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빨리빨리”입니다.

모든 것이 빨리 되었으면 합니다.

성장도 빨리되고, 성공도 빨리되고, 회복도 빨리되길 원합니다

.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십시오.

열매가 익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어둠이 물러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 시간이 있습니다.

“차츰차츰”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결코 제자리 걷기가 아닙니다.

“걷고 걸었는데 결국 그 자리야”이렇게도 탄식합니다.

아닙니다. 그 자리처럼 보일 뿐입니다.

믿음의 길은 광야의 길이기 때문에 매일매일 사방을 둘러보아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광야 가운데서도 흐르는 시간, 소망의 단어“차츰차츰”을 잊지 마십시오.

 

이렇게 노래 부르는 이들도 있답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지난 주일 저녁 카작스탄 사역을 마치고 키르기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

알마티를 출발한지 4시간 가까이 되어 국경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모두 15명이었습니다.

퀸즈장로교회 9명, 키르기스탄 선교를 돕겠다고 나선 알마티 퀸즈장로교회 6명이었죠.

짐을 가지고 걸어서 통과해야 하는 국경을 서너 그룹으로 나누어 넘었습니다.

앞선 그룹들이 넘어와서 한참 기다리는데 마지막 그룹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그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알마티 교회 교사 중 한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넘어설 줄 알았던 국경을 통과하지 못하고 다시 알마티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교사는 자신의 여권이 지난 7월로 만기된 것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한편 그 마지막 그룹에게 까다로운 국경 경비원이 선교 짐들에 대해 시비를 걸었답니다.

놀랍게도 검색대 컴퓨터가 그 때에 작동하지 않아 모든 짐이 그대로 통과할 수 있었답니다.

 

국경에서 생긴 일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우리의 철저한 준비를 요구한 국경이었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체험한 국경이었습니다.

 

천국문 앞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그곳을 엉뚱한 것을 가지고 통과하려는 사람은 없는지요.

우리의 모든 것을 덮어주시는 은혜가 있는 자리가 천국문 앞인 것을 잊은 사람은 없는지요.

확실히 그 날의 국경은, 훗 날의 천국문 모형이었습니다.


마샤 자매는 신학생입니다.

마샤는 찬양을 잘합니다.

마샤는 교회 봉사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마샤가 울었습니다.

 

알마티에서 신학교 강의를 하는 가운데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뜻밖에 마샤는 자기를 영적인 고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네가 한 일 돌이켜 보라. 지금 행동을 보라.

너 같은 자를 누가 좋아하겠냐? 하나님은 이미 널 버렸어.”

 

우리의 하나님 자녀 됨은 나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우는 마샤 같은 자들이 많기 때문에 단기 선교팀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오늘도 온 땅을 두루 다니며 고아처럼 사는 또 다른 마샤들에게 외칩니다.

“울지 마, 마샤”

 

-사랑하는 성도들의 기도가 생생히 들리는 것 같은 선교 현장에서-


 

“뚫어!”

그 구성진 외침이 동네 구석구석을 울리며 누볐습니다.

굴뚝이나 싱크대, 배수관 등 무엇인가 집안에 막힌 것을 뚫으라는 것입니다.

집안이 무엇인가로 막혀있다면 머잖아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뚫어!”

누군가에게 막힌 혈관을 뚫어야 한다는 의사들의 소견(所見)이 있곤 합니다.

막힌 혈관을 뚫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시술(施術) 또는 수술(手術)을 하지요.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운동일 것입니다.

힘든 일을 만나지 않으려면 혈관을 뚫어야 합니다.

 

“뚫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려워질 때“뚫어!”가 필요합니다.

소통이 막히면 삶은 점점 피폐(疲弊)해 질 것입니다.

소통이 아닌 일방통행의 사람 주변에 누가 있던가요.

 

“뚫어!”

진짜 뚫려야 할 곳이 있습니다. 하늘입니다.

지난 월요일, 마치 하늘이 뻥 뚫린 것 같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 뚫린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복을 받는 인생은 얼마나 좋을까요.

이 땅의 것을 끌어 모으려고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이 뚫리면 하늘의 것이 내려옵니다.

하늘을 뚫는 방법 잘 아시죠?

기도 외에는 하늘을 뚫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아리조나, 중국, 캄보디아, 차례차례 불편한 먼 길을 기쁨으로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저 분은 바쁜데, 이 분은 아픈데, 저 청년은 힘든데, 이 학생은 약한데....”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모두가 다 그 길을 떠나지 않을 충분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 그 복음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구원의 길이 없기에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기 위해 말없이 떠나는 뒷모습이 왜 이렇게 가슴 시리도록 숭고(崇高)한지요.

 

그 뒤를 이어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길 이들이 준비하고 있군요.

필라델피아, 카작스탄, 케냐, 키르키스탄, 온두라스, 에디오피아, 할렘.... 그 누군가 익숙한 자리, 편안한 자리를 떠나는 그 뒷모습을 남겨야 여기 교회도 살고, 저기 세상도 산다면, 우리 교회에서 뒷모습을 남기는 이들의 줄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선교는 사랑인가 봅니다. 선교는 눈물인가 봅니다.

저들이 힘 있게 복음을 전하고 건강하게 돌아오기까지 사랑으로 바리바리 무엇인가 싸서도 보내고 그 무엇인가를 싸던 두 손을 모아 눈물로 기도도 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런 뒷모습이 향기가 되는가 봅니다.


어렸을 적에 “가위 바위 보”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묵찌빠”라고 부르기도 했죠.

이것을 통해 승부(勝負)를 결정짓습니다.

“내가 주먹을 낼 테니 너는 보를 내라”고 심리전을 펴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고는 “가위 바위 보”놀이를 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만 어릴 때 작은 손으로 만들었던 가위 바위 보자기의 모습에 많은 교훈이 있음을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가위”는 자르는 것입니다.

가위는 가차 없이 자릅니다. 나도 자를 것은 잘라야지.

가위는 좌우로 가르면서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도 분명히 결단해야지.

 

“바위”는 땅 위에도 있고 흐르는 강물 속에도 있습니다.

땅 위의 바위는 견고합니다. 나도 흔들리지 않아야지.

흐르는 강물 속의 바위는 매일 자기를 씻습니다.

나도 날마다 성령으로 씻어야지.

 

“보”는 손을 다 펴는 것입니다.

보자기의 모습을 보입니다. 나도 사는 동안 감싸는 인생이 되어야지.

펼친 손은 사람이 이 땅을 떠날 때의 모습입니다.

나도 모든 것을 놓는 연습해야지.

 

우리는 옛 친구들과 “가위 바위 보”놀이를 언제 다시 할 수 있을까요?


여름 더위가 만만치 않습니다.

여름 더위에 짜증나는 일은 피해야 하겠습니다.

그 누군가와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싸우지 않는 비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지난 수련회 때 강사님이 교훈이 담긴 유머를 들려 주셨는데 들으신 분들은 다시 한 번, 안 들은 분들은 잘 들어 보십시오.

 

람보(실베스터 스탤론이 출연한 영화 주인공)와 이소룡(중국 무술 영화 주인공)이 같이 짜장면을 먹을 때 일어난 일이랍니다.^^

단무지가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자 람보가 이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

“서로 한 대씩 때려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 남은 단무지를 먹자” 그래서 이소룡이 먼저 람보를 때렸습니다.

람보는 아팠지만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잘 참았습니다.

이제 람보가 이소룡을 때릴 차례입니다.

그 때 이소룡이 람보에게 말합니다.

“나 때리지 말고 너 먹어.”그리고 이소룡은 주방을 향해 외칩니다.

“아줌마, 여기 단무지 한 접시 더 주세요.”

 

맛있는 짜장면 먹으면서 단무지 때문에 얼굴 붉히며 싸울 필요 없습니다.

어느 중국집이나 짜장면을 다 먹을 때까지 단무지는 무한리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더 갖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자원(資源)이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니까 싸워서 내가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무한히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내가 더 많이 갖겠다고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무한(無限) 공급자 하나님을 생각하니 감사가 넘쳐흐릅니다.

유한(有限)한 가운데도 최선을 다해 전교인 수련회를 아름답게 섬겨주신 모든 분들에게 생각하니 기쁨이 넘쳐흐릅니다.

더운 여름, 싸우지 말고 시원하게 삽시다.


 

 

 

“아! 목마르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목말라합니다.

“물 마셔!”

아이가 어이가 없어 말합니다.

 

 

 

물이 가득 있는데, 입만 열면 그 물을 실컷 마실 수 있는데 계속 목마르다고 힘들어한다면 도대체 누구의 탓일까요?

“물속의 물고기도 목이 마르다”는 안타까운 제목의 책에서 본 그림입니다.

오늘부터 전교인 여름 수련회가 시작됩니다.

우리 주님이 준비하신 은혜의 강가입니다.

목마르십니까?

입을 열어 자신의 마른 목만 잠시 축일 것이 아니라 은혜의 강이 나를 통해 계속 멀리멀리 흘러가도록 우리 모두 입을 크게 열어 벌컥벌컥 마셔요. ok?


우리 교회 가까이에 라과디아 공항이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라과디아 공항은 지금 확장공사 중에 있습니다.

차를 타고 그 옆을 지날 때에 정체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 공사 중인 라과디아 공항에 들어갔다가 크게 불편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공사 중인 공항 주변의 상황과 그 안의 활용이 다소 힘들지만 보다 쾌적하고 편리한 공항의 완성을 생각할 때, 잘 기다리고 넉넉히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지금 공사 중입니다. 영어 문법으로 말하면 현재 진행형입니다.

아직 우리 주변을 지나다니는 자들도, 우리 내면에 들여다보는 자들도 계속 힘듭니다.

그러나 공사는 현재 진행형이기에 점점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공사 중이니까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다른 이에게 너무 엄격하지 마십시오.

 

오늘 교회학교 졸업예배가 있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신 교육부 교사님들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기도하시면서 또 부모님들과 협조하면서 신앙교육의 길을 묵묵히 걸어주셔서 오늘 같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졸업은 결코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졸업생들도 알고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차원의 공사로 이전일 뿐입니다.

다음 세대의 신앙 공사를 위한 vbs와 수련회도 이 여름에 계속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점검과 성장을 위한 전교인 여름수련회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기본적인 것들도 다시 점검해 보고 또 다른 차원의 신앙을 세워 갈 절호의 기회입니다.

옆에서는 신앙이 계속 성장해가고 있는데 나는 공사 중단 같은 모습으로 살 순 없겠죠.

공사 중이라는 단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벅찬 소망의 단어이지만

공사 중단이라는 말은 점점 자신과 주위를 더욱 힘들게 할 절망의 단어입니다.


파도는 끝없이 몰려옵니다.

외로이 서 있는 등대를 삼킬 듯이 거세게 달려옵니다.

그래도 등대는 꿈적이지 않습니다.

파도의 등쌀에 밀려 등대가 조금씩 움직인다면

많은 배는 바다에서 길을 잃고 높은 파도에 하나하나 휩싸여 사라질 것입니다.

 

등대와 같으셨던 아버지.

수많은 어려움의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으셨던 아버지.

모진 파도에 못 이기는 척 하면서 쓰려지셨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을 터인데,

언제나 꿋꿋이 그 자리에 서시어

캄캄한 밤, 파도 소리에 무서워하고 그 힘에 힘겨워하던 자녀에게

환한 등대 빛을 비추어주셨던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들은 그러셨습니다.

 

그 등대 자리에

이제는 아버지가 된 우리들이 굳게 서서 거대한 파도와 맞서며

몰아치는 파도에 방황하고 두려워하는 자녀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데

그 파도에 먼저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여 슬퍼집니다.

우리도 쓰러지지 말아야지요. 끝까지 갈대가 아닌 등대이어야 하지요.

 

아버지 날에,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저 파도 소리보다 더 크게

그리운 아버지를 불러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등대 같으셨던 아버지를 말입니다.


솔직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 목회자는 더욱 자기의 아픔이나 상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강사 목사님은 매우 열려있고 솔직합니다.

그 상처와 아픔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는 정말 은혜롭습니다.

 

깊이 있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본문일지라도 강사 목사님은 아주 신선하게 풀어갑니다.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졸리기는커녕 벌써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났나 합니다.

깊은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린 시원한 물 같은 강사님의 말씀은 매우 깊이 있습니다.

 

경륜 있다.

전통적인 서울 충현 교회 부목사, 새로운 시도가 많았던 안산 동산 교회 부목사,

보수적인 서울 창신교회 담임을 역임하시고 현재 새로운 모델의 예수향남교회 담임.

다양한 형태의 교회를 섬기면서 쌓은 경력들이 벌써 묵직한 경륜이 되었습니다.

 

관심 있다.

자기 교회만을 위한 목회가 아님은 충분히 보아 왔습니다.

둘러 살피며, 지역 그리고 이 땅의 많은 교회가 함께 숲을 이루기를 시도해왔습니다.

강사 목사님의 관심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아주 관심이 큽니다.

 

위의 내용과 그 밖에 쏟아질 은총들은 이번 여름 전교인 수련회에 참석하시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수련회를 마치고 위의 내용이 기대만큼은 아니었다고 느껴지시는 분들에게 수련회비를 전액 되돌려 드릴 계획은 아직 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기에.


지난 수요일(29일) 밤,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다른 유람선과 충돌하여 침몰하였습니다.

7명 구조, 7명 사망, 19명 실종이라는 보도는 큰 놀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안타까움을 갖고 후속(後續) 기사를 읽는 가운데 그 유람선에 제가 잘 아는 부부가 타고 있었음을 알고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믿음과 성품이 너무 귀한 부부였습니다.

 

일곱 명의 생존자 명단에 남편만 있었습니다.

그 아내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생존자 명단은 이런 사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존자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생명책이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일러줍니다. (계 20:15)

 

우리의 이름이 거기에만은 반드시 적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펼치실 그 생명책에 나와 나의 가족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합니다.

내 이웃과 열방의 사람들도 그 명단에 올라 있어야 합니다.

눈 씻고 찾아보아도 거기에서 이름 찾을 수 없다면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한국정부에서 헝가리로 구조대를 급파하였다지만 생명을 구조하기에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구조대는 다릅니다.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구조대는 단기선교팀이라는 이름으로 올해도 세계 곳곳에 파송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책에서 그 이름들을 볼 수 있도록 구조대들은 분투할 것입니다.

어제 보여 준 아름다운 선교바자와 늘 계속되는 뜨거운 기도는 “영원한 생존자 명단”을 만드는 일에 매우 중요한 동역자입니다.


지난 주간 la에서 개최된 교단 총회를 다녀왔습니다.

총대 장로님들과 참석했던 43회 총회는 여러 단상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번 총회의 주제는“항상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소서”입니다.

개회 예배부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를 감명 깊게 묵상케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총대들은 하나님의 공의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도 있어야 함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누락된 행정절차에 대해 오랜 논의 끝에 당사자의 사과와 총대 회원의 용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사 대회 때 특강을 통해 이슬람의 급성장과 우리의 둔감에 대해 스스로 놀라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총회에서 4분의 선교사님을 또 파송하였는데 늘 어려운 가운데 선교하시고 또 교회들을 일깨워주시는 선교사님들이 고마웠습니다. 

총회적으로 정리하고 매듭지어야 했던 여러 사안들이 잘 처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총대 장로님들과 여러 차례 논의하고 준비했던 안건도 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아프지 않고 모두가 승리하는 경험을 통해 우리를 보내시고 총회를 위해 기도해 주신 교우들의 기도의 힘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총회 기간 중에 쉼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러 형태로 그 시간을 보냈는데 저는 많은 총대들과 함께 같은 차를 타고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그리피스 천문대와 헐리우드 스타들의 이름, 손도장, 발도장이 찍힌 거리 등을 가보았습니다.

이 땅의 스타도 아니요 저 하늘의 별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옳은데로 인도하여 마침내 천국에서 별 같은 존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 43년 동안 우리 총회는 기쁨의 시간도 있었고 아픔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기쁨의 시간이 자만으로 흐르지 않고 아픔의 순간이 좌절로 이어지지 않도록 우리 총회는 주님 안에서 거하길 힘썼습니다.

주님 안에 있고 또 총회에 속한 모든 개개인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만치 않아야 합니다. 좌절도 말아야 합니다.

   


지난 15일 맨하튼 센추럴 파크에서 bts(방탄소년단)의 짧은 공연이 있었습니다.

어제부터는 뉴져지에서 대형공연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세계적인 인기는 충격, 그 이상입니다.

비가 오든 바람이 치든 수많은 젊은이들이 며칠씩 노숙하면서 이들의 공연을 기다리는 것은 이제 새삼스럽지가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나 경찰들이 아무리 뭐래도 그들은 bts의 팬 이름 army(군대) 답게 자기 자리를 굳게 지킵니다.

 

bts는 자신들의 최근 신곡을 이번 공연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제목은 “작은 것들을 위한 시”입니다.

그 가사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 삶은 온통 너/ 사소한 게 사소하지 않게/ 만들어버린 너라는 별/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특별하지/ 너의 관심사 걸음걸이와 말투까지/ 사소한 작은 습관까지....”

 

너무 섬세한 가사요 듣는 이에겐 위로가 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면 bts는 또 다른 그들의 스케줄을 따라 떠날 것이요 수많은 팬들은 또 다시 각자 홀로 쓸쓸히 자기들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팬들의 가슴엔 그 가사가 심겨 있고 그 눈에 그들의 몸짓이 남아있겠지만 bts는 그들이 부른 노랫말과 달리 더 이상 팬들의 걸음걸이, 말투, 그리고 사소한 작은 습관을 하나부터 열까지 특별하게 살피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자신의 생명을 쏟아 구원하시고 그 후에도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시며 작은 자들의 작은 모든 것까지 세세히 살피시는 예수님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따르며 자기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제자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누군가 말씀 좀 해주시겠습니까?

이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bts의 팬들 중에 누가 더 충성스러운지.


아들 독수리가 먹잇감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오랜 비행 끝에 좋은 먹이를 발견하였습니다.

한 동안 굶주렸기에 잡은 먹이를 막 먹으려던 차에 엄마 독수리가 생각났습니다.

“좀 갔다 드릴까?.... 아니야. 나 먹기도 부족한데.... 엄마는 알아서 잡아 드시겠지.”

아들 독수리는 잡은 먹이를 혼자 잘 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 독수리가 아들 독수리를 맞이합니다.

“어딜 그리 오래갔다 왔니?

너무 안 들어와서 많이 걱정했다.

어서 씻고 이리 와라.

이 어미가 먹이를 잡았는데 너와 같이 먹으려고 한참 기다리고 있었단다.

자 어서 먹자꾸나”

 

내리사랑은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일컫습니다.

어떻게 자녀가 부모의 끝없는 사랑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치사랑이 있습니다. 내리사랑의 반대입니다.

“치”라는 단어는“치솟다”처럼 무엇인가 아래에서 위로 끌어올린다는 뜻입니다.

치사랑은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을 사랑하는 것인데 특히 자녀가 부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주변에 정말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시는 효자 효녀를 많이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치사랑이 내리사랑을 이기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 어떤 자녀도 부모의 나실 제 괴로움과 기를 제 애씀을 다 알지 못하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 어느 자녀도 자식이 잘 되길 바라며 모든 것을 쏟아부은 부모의 소원과 희생을 다 깨닫지 못합니다.

 

정말이지, 저 위의 아들 독수리는 자기 먹이를 위해 비행(飛行)은 잘했으나, 저속한 행동의 비행(卑行) 독수리였습니다.

그 아들 독수리가 우리를“친구야”라고 부르지는 않을까요?


다시 뛰어가고 싶습니다. 어린아이 그 시절로 말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동네를 누비며 놀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집어던지고 나가 몇몇 친구들과 이런 노래를 부르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애~애~ 애들 모여라 여자는 필요 없고 남자 모여라”

사실이지 그 노래를 함께 부르던 남자 친구들 마음에는 여자 친구들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큰 바램이 있었답니다.

 

다시 뛰어가고 싶습니다. 어린아이 그 시절로 말입니다.

구슬땀 흘리며 구슬치기, 땅따먹기, 딱지치기하면서 놀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술래잡기나 다방구, 자치기, 닭싸움, 말뚝박기 놀이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손에 검은 연탄을 묻혀 친구가 못 보게 하였다가 친구 얼굴을 만지면서 그 얼굴을 시커멓게 만들어 놓고 다른 친구들과 놀리며 웃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다시 뛰어가고 싶습니다. 어린아이 그 시절로 말입니다.

신문지에 싸주어 국물이 줄줄 새던‘뻔데기’ 쪼그리고 앉아 국자 넣어 불에 달구어 먹던‘달고나’ 라면땅, 아이스께끼, 솜사탕 등으로 군것질하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매일 일기를 써야 하는 방학 숙제를 미루고 미루어 놓았다가 개학 전날 하룻만에 한 달 치를 거뜬히 썼던 초능력(?)의 그때가 그립습니다.

 

이제는 갈 수 없습니다. 너무 멀리 지나왔습니다.

그 철없던 어린 시절로는 다시 못 가지만, 그렇다고 지금 철든 것은 아니니 스스로 궁금합니다.

“나는 여전히 아이일까, 그래도 어른일까.”

 

오늘, 5월 5일 어린이 날.

문득, 갈 수 없는 그 시절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로드아일랜드에 있습니다.

여기서 로드아일랜드 중앙한인교회 부흥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부흥이란 단어를 들으시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저에게 부흥이란 교회를 깨우는 것이며 지옥불로 끌려가는 자들을 건져내려는 영적 싸움입니다.

 

이 악한 시대, 지옥불로 수많은 자들이 줄 대어 달려가는 이때에 교회가 깊이 잠들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나 부흥은 일어나야 합니다.

부흥회라는 방법은 아니더라고 부르짖고 사모하면서 부흥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많은 것들이 바뀝니다.

성경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는 변화의 넘치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유약했던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도 그렇고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이 가져온 큰 변화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의 기도가 있기에 그제도 어제도 말씀을 증거 할 수 있었고 오늘 낮에도 저녁에도 계속 복음을 외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립습니다.


빌바오가 죽었습니다.

빌바오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빌바오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빌바오는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스페인 북부의 자그마한 도시 이름입니다.

 

중공업의 발달로 한 때 찬란함과 부유함을 자랑했던 도시 빌바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전 세계 중공업이 쇠퇴하면서 찬란했던 빌바오의 영광도 함께 쇠락했습니다.

사람들은 떠나고, 기업들은 철수하고... 그러던 빌바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의 세 번째 해외 미술관을 유치하면서 죽어있던 도시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산업 중심의 도시가 문화 예술의 도시로 거듭난 것입니다.

 

“빌바오 효과 (bilbao effect)”라는 말도 생겼으니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살아난 빌바오는 떠났던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계속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구겐하임을 받아들인 빌바오가 다시 일어났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죽었던 그 누구도 다시 살아납니다.

죽은 도시는 빌바오처럼 다시 살아나고, 죽은 사람은 나사로처럼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한 영국 시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는 무엇을 져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나를 돌보셨습니다.

나는 누구를 돌보아야 하겠습니까?

 

 

 

..................

 

나도 묻고 대답해야 하는데,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높임을 받으소서

내가 밟는 땅 주님의 땅이니

하늘이 주의 이름 높이 올리며 넓은 바다가 주를 노래해

내 평생에 주의 이름 높이며 어느 곳에서든지 주님을 예배하리라

내가 밟는 모든 땅 아버지의 영광이 선포 되어야 하리

 

청년들의 찬양이 울려 퍼졌습니다.

장로님들이 함께 나와 손에 손을 잡았습니다.

교역자들은 앞으로 나와, 성도들은 그 자리에 서서 함께 손을 들어 축복하였습니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있었던 전성호 선교사님 파송 기도의 풍경이었습니다,

일흔한 살의 선교사님은 그렇게 성도들의 기도를 뒤로하고 선교지로 떠나셨습니다.

 

71세. 무엇인가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입니다.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사는 것이 삶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나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도전입니다.

 

인생의 크기는 도전의 크기입니다.

도전하는 자는 아름답습니다.

도전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밟는 모든 땅, 아버지의 영광이 선포되길 도전하는 사람들이 또 일어나야 합니다.

 

도전은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Board Pagination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25 Next
/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