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스펙은 제품설명서를 뜻하는 specification 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펙이 좋다는 것은 남다른 기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펙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남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궁금해 하고 스펙이 많고 다양한 사람일수록 대단히 여기는 풍토가 있습니다.

 

스펙으로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의 화려한 스펙보다 더 찬란한 스펙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두바이에는 세계 최고의 칠성급(七星級)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최고의 호텔이었던 5 성급 호텔을 누른 7 성급 호텔이 탄생했다면 그 언제가 9 성급 호텔도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라 스토리입니다.

스토리는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스토리가 쏟아져도 걱정하거나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스토리를 빼앗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시간과 장소는 스펙처럼 특별한 곳과 특정한 때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日常) 속에서도 남다른 특이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낫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펙의 사람이고, 남들과는 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토리의 사람입니다.

스펙을 지향할 것인가 스토리를 지향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은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스펙보다 스토리가 자신을 더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조금 더 다가가면 모든 일상 속에서 나의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간다면 위대한 영적 스토리–간증까지 생긴답니다.

스펙의 시대에 스펙이 없어도 당당함을 뛰어 넘어 압도하는 사는 길, 스토리의 삶입니다.


스펙은 제품설명서를 뜻하는 specification 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펙이 좋다는 것은 남다른 기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펙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남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궁금해 하고 스펙이 많고 다양한 사람일수록 대단히 여기는 풍토가 있습니다.

 

스펙으로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의 화려한 스펙보다 더 찬란한 스펙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두바이에는 세계 최고의 칠성급(七星級)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최고의 호텔이었던 5 성급 호텔을 누른 7 성급 호텔이 탄생했다면 그 언제가 9 성급 호텔도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라 스토리입니다.

스토리는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스토리가 쏟아져도 걱정하거나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스토리를 빼앗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시간과 장소는 스펙처럼 특별한 곳과 특정한 때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日常) 속에서도 남다른 특이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낫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펙의 사람이고, 남들과는 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토리의 사람입니다.

스펙을 지향할 것인가 스토리를 지향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은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스펙보다 스토리가 자신을 더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조금 더 다가가면 모든 일상 속에서 나의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간다면 위대한 영적 스토리–간증까지 생긴답니다.

스펙의 시대에 스펙이 없어도 당당함을 뛰어 넘어 압도하는 사는 길, 스토리의 삶입니다.


어느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이상한 욕을 듣고 살게 되었답니다.

간암 말기 진단을 받은 그는 3 개월 밖에 못 산다는 최후통첩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시한부 인생임을 자신도 주변의 모든 사람도 다 알고 눈물로 하루하루 지내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를 보고 “살 놈!”이라고 외치고 지나 간 것입니다.

놈이란 욕을 들어 언짢았으나 그 앞에 있는 수식어에 너무 감동이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곧 “죽을 놈!”이라고 여기며 지내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말은 안 해도 자기와 똑같은 시각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뜬금없이 “살 놈!”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이 시한부 인생의 시각은 그 때부터 바뀌었습니다.

“나는 죽을 놈이 아니다.

나는 살 놈이다.

나는 살 수 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삶에 대한 뜨거운 용기를 가지고 말이나 태도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없이 들어도 좋은 나는 “살 놈!”

 

그 시한부 인생에게 “살 놈!”이라고 욕(?)하신 분은 다름 아닌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시한부 인생에게 “살 놈!”이라고 욕한 것이 아니라 “샬롬!”이라고 인사한 것입니다.

평안을 기원한다는 “샬롬”을 “살 놈”으로 잘 못 들었으나 아무튼 그는 교회도 다니고 기도도 하면서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샬롬”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로 화목의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미안한 표현이긴 합니다만 우리 모두는 “살 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크게 이해를 간구하며 인사합니다.

오해 없이 들어주십시오.

하지만 그 내용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살 놈이여 샬롬!


일주일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2015 년 사순절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한 걸음씩 내디딘 걸음이 머잖아 부활절을 지날 것이요, 그 언젠가는 주님의 존전 앞에도 이를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으실 질문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기철 목사님은 이런 글을 옥중에서 남기셨습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른 것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이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리이까?”

목사님은 주님께서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할까를 늘 생각하면서 이 땅을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목사님은 5 년의 옥고(獄苦)를 치르면서도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시고 47 세이시던 1944 년 4 월, 가장 아름다운 고난의 잔, 순교(殉敎)로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아흔 여섯 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2015 년 삼일절을 맞고 있습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그 해 열일곱 살 꽃다운 나이의 여학생 유관순은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소망의 미래로 일깨우기 위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조선의 해방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다 함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나는 대한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 만 18 세가 되기도 전(前)인 1920 년 9 월 순국(殉國)한 어린 소녀의 마지막 말은 이랬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오늘 우리는 교회 설립 41 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위대한 사도행전의 역사를 재현하는 교회가 되게 하자”는 기치를 들고 중단 없이 달려왔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이민 땅에서 많은 교회가 넘어지고 흩어지는 가운데 우리 교회는 그 초점을 잃지 않았기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초점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동안 절대 진리인 성경의 자리를 대신하여 이성(理性) 또는 과학(科學)이 절대 진리인 것처럼 행세하여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왔습니다만 이제는 그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절대 진리에 대한 관심보다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세상의 “절대 진리”에 대한 태도는 무관심이 아니라 실망에 가깝습니다.

오늘에 지친 삶에 대한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하고, 현대의 혼돈스런 삶을 조금도 변화시켜 주지 못하는 진리에 더 이상 소망을 두고 싶지 않다는 애절한 절규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진정성을 보여 준다면 세상은 다시 그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그 말씀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간다면 초점 없이 상대주의에 빠져 살던 사람들이 다시 귀를 쫑긋일 것이며 눈의 초점을 그 하나에 모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라는 목표는 그렇게 세워진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변화시킬 진리를 기다려 왔습니다.

척박한 이민 땅에서 우리 교회의 41 년이 “사도행전 역사의 재현”이라는 선명한 초점에의 승리였다면, 상대주의가 편만한 시대에서의 지속적 승리를 위해 “말씀으로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라는 초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른 초점과 그 초점을 향한 타협 없는 헌신을 보여주신 우리교회 1 세대의 어른들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다음 장(章)의 역사를 힘 있게 쓰기 시작한 새로운 세대(世代)에게 뜨거운 사랑을 전합니다.


 

사순절, 기도의 계절이 다가 왔습니다.

기도는 항상 해야 하지만 사순절은 구약의 미스바 성회처럼 우리 온 교회가 하나님께 나아가 전심으로 부르짖는 특별한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사순절 기도는 개인의 회복, 가정의 축복, 교회의 부흥, 선교의 확장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은 세 사람이 함께 조를 짜서 참여하는 삼겹줄 중보기도회로 진행 할 것입니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많은 분들이 삼겹줄 중보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먼저 세 사람이 한조를 짜서 그 이름을 교역자에게 제출해 주시면 됩니다.

유의하실 것은 한 사람은 꼭 한 그룹에만 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쁘실 테니까

겹치기 출연은 삼가 주세요.

 

중요한 것은 사순절 동안 세 사람이 자주 만나 서로 격려하고 서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만남이란 의미는 새벽기도회 시간에 꼭 같이 앉으라는 것이아닙니다.

매일 새벽기도회 후에 친교실에서 베이글과 커피를 앞에 두고 만나실수 있고, 밖에서 만나셔서 삼겹줄 중보기도모임답게 삼겹살, 삼계탕, 삼선짬뽕 또는 삼합 등 ‘삼’자가 들어간 음식을 먹는 것도 참 좋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을 불러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8b)"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깨어 기도하라”는 명령이 이번 삼겹줄 중보기도에 참여하는 우리 모든 교우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졸지마시고, 포기마시고, 안 된다고 하지 마시고 깨어 기도합시다.

깨어 기도할 때 나 자신도 깨어나고, 내 가족도 깨어나고, 교회도 세상도 깨어날 것입니다.

세 사람의 중보기도, 세 사람은 물론 세상을 새롭게 바꿀 기적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b).”

그렇습니다.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서로 인사할 때 “마라나타!”라고 외쳤습니다.

원문 성경 고린도전서 16 장 22 절에 나오는 “마라나타”는 우리 성경이 번역한 대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제 곧 우리 주님이 오십니다.

어떤 어려움도 잘 참고견딥시다.”라는 의미로 마라나타를 그들의 인사로 삼은 것입니다. 

오늘날은 초대 교회의 상황이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외칠 것도 마라나타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요한계시록을 강해합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에도 마라나타를 풀어 쓴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22:20)라는 간절한 외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나타의 신앙을 일깨워 줄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잘 이해하시고 요한계시록 전체를 읽으시며 사순절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험한 세상을 넉넉히 이기시는 모든 교우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1-3 장에는 서론과 일곱 교회 이야기가 있다 

4 장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 예배 광경이 보인다

 

5,6 장에는 일곱 인이 떼어진다 

7 장에는 많은 무리가 예배드리는 광경이 있다

 

8,9 장에는 일곱 나팔 이야기가 있다 

10 장에는 일곱 우레 소리가 있다

 

11 장에서는 두 증인이 죽는다 

12 장에는 용과 여자의 싸움이 나온다

 

13 장에는 666 숫자가 나온다 

14 장에는 144,000 명이 나온다

 

15 장에는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가 있다 

16 장에는 일곱 대접이 부어진다 

17 장에서는 음녀가 망한다 

18 장에서는 바벨론이 망한다

 

19 장에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있다 

20 장에는 천년왕국 이야기가 있다 

21 장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인다 

22 장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우리 모두가 가슴 저미게 외치고 외칠 그 말,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니~ 벌써~♬

2 월이 되었습니다. 신년하례 예배 드리고, 제직수련회 지나고, 청년수련회 잠간 갔다 왔더니 한 달이 훌쩍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이 시간입니다. 농부들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더 빠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아직 겨울이지만 농부들의 마음은 밭으로 나가 있겠고 파종을 하기 위한 여러 준비를 할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파종 했다고 그의 일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부터 바쁜 일이 진짜 시작되는 것입니다.

농부는 수시로 밭을 드나들며 심은 작물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 둘러볼 것입니다.

만일 어느 농부가 게을러서 밭을 둘러보지 않는다면 그의 가을 들녘에서는 부를 노래가 없을 것입니다.

후회의 탄식과 눈물이 볼품없이 자란 작물에 뚝뚝 떨어질 것입니다.

부지런히 돌본 농부의 밭은 자신이 먹기에 넉넉함은 물론 그 풍부함을 함께 누릴 이웃들의 존경어린 눈길을 받을 것입니다.

 

이 땅의 밭이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예민합니다.

돌보지 않고 가꾸지 않는 영혼은 겉으로는 잘 표시가 나지 않는 것 같지만 곧 비틀거리다가 조그마한 시련에도 쓰러질 것이요,

잘 돌본 영혼은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영적 열매를 함께 나눌 것입니다.

 

2 월은 영혼을 부지런히 돌볼 계절입니다. 이번 주면 제자훈련과 영성훈련이 시작됩니다.

사순절도 2 월에 시작됩니다.

영혼 가꾸는 일, 나중에 해도 괜찮으려니 하다가는 자신의 육신도 거하기 싫다고 외칠 황폐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영혼을 부지런히 가꾸세요. 영혼을 가끔 돌보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 삼지 마십시오.

너무 빠르게 다가온 2 월, 그나마 2 월은 삼일 먼저 도망가니 영혼을 잘 가꾸어 거두셔서 풍성한 2 월의 가을을 만들어 봅시다.


고(故)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는 한 살 때 소아마비가 걸려 평생 두 발을 쓰지 못하였고 암에도 걸리고 또 재발도 하여 투쟁 이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서 그 제목을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기적이란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단지 하나님에 의해 행해졌다고 굳게 믿어지는 기이한 일을 지칭합니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기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어 기적을 펼치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닌 사건들이 우리의 지난 삶이었고 또 우리들 앞날의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어린 아이의 점심 도시락,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 오병이어는 수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을 충분한 재료였습니다.

내 인생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계산하지 마십시오. 상상 못할 기적도 있습니다.

 

장영희 교수는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생생하게 제 생애에 기억되는 사람입니다.

어디선가 ‘장영희’하면 하던 것을 멈추고 ‘장영희씨에게 또 무슨 아름다운 일이 있었다는 거야?’ 궁금해 하면서 둘러보게 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는 분이 기억되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모습을 인간의 관점으로만 보지 않고 그 모습 위에 펼쳐질 기적을 기대하며 노래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삶이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기억이 된다면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은 삶을 산 것입니다.

 

올 한해도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우리에게 기적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살아온 것이 기적인데 살아갈 것도 기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경이로운 열매를 거두는 기적의 삶,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루어 가실 나의 삶이 될 것입니다.

현실을 탓하지 않고 기적을 기대하며 기적을 베푸실 하나님을 노래하며 살 때, 먼 훗날 나의 삶을 아름다운 삶으로 기억해 줄 사람들이 몇이라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예배 후, 모(某) 집사님을 제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집사님의 부친께서 한국에서 소천 하시어 위로 차 뵙게 된 것입니다.

올해 아흔이 되신 그 부친께서는 북한이 고향이라고 하셨습니다.

20 세 때 떠나온 고향을 70 년 동안 그리워하셨고 마지막에는 북에 계신 어머님을 그토록 부르셨다고 합니다.

 

이산가족의 문제는 아직도 우리 민족에게는 크나 큰 고통의 현실입니다.

현재 1,000 만 명 이상의 관객이 보았다는 영화 ‘국제시장’도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온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 흥남에서 미군 함정에 올라타려는 수많은 피난민 중에 나이 어린 덕수의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배에 오르면서 덕수는 등에 업었던 여동생을 잃어버립니다.

덕수의 아버지는 그 딸을 찾으려고 이미 올랐던 배에서 다시 내립니다.

그 때 자기의 저고리를 어린 장남 덕수에게 건네주면서 아버지가 없으면 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남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줍니다.

 

덕수, 그는 한평생 홀로된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묵묵히 험한 길을 걸으며 아버지가 부탁한대로 모두가 행복해 하는 가정을 일구어 냅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노는 그 시간, 할아버지 덕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쓸쓸히 놓여 있는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목 놓아 흐느낍니다.

“아버지, 내 약속 잘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그 옛날 아버지가 건네준 저고리를 껴안으면서 그의 통곡은 계속됩니다.

 

저는 이 영화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절망 중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버지, 내 약속 잘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살았지예....”라는 덕수의 독백에서 예수님의 치열하셨던 구속사역이 가슴 저미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저와 우리 교우들도 이 땅의 소명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아버지를 뵈올 그 날 “이만하면 내 잘살았지예”라고 눈물 콧물 흘리며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생각도 함께 떠올려 보았습니다.


짐 지고 가는 자, 우리 모든 인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짐이 있습니다. 보이는 짐도 있고 보이지 않는 짐도 있습니다.

무거운 짐도 있고 가벼운 짐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있는데 너무 무거워 감당할 수 없다고 이렇게 신음하고 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시 38:2). 우리 모두의 신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죄의 짐을 대신 져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아십니까?

날마다 우리의 죄의 짐을 지시는 분의 이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 58:19).

 

자신이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짐, 죄의 짐을 계속 지고 가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죄의 짐은 주님께 맡기십시오.

무거운 그 죄는 심판까지 기다리고 있기에 무서운 짐이기도 합니다.

그 옛날 바라바는 놀라고 또 놀랐을 것입니다.

흉악한 죄의 값으로 죽어야 할 사형수 바라바 자기 대신 예수님께서 사형수로 돌아가시고 자기는 자유롭게 된 사건,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의 그 바라바입니다.

 

우리 짐 가운데는 이렇듯 맡길 짐이 있는가 하면, 맡은 짐이 있습니다. 사명의 짐입니다.

이 짐은 다른 자에게 떠맡길 수 없습니다.

남편으로의 사명, 어머니로서의 사명, 누가 대신해 주겠습니까? 내가 맡은 직분, 누구에게 떠넘기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날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맡은 사명의 짐이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내 등의 짐"이라는 시를 이렇게 시작하고 이렇게 마칩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를 못했을 겁니다.

내 등에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 내 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 짐, 슬픈 이별의 짐들이 내 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시인은 맡은 짐들이 선물이라고 합니다.

 

.... 성도는 자기가 맡은 짐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오늘, 우리 교회는 새로운 선교역사(宣敎歷史)의 장(章)을 열게 되었습니다. 중국어예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중국어 예배는 매 주일 오전 9 시 45 분 양순관에서 드려집니다.

낯선 미국 땅에서 우리처럼 이민자(移民者)로 살아가는 중국인들을 애틋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부터 우리도 중국이민자들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몇 달 동안 기도하며 준비해 온 중국어 예배가 드디어 오늘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하나님은 그를 불러 중국 복음화의 문을 열도록 하셨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삶의 법칙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뜻 앞에 순종하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습니다.

그의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의 후손을 비롯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 선교사로 자원을 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국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중국어 예배, 우리의 시작은 미약합니다. 우리는 시작이 미약하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또 시작하며 가는 길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반드시 창대케 될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시작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롭게 결심하며 해보시려는 일들이 각자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미약한 일들이 대부분일터인데, 그 미약함을 함부로 멸시하지 마십시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는 약속의 시각, 미래의 눈으로 오늘의 미약함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앞에는 더 크고 더 좋은 일(bigger and better) 이 약속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미약함 속에 깃든 창대한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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