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가장 멀리 어디까지 가보셨습니까?

다음 빈칸에 여러분이 가보신 가장 먼 곳을 떠올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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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게 먼 길이 있어요.

저 남미도 아니에요, 유럽도 아니고 아프리카도 아니지요.

머리에서 마음, 그리고 마음에서 입술까지가 참 멉니다.

 

 

하나님에 대한 머리의 생각들이 마음으로 내려와 하나님 사랑이 되고, 마음의 하나님 사랑이 입술의 하나님 찬양이 되기가 왜 이렇게 멀고 먼지.

 

오는 수요일, 그리고 목요일 찬양 집회가 있는 것 아시죠?

평일, 찬양 드리러 나오시기가 너무 먼 거리이신가요?

혹시 마일리지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가 먼 것은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시기까지 참 멀었는데.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한 걸음으로 내려오셨는데.

 

머리에서 마음이, 마음에서 입술이, 그리고 우리 집에서 교회가, 이렇게 먼 줄 몰랐어요.


우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텍사스, 플로리다 등 남부지역을 강타한 태풍 하비(harvey)와 어마(irma)로 인해 많은 것을 상실한 자들의 통곡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나 혼자만 천국 가는 데 만족하라는 부분적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복음은 총체적이며 온전한(whole)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미래에만 아니라 현재의 삶에도 소망이 되는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개인적일 뿐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의 아픔에도 참여하는 복음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동사무소(?)에선가 나누어 준 우윳가루를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맛도 있었고 배도 고파서 잘 먹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알았습니다.

그 우윳가루가 미국에서 보내 준 구호 물품이었던 것을.

훗날 알았습니다.

복음은 우는 자들에게 실체적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지금, 우리가 건너와 사는 미국 땅에 눈물이 철철 흐릅니다.

저 남녘에서 들려오는 울음에 동참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울 때 우리를 도왔던 그들을 우리가 도울 차례가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그들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흐르는 눈물을 조금이라도 닦아 주기 위해 위로와 사랑이 담긴 손길을 모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복음, 우리가 경험한 복음이기에.


“더”는 부사(副詞)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계속하여. 또는 그 위에 보태어. 어떤 기준보다 정도가 심하게. 또는 그 이상으로.

이렇듯,“더”는 짧지만,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벌써 찬바람이 이는 9월이 되었습니다.

이제 곧 한 해를 결산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가 가슴에 새기고 발길에 확인되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예루살렘에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길을 가슴 아프게 걸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으셨던 그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홀로 두고 도망갔거나 멀찍이 따랐던 길입니다.

그 때,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 눈물로 걸었지만 지금 저의 모습은 그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오는 9월 20일(수)-21일(목) 청장년을 위한 찬양 집회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청장년이라 함은 청년 선교부와 30~40대 선교회를 지칭합니다.

청장년은 물론 우리 교우 모두가 다시 회복해야 할 삶입니다.

더 먹고, 더 놀고, 더 편하고, 더 갖겠다는 이 시대의 풍조 속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싶은데...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옵니다.

이제 각 가정의 자녀들이 가을 학기를 맞아 학교로 다시 돌아갑니다.

쉼, 여행, 아르바이트, 새로운 경험 등 방학도 필요하지만 역시 학생은 학교로 돌아가야 가장 잘 어울립니다.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긴 방학을 이제는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back to school.

 

힘들고 어려울 때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하던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back to basic.

 

지금을 멈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돈스런 지금을 끌고 더 불투명한 미래로 걸어갑니다.

그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안 봐도 video입니다.

 

개혁교회의 기본은 말씀입니다.

장년세대의 기본도 말씀입니다.

다음세대의 기본도 말씀입니다.

말씀에 지금의 길이 있고, 말씀에 미래의 답이 있습니다.

역시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가장 잘 어울립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멈추고 back to the bible.


지난 8월 5일부터 13일까지 런던에서 세계육상 선수권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의 마지막 은퇴경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번개같이 빠르다고 하여 라이트닝 볼트라는 별명을 가진 우사인 볼트는 100m, 200m, 400m 계주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세계육상계를 좌지우지하였던 그에게도 마침내 은퇴의 시간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12일에 있었던 그의 마지막 공식 경주, 400m 계주의 마지막 주자로 달리던 그가 쓰러졌습니다.

우승은커녕 결승라인을 통과도 못한 채 동료들의 부축 속에 경기장을 씁쓸히 떠나야 했습니다.

육상황제의 너무나 안타까운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 후의 보도에 의하면 그가 다리에 경련이 있었다고도 하고, 경기를 앞두고 새벽까지 음주 가무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그의 마지막은 결코 “finish well”이 아니었습니다.

 

최근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사모님이 방송 인터뷰를 하게 되었답니다.

“사모님, 목사님께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방송 진행자의 질문에 사모님의 대답은 이러하셨답니다.

“끝까지 사고 안치시고(?) 목회를 마치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너무나 어수선한 세상이라 남편 목사님의 “finish well”을 기원하는 사모님의 표현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it is finished.”라고 외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외침과 선언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의 finish well”, 기도의 제목이며 삶의 소원입니다.


둘째 손녀 “마음”이는 태어난 지 한 달 하고 열흘을 막 지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갓난아기입니다.

아직까지 먹고 잠을 자는 일이 주 업무(?)입니다.

제가 처음 안아 줄 때 뭔가 불편하다는 듯이 끙끙거리며 작은 손과 발, 온몸도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며칠이 지난 지금은 편하게 안겨 있습니다.

 

저는 이번 휴가 중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에 있었던 “global leadership summit 2017” 에 등록하여 참석하였습니다.

이 리더십 컨퍼런스는 매년 이맘때 시카고의 윌로우 크릭 church 주관으로 열립니다.

올해는 123 국가의 수천 개 교회가 각 지역에서 참여하여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강의를 들었는데, 대략 400,000명의 지도자들이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갔었던 지역 교회는 1,500명 정도가 모인 “church on the hill”이었습니다.

 

“구도자예배”를 앞세우며 지난 20-30년간 영향을 끼쳐오던 윌로우 크릭 church의 빌 하이블스 목사님이 지금은 세계적 리더십 컨퍼런스를 통해 새로운 영향력을 끼치고 계십니다.

저명한 교계의 지도자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강의 또는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 이번 컨퍼런스의 개강 강의에서 빌 하이블스 목사님은 마지막에 한 사진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큰 손 안에 쥐어져 있는 갓난 아기의 작은 손”의 사진이었습니다.

빌 하이블스 목사님은 아버지의 큰 손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갓난 아기의 작은 손은 이 땅의 연약한 리더들의 손으로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붙들린 리더들의 작은 손. 아무리 작아도, 아무리 약해도 괜찮습니다.

진정한 리더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그 약한 손들을 꼭 붙잡고 리더의 길을 이끄실 것이니까요.

이번 휴가 때에 “마음”이의 갓난 아기 손만 본 것이 아닙니다.

제 손이 갓난 아기 손으로 새롭게 보였습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두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지속적으로 실험 발사하는 북한의 태도에 대해 미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것 같습니다.

미국은 그냥 좌시하지 않겠다며 심각한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음을 여실히 보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8월 위기설(危機說), 8월 전쟁설(戰爭說)이 허황되이 들리지 않는 이 때에, 걱정하고 두려워할 일만이 아닙니다.

이 8월, 우리가 부를 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에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 데 없네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

 

그렇습니다.

여기저기서 발사되는 미사일이 잘난 듯이 저 하늘 높이 솟구쳐도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먼지만도 못한 시시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각 나라의 정권이 제 아무리 힘 있다고 떠들어도 우리 주 목소리 한 번만 발하면 천하의 모든 것이 다 망합니다.

우리에게 8월에 부를 노래가 있는 한, 난리의 소문이 끊이지 않는 8월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만 ♬...”


지난 화요일(25일) 오전, c국의 k시에 있는 지하 신학교를 l선교사님의 안내로 방문하였습니다.

허름한 아파트의 베란다를 개조해 신학교 교실(?)로 만들었는데 40여명의 남여신학생들이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1년에 네차례 모여 한번에 2-3주 동안 합숙하며 수업을 진행한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아침에 1시간 20분 동안 l선교사님의 통역으로“소명”에 대한 특강을 하였습니다.

2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에 이르는 신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였습니다.

강의 중반 즈음에 그들에게“우리가 다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각각 은사가 다르니 주어진 자기의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잘 섬겨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립시다” 라고 강의하면서“이 자리에 음악의 재능을 가진 분들이 있으면 나오셔서 특송을 하시면 좋겠습니다”라는 제안을 드렸습니다.

 

6명의 신학생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나와 잠시 의논 후, 그 중에 한명이 키보드를 치고 5 명은 찬양을 진지하게 불렀습니다.

중간 즈음에 제가 나지막히 l선교사님께 그들이 부르는 찬양에 대해 물었습니다.

“무슨 뜻이죠?”

선교사님은 뜻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모르겠는데요.

”청산유수로 통역하시던 선교사님의 그 뜻을 모르신다는 데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목사님, 저들은 지금 c국 말로 통일된 찬양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수민족 언어로 각각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릅니다.”

 

찬양 후 선교사님이 키보드를 친 분에게 물어 그 내용을 알게 된 선교사님이 제게도 일러 주셨습니다.

찬양의 내용은“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나는 존재하지 못하네...” 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을 뛰어넘어 공부하러 모이고,

매시간 눈물로 강의를 경청하는 이유가“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는 고백적 찬양 가운데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현지 지도자 세미나를 위해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저들의 순전한 고백적 찬양이, 중요한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제 귓가에서 오래동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더위에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선교팀들이 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하고 또 출발할 팀도 있고…

여러분들이 더위 가운데서도 뜨겁게 중보기도 해 주셔서 이렇듯 힘있게 선교를 할 수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캄보디아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으실 즈음에는 한국에 있을 것이고 오는 주간에는 중국도 다녀옵니다.

캄보디아 이야기입니다.

 

캄보디아에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어느 학교에서건 음악교육이 없습니다.

음악은 단지 노래방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접할 뿐입니다.

인구의 삼 분의 일에 달하는 2백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킬링필드(1975-78) 때에 이미 그들은 노래를 잃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새가 운다”고 말하지만, 미국에서는“새가 노래한다”고 표현합니다.

캄캄한 밤에도 노래하는 새가 있습니다.

나이팅게일이라는 새입니다.

이 새는 밤이라도 노래를 부르는데, 캄캄한 밤의 시간에 캄보디아 사람들은 노래를 잃은 것입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복음은 노래를 잃은 사람에게 노래를 되찾아 준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복음을 가슴에 품은 자마다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이번 단기선교를 통해 보았습니다.

 

캄보디아 단기 선교팀은 이번 선교 중에 주님의 사랑으로 말씀을 전해 주었고, 안경도 맞추어 주었고, 영어도 가르쳐 주었고, 미술도 가르쳐 주었고, 머리도 깎아 주었고, 머리도 감겨 주었고, 참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도폭발 등을 통해 구원의 예수님을 증거도 하였고, 지도자들에겐 제자의 비전에 대한 세미나도 진행했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결과로 캄보디아인들의 가슴에서 출발한 노래가, 그것도 하나님을 송축하는 노래가 저들의 입을 통해 크게 불려졌습니다.

큰 상처를 입고 슬픔 가운데 잠겨 노래를 잃은 캄보디아가 다시 노래를 부르는 나라가 되기까지 무엇을 하여야 할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50번째 주(州)인 하와이는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와이 주(州)의 수도 호놀룰루는 오하우 섬에 있고, 코나 열방 대학은 하와이 주에서 가장 큰 섬인 빅 아일랜드에 있습니다.

 

몇 년 전 코나 열방 대학에서 진행하는 한인 목회자 제자훈련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업 장소는 야외였고 바다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불렀던 많은 찬송 중에 가장 격한 눈물 가운데 부른 찬송은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였습니다.

 

주 품에 품으소서

능력의 팔로 덮으소서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보이는 바다에 거친 파도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출렁이는 바다 물결을 보면서 부르는 찬송 가운데 나를 품으시고 나를 날아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히 느꼈습니다.

 

저는 압니다.

거친 파도가 날 향해 와도 그 파도는 저를 삼키지 못한다는 것을.

폭풍우 때문에 떨지 않고 주와 함께 날아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거친 폭풍우 위에서 잠잠히 주를 바라볼 것입니다.


7월 둘째 주,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할 때일까요?

뜨거웠던 전교인 여름 수련회가 끝난 지금은, 올해의 하반기를 바라보며 조금 여유롭게 보낼 시간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에릭과 그의 가족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주님의 넘치는 위로와 선하신 인도하심이 있기를 간구할 때입니다.

 

지금은 교육부를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힘들어하는 교사들과 학생들과 많은 대화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단기선교를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난 6월의 알마티선교를 시작으로 연이어 출발하는 단기선교팀이 가는 곳마다 복음의 열매를 맺고 안전하게 다녀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새 성전건축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qpem, 다음 세대, 다민족을 위한 새 성전은 기도로 세워야 합니다.

 

지금은 올여름에 교회 안팎에서 계속될 행사들을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의 여름학교, 교회 밖에서의 청년들 수련회가 기도를 요청합니다.

 

지금은 나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절망의 어두움과 두려움이 물러가고 소망의 변화와 부흥이 힘 있게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내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주일간 특별새벽기도회가 있게 됩니다.

매일 새벽 5시 45분부터 시작되는 기도회에 동참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우리가 함께 모여 부르짖어 기도할 때임이 분명합니다.


유치한 질문 몇 개 들어보실래요?

 당연한 답변도 서비스 차원에서 알려드려요.

“차가 망가졌어요?

 어떻게 하죠?”

“오토샵으로 가시면 됩니다.”

“시계가 고장 났는데... ?”

“뉴욕에 좋은 시계 수리 기술자 많은 것 아시잖아요.”

“머리가 너무 길고 엉클어졌어요?

어디로 가죠?

“빨리 미용실로 가세요”

 

다음 질문도 유치한가요?

“인생 살다가 낭패와 실망을 당했는데 어떡하면 좋아요?”

자못 심각하군요.

하지만 거기에도 분명한 답이 있습니다.

우선 제가 찬송을 잔잔히 부를 테니까 잘 들어 보세요.

거기 답이 있어요.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갑니다

십자가 은혜받으려고 주께로 갑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받고 이 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갑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했다면 많이 힘드시겠습니다만 속절없이 울지만 마시고, 비통의 비명만 쏟지 마세요.

은혜와 위로를 가지고 계시고, 이생의 풍파를 잔잔하게 해주실 분이 있으니 그분에게로 가면 됩니다.

그분 앞에 가면 놀랍게도 울음소리 멈추고 비명소리 그치고, 영광의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물론 다음 분들도 그분에게 가면 강력한 효과가 있습니다.

 

고통의 멍에를 벗고 자유와 기쁨을 맛보고 싶은 자.

병든 몸이 튼튼해지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고 싶은 자.

죄악, 교만, 실망 다 내버리고 복되신 말씀 따르고 새 힘을 얻으려는 자.

 

그 분에게 가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그 분에게 함께 가실래요?


오늘은 6.25전쟁 67주년의 날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역사를 잊으면 제대로 된 자신의 미래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6.25. 우리는 그 날을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됩니다.

특별히 남침을 감행한 무리에 죽음으로 맞선 군인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6.25전쟁 피난길에 한 군인의 죽음을 목격(目擊)한 모윤숙 시인은“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詩)를 썼습니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

 

조국의 자유를 지키다 죽어간 25세의 군인.

그는 자기 죽음의 이유를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와 같은 이들의 이유 있는 죽음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도 33세에 자신 죽음의 이유가 대속(代贖)의 죽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 자기 죽음의 이유가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죽음을 뛰어넘는 죽음이 될 것입니다.


소리 없는 화음을 들어보셨습니까?

소리 없는 설교를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들어 보았습니다. 아주 선명하게.

교우 여러분들의 기도와 후원 속에 다녀온 알마티에서.

 

지난 주일(11일)은 알마티 퀸즈장로교회 설립 25주년 기념 주일이었습니다.

오전에는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고 오후에는 기념 감사 찬양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찬양제에는 우리 단기선교팀을 비롯해 12팀이 참여하였습니다.

그 중에 4명의 농아 장애우로 구성된 찬양팀도 있었습니다.

맨 앞의 인도자가 수화(手話)로 솔로(?)를 하면 그 솔로의 양옆과 뒤에 서 있던 장애우들이 중간 중간에 손으로 화음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설명을 들어보니“나를 진주와 같이 만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뜻의 찬양이었습니다.

고난 속에 만들어진 진주와 같은 존재가 바로 자기들임을 감사한 것입니다.

마음의 소리로만 드려진 수화 사중창, 어떤 화음보다 아름다운 화음이었답니다.

 

“제가 설교해본 지가 7년이나 되었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있었던 현지교역자, 한인 지도자 세미나 때에 어느 선교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선교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제도와 상황 속에서 입으로 하는 설교 대신 삶으로 복음을 증거해 오신 선교사님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삶으로 외쳤던 설교가 얼마나 진실했는지를, 그를 존경하며 따르는 사람들과 그가 끼친 다양한 영향력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침묵의 찬양이 더 간절할 수 있고,

침묵의 설교가 더 진실할 수 있음을 이번 알마티선교 중에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여러분들의 뜨거운 기도와 정성 어린 후원 가운데 카자흐스탄 단기선교 팀과 함께 알마티에서 사역 중에 있습니다.

알타미 퀸즈장로교회 설립 25주년 예배와 여러 사역이 있었고, 내일부터는 현지 목회자와 한인 지도자들을 위한 세미나도 진행될 것입니다.

전도폭발 사역, 미용 사역, 그리고 네일 사역도 계속 될 것입니다.

 

각기 주어진 소명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10개의 단기선교 팀을 위한 선교바자회가 아름답게 마무리되었지만, 바자회를 준비하다가 또는 바자회 가운데 모든 교우들이 피곤하셨을 것이고, 피곤함을 넘어 아프기도 하셨을 것이고, 아픔을 넘어 눈에 보이는 상처를 가지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교우들의 피곤과 아픔과 상처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느끼면서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저는 분명히 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 가운데 새겨진 예수의 흔적입니다.

예수의 흔적으로 승화된 상처와 아픔에는 가슴 저민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그 날, 우리 때문에 손, 발, 옆구리, 머리, 온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많이 가지신 예수님을 다시 뵈올 그 날.

이런 일 저런 일 가운데 갖게 된 예수의 흔적들이 우리에게 있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위로해 주시지 않을까요?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 긴 신앙 여정 가운데 예수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면 예수님은 속으로 이렇게 의아해하시지 않겠습니까.

“어? 이건 뭐지?”

 

어제, 선교바자회 치르시느라 많이 힘드셨지요?

몸살 나지 않으셨나요? 큰 수고 하셨습니다.

사실 어제 바자회가 있었다는 말은 충분한 표현이 아닙니다.

더 더 오래전부터 많은 분들의 기도와 생각과 준비와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고도 싶을 것입니다.

“굳이 고생하면서 시간 들여 바자회를 할 필요가 있느냐.

바자회의 결산에 걸맞는 금액을 선교기금으로 모으면 안 되나... ?”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 계산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옥합을 깨어 그 안에 담긴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어드렸을 때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노라”고 책망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계산적으론 맞는 말인데 예수님은 그들을 나무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계산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선교 바자의 최종목적도 몇만 불이라는 결산이 아닙니다.

물론 그 소중한 결산이 이번 단기 선교 각처에서 아름답게 쓰일 터이지만

우리의 선교 바자는 돈으로는 결코 계산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며, 선교 소명에 대한 각자의 응답이며,

우리 공동체에 대한 결속의 다짐이랍니다.

 

올해도 돈으로 결코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을 함께 일구신 우리 교우들.

이런 멋진 분들과 같이 한 주님, 한 교회를 섬기는 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충청도에서 8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충청도 말이 길고 느리다고 생각하시는데 의외로 짧고 의미가 분명합니다.

예를 들면 “춤을 같이 추시겠습니까?” 라는 말을“출텨?”하면 상대방이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또“보양탕을 먹으십니까?” 라는 질문은 “혀?”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와 같이 가시겠습니까?”라는 긴 문장은 “갈텨?”하면 됩니다.

제가 오늘 칼럼에서 몇 번“갈텨?”라는 말을 사용할 터인데 무례한 말로 여기지 마셨으면 합니다.

 

오늘 오후 예배에 갈텨, 안 갈텨?

오늘 오후 예배는 러시아어권 설립 1주년 예배로 드립니다.

가족 안에 돌잔치가 있다면 웬만하면 다 갑니다.

러시아어권 예배의 설립 첫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같이 가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들을 축하하고, 다민족 선교 비전을 다시 새롭게 합시다.

그런 예배 같텨, 안 갈텨?

 

내일 한마음 축제에 갈텨, 안 갈텨?

내일은 일 년 동안 설레며(?) 기다린 전교인 한마음 축제입니다.

1-4부 예배, 교육부 예배, 청년 예배, 영어 예배, 중국어 예배, 러시아어권 예배로 나뉘어 있는 우리 모임이 한마음인 것은 내일과 같은 모임에 함께 함으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축제 갈텨, 안 갈텨?

 

토요일 선교 바자에 갈텨, 안 갈텨?

오는 토요일은 선교바자회 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성취에는 선교라는 방법이 큰 역할을 합니다.

모두들 벌써 이 일에 얼마나 열심을 내는지... 참 아름답습니다.

아무튼 10개 팀으로 나가는 올 여름 단기 선교에 동참하는 방법은 이번 토요일 선교 바자에 함께하시면 됩니다.

그런 바자 갈텨, 안 갈텨?

 

세상 여정 끝나고 천국에 같텨, 안 갈텨?

우리의 세상 생활은 눈물 골짜기를 비롯 다양한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의 최대 소망은 이 세상 여정이 모두 끝난 후, 눈물 없는 천국에서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성삼위 하나님을 영원토록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런 천국 갈텨, 안 갈텨?


지난 월요일 밤 첸위지 전도사님으로부터 힘든 소식을 받았습니다.
목사고시를 치루기 위해 총회가 열리는 알라스카로 며칠 전 떠났던 첸 전도사님이 그 결과를 알려온 것입니다.
“목사님, 다른 모든 과목은 pass했는데 설교 과목에서 fail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과목이면 몰라도 설교에서 떨어지다니.
아시는대로 첸 전도사님의 열정적인 설교는 중국어 회중은 물론 한국어 회중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어왔고 중국어 예배 부흥에 견인차 역할을 해왔습니다.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총회 장소에 도착한 장로님들은 총회와 고시부 관계자들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저는 이 상황을 하나님 앞에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 몇가지 묵상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펼치시는데 그것은 항상 신실하신 것이며 가장 좋은 것이다.
총회와 고시부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이번 일로 총회 지도부가 각 교회의 비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첸전도사님은 더 겸손하고 더 위대한 설교자가 될 것이다.
중국어 예배는 더 부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다민족선교의 비전은 기도와 성찰을 통해 더 힘있게 전개될 것이다.
우리 교회가 너무 귀하고, 성도들이 참 아름답고 너무 보고 싶다...”


싸움질은 기본이요 온갖 나쁜 짓을 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이 아들이 결국 교도소에 갈 것을 아버지는 압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죄를 짓고 교도소로 들어갑니다.

면회 온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여기는 절대 올 곳이 아니니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살아라.”

 

후에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아버지가 교도소를 가게 된 진짜 이유를 알려 줍니다.

“아버지는 너를 위해 일부러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간 것이란다.

네가 교도소에 들어오지 말라고 미리 들어가 막고 있는 것이란다.”

 

이 놀라운 말을 들은 아들은 변하여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이철환 씨의 작품에 나오는“먼 불빛”이란 실화 내용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스스로 어둠이 되었다.

빛을 거부했던 아들의 어둠 속으로 들어와 끝내는 그르치고야 말 그의 인생 앞에 불빛 하나를 밝혀주었다.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인생에서 표류할 때마다 두고두고 바라볼 먼 불빛, 아버지, 아버지….”

 

우리 부모님들은 모두 그런 분들이십니다.

방황하는 우리 인생길 앞에서 희생으로 밝히신 먼 불빛이 되시어, 가서는 안 되는 길을 일러 주시고 가야만 하는 길을 비추어 주십니다.


야바위꾼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여기 한 번 와보라”고 외치면서 동시에 이런 으름장 섞인 말도 합니다.

“자 자 애들은 가라.”

야바위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장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눈에 자기들이 사기 치는 것이 들통날까 봐 걱정스럽기도 한 것입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애들은 가라”는 야바위꾼의 쉰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과 말하다가 뭔가 불리한 듯 싶으면 갑자기 그 아이를 위아래로 째려보다가 퉁명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어디서 쪼그만 게 까불어. 저리 가!”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애들은 가라.”

“어디서 까불어!”라고 차갑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참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뿐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어른도 좋아하십니다.

왜 그러신 줄 아세요?

이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3b-5)

 

예수님은 어린아이를“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정의(定義)하셨습니다.

예수님은“자기를 낮추는”어린아이와“자기를 낮추는”어린아이 같은 어른들을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따듯하게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어서 와라.

이 천국은 너희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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