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솔직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 목회자는 더욱 자기의 아픔이나 상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강사 목사님은 매우 열려있고 솔직합니다.

그 상처와 아픔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는 정말 은혜롭습니다.

 

깊이 있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본문일지라도 강사 목사님은 아주 신선하게 풀어갑니다.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졸리기는커녕 벌써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났나 합니다.

깊은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린 시원한 물 같은 강사님의 말씀은 매우 깊이 있습니다.

 

경륜 있다.

전통적인 서울 충현 교회 부목사, 새로운 시도가 많았던 안산 동산 교회 부목사,

보수적인 서울 창신교회 담임을 역임하시고 현재 새로운 모델의 예수향남교회 담임.

다양한 형태의 교회를 섬기면서 쌓은 경력들이 벌써 묵직한 경륜이 되었습니다.

 

관심 있다.

자기 교회만을 위한 목회가 아님은 충분히 보아 왔습니다.

둘러 살피며, 지역 그리고 이 땅의 많은 교회가 함께 숲을 이루기를 시도해왔습니다.

강사 목사님의 관심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아주 관심이 큽니다.

 

위의 내용과 그 밖에 쏟아질 은총들은 이번 여름 전교인 수련회에 참석하시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수련회를 마치고 위의 내용이 기대만큼은 아니었다고 느껴지시는 분들에게 수련회비를 전액 되돌려 드릴 계획은 아직 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기에.


지난 수요일(29일) 밤,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다른 유람선과 충돌하여 침몰하였습니다.

7명 구조, 7명 사망, 19명 실종이라는 보도는 큰 놀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안타까움을 갖고 후속(後續) 기사를 읽는 가운데 그 유람선에 제가 잘 아는 부부가 타고 있었음을 알고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믿음과 성품이 너무 귀한 부부였습니다.

 

일곱 명의 생존자 명단에 남편만 있었습니다.

그 아내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생존자 명단은 이런 사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존자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생명책이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일러줍니다. (계 20:15)

 

우리의 이름이 거기에만은 반드시 적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펼치실 그 생명책에 나와 나의 가족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합니다.

내 이웃과 열방의 사람들도 그 명단에 올라 있어야 합니다.

눈 씻고 찾아보아도 거기에서 이름 찾을 수 없다면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한국정부에서 헝가리로 구조대를 급파하였다지만 생명을 구조하기에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구조대는 다릅니다.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구조대는 단기선교팀이라는 이름으로 올해도 세계 곳곳에 파송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책에서 그 이름들을 볼 수 있도록 구조대들은 분투할 것입니다.

어제 보여 준 아름다운 선교바자와 늘 계속되는 뜨거운 기도는 “영원한 생존자 명단”을 만드는 일에 매우 중요한 동역자입니다.


지난 주간 la에서 개최된 교단 총회를 다녀왔습니다.

총대 장로님들과 참석했던 43회 총회는 여러 단상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번 총회의 주제는“항상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소서”입니다.

개회 예배부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를 감명 깊게 묵상케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총대들은 하나님의 공의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도 있어야 함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누락된 행정절차에 대해 오랜 논의 끝에 당사자의 사과와 총대 회원의 용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사 대회 때 특강을 통해 이슬람의 급성장과 우리의 둔감에 대해 스스로 놀라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총회에서 4분의 선교사님을 또 파송하였는데 늘 어려운 가운데 선교하시고 또 교회들을 일깨워주시는 선교사님들이 고마웠습니다. 

총회적으로 정리하고 매듭지어야 했던 여러 사안들이 잘 처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총대 장로님들과 여러 차례 논의하고 준비했던 안건도 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아프지 않고 모두가 승리하는 경험을 통해 우리를 보내시고 총회를 위해 기도해 주신 교우들의 기도의 힘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총회 기간 중에 쉼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러 형태로 그 시간을 보냈는데 저는 많은 총대들과 함께 같은 차를 타고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그리피스 천문대와 헐리우드 스타들의 이름, 손도장, 발도장이 찍힌 거리 등을 가보았습니다.

이 땅의 스타도 아니요 저 하늘의 별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옳은데로 인도하여 마침내 천국에서 별 같은 존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 43년 동안 우리 총회는 기쁨의 시간도 있었고 아픔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기쁨의 시간이 자만으로 흐르지 않고 아픔의 순간이 좌절로 이어지지 않도록 우리 총회는 주님 안에서 거하길 힘썼습니다.

주님 안에 있고 또 총회에 속한 모든 개개인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만치 않아야 합니다. 좌절도 말아야 합니다.

   


지난 15일 맨하튼 센추럴 파크에서 bts(방탄소년단)의 짧은 공연이 있었습니다.

어제부터는 뉴져지에서 대형공연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세계적인 인기는 충격, 그 이상입니다.

비가 오든 바람이 치든 수많은 젊은이들이 며칠씩 노숙하면서 이들의 공연을 기다리는 것은 이제 새삼스럽지가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나 경찰들이 아무리 뭐래도 그들은 bts의 팬 이름 army(군대) 답게 자기 자리를 굳게 지킵니다.

 

bts는 자신들의 최근 신곡을 이번 공연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제목은 “작은 것들을 위한 시”입니다.

그 가사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 삶은 온통 너/ 사소한 게 사소하지 않게/ 만들어버린 너라는 별/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특별하지/ 너의 관심사 걸음걸이와 말투까지/ 사소한 작은 습관까지....”

 

너무 섬세한 가사요 듣는 이에겐 위로가 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면 bts는 또 다른 그들의 스케줄을 따라 떠날 것이요 수많은 팬들은 또 다시 각자 홀로 쓸쓸히 자기들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팬들의 가슴엔 그 가사가 심겨 있고 그 눈에 그들의 몸짓이 남아있겠지만 bts는 그들이 부른 노랫말과 달리 더 이상 팬들의 걸음걸이, 말투, 그리고 사소한 작은 습관을 하나부터 열까지 특별하게 살피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자신의 생명을 쏟아 구원하시고 그 후에도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시며 작은 자들의 작은 모든 것까지 세세히 살피시는 예수님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따르며 자기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제자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누군가 말씀 좀 해주시겠습니까?

이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bts의 팬들 중에 누가 더 충성스러운지.


아들 독수리가 먹잇감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오랜 비행 끝에 좋은 먹이를 발견하였습니다.

한 동안 굶주렸기에 잡은 먹이를 막 먹으려던 차에 엄마 독수리가 생각났습니다.

“좀 갔다 드릴까?.... 아니야. 나 먹기도 부족한데.... 엄마는 알아서 잡아 드시겠지.”

아들 독수리는 잡은 먹이를 혼자 잘 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 독수리가 아들 독수리를 맞이합니다.

“어딜 그리 오래갔다 왔니?

너무 안 들어와서 많이 걱정했다.

어서 씻고 이리 와라.

이 어미가 먹이를 잡았는데 너와 같이 먹으려고 한참 기다리고 있었단다.

자 어서 먹자꾸나”

 

내리사랑은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일컫습니다.

어떻게 자녀가 부모의 끝없는 사랑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치사랑이 있습니다. 내리사랑의 반대입니다.

“치”라는 단어는“치솟다”처럼 무엇인가 아래에서 위로 끌어올린다는 뜻입니다.

치사랑은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을 사랑하는 것인데 특히 자녀가 부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주변에 정말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시는 효자 효녀를 많이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치사랑이 내리사랑을 이기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 어떤 자녀도 부모의 나실 제 괴로움과 기를 제 애씀을 다 알지 못하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 어느 자녀도 자식이 잘 되길 바라며 모든 것을 쏟아부은 부모의 소원과 희생을 다 깨닫지 못합니다.

 

정말이지, 저 위의 아들 독수리는 자기 먹이를 위해 비행(飛行)은 잘했으나, 저속한 행동의 비행(卑行) 독수리였습니다.

그 아들 독수리가 우리를“친구야”라고 부르지는 않을까요?


다시 뛰어가고 싶습니다. 어린아이 그 시절로 말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동네를 누비며 놀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집어던지고 나가 몇몇 친구들과 이런 노래를 부르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애~애~ 애들 모여라 여자는 필요 없고 남자 모여라”

사실이지 그 노래를 함께 부르던 남자 친구들 마음에는 여자 친구들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큰 바램이 있었답니다.

 

다시 뛰어가고 싶습니다. 어린아이 그 시절로 말입니다.

구슬땀 흘리며 구슬치기, 땅따먹기, 딱지치기하면서 놀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술래잡기나 다방구, 자치기, 닭싸움, 말뚝박기 놀이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손에 검은 연탄을 묻혀 친구가 못 보게 하였다가 친구 얼굴을 만지면서 그 얼굴을 시커멓게 만들어 놓고 다른 친구들과 놀리며 웃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다시 뛰어가고 싶습니다. 어린아이 그 시절로 말입니다.

신문지에 싸주어 국물이 줄줄 새던‘뻔데기’ 쪼그리고 앉아 국자 넣어 불에 달구어 먹던‘달고나’ 라면땅, 아이스께끼, 솜사탕 등으로 군것질하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매일 일기를 써야 하는 방학 숙제를 미루고 미루어 놓았다가 개학 전날 하룻만에 한 달 치를 거뜬히 썼던 초능력(?)의 그때가 그립습니다.

 

이제는 갈 수 없습니다. 너무 멀리 지나왔습니다.

그 철없던 어린 시절로는 다시 못 가지만, 그렇다고 지금 철든 것은 아니니 스스로 궁금합니다.

“나는 여전히 아이일까, 그래도 어른일까.”

 

오늘, 5월 5일 어린이 날.

문득, 갈 수 없는 그 시절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로드아일랜드에 있습니다.

여기서 로드아일랜드 중앙한인교회 부흥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부흥이란 단어를 들으시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저에게 부흥이란 교회를 깨우는 것이며 지옥불로 끌려가는 자들을 건져내려는 영적 싸움입니다.

 

이 악한 시대, 지옥불로 수많은 자들이 줄 대어 달려가는 이때에 교회가 깊이 잠들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나 부흥은 일어나야 합니다.

부흥회라는 방법은 아니더라고 부르짖고 사모하면서 부흥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많은 것들이 바뀝니다.

성경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는 변화의 넘치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유약했던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도 그렇고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이 가져온 큰 변화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의 기도가 있기에 그제도 어제도 말씀을 증거 할 수 있었고 오늘 낮에도 저녁에도 계속 복음을 외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립습니다.


빌바오가 죽었습니다.

빌바오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빌바오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빌바오는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스페인 북부의 자그마한 도시 이름입니다.

 

중공업의 발달로 한 때 찬란함과 부유함을 자랑했던 도시 빌바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전 세계 중공업이 쇠퇴하면서 찬란했던 빌바오의 영광도 함께 쇠락했습니다.

사람들은 떠나고, 기업들은 철수하고... 그러던 빌바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의 세 번째 해외 미술관을 유치하면서 죽어있던 도시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산업 중심의 도시가 문화 예술의 도시로 거듭난 것입니다.

 

“빌바오 효과 (bilbao effect)”라는 말도 생겼으니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살아난 빌바오는 떠났던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계속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구겐하임을 받아들인 빌바오가 다시 일어났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죽었던 그 누구도 다시 살아납니다.

죽은 도시는 빌바오처럼 다시 살아나고, 죽은 사람은 나사로처럼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한 영국 시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는 무엇을 져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나를 돌보셨습니다.

나는 누구를 돌보아야 하겠습니까?

 

 

 

..................

 

나도 묻고 대답해야 하는데,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높임을 받으소서

내가 밟는 땅 주님의 땅이니

하늘이 주의 이름 높이 올리며 넓은 바다가 주를 노래해

내 평생에 주의 이름 높이며 어느 곳에서든지 주님을 예배하리라

내가 밟는 모든 땅 아버지의 영광이 선포 되어야 하리

 

청년들의 찬양이 울려 퍼졌습니다.

장로님들이 함께 나와 손에 손을 잡았습니다.

교역자들은 앞으로 나와, 성도들은 그 자리에 서서 함께 손을 들어 축복하였습니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있었던 전성호 선교사님 파송 기도의 풍경이었습니다,

일흔한 살의 선교사님은 그렇게 성도들의 기도를 뒤로하고 선교지로 떠나셨습니다.

 

71세. 무엇인가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입니다.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사는 것이 삶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나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도전입니다.

 

인생의 크기는 도전의 크기입니다.

도전하는 자는 아름답습니다.

도전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밟는 모든 땅, 아버지의 영광이 선포되길 도전하는 사람들이 또 일어나야 합니다.

 

도전은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황금률(golden rule) 아시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이 황금률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거울입니다.

거울은 결코 먼저 웃지 않습니다.

거울을 바라보는 자가 먼저 웃을 때 거울도 따라 웃습니다.

거울 앞에서 찡그려 보세요. 여지없이 거울도 나를 향해 찡그립니다.

거울 속의“나”는 결코 다른“나”가 아닙니다.

 

어렸을 적에 엄마와 아빠가 다투었는데 엄마가 집을 나가겠다며 보따리 싸고 나서면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하였답니다.

“넌 필요 없어. 난 네 형이면 돼.”

엄마에게 거절당한 상처를 수십 년 안고 살아가던 분을 보았습니다.

 

나를 향해 더 이상 상처를 말하지 마세요.

그 상처 치유 안 됩니다. 그 상처가 나의 진짜는 아니잖아요.

나를 향해 부정적인 태도 던지지 마세요.

일그러진 자화상으로 살게 됩니다. 그 자화상이 내 본 모습 아니잖아요.

그런 모습을 거울에 비추지 마시고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해 보세요.

“너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작품, 난 널 좋아해. 자랑스럽고.”

곧 거울이 나를 행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작품, 난 널 좋아해. 자랑스럽고.”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수년 전에 높은 시청률을 보였던 프로그램 제목입니다.

유아들의 여러 문제들을 고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아이들의 문제는 아이들 자신보다 부모의 문제가 더 크다는 전체 결론이 기억됩니다.

 

“내 몸이 달라졌어요”

누구나 외치고 싶은 말입니다.

모두가 군더더기 살 대신에 근육질 몸매가 되고, 골골했던 몸이 회복을 넘어 강건하게 되길 고대하지만 거기에 걸맞는 운동을 꾸준히 하는 자를 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내 영이 달라졌어요”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영적 약골(弱骨)이 즐비한 시대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한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근육질 사람은 가끔 보았는데 이제는 깊은 영의 사람, 강한 영의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사순절이 2주가 지났습니다.

내 영이 변화되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닙니다만 내 영이 변화되는 강력한 조짐을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그동안에 동참했던 분들은 꾸준히, 아직 참여하지 않은 분들은 아무도 늦지 않았으니 내일부터라도.

그리하여 부활절을 절기로만 맞지 말고, 실제 내 영이 변화되어 가슴 벅찬 그 날을 모두 맞이합시다.

 

겨우내 닫아 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창 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던 봄이

왜 이제야 문을 여느냐는 듯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봄은 따스함입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녹이는 따스함입니다.

봄은 소리입니다.

아니 함성입니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예쁜 꽃들의 함성입니다.

 

봄은 희망입니다.

각양 씨앗들이

녹은 땅을 찾아들어 희망을 싹 틔우려고 들썩이고 있습니다.

 

봄은 향기입니다.

살짝 머리 아픈 샤넬 파이브가 아닌

가슴까지 싱그러운 자연산 향기입니다.

 

봄은 그대 앞에 와 있습니다.

봄의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봄과 함께 사순절의 여정을 즐기십시오.

 

벌써 봄이 그대 앞에 와 있는데

왜 아직 겨울 자락을 덮고 있습니까?

이제는 그렇게 춥지 않잖아요?

어서 겨울 자락을 거두고 우리 같이 봄을 노래해요


숨이 막혀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미세먼지 때문에 한국에서 울려 퍼지는 탄식입니다.

유치원에 가는 어린아이들까지 마스크를 쓰여 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 오가는 사람이 없어 장사를 할 수 없다는 상인들의 마음은 참담하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먼지들은 교육, 경제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심각하게도 사람들에게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거나 그 목숨을 앗아 갑니다.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한국을 다녀오시는 많은 분들이 뉴욕의 공기가 이렇게 좋다는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공기가 맑고 좋은 곳을 청정지역이라고 합니다.

조사(調査)를 통해 보니 뉴욕은 미세먼지 농도가 낮은 청정(淸淨) 도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난날 뉴욕도 최악의 미세먼지로 시달렸으나 그런 먼지들을 방출(放出)하는 원인들을 꾸준히 퇴출(退出)시킨 결과입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입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영적 미세먼지도 있습니다.

마귀의 변함없는 전략은 영적 미세먼지입니다.

마귀는 사소(些少)한 이유들로 영적 미세먼지를 빚어 성도들의 기도를 조금씩 틀어막다가 마침내 치명적인 영적 손상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날 기도의 호흡이 전혀 막히지 않는 최고의 영적 청정지역은 어디일까요?

더 이상 마귀의 영적 미세먼지 전략이 조금도 먹히지 않는 곳입니다.

내일 새벽에 이 시대에 최고의 영적 청정지역이 어디인지 볼 수 있을까요?


2019.03.03 00:00

[2019-3-3] 기대하라

“고도를 기다리며”는“고도(高度)를 기다리며”가 아닙니다.

“고도(godot)를 기다리며”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제목입니다.

이 책에서는 두 친구가 날마다“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고도”라는 사람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서“고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紛紛)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어떤 대상을 말한다고도 하지만 그러나 원작의 제목에 쓰인 단어를 유심히 보면 “고도(godot)”는“신(god)”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을 기다리지 말라, 그는 결코 오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기대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가졌기 때문일까요, 기다려보았자 별것 없기 때문일까요.

이런 세태를 거슬러 가야 합니다.

“기대하라”는 오는 3월 11일 월요일부터 시작될 올해 사순절의 주제입니다.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서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6주간 동안 진행될 사순절에 6개의 소주제가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기대하라.

지금, 어떤 상황이든지 기대하라.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라.

여기, 어떤 곳이든지 기대하라.

놀라운 회복과 기적을 기대하라.

십자가를 기대하라.

 

사무엘 베케트는“고도(godot)”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고 슬퍼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대하는 모든 자에게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죄가 사람에게 안겨준 것은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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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저 외로움을 견디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요?

여리고 성에 살던 삭개오는 외로웠습니다.

돈은 있었지만 친구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비난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도 뽕나무 위에서 싸늘히 흐르는 고독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런 자기에게 다가와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신 분이 있으셨습니다.

그분은 삭개오에게 구원과 공동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애에 언제나 나를 품어주는 공동체,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어디선가 외로움에 지쳐 울고 있을 것입니다.


습관은 버릇이 되고 버릇은 점차 익숙한 것이 됩니다.

습관도 버룻도 버리기 힘든데 익숙한 것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익숙의 영역은 다양합니다. 보는 것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만 보려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대한 발전은 더딥니다.

 

10년 20년을 같은 길을 다녀도 그곳에 언제나 있었던 가게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다가“이런 가게가 여기 있었어?”하고 놀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익숙한 것만 보이는 안타까움의 현장입니다.

 

1990년 지구궤도에 발사된 허블우주망원경이 있습니다.

지상의 우주망원경과는 달리 더 높은 해상도의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 허불망원경이 관찰하는 행성은 익숙한 것만 관찰합니다.

로버트 윌리암스는 허블망원경의 각도를 틀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방향을 관찰해 보자고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방향을 주시하고 주시하였더니 그동안 물랐던 아름다운 은하계를 발견한 것입니다.

1995년의 일입니다.

 

성경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들인데, 성경 전체를 읽긴 읽어도 익숙한 이야기만 보면서 그 수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지나쳐 가곤 합니다.

익숙함을 넘어설 때 우리의 삶과 신앙은 더욱 풍성해 질것입니다.

저는 지금 멀리서 익숙함을 넘어서는 성경 읽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77세이신 아버지는 건강하셨답니다.

급작스런 아버지의 담도암 소식을 듣고 황급히 한국으로 날아갔습니다.

일주일간 간호해드리는데 어느 토요일 아침 그의 눈앞에서 아버지는 떠나신 것입니다.

목사님이신 아버지의 죽음.

많은 일을 하셨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의외로 짧았습니다.

“천국에서 만나자”

 

장례식이 예배로 가득 찼답니다.

하루에도 20번 정도의 예배가 드려진 장례식.

많은 분들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한결 같았습니다.

“네 아버지는 훌륭하셨다.”“네 아버님은 좋으신 분이셨지.”“네 아버지는....”

 

장례식을 다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 온 그는

아름다운 삶을 남기신 아버지의 죽음 앞에 자기의 삶을 돌이켜 보게 되었답니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세상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좋다고 먹고 마셨던 것들이 다 부질없었어.”

“천국에서 아버지를 어떻게 뵐까.”

 

그에게도 아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자기 아들이 사람들에게 들을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 아버지는....”“네 아버님은....”“네 아버지는....”

훗날 천국에서 만날 아버지. 훗날 자신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를 들을 아들.

두 시간 가까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 갖게 된 상념을 나직이 말한 던 그가, 스스로 밝힌 나이는 올해 50입니다.

50세면 삶을 바꾸기에 늦은 것일까요?


지난 주간에 신학교가 개강했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첫 삼일 동안 개강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개강 부흥회에는 y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높으신 연세에도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월요일 첫날에 목회 중에 있으셨던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른 교단 교회에 잠시 파송 사역을 하시게 되었답니다.

아주 젊으셨을 때였죠. 그런데 그 교회 제직들이 희한(稀罕)했다는 것입니다.

맥주도 마시고, 고스톱도 치고, 사교(社交) 댄스도 추는....

원래 정치운동 색깔이 짙은 교회였지만“이것은 결코 아닌”제직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사교댄스를 추려던 그들에게 y 목사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셨답니다.

“댄스든지 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시오.”

그들이 잠시 의논한 후 답을 가져왔답니다.

“우리는 댄스를 택하겠습니다.”

 

쿵짜작 짝짝~~

음악과 함께 사교댄스를 추는 그들에게 목사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등짝을 때리면서

“들어가시오”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댄스는 멈춰지고 목사님은 집으로 돌아 오셨답니다.

그날 저녁,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 전화를 많이 받으셨답니다.

성도들이“목사님, 잘하셨습니다. 도대체 제직들이 그게 무슨 짓입니까?”

그 후 교회는 변화되었고, 그 제직 가운데 사역자들도 나오게 되었답니다.

 

“우리는 댄스를 택하겠습니다.”

“들어가시오”

저와 젊은 신학도(神學徒)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노(老) 목사님의 목회 단상(牧會斷想)이셨습니다.


2019.01.27 00:00

[2019-1-27] 후츠파

다음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빌 게이츠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

윌리엄 로젠버그 (던킨 도너츠 창업자)

 

같은 학교 선후배라고요?

같이 부자 동네 산다고요?

아닙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혁신적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느냐하면 어렸을 적부터 질문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겐 후츠파 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후츠파(הפצוח)는 무례, 당돌, 철면피 따위를 뜻하는 낱말입니다.

이 단어는 용기, 진취, 도전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무례할 정도로 묻고 또 물으면서 전혀 새로운 관점들과 실험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형식파괴, 질문권리, 상상력과 섞임, 위험감수, 목표지향, 끈질김, 실패학습 이라는 7가지 정신이 후츠파에 있습니다.

 

우리에겐 침묵을 미덕으로 여기며 궁금한 것도 없고 따라서 질문도 없이 지나치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요?

침묵이 그 자리에선 예의가 있어 보이지만 앞이 캄캄합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질문을 던지는 후츠파가 당시에는 무례하고 당돌하지만 환한 미래를 여는 중요한 열쇠라고 확신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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