는 그 때 그 분들의 눈물이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 없이 빚어지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가 봅니다.

한 송이의 아름다운 국화꽃이 피어남에도 오래 전부터 누군가의 눈물이 있었다고 서정주 시인은 확신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中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다(多) 민족, 다음 세대의 비전을 머금은 또 하나의 교회당이 필요한 이 때에 그 때 그 분들처럼 눈물로 새 교회당을 적실 분들이 필요합니다.

 

국화꽃 향기 나는 가을날에 펼쳐 질 건축 바자회는 새 교회당을 내 눈물로 촉촉이 적실 시간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니지요?”하지 마시고요^^


하나 둘 떨어지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부쩍 외로움을 느끼는 가을.

날씨가 점점 추워져가면서 뭔가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가을.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 옛 누군가를 기다리는 가을.

그래서인지‘가을을 탄다’는 말이 옛 부터 있었나 봅니다.

 

가을을 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을을 타는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가을을 타는 사람들을 초청하는 소리, “그렇다면 가을 새벽 부흥회에 오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가을 새벽 부흥회

“두나미스, 능력을 주옵소서!” 10월 19일(월)-24일(토) 매일 새벽 5시 45분

 

두나미스!

능력이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두나미스를 받으면

아무리 가을이 깊어져도 쓸쓸하거나

의기소침해질 수 없습니다.

 

두나미스는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남의 것을 빌릴 수도 없기에 직접 오셔서 받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가을을 타지 않으니 안 가도 되지요?”하는 사람들에겐 더욱 필요한 가을 새벽 부흥회입니다.

왜냐구요?

가을을 안 타는 사람들도 진짜 매서운 겨울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나미스는 이 가을은 물론 다가 올 겨울을 넉넉히 이길 하늘의 능력입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에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사랑해~너를 너를 사랑해~

노사연씨가 부른‘만남’입니다.

사랑의 만남도 언젠가는 헤어지니 눈물이 납니다.

잘못된 만남은 후회의 눈물을 철철 흐르게 합니다.

그래서 만남은 눈물입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통째로 그 사람의 생애를 만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아픔과, 그가 가진 그리움과 남아 있는 상처를 한꺼번에 만나기 때문이다.

김재진 시인의‘만남’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단지 얼굴을 맞대는 정도가 아니라 만나는 자의 전생애(全生涯)를 맞닥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남은 두려움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아모스 선지자의‘외침’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과 만날 순 없지만 모든 사람은 그 날에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남은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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