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마지막 한 마디

 

2024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평범했을 남은 몇날도 마지막이란 관점으로 보니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올해도 무수(無數)한 말을 주고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 말 가운데 위로가 되는 말도 있었고 상처를 안긴 말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가르쳤던 D. L 무디는 마지막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

프랑스의 이교도(異敎徒) 볼테르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소!----나는 지옥으로 갈거요.----”

그 마지막 말이 소망으로 가득찬 사람도 있고, 절망의 언어인 사람도 있습니다.

 

일년내내 불평과 탐심의 언어를 쏟던 사람의 마지막 말이 은혜롭긴 어렵습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삶을 살던 사람의 마지막 말이 험악(險惡)할리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한 마디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감동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감사합니다는 필경(畢竟) 감동의 언어 가운데 앞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 감사해요.” “교우님, 감사해요.”

 

늦지 않도록, 후회하지 않도록, 2024년도가 저물어가기 전에 말해보아요.


잃어버린 주인공을 찾아서

 

심리학 교수 한 분이 40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상테스트를 하였습니다.

성탄절이라는 단어를 주고 생각나는 것을 하나씩 적으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의 대답에는 추리, 선물, 휴일, 캐럴, 산타클로스등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40개의 대답 가운데 예수님이란 단어는 없었답니다.

아무도 성탄절의 진정한 주인공을 몰랐던 것입니다.

 

주인공을 잃어버린 잔치이야기, 그 학생들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성탄절의 거리를 걸어보십시오.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치장이 성탄절을 앞두고 거리를 메우고 있지만

정작 성탄의 주인공은 외롭고 쓸쓸한 거리.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의도하여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음받은 존재이고, 지으신 이의 의도가 있는 존재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내 인생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연말연시, 가짜 주인공들로 들뜨기 쉬운 성탄절.

이 세상이 잃어버린 주인공을 찾아뵙는 성탄절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는 25, 교회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성탄의 진짜 주인공을 만나보아요.

 

 

 

 

 


왕이 나셨도다

 

세상에는 가짜 왕이 너무 많습니다.

왕이 되려는 싸움이 치열합니다.

“내 것은 내 것이다, 네 것도 내 것이야.”

우리도 이런 싸움판에 한명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말합니다.

“내 방, 내 컴퓨터, 내 옷....”

착각입니다. 부모님이 그 값을 지불했지 자녀들이 지불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쓰고 있을지언정 자기들의 소유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위탁받은 것을 사용할 뿐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요 통치하는 왕이 단 한 분 있습니다.

그 이름 예수.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왕노릇하면 안 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왕이 나셨습니다. 놀라운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을 송축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동방의 작은 나라

 

동방의 작은 나라. 오랜 역사 가운데 수많은 외침(外侵)이 있었고

가난과 온갖 우상숭배와 공산당의 침략으로 가슴 아팠던 나라.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아주 쓰러진 것 같아도 다시 일으켜 주시어

오늘날의 경제(經濟)대국, 문화(文化)대국으로 세워 주신 나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넘치게 받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아직도 거짓과 인본주의 죄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라.

 

우리의 선진(先陣)들이 기도로 풍전등화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듯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또 다시 절절히 필요한 나라.

이러한 기도와 찬송이 있습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의 끝까지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며 주님만 섬기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의 주님 교회 위에 하늘의 생기 부어 주소서

열방을 치유하는 주 백성 주님의 군대를 일으켜 주소서

 

성령의 새 바람 이 땅에 불어오소서 주의 영 그 생기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땅에 하나님 영광 거하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열방에 하나님 영광 비추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살리사 하나님만 높이고

복음으로 열방을 치유하는 선교(宣敎)대국 되게 하소서.

 

 

 

 

 

 

 

 

 

 

 


마지막 한 달은

 

202412월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큰일을 하는 교회라는 표어로 출발한 한 해였습니다.

벌써 마지막 달이 되었습니다.

 

정녕 믿음으로 살아온 한해였던가.

어떤 도전을 하였으며,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가.

아쉬움이 큽니다.

 

마지막 한 달이 남았습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년을 기약하며 주저앉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2024년도의 센 물살이 여전히 우리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물살에 떠내려갈 것 같은 두려움도 있지만

믿음으로 발을 내딛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면

마지막 한 달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데 충분한 시간입니다.

 

 

 

 

 


진정한 축복

 

미국은 청교도들의 세운 나라입니다.

1620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으로부터 항해 끝에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

항해 길에 위험과 도착한 땅의 어려움 가운데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감사였습니다.

 

그들에겐 황량한 환경이 크게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이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신앙이 청교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풍요해진 강대국 미국이지만 감사는 초라해지는 것은 아닌지요.

청교도 나라 미국이 가장 먼저 회복해야 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입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고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진정한 축복은 감사드리는 자들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받은 은혜 잊지 말고 감사하며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성찬과 세례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성찬과 세례,

당연한 것인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성찬과 세례가 있는 것입니다.

 

성찬과 세례의 집례,

당연한 것인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집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찬과 세례를 당연히 여겼던 죄악을 회개하며

눈물과 감사로 예수님이 베푸신 생명의 식탁에 나아갑니다.

 

하늘의 양식을 먹은 답게 세상을 넉넉히 이기겠습니다.


입맛은 그대로

 

어느 마을에 가난한 감사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습니다.

고기가 드시고 싶어 정말 오랜만에 마음을 가지고 소고기 반근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들고 가시다가 길바닥에 떨어뜨리셨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개가 귀한 고기를 물어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광경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있으셨습니다.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무엇이 감사하시냐고 물었습니다.

"감사하지요. 비록 고기는 없어졌으나, 입맛은 그대로 있으니까요. 하하하"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시는 할아버지의 감사를 꺾을 것은 없었습니다.

 

감사의 달입니다.

올해 살아오면서 잃은 것도 적잖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러보십시오. 얻은 것과 남아 있는 것에 풍성함이 보일 것입니다.

입맛은 그대로 있어 감사하신 할아버지처럼, 영적인 입맛이 남아 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영적인 입맛은 기도의 갈망입니다.

나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에 대한 갈망입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내게 하나님께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여전히 끓어오르십니까.

 

그렇다면 두려워할 것도 염려할 것도 전혀 없습니다.


11

 

어느덧 11월이 되었습니다.

나뭇잎도 떨어지고 들판의 곡식도 추수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11이라는 숫자를 가만히 보면 결코 외로운 시간이 아닙니다.

112달 중에 이렇게 멋진 숫자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리로도 저리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동일한 숫자 11,

동행의 시간, 11.

 

외로우십니까?

힘드십니까?

내 옆에 계신 분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좋은 친구이신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

내 맘이 아플적에 큰 위로 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11, 많은 것들이 보이고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는 시간일터인데

친구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묵상하며 걷는다면

잊지 못할 2024년도의 멋진 11월이 될 것입니다.

 

 

 

 


덩실 덩실

 

 

 

나비는 사이로 다니면서 멋진 춤을 춥니다.

 

벌도 꿀을 만나면 신나게 춤을 춥니다.

 

고래도 칭찬을 들으면 묘기에 가까운 시원한 춤을 춥니다.

 

아버지도 아들이 돌아오자 풍악에 맞춘 춤의 자리를 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 자녀들이 기뻐 춤추는 모습을 여러번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덩실 덩실 춤을 추신 적이 있으십니까?

 

성경을 보다 너무 좋아서, 주님을 묵상하다 너무 감격해서 나홀로 춤을 춘적이 가끔 있습니다.

 

오늘도 춤추는 날이 아닐까요.

 

오랜만에 형제자매를 만나니 즐거워서

 

어떤 분은 주안에서 처음 만나기도 하니 반가워서 어깨가 들썩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무엇이 기쁜지 밤새 이상한 춤을 춘다고 합니다.

 

새벽에는 공허와 고통만을 남겨주는 허탈한 춤을.

 

 

 

즐거움이 없는 것인지, 즐거움을 표현 못하는 것인지  진정한 춤이 멈추어진 시대입니다.

 

가장 즐거움인 구원의 즐거움을 덩실 덩실 춤으로 표현하시지 않겠습니까?

 


괜찮다를 넘어

 

아버지는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기다림이 바로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탕진한 아들이었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한 가지가 있었답니다.

놀랍게도 아버지의 기다림, 아버지의 사랑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것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기다리던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체면을 차리지 않고 달려가 맞았습니다.

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어찌 이렇게 되었느냐?”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며 얼싸안고 입을 맞춘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아들에게 용서이상의 것을 주었습니다.

괜찮다, 아들아. 괜찮다.”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넘어입니다.

네가 돌아와 너무 기쁘다, 같이 즐기자하며 큰 잔치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아버지는 실패한 아들에게 잔치를 열어주며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어 준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행복에의 초대 주일입니다.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집밖으로 나간 아들만 탕자가 아니었습니다.

집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아들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집 안팎의 탕자에게 괜찮다넘어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나는 너희들을 여전히 사랑한다. 너희들을 기뻐한다.

일어나라. 다시 시작이다.”

 

 


가불

 

가불은 월급날에 앞서 미리 그달의 봉급을 일부 또는 전부를 받아가는 것입니다.

돈을 사정이 급하기 때문에 가불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시절에 사례비를 가불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재정이 갑자기 필요했었기에 가불을 신청했고

흔쾌히 허락을 받아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가불이란 제도는 남용하면 어려워 지기도 하지만 적절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불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재정" 가불이 아닌 "염려" 가불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 6:34a)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는 염려하지 않지만 매일 매일 먹고 살아갑니다.

들에 백합화는 염려하지 않지만 매일 매일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신뢰하는 자는 염려대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새와 꽃도 하나님을 신뢰하건만 사람은 신뢰대신 염려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재정의 가불은 간혹 필요하겠지만 염려의 가불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염려는 주권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요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평생 염려 가불 금지!!!


반드시 해야 할 일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인 가을은 우리로 겸손케 만듭니다.

무엇인가를 정리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도 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제 새벽에도 황계덕 권사님이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우리의 남은 날을 잘 계수해야 할 숙연한 계절입니다.

 

남은 시간, 우리 앞에는 세 종류의 일이 놓여 있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기에 봄이나 여름처럼 무엇인가 여유롭게

이것 저것 선택하며 지낼 시간이 없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제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할 일에 함께 마음과 정성을 모았습니다.

 

베드로전서 47절부터는 마지막 때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일러줍니다.

정신 차리고 기도하라.

뜨겁게 사랑하라.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

마지막 고지가 보이는 가을, 기도하며 사랑하며 봉사하며 걸어요.

 

 

 


그대들은 누구이십니까?

 

눈물이 말라버린 세대에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그대들은 누구이십니까?

 

건축바자회가 엿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바자회가 오는 토요일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온 교우들이 함께 기도하고 준비하고 수고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

놀라움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을 위한 일도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온 열방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7:9-10)

 

주님이 기뻐하실 하늘나라 다민족 예배의 웅대한 비전을 가슴에 품고,

다민족이 모여 사는 이민 땅에서 그런 예배가 드려지게 하옵소서 기도하며,

플러싱 한 모퉁이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건축바자의 길을 걸으며,

마음과 얼굴을 감동의 눈물로 적시게 하는 그대들은 누구이십니까?

 

 

 


다시 일어서는거야

 

누구에게나 투병의 길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아픈 사람은 자주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저도 지난 금요일 새벽에 고열(高熱)이 있어 응급실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오후 퇴원했습니다.

 

췌장암 발견 이후 세 번 입원해서 길게 또는 짧게 병원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몸은 힘들었지만 단단히 다져지는 내면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다시 일어서는거야

그리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제가 이렇게 당당하게 외칠 근거는 분명했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목사님을 다시 일으켜주옵소서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밤중에 부를 찬송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얼마 전에 보내주신 글입니다.

사랑하는 김성국 목사님----비록 아직 사방이 어둠이지만 닫힌 동굴이 아닌

열린 터널이니 곧 밝은 날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동굴 안에 갇힌 자처럼 엎드려 있지 않겠습니다.

열린 터널을 향해 힘있게 걸어가기 위해 일어서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지금 너무 힘들어 쓰러져 계십니까. 이렇게 같이 외칩시다.

다시 일어서는거야.”

 

 


나 돌아가리라

 

나 돌아가리라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과 실행은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드넓은 바다에서 살다가 마침내 자기가 태어난 강물로 돌아가 죽는다는 연어.

돌아가는 길에 숱한 어려움이 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연어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습니다.

 

내일 모레이면 추석.

이민자 그 누구도 쉽게 갈 수 없는 고향,

맞아주실 부모님도 아니 계신 경우가 많은 고향,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가야 할 목적지가 없는 사람은

매일 다가오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매일 절망의 시간일 뿐입니다.

찬바람과 눈보라가 세차게 불어오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가야 할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면 오늘도 소망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 돌아가리라

어디로 돌아가십니까?”

돌아갈 내 고향은 사모하는 주님과 그리던 성도들이 있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제 11차 다민족 선교대회가 있는 날.

우리에게는 다민족의 아버지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신 영원한 고향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열방이 함께 손을 잡고 하늘나라로.

 

 

 

 

 


원위치

 

원위치!”

조교의 말 한마디면 모든 훈련생은 즉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원위치를 잊고 무엇인가 계속 진행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하다 싶으면 원래의 위치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 지름길이고 바른 길입니다,

 

원위치기본으로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산만했던 여름 방학을 끝낸 자녀들이 다시 돌아갈 자리입니다.

성도에게 원위치는 신앙생활의 기본인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원위치는 건강을 잃은 사람이 너무나 부러워하는 자리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모든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지만 그 옛날 건강했던 시간들을

떠 올리며 다시 한번만 건강을 주옵소서라고 누구나 기도합니다.

 

원위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의 자리입니다.

자기의 원위치를 떠난 인류는 그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리운 자리, 원위치!

가야 할 자리, 원위치!

 

허물어진 세대, 회복이 필요한 이때에 그 기준은 단 하나 원위치!”입니다.


가을에는 무엇을 해야할까?

 

 

~가을인가 가~을 인가봐~

 

 

9월이 왔습니다. 가을 소리, 가을 내음도 살포시 9월과 함께 찾아 왔습니다.

아직은 농익지 않은 가을이지만 8월과의 이별이 있어야 했습니다.

김영남 시인은 “9월이 오는 소리에서 이렇게 들려주었습니다.

 

 

덥다고 너무 덥다고

저리 가라고 밀어 보내지 않아도

머물고 떠날 때를 알고 있는 여름은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많은 이야기를 담아냈던 여름은 머뭇거리지 않고 훌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가을도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떠나면서 곧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회없는 가을나기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요?

이렇게 답한 분이 있습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을이라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가을이라면,

가을이 마냥 외롭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다

 

오늘은 교회학교 졸업예배가 있는 주일입니다.

그동안 성실하게 배우며 풍성한 열매를 맺은 졸업생들을 축하하며 축복합니다.

눈높이를 맞추어 가며 최선의 신앙교육을 펼치신 선생님들의 노고(勞苦)가 컸습니다.

내 자녀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마음으로 함께해 주신 부모님들이 멋지셨습니다.

다음 세대를 향한 온 교회의 관심 어린 사랑과 기도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졸업은 그동안 수고했으니 이제는 쉬고 멈추라는 시간이 아닙니다.

졸업예배는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시간이며

졸업 이후 전개(展開)될 새로운 도전을 향해 힘있게 출발한다는 헌신의 시간입니다.

우리 졸업생들은 졸업과 함께 안주하거나 방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속된 부서의 이름이 바뀔 뿐, 믿음의 항해는 여전히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어른들로부터 영아에게 이르기까지 공동의 자산(資産)이 있습니다.

우리 졸업생들이 다 들고 있는 불변(不變)의 네비게이션 이기도 합니다.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성경을 열면 갈 길도 열립니다.

성경을 보면 미래도 보입니다.

성경을 알면 하나님도 알고 나도 알게 됩니다.

우리 졸업생들!

눈이 부시게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성경의 사람들!

 

 


필요한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인가?”

 

엘리사와 나아만은 동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였고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엘리사와 나아만은 가지고 있는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엘리사는 세상의 것은 달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가지고 있었던 성령의 능력을 갑절이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하늘의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높은 지위와 함께 금은보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성령의 능력이라는 수직적 자원이 가득하였고

다른 사람은 지위, 재물, 경력이라는 수평적 자원이 대단했습니다.

누가 그 시대에 더 필요한 인물이었겠습니까.

수직적 자원을 가졌던 엘리사였습니다.

 

수평적 자원은 달리 없어도 괜찮습니다.

성령의 능력이라는 수직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힘있게 펼칠 필요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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