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새해 첫날입니다.

새해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만복이 온 가정에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첫날이 되면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아이들의 설날노래가 울려 퍼지던 고향나라, 지금은 새해 설날도 잊은 채 진통을 겪고 있는 조국이 그립습니다.

 

설날에서“설”의 뜻은“낯설다”“익숙하지 않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새해 이 첫날은 우리 모두에게“낯선 날,”“익숙하지 않는 날”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닥 낯설지 않습니다.

아니 다 그대로입니다.

새해라고 하지만 길도 건물도, 사람도 환경도 다 그대로 있습니다.

 

달력을 바꾸어 놓은 것 외에 새로운 것이 없음에도 진정한 새해를 맞이하려면 내 자신이 새롭게 변화가 되어야만 합니다.

내 자신이“낯설고”“익숙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화된 말, 가까이만 보던 데서 먼 곳을 바라보는 변화된 눈,

사람의 소리만 듣다가 하늘의 소리를 먼저 듣는 변화된 귀....

아름답게 변화 된 내가“낯설어야”오늘이 진짜 나의“설날”이 되는 것입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껜데요

나의 나의 설날은 오늘일까요?


이렇게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니 또 일 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새해로 건너가시기 전, 올해를 잠시 돌이켜보세요. 어떤 단어가 떠오르시는지요?

제게는“도전”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돌이켜보니 사계절(四季節)마다 도전이 있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 있었던 임직식을 지나 “응답하라 4150”이라는 제목으로 문을 연“선교회의 밤”은“우리가 중심이다” “bravo my new life” “great dreamer” “삼삼한 밤” 참신한 도전이었습니다.

 

여름

러시아권 설립예배, 여름 비 오는 주일 오후, 다양한 퍼포먼스와 다양한 언어로 복음을 전한 노방전도,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 열방을 향한 여름단기 선교 뜨거운 도전이었습니다.

 

가을

낙엽이 곱게 물들어 가던 가을, 10월 23일“행복에의 초대”가 있었습니다.

“집으로”라는 주제 아래 수백 명의 다민족이 몰려왔던 그 날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겨울

가을에 시작된 연습, 12월 11일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성탄칸타다“사랑의 왕” 12월 18일은 처음 시도된 다섯 교회의“성탄연합찬양축제” 비범한 도전이었습니다.

 

새해에도 또 다른 도전은 계속될 것입니다.


성탄절이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곤 하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도 아니고, 예수님을 장사지낸 아리마대 요셉도 아닙니다.

요한나바드의 요셉입니다. 홍요셉.

잘 모르시겠다고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적잖은 분이 아실 것입니다.

 

홍요셉, 그 분은 우리 교회 출신 홍황식 선교사님입니다 .

제가 부교역자시절 함께 동역하셨던 선교사님.

기도하시고, 기도하시고 또 기도하시던 선교사님.

다른 데는 관심이 없으시듯이 묵상하듯 감은 눈을 아래로만 향하시던 선교사님.

 

근황이 궁금하던 차에 한 청년이 전해 준 선교사님의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책 제목은“요한나바드에서 학교하기”입니다.

요한나바드는 파키스탄의 최대 기독교 마을이면서 가난, 문맹, 술, 담배, 마약도 유통되는 도시입니다.

 

선교사님은 2009년 1월 23일, 가족들과 함께 이민 가방 10개를 끌고 그곳에 도착한 후 1년의 준비기간을 보내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50명의 임직원과 1,000명의 학생들이 함께하는 기독교학교를 세우셨고 또 그 너머를 향해 전진하고 계십니다.

 

그 책 첫 page에는‘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이 쓰여 있었고 다음 page에는“현장에서의 첫 걸음”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현장,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해 처절히 살아가는 그 삶의 현장에 누군가가 함께 살아주면서 위로하고 보담아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기”부터 “골고다에서 대신죽기”까지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위로하시고 보담아 주셨던 예수님 이야기처럼, “요한나바드에서 학교하기”는 가장 성탄(聖誕)스러운(?) 요셉 이야기였습니다.


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여 높은 산에 올라 외치라.

유대 고을마다 고하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오 예루살렘 딸들아 보라 왕이 네게 오셨네.

머리 들라.

너의 머리를 들어라.

영광의 왕이 들어오신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전능의 왕이 다스리시네...

 

지난 목요일 밤, 맨해튼 fifth avenue에 있는 saint thomas church에서 소년 합창단의 메시야 공연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헨델의 메시야 공연에 여러 차례 참석해 보았지만 소수의 남성과 소년들로 구성된 합창단의 공연은 처음 경험해 보았습니다.

소수의 찬양대원들이 왕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며 미성(美聲)으로 부르는 찬양 속에서 겸손하신 왕, 진짜 왕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두 시간이 훌쩍 넘는 연주회가 끝나고 들어 올 때보다 다소 추워진 맨해튼 거리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코트 깃을 한껏 세우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여러 블록을 걸었습니다.

높은 건물에서 화려한 조명들이 춤추는 모습에 눈은 휘둥그레 해졌지만 그 화려함 뒤에 숨어있는 성탄의 일그러진 상업화에 마음은 아팠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고을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맨해튼에도 오셨습니다.

맨해튼에는 예수님이 진짜 왕이라며 그 분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자들도 있고, 나의 진짜 왕은 성탄절 매출을 올려줄 손님들이라며 그들에게만 문을 활짝 여는 자들도 있습니다.

맨해튼의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2천 년 전의 유대 고을 베들레헴 사람들처럼 진짜 왕 예수님에게 “내겐 당신을 맞을 빈 방이 없네요.”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는 오늘 오후 플러싱 퀸즈장로교회 찬양의 자리에 오실 “사랑의 왕”을 맞이하실 방은 있으시지요?


주화씨를 아시나요?

송주화씨.“용서”라는 신학적 주제를 다룬 영화“밀양”의 제작에도 참여하시고 현재는 한국에서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계신 목사님.

잘 모르실 것입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분이 참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목회자 월간지인“목회와 신학”12월호에 쓴 글을 보았습니다.

제목이 조금 깁니다.

“성도들과 함께하면 좋은 크리스마스 영화들.”그는 그의 글에서 성탄절에 볼만한 영화들,“멋진 인생”,“크리스마스 캐롤”,“작은 아씨들”,“메리 크리스마스”,“34번가의 기적”,“내티비티 스토리-위대한 탄생”등 여러 편의 영화를 간단한 해설과 함께 친절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친절은 친절을 베푸는 자에게 기쁨을, 친절을 받는 사람에게는 유익을, 그리고 그 친절을 받은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신비함이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주화씨가 친절히 소개한 영화를 보게 되면 저는 그 감동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아직 그 영화들을 못 보았지만 친절이 전달되는 짧은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도로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가 길가에 쓰러진 청소년을 일으켜 주고, 그 청소년은 무거운 짐을 든 나이 드신 여자 분을 도와주고, 그 여자 분은 자동차를 파킹하고 미터기에 넣을 동전이 없어 쩔쩔매는 사람에게 동전 몇 개를 건네주고, 그 사람은 지갑을 떨어뜨린 자의 지갑을 집어 전해주고....

이어지는 친절을 받은 마지막 사람이 맨 처음 친절을 베풀었던 공사장 인부에게 물을 친절히 전달해 주는 것으로 끝나는 영상이었습니다.

 

이 12월이 친절을 주고받는 날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왕 예수님이 절망으로 쓰러진 우리를 찾아오셔서 친절히 일으켜주셨는데, 사랑의 왕의 이름으로 다른 자들을 친절히 도와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왕을 친절히 소개해 주고, 그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사랑의 왕께 찬양을 아주 친절한(kind) 목소리로 올려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입 밖에 나간 말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말은 입 안에 있으면 내 얌전한 종이 되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나가면 내 거친 주인이 됩니다.

당황스럽게도 내 입을 떠난 말은 결코 다시 내게로 돌아오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크고 작은 일들을 벌일 뿐입니다.

 

지나간 세월도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흘러간 시간으로 그 어떤 일도 다시 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과 함께 찾아오는 좋은 기회들도 빨리 붙잡지 않으면 그 시간과 함께 곧 멀리 흘러가 다시는 만져볼 수 없게 됩니다.

 

겨울이 몇 걸음 앞에 다가왔습니다.

12월 초(初)를 가을이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1월 말(末)을 아직 가을이라 불러도 크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 더 늦기 전에 꼭 찾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거울 앞입니다.

싫어도 귀찮아도 내 모습이 어떤지 거울 앞에서 다시 살펴야 합니다.

 

내 인생의 겨울이란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맨해튼 높은 빌딩들을 가소롭게 내려 보던 태양이 늦가을의 짙은 노을을 남기며 허드슨 강 서쪽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풍경(風景)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주님 만나기 전의 내 영적인 상태를 잘 살펴보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입니다.

아시지요?

말씀은 거울과 같다는 것. (야1:23)

 

겨울 전(前)에 거울 전(前)에 서십시오. 꼭!


기적 같은 일들이 있습니다.

올해 어떤 기적을 경험하셨나요?

기적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은혜입니다.

기적, 크게 감사해야 합니다.

 

기적보다 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일상(日常)입니다.

올해도 공기, 물, 햇볕을 날마다 누리고 하루하루 일하고, 먹고, 자고 살아온 일상(日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상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입니다.

일상, 확실히 감사해야 합니다.

 

가시는 아픕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올해 어떤 가시 같은 일이 있으셨나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가시가 아니었으면 깨닫지 못했을 일들이 많았고 그 가시 때문에 더 큰 위험을 막거나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폴 브랜드라는 사람이 한 나병 환자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하나님께 받고 싶은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게 고통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의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가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은 고통이었습니다.

 

가시는 하나님의 숨어있는 은혜입니다.

가시, 그래도 감사해야 합니다.


토끼는 빠른 경주자입니다.

하지만 거북이가 마지막에 먼저 도착한 선착자가 되었습니다.

빠르긴 했지만 교만한 토끼는 성실한 거북이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빠른 경주자와 선착자가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솝 우화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자주 목격되는 일이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전 9:11)

 

저는 중학교 때 육상부에 있었습니다.

빠른 경주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저의 존재감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달릴 때도 그랬고 그 후에도 저 보다 빠른 경주자들에게 조바심을 내곤 하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race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자기의 결론을 지금 말하지 마십시오.

조금 앞서거나 약간 뒤처진 사람들에게 신경 쓰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저“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라는 엄중하면서도 소망어린 말씀을 품고 자기 길을 묵묵히 달리면 됩니다.

finish line에 이를 그 날까지.


11이란 숫자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한국의 어느 학생이 생각했답니다.

“11은 길쭉한 과자 빼빼로 닮았다...”

그래서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빼빼로 데이(11월 11일)가 한국에서 제정(?) 되었습니다.

빼빼로 과자공장 사장님, 올해도 대목을 잘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어느 시인은 11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한 사람이 서 있네

그 옆에 한 사람이 다가서네

이윽고 11이 되네

서로가 기댈 수 있고 의탁이 되네

직립의 뿌리를 깊게 내린 채

나란히 나란히 걸어가시네

......”

 

11이란 숫자를 과자 모양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11이란 글자를 사람 모습으로 보는 시인이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그 11이란 글자에서 서로 함께 걷는 다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답니다.

하지만 누가 그 옆 가까이서 함께 걷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대통령이라도 그 옆에 걷는 한 사람 때문에 큰 수치를 당할 수 있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그 옆에 함께 걸으시는 주님 때문에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11은 예사로운 숫자가 아닙니다.

11월은 연말 정리 때문에 바쁘다고 무심코 지낼 달이 아닙니다.

11, 지금 내 옆에서 함께 걷는 분은 누구입니까?


지난 화요일, 성인대학 야외예배 및 학습이 베어 마운틴에서 있었습니다.

맑고 잔잔한 호수, 그 위에서 엄마 같이 호수를 따듯이 감싸며 펼쳐진 산들, 그 산 속 나무마다 형형색색의 가을 단풍 끝자락을 다정히 붙잡고 있었고, 사이좋은 친구처럼 푸른 잔디밭이 파란 호숫가 옆에 가지런히 누워있었습니다.

 

다소 춥긴 했지만 그 날 함께 부른 찬송은 분명 탄성이기도 하였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나 알 듯하도다”

 

산과 바람과 시냇물이 각각 자기 자신만을 드러내기보다 함께 어울릴 때가 더 아름답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하나씩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고 모든 것을 다 지으신 다음에는“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답니다.

 

“행복에의 초대”가 각 언어의 예배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던 지난 주일, 그 날 오후예배 다민족 기도 합주회는 다민족, 다세대가 함께 어울려진 참 아름다움의 절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서로 개성과 문화와 역사와 언어가 달랐지만 그 날, 한 주님 한 믿음 안에서 서로주고 받은 감동이 너무 컸고 그 어울림 가운데 주님 음성도 들리는 듯 하였답니다.

“너희 모두가 함께 사랑하며 어울리니 내가 보기에 심히 좋단다.”

 

다민족 선교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자 소중한 사명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열방이 함께 할 천국의 소망과 모습이 참 아름답게 새겨져 있답니다.


어렸을 적에 술래잡기 놀이는 재미있었습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아이들의 노래처럼 저도 잘 숨었습니다.

한동안 술래가 못 찾으면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덜컥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술래와 다른 친구들이 아예 나를 잊어버린 건가.

이러다가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 누가 와서 나를 잡아가면 어떡하지...”

이렇듯 숨어 있는 곳은 계속 재미있거나 편안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먼 옛날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대답했습니다.

“부끄럽고 두려워 숨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그 날 그 후, 아담의 후예들은 여러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고 숨어 있곤 했습니다.

뭔가 불편하거나 부끄러우면 숨을 자리를 찾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 이름 부르며 물으십니다.

“____________아(야),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의 있는 곳을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너무 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집으로 왔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집으로 왔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오니 너무 행복합니다.


빈자리, 언젠가는 떠들썩했는데 지금은 조용한 곳.

조용해서 좋겠다고요?

아뇨. 빈자리가 싫습니다.

그리움에 아프고 기다림에 지친 빈자리는 싫습니다.

 

10월 23일, 기다리는 사람들이 와서 앉아 주길 바라며 우리 모두는 빈자리를 채울 초대장을 나누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날도 여전히 그 자리 위로 예배당 공기만 스쳐 지나간다면, 아버지는 마음을 달래시기가 힘드실 것이고, 우리들의 속도 꽤 쓰릴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는 가을새벽부흥회.

23일에 빈자리가 없게 해달라고 기도할 그 자리에 설마, 당신이 만들 빈자리는 없겠지요.

 

만일 당신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내일부터 빈자리로 만들어 놓는다면...

당신의 그 빈자리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일주간 내내 버젓이 앉았다가, 10월 23일에도 아예 아무도 앉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내일부터 채워주세요, 기도의 빈자리가 없도록 꽉꽉.

데워주세요.

10월 23일, 그 사람이 따듯하게 앉을 수 있도록.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쓰여 있는 병법도 아니고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지략(智略)도 아닙니다.

무공무방(無攻無防)은 어느 경건 서적에서 보았고 제 마음에 진하게 남아있는 단어입니다.

무공무방(無攻無防),“공격도 하지 않고 방어도 하지 않는 삶.”

물론 마귀와 싸움을 벌이는 영적 전쟁터에서의 태도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무공무방(無攻無防)은 내 인생을 바꿀 놀라운 삶의 자세가 될 것입니다.

 

이 가을, 타인에 대한 공격과 자신에 대한 방어가 삶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왔던 우리들에게 어느 시인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은 깊은 자성(自省)을 자아내게 합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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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저도 이 아름다운 시에 편승(便乘)해서 저 자신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무공무방(無攻無防)이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피하고 싶은 답변이 제 속에서 또렷이 들려옵니다.

 

아니었잖아...


뱅쿠버에 계신 셋째 누님은 올해 만 74세, 가족 카톡방에 올리시는 글들은 문학소녀 (文學少女)의 편지와도 같습니다.

얼마 전 담석의 아픔에서 치유 받으시고 이런 감사의 글을 쓰셨어요.

 

한량없는 주님의 은혜와 자녀들의 최고의 사랑과 격려, 생각만 해도 뜨거운 가족들의 기도가 저를 일으켜 세웠지요.

지금도 고마운 눈물이 흐르네요.

 

지난 목요일에는 이런 가을편지를 가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가을 하늘이 너무 맑고 온 천지가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 경이롭지요.

“행복”의 뜻을 음미하며 오래된 가요지만 주옥같은 곡과 가사와 부르는 분들의 목소리가 가을과 함께 애틋이 다가오네요.

 

늘 찬송과 복음송을 즐겨 부르시고 카톡방에 올리시던 누님이 그 날 올리신 노래 가운데 뜻밖에 이동원의 “가을편지”라는 곡이 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누워계시다가 몇 년 전 하늘나라에 먼저 가신 매형님을 몹시도 그리워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동원의 가을편지를 들으며 74세 문학소녀, 누님의 가을앓이가 동생 목사의 마음에 저미어왔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이동원의 가을편지)

 

이 가을, 어디선가 외로움의 아픔을 앓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그대 삼아 주님의 마음을 담은 가을편지를 띄어 보내는 것은 어떨까요.


내 생애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입니까?

다윗에게 그 생애 가운데 꼭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의 살아생전에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선지자 나단을 통해 이런 답변을 주셨습니다.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대상17:4b)

 

다윗은 훗날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자신이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많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절절히 들려줍니다. (대상22:1-16)

성전건축은 다윗도 이루지 못한 꿈이었습니다.

성전건축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축복이 아닙니다.

성도로서 그 생애 가운데 단 한번이라도 성전을 건축할 수 있다면 축복 중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현재 성전 건축은 성도들의 눈물겨운 기도와 끊임없는 헌신, 그리고 건축위원들의 민첩하고 묵묵한 수고를 통해 금주에 설계사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

설계사 인터뷰 단계까지 상상을 초월한 꼼꼼하며 견고한 과정이 있었답니다.

 

성전 건축으로 가는 그 길목에 건축바자회가 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만들고 사먹고,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건축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는 토요일, 10월의 문을 여는 첫 날.

선교회 교육부 청년 등 한어회중, 영어회중, 중국어회중, 그리고 러시아어회중이 정성과 기도로 함께 준비한 건축바자회의 문도 열린답니다.

내 생애 단 한번이 될지 모를 성전건축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린답니다.

 


어느 마을, 그 동안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아 주던 의사 선생님이 은퇴하시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못내 아쉬워하며 송별회를 만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제안에 의해 그 송별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집에 있는 포도주 중에 가장 비싸고 맛난 것을 가져오기로 하였습니다.

 

송별회 그 날, 참여하는 사람들이 입구에 놓인 큰 항아리에 자기가 가져온 포도주를 부으면서 입장하였습니다.

송별회는 시작 되었고 천하제일의 맛을 기대하며 항아리에서 포도주를 건져내어 은퇴하시는 의사선생님에게도 드렸고 자신들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의 얼굴빛이 변하였습니다.

그들이 마시고 있는 것은 기대했던 맛난 포도주가 아니라 맹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송별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빚어진 씁쓸한 결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맛난 포도주를 가져올 것이고, 거기에 나 하나쯤이야 맹물을 갖다 부어도 티가 안 날거야.”

 

희석(稀釋/dilut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원액(原額)에 맹물을 갖다 부어 원액의 농도(濃度)를 낮추는 것입니다.

10월 23일은 “행복에의 초대” 날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누군가를 데려올 것이고 나야 그냥 참석해도 티가 안 날거야.” 라는 계산된 확신(?)을 갖고 계시다면, 그 날 우리 모두는 맹물을 마시거나 아주 희석된 물을 마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티가 안 날거야” 라며 내게 주어진 작은 책임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의 최선을 쏟아 부어야 할 잔치 날, 스리슬쩍 맹물타기 없깁니다. ^^


추석이 다가옵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명절이면 부모님이 새 신과 새 옷을 사주시곤 했습니다.

 

새 신을 신고 뛰어 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명절 아침, 새 신을 신고 하늘까지는 아니어도 고소한 음식 냄새가 흐르는 동네 사이를 흥분 속에 씽씽 달려보곤 했습니다.

새 신을 신고 동네를 뛰어다녔던 명절 아침은 이제 추억 속에만 있습니다.

 

명절에 새 신을 신지 않아도 흥분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발돋움입니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둘려 모여 있는 곳이 적잖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무슨 일이 있을까 궁금하여 발돋움하곤 했습니다.

어릴 적엔 선반 위에 있는 먹을 것을 꺼내 먹으려 발돋움한 적도 있습니다.

요즘도 가끔 발돋움을 합니다.

다소 높은 곳에 꽂혀있는 책을 빼어보려고 그렇게 합니다.

 

발돋움은 멀리 가는 일이 아닙니다. 무슨 돈이나 별다른 시간이 드는 일도 아닙니다.

그저 있는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향해 발뒤꿈치만 들면 됩니다.

그 작은 행동, 발돋움에도 간절함이 배어 있으면 새로운 세계를 볼 수도 있고 맛난 것, 필요한 것 등을 손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올 추석도 우리 대부분은 고향에 갈 수 없을 터인데...

명절이라고 새 신을 사주실 부모님이 안 계신 분도 많으실 터인데...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갈망하는 발돋움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8월과 9월이 교차했던 지난 주간, 땅위의 더위를 식히고, 길가의 코스모스를 일으킬 빗소리와 함께 여름의 문이 살포시 닫혀 지고, 가을의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멀게만 느껴지던 가을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 왔습니다.

 

가을 뜨락에 떨어진 나뭇잎위로 돋보기를 손에 잡고 햇빛을 부르면 오래지 않아 나뭇잎 사이에 하얀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다가 마침내 그 나뭇잎 전체가 태워집니다.

거기에는 햇빛을 모으는 초점(焦點)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을에도 할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다 펼쳐 놓으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마무리 못하고 찬 겨울을 맞을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그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해야 할 그 많은 일 가운데 초점이 필요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난 목요일, 6기 제자훈련과 4기 영성훈련이 개강되었습니다.

연합해서 드려진 개강 예배를 마치고 모든 훈련생과 훈련자들이 훈련에 참여하는 소감을 한 마디씩 밝혔습니다.

그 한 마디 속에 훈련을 앞둔 갈등, 훈련을 통한 기대 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초심(初心)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가을에 다시 찾아야 할 것이 있다면 초심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을의 입구에서 이 가을에 구할 기도 제목이 생겼습니다.

 

주여, 이 가을에는 두 개의 초를 주소서.

초점(焦點)을,

초심(初心)을.


박물관은 다양한 분야의 여러 자료나 물품을 수집하고, 보관하고, 전시하여 과거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 일깨움을 주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어떤 분야의 박물관들을 가보셨나요?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박물관 한 번 안 가보실래요?

시간이 없어 멀리 못 가신다구요?

가실 수 있어요.

가까이 있기 때문이죠.

그 박물관의 이름은 “내 인생의 박물관”이랍니다.

 

 

내 인생의 박물관을 둘러보면 의외로 물건들, 자료들이 꽤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박물관에 가장 훌륭한 물건이 있다면 각자가 집안 어딘가에 간직하고 있는 빛바랜 사진들일 것입니다.

집안에서 앨범, 또는 사진 상자들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열어보십시오.

일, 이년 된 사진부터 몇십 년 된 사진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진 속의 자신과 찬찬히 대화를 해보십시오.“야~~ 멋있네,”

“그 때 너 많이 힘들었지,”“그 정도면 잘 살았어”

그 사진의 내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말을 붙여보십시오.

몇 년 동안 시리즈로 만들어 많은 돈을 벌어들인 미국 오락 영화가 있습니다.

원래 그 영화의 타이틀은“night at the museum”입니다만 한국에서 개봉할 때 그 제목을 “박물관이 살아있다”라고 붙였습니다.

이 한국 제목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박물관 안의 역사적인 전시물들이 살아나 일대 소동(?)을 벌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박물관에서 둘러본 사진, 편지, 일기, 여러 글, 기억, 그리고 기념적인 물건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한바탕 소동(?)을 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러 박물관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박물관을 둘러 볼 때는 분명히 과거를 향해 걸었는데 그 박물관을 나올 즈음에는 뭔가 의미 있는 미래를 향해 걷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다가오는 가을을 의미 있게 걷기 위해 잠시라도 시간을 내서 내 인생의 박물관을 둘러보심이 어떨지요.

내 인생의 박물관은 하루 24시간 open이고 입장료는 언제나 free 인 것 아시지요?


리우 올림픽이 서서히 그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결과를 가지고 모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경기가 끝났음에도 딱히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명의 난민 올림픽 팀(refugee olympic team) 선수들입니다.

이번 대회에 전쟁 속에 국가를 잃어버린 난민들이 그저 올림픽 팀이란 이름으로 참석했습니다.

브라질을 떠나 어딘가로는 가겠지만 자기 나라는 아닙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부해안에 지진과 쓰나미가 있었습니다.

그 때 후쿠시마 원전에도 사고가 함께 발생하여 방사능이 방출되었습니다.

그 당시 그 땅을 떠났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말합니다. “돌아갈 곳이 없다.”

 

우리 이민자들도 다 떠나 온 곳이 있건만 곰곰 생각해보니 돌아갈 곳이 달리 없습니다.

이 땅에 돌아갈 곳이 없는 설움은 꾹꾹 참겠지만 인생의 여정이 다 끝났는데도 돌아갈 곳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세상 여정 끝내고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아 노래하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귀천/歸天, 천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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