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없다 song을 아십니까?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 20:6下)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처한 환경을 둘러보며 이곳에 다섯 가지나 없다고 외칩니다.

 

영국의 조지 허버트라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의 마음에 없는 한 가지를 이렇게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한 가지만 더 주시옵소서

감사하는 마음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면 “환경”에 있는 “그 어떤 것들”이 아니라 “마음”에 꼭 있어야 할 “감사”가 아닐까요?


죽기를 연구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삶이 너무 힘들었을 때 죽기를 살짝 생각해 본 적이 있으셨을지는 몰라도 그 누구도 본격적으로 죽기를 연구해 본 적은 없으실 것입니다.

 

며칠 전 찾아가 만난 분이 몸이 아픈 것을 비관하여서 한 달 이상을 본격적으로 죽기를 연구하였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담담하고 상세하게 일러 주셨는데, 병실에서 뛰어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머리를 벽에 세게 부딪히는 것 등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몸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어~어~ 이제는 살아야 하나?”를 생각하셨답니다.

 

아직 그분은 몸의 한 부분이 아프십니다.

그 아픈 곳을 부여잡고 여전히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날 저는 말씀을 전하면서 그분의 안 아픈 곳을 하나하나 집어가면서 물었습니다.

“여기 아프세요?” “아뇨.”

“여기는 어떠세요?” “괜찮아요.”

“여기는요?” “안 아픈데요.“

“안 아프신 곳이 훨씬 많으시군요?” “....그렇네요.”

 

그분은 이제 죽기를 연구하길 포기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대신 잘 살기를 각오하였음을 보았습니다.

“빨리 나아서 교회 갈게요.”

교회와 담쌓고 살던 그분이, 그의 병실을 나서는 우리에게 아픈 곳을 잡고 있던 그 손으로 사랑의 표시를 몇 차례 하였습니다.

그분의 병실 창문 밖에는 올해의 첫눈이 하얗게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밥을 빨리 먹습니다. 밥만 빨리 먹는 것만은 아닙니다.

빨리 걷고 빨리 말하고.... 모든게 빠릅니다.

 

저 스스로 많이 질문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왜 모든 것을 빠르게 하려는지 말입니다.

모든 빠름에는 쉼표의 미학이 없어 볼품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빠름, 특별히 빨리 먹는 모습이 보여주는 수많은 볼품 없음 가운데도 두 가지 고상한(?) 의미가 있음을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면서 드디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래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미래로 빨리 가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미래가 항상 궁금합니다.

“이 시간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런 물음이 제 안에 깊숙이 자리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밥을 먹고 주님을 위해 죽고, 교인들이 주는 밥을 먹고 교인들을 위해 죽으라는 선배 목사님의 가르침도 제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미래로 빨리 가려고 빨리 먹는다는 것은 어이없는 논리일 수 있지만, 혹시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동안은 별로 그렇지 않았더라도 주님이 다시 오실 미래의 촉박한 시간 앞에, 빨리 밥을 먹고 주님과 교인을 위해 일할 시간을 조금 더 확보하는 것이 가능할지 말입니다.


“벌컥 벌컥”제가 물을 마실 때 나는 소리입니다.

저는 평생 이렇게 물을 마시면서 감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변에 얼마든지 있는 물을 가져다가 벌컥 벌컥 마시는 것이 제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물이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물을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감사할 일인지 최근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여름, 그동안 말로만 듣던 아프리카의 열악한 물 사정을 실감 나게 깨닫고 나서 전교인 수련회에서 전 성도들이 아프리카에 우물 파주기 특별 헌금을 드렸고, 그 헌금으로 이미 두 개의 우물을 팠으며 또 한 개의 우물 파기와 큰 물탱크를 설치하는 일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 모금의 물도 없던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답니다.

 

지난 목요일 밤, 아내와 함께 보스턴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암 치료 중인 남위홍 집사님과 그를 간호하고 있던 남편 석뢰 교우님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치료하는 과정 중에 식도가 많이 상하게 된 남 집사님은 사람들이 물 한 모금 먹는 것이 너무 부럽다며 그 물 한 모금에 감사하지 못했던 지난 삶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나직이 말했습니다.

 

“한 모금 물”도 없는 곳....“물 한 모금”의 감사를 잃은 자....

지난 주일 있었던 행복에의 초대에 km, em, cm, rm에 나온 90명 가까운 새 신자들에게는 한 모금의 물이 아닌 풍성한 성령의 생수로 다시는 갈함이 없고, 그동안 물 한 모금의 감사를 잃었던 저와 또 저와 비슷한(?) 자들에겐 뜨거운 감사가 회복되는 감사의 달 11월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저에게는 두 손녀가 있습니다.

큰 손녀 이름은 하늘이고 둘째 손녀 이름은 마음이입니다.

그 손녀들의 이름을 제가 지어주었습니다.

제가 지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릴 리 없습니다.

멀리 살고 있습니다만 영상 통화할 때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사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제가 더 기쁩니다.

 

우리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부르십니다.

오늘 행복에의 초대를 맞아 그동안 오래 나오신 분, 오랜만에 나오신 분, 그리고 처음 나오신 분.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이름을 알고 부르십니다.

 

내 이름 아시는지 궁금하면 물어보세요.

“저~~ 내 이름 아시나요?”

“사랑하는 내 자녀야. 알다마다.

나는 저 하늘의 수많은 별의 이름도 다 안단다.

내가 너를 태어나기 전에도 알았고, 내가 너를 지명하였고, 심지어 내 손바닥에 네 이름 새겨 놓았단다.”(시147:4,사43:1,49:16, 렘1:5)

 

내 이름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도, 내 이름을 알지만 불러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하나님 아버지는 내 이름을 아시고 늘 불러주십니다.

내 이름을 부르시며 스스로 감격해 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변함없으신 나의 아빠 아버지이십니다.


정말 뉴욕에는 봄과 가을이 사라진듯 합니다.

며칠전만 해도 에어컨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히터를 틀것을 생각하게 될 정도로 날씨가 제법 차가와졌습니다.

하루의 기온차도 크니 감기 걸리기에 제격인 날씨인데, 우리 교우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덧 행복에의 초대가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성도, 모든 부서가 한 마음이 되어 이 거룩한 행사에 진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동안 몇차례의 노방 전도가 있었는데 오늘 오후에는 전체 부서, 전체 회중이 함께하는 전도대회가 main street 도서관 앞에서 있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전도가 오늘도 펼쳐집니다.

 

교회가 채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 입니다.

교회가 채워지려면 먼저 채워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기도가 그 교회당에 차야합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일곱번 채워졌을 때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온 땅을 적시었듯이 우리의 기도가 먼저 차야 교회에 사람들도 차게 됩니다.

 

내일부터 가을 새벽 부흥회가 열립니다.

기도를 채웁시다.

교회당 안에 사람이 가득 차도록.

기도를 채웁시다.

우리 가정을 향한 하늘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를 채웁시다.

성큼 다가온 영적인 겨울을 넉넉히 이기도록.

그렇습니다.

차야 찹니다.


8분이면 충분했습니다.

80년의 난제를 해결하는데 말입니다.

무슨 일이냐고요? 들어보세요.

 

지난 화요일, 우리 교회 나오시는 분이라는 말만 듣고 환자분을 찾아갔습니다.

가서 뵈니 등록은 안 하셨지만 한 동안 예배에 참석하셨던 성도였습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엉치 옆뼈를 우두득 부숴 놓았답니다.

괜히 문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쫓아 들어갔다고 후회도 하고, 너무 아프다고 호소도 하시는 그 분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다음 심방 장소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쉽게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 가운데 놀라운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기 나이는 80세가 다 되어 가고 모태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하나님은 믿어지는데 예수님은 안 믿어진다고 하였습니다.

80년을 교회 다녔는데 예수님이 안 믿어진다는 그 말이 안 믿길 정도였습니다.

위로의 말씀 대신 백지 위에“다리”그림을 그려가면서 예수님을 말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이 죄 때문에 떨어져 있는 그림을 그리고, 그다음에 하나님과 떨어진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다리로서 돈, 지위, 지식, 인격 등은 불충분하고, 하나님이 보내 주신 유일한 천국 가는 다리(길)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말하는데 8분 정도 걸렸습니다.

통증으로 힘겹게 예수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분이 깜짝 놀랄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다치게 하신 이유이군요.”

80년의 어둠이 걷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말한 8분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말하면 어디서나 기적은 일어납니다.


부엌살림 하다보면 골칫거리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 중에 하나가 찬밥이 남아도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찬밥을 어떻게 하시나요?

아낌없이 버리시거나 속절없이 냉장고에 놔두시는 분도 있지만, 그 찬밥에 주물주물 손대어 화려한 별미(別味)로 바꾸시는 분도 있습니다.

 

지난 4일,

la 다저스 구장에서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이 있었습니다.

la 다저스 소속 우리나라 류현진 선수가 1차전 선발로 나와 7회 동안 한 점도 주지 않는 빼어난 피칭으로 승리투수가 되었습니다.

작년에도 la 다저스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었습니다.

그 때 류현진 선수는 정규 멤버가 되지 못하고 구경만 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작년에 그는 찬밥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포스트시즌 첫 게임에 팀의 제 1선발로 나서 승리한 것입니다.

찬밥의 화려한 변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도 집안에서 말째로서 찬밥신세였습니다.

다윗은 찬밥신세라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찬밥이 온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는 화려한 변신이 있었습니다.

 

찬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찬밥도 여태 맛 못 보았던 뜨신 밥으로 화려하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 집안의 찬밥, 그 누군가 있지요?

버리지 마세요. 놔두지 마세요.

찬밥이 화려하게 변신하여 별미가 될 수 있는데, 왜 찬밥을 언제나 차갑게만 대하시나요?


하트하트오케스트라를 아십니까?

발달장애 청소년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입니다.

지난 주일 밤, 카네기 홀에서 있었던 2018 세계찬양대합창제에 초대받아 한국에서부터 먼 길을 와서“나 같은 죄인 살리신”등을 연주하며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모든 청소년들 한명 한명이 자기의 악기를 진지하게 연주 했습니다만, 그 중에 팀파니를 치는 청소년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팀파니는 몇 개의 큰 북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주 중에 몇 차례 아주 짧게 참여합니다.

 

여태껏 보아 온 팀파니 연주자들은 가만히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화려하게 연주에 합류한 후, 또 한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달랐습니다.

자기가 직접 연주하는 시간이 아닐 때에도 허공을 치며 연주에 동참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허공을 쳤을지 궁금했습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친구들과의 호흡을 헤아리고 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 친구에게는 허공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보이는 팀파니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기(空氣)에게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다그치는 것도 같습니다.

곰곰이 보면 주님에 대한 사랑을 한 순간도 쉴 수 없다는 몸짓 같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카네기 홀의 허공을 치던 그 친구의 모습이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040 찬양부흥 집회가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마다 독특한 순서들이 있었습니다.

목요일 밤에는 이번에 큰 주제인“the one”의 이름을 딴 “one 특별찬양”팀의“즐거운 모임”이라는 짧은 뮤지컬이 있었습니다.

 

전체 기획부터 섬세한 부분까지 잘 준비되었고, 무대에서 보여준 “one 특별찬양팀”의 뮤지컬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준 작품이었습니다.

저도 그 뮤지컬에 당당히(?) 한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의 배역은 골리앗이었습니다. 저의 생김과 골리앗의 이미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교우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무튼 골리앗의 역할을 맡아 몇 번의 연습과 실제 공연에 참여하면서 골리앗의 눈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골리앗의 눈으로 보니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겁쟁이였습니다.

골리앗의 큰 목소리에 벌벌 떠는 것이었습니다.

“으하하하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맞아?”

골리앗의 조롱에 아무도 나서지 못하였는데 저기 조그만 다윗만이 내 앞, 골리앗 앞으로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골리앗의 눈에 기독교인들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인다면 세상은 온통 골리앗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3040 찬양부흥 집회에 함께하면서 다윗 같은 기개(氣槪)가 우리 3040 세대에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골리앗의 눈으로 보니 수많은 다윗들이 일어나 있는 것이 보여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참 기쁘셨을 것입니다.


지난 11일, 화요일 저녁은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교회를 넘어서까지 이민 교회 역사(歷史)의 한 페이지가 기록된 날입니다.

우리 교회 서리집사 안수집사 시무장로의 사역을 잘 감당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신학 공부를 마치고 만 70세가 되는 해에 선교 목사로서 안수를 받으신 전성호 목사님.

그리고 다민족 선교의 꿈을 안고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걷다가 우리 교단 안에서, 아마도 다른 한인 이민교회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중국인 최초로 안수를 받으신 첸위지 목사님.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펼치신 이 새로운 역사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방향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 불과한 뉴욕의 한인 이민자라는 정체성에서 하늘의 복을 우리가 사는 땅과 저 열방에까지 흘려보내야 하는 하늘 소명자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깊은 의미로 기록된 지난 화요일의 역사 페이지는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모두 하늘 소명자로 새로운 역사를 계속 써나가야 합니다.

우리 앞에 어떤 어려움이 있고, 우리 안에 어떤 아픔이 있다 하여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늘 소명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분명합니다.

하늘 소명자의 이야기를 기록할 붓은 기도의 눈물, 수고의 땀, 그리고 희생의 피가 담긴 벼루에 적셔야만 써갈 수 있다는 것이.


아프리카 대륙에 몇 나라가 있는 줄 아십니까?

많은 분이 아시는 대로 54개 국가입니다.

그중에 53개 국가 정상들이 지난 3일과 4일에 중국 베이징에 모여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 정상회의”를 가졌습니다.

한 나라가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 나라의 이름은 스와질랜드(swaziland)입니다.

아니, 에스와티니 왕국(kingdom of eswatini)입니다.

얼마 전에 그 나라 왕 음스와티 3세가 자기 마음대로 나라 이름(그 이름에 소문자를 대문자 앞에 쓰는 것 좀 보세요)을 바꾸었습니다.

 

그 나라는 인구가 백만 명을 조금 넘는 나라인데 아프리카 54개 국가 중 중국과 수교하지 않고, 대만과 수교하여 지내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큰 나라 중국을 거절하고 작은 나라 대만을 선택한 것, 왕 맘대로입니다.

 

이번에 신학교 가을학기 개강부흥회 강사님으로 오신 분이 그 나라 eswatini medical christian university의 김인환 총장님입니다.

총장님에 따르면 그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왕 마음대로라고 합니다.

대학교 졸업식이 오전 10시에 열린다고 광고하여 다 모였어도, 그 왕 맘대로 오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정오 12시든 오후 1시든 그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명색이 왕이니까, 그 왕 맘대로 해도 국민들이 별로 뭐라고 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세상 왕 맘대로는 모든 것이 불안불안 합니다.

다분히 자기감정대로 움직이면서 국민들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왕, 영원한 우리 왕, 하나님이 맘대로 하시는 것은 언제나 옳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보다 그가 늦으시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보기에 큰 것보다 다른 것을 선택하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것이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왕 맘대로”그것이 최고의 선택임이 분명합니다.


“받았으니 주어야 해요.”

자기 가족 중에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받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받았으니 주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말은 이렇게 계속되었습니다.

“내 가족이 다른 이의 장기를 받아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받았으니 나도 남에게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받았으니 주어야 해요.”

큰 은혜를 받고도 거기서 머문 채로 사는 사람이 하도 많은지라 당연한 것 같은 그분의 말이 크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뜨거웠던 여름은 가고 거리마다 9월의 바람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 가을의 문턱에서 누군가의 물음도 우리 마음에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당신은 그분의 생명을 받으셨는데 당신은 다른 이에게 무엇을 주시나요?”

 

오늘 오후에는 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 이 취임식 예배가 있습니다.

장영춘 목사님은 32년 동안 학장님으로 신학교를 통해 후학들에게 사랑과 가르침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저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목사님이 섬겼던 자리를 이어 섬기면서 제게 꼭 필요한 말과 결단은 "받았으니 주어야 해요.”인 것 같습니다.


지난 주간 어느 모임에서 만난 l 목사님.

본인이 어려서부터 배운 기타 솜씨가 대단하였답니다.

그 탁월한 솜씨에 수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답니다.

대천해수욕장에서 멋들어지게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 그 솜씨에 놀란 젊은이 수십 명이 금방 모여드는 일은 일도 아니었답니다.

 

군대 제대하면서 스스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기타 치며 인기 끌어 인생을 멋지게 놀아보려는 꿈을 막 펼치려던 어느 날, 탈곡기 앞에서 장난하다 왼손이 끌려들어가 손가락들이 너덜너덜해졌답니다.

재활치료를 통해 왼손 모습은 돌아왔지만 그 손가락으로 더는 기타 코드를 잡을 수 없었답니다.

 

군대 생활 중에 만난 군목 목사님이 어렵사리 모은 돈을 봉투에 넣어 주면서 이것으로 신학 공부를 시작하라고 했건만 그 돈도 스멀스멀 다른 곳에 다 썼답니다.

 

l 목사님의“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라는 꿈은 산산이 깨어졌지만 그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신학의 길, 목회의 길로 이끄시어 기타로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람을 이끌게 하시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꿈이 깨어지는 것은 결코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축복의 길임이 분명합니다.


“으아아아앙~~~~~~”

팝콘을 맛있게 먹던 하늘이가 손에 있던 팝콘을 놓고 갑자기 우는 것입니다.

한 손가락을 입에 넣고 입천장을 다급히 만지는 것을 보니 팝콘 끝의 얇고 달콤한 노란 딱지(?)가 입천장에 붙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늘이 옆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저희 부부와 사돈 부부가 화들짝 놀랐고 며느리가 급히 물을 가져다주며 물을 마시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는 가져다준 물을 마시지 않고 손가락을 넣은 채 계속 울다가 “칵칵”하며 마른기침을 몇 차례 하였습니다.

 

몇 분 동안의 소동 끝에 마침내 작게 녹아버린 그 달콤한 노란 딱지를 입에서 끄집어내며 큰 손녀 하늘이가 울음 섞인 소리로 한 말이 이것입니다.

“more popcorn please.”

 

모두 놀랐습니다.

그토록 고생시킨 팝콘을 입에서 꺼내자마자 또 달라 하는 아이의 어이없음에....

모두 들었습니다.

“죄를 후회하고도 그 죄를 반복해서 짓는 모습 같아요.”라는 며느리의 말을....

모두 보았습니다.

작은 아이의 모습 속에서 죄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고도 또다시 그 죄를 반복해서 짓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죄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게 합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죄보다 더 크신 분을 의지하면 됩니다.

아시죠? 그 분.


큰 아들이 섬기는 교회(westgate church) 담임목사님을 몇차례 뵈었는데 그 때마다 사려 깊음과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아들이 6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홀로 가스 공사를 하는데 가스가 새어나와 그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지금까지 마음 아파하시면서 가끔 이야기 하신답니다.

“내 아들이 죽어 갈 때 아빠를 불렀을 텐데… 내가 아무 것도 못해 주었네요.”

 

작은 아들이 치아가 안 좋아서 제가 언젠가 한 마디 했습니다.

“왜 이렇게 치아 관리를 못했니?”

아들도 스스로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답을 찾았습니다.

“제가 이가 아파 병원 가야할 때, 아빠가 안계셨는데요.”

그리고 보니 작은 아들이 한창 자라날 청소년 때에 제가 돌봐준 것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미국에서 아빠를 힘들어 찾았을 때, 저는 언제나 한국에 있었으니까요.

 

육신의 아버지가 살아 계시든 아니든 아버지 부재(fatherlessness) 현상은 이 땅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진통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런 아버지가 계십니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9)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무섭고, 슬프고, 아파서“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 언제나“내가 여기 있다”라고 대답하시고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펼치십니다.

휴가지에서의 밤은 깊어 갑니다.

끌어 안고 온 짐도 많고, 가서 펼쳐야 할 일도 많아 뒤척이다 일어났지만 “내가 여기 있다”의 아버지가 계시기에 그 모든 짐 몽땅 아버지께 맡기고, 저는 이제 다시 잠자리에 들려고 합니다.

 

카작스탄 사람들은 이름을 두 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식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어렸을 적부터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입니다.

알마티 퀸즈장로교회의 알렉산더라는 남자 청년의 애칭은 샤샤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알마티 퀸즈장로교회를 출석했던 샤샤는 사춘기 때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 샤샤가 교회로 돌아 왔습니다.

어떻게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귀찮아서(?) 왔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돌아오라는 연락이 너무 귀찮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샤샤 형제의 의미 있는 답변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굴잔 전도사님(현지 예배와 단기선교팀 통역자)이 거들며 이야기 합니다.

“돌아 왔을 때 교회에서 찬양대원으로 봉사하라고 사명을 주었지요.

사명을 받고 나서부터는 교회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몇 년을 찬양대원으로 섬기던 샤샤는 지금 찬양대 지휘자이며 경찬팀의 리더입니다.

지난주일 알마티 퀸즈장로교회 26주년 기념 예배 때 샤샤는 러시아권 찬양대의 찬양을 지휘하였습니다.

단기선교팀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깊은 영성에 잠긴 찬양대는 찬양의 절반을 정확한 한국말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영 기뻐 찬양합니다....”

 

돌아온 샤샤는 악보도 없이 능숙하게 한국말로 스스로 찬양도 하고 또 찬양대를 지휘하기도 하였습니다.

단기선교팀을 돕기 위해 샤샤는 자기 일을 며칠 내려놓고 기쁨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돌아온 샤샤는 더 이상 시시하게 살고 있지 않답니다.


나단 푸시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마음껏 흔들 수 있는 깃발이 있는가?

둘째, 목놓아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는가?

셋째, 목숨 바칠 신조가 있는가?

넷째, 목숨 걸고 따를 지도자가 있는가?

 

젊은이들에게만 필요한 질문은 아닐 것입니다.

모두에게 물어져야 할 질문이며 특히 모든 사람은 자기가 부를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더운 여름이라고“덥다, 더워. 너무 더워” 라는“덥다 song”만 반복하여 부르시겠습니까?

이 여름에도 단기 선교의 깃발을 흔들며 저마다 사명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초여름 시작되어 뜨거운 이 여름날까지 멈추어지지 않는 노래가 있는데 오늘은 필라에서, 시앤립에서, 그리고 알마티에서도 이어져 울려 퍼집니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더운 여름, 예배의 자리 사명의 자리를 지키며 단기 선교팀을 중보하는 퀸장의 성도들을 생각하며 힘을 내어, 우리 모든 단기 선교팀원들은 오늘도 사명의 노래를 목놓아 부르겠습니다.


지난 화요일 새벽, 다급히 플러싱 병원으로 갔습니다.

20년 전에 우리 교회에 등록한 한 교우가 병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교회에 몇 차례 나오셨을 뿐 실상은 주님과 교회로부터 멀리 떠나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방광암 말기에, 그 전날 뇌졸중(stroke) 까지 맞게 되었습니다.

양손은 묶여 있었고 마치 모든 의식을 잃은 듯하였습니다.

그런 상태로 예배드릴 수는 없어서 눈을 떠보시라 하니 놀랍게도 그 말을 알아들으시고 눈을 뜨셨습니다.

정말 말을 알아들으시면 표시해보라고 하였더니 손을 움직이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0-31절 말씀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구원자 예수님을 믿으시면 눈을 깜박이시라고 했더니 하실 수 있는 대로 가장 눈을 크게 뜨시고“깜박깜박”이셨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복음의 내용을 확인할 때마다 입으로 크게 아멘 하시듯이 눈을 크게 깜박이셨습니다.

사실 그날 심방은 오전 10시로 잡혀 있었습니다.

뭔가 급한 마음으로 새벽 예배 후 7시로 당겨서 갔고, 우리가 떠난 후에 그는 다시 의식을 잃었고, 지난 목요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금요일과 토요일 장례예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깜놀(깜짝 놀람)했습니다.

그가 택한 백성을 포기하지 하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찾고 찾으시는 하나님과 마지막 순간에 깜멘(깜박이므로 아멘을 표시)으로 신앙을 고백한 교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주, 깜놀과 깜멘이 만나 하늘을 함께 날았습니다.


라면 좋아하십니까?

라면을 멀리하지만, 꼭 먹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tv 드라마 등에서 누군가 후후 불면서 라면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 저도 그 사람처럼 그렇게 라면을 먹고 싶습니다.

라면 하나 먹는데도 감격(?)스럽게 먹는다면 그 영향력이 작지 않습니다.

 

시인이 별, 바람, 꽃에 감격하지 않고 시를 쓴다면 누구도 그 시를 읽지 않을 것입니다.

감격 없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승리에 감격스러운 환호가 없다면 그 어떤 운동경기도 곧 퇴출당할 것입니다.

 

감격이 없는 사람은 울분도 없습니다.

진리를 보고 감격하지 않는 사람은 불의를 보고 울분을 쏟을 리 없습니다.

감격도 울분도 없는 사람에게 그 어떤 선한 것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에는 감격과 울분의 이중창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에 감격해 하고, 죄에 분노하는 감정이 없다면 뜨거운 신앙생활이 아닌 싸늘한 종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감격도 울분도 없었다면 십자가 앞으로 가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머물러 있어 보십시오.

예수님 은혜의 감격, 내 죄악의 울분이 터져 나와 마침내 혼자서 감격과 울분의 이중창을 목 놓아 부를 것입니다.

내 삶에서 울려 퍼지는 감격과 울분의 이중창은 이상한 변덕이 아니라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드는 아름다운 화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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