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10가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두 아들 장례식에서 10가지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전도하다 순교당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7가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신앙의 자유를 찾았던 청교도들이 혹독한 어려움 가운데 7가지 감사를 드렸습니다.

 

80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였지만 그런 배라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합니다.

폭풍으로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

고통스러운 삼 개월 항해 중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었음을 감사합니다.

 

그들은 극심한 고통의 자리에서도 감사에 감사,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넘어서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았기에 그토록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들이었다면 몇 가지를 감사할 수 있을지 스스로 궁금합니다.


내일 모레가 11월 19일, 오는 목요일이 21일이네요.

11월 19일 케이프코트만(灣) 경유(經由), 11월 21일 프로린스타운에 입항(入港).

1602년 9월 16일 영국 잉글랜드 항구도시 프리머스에서 102명의 청교도를 태우고 출발했던 배가 미국 땅에 다다르던 날자와 장소 입니다.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 fathers)이라고 일컫는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 앞에는 바다의 파도부터 시작하여 온갖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는 이듬해 봄에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그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결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역경 앞에 그들이 외쳤던 말은“힘들다, 죽겠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였습니다.

감사는 어떤 역경도 이깁니다.

역경 중의 감사가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습니다.

탱큐, pilgrim fathers!


연말이 점점 가까워오며 바쁜 일들은 더 몰려오지만 문득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한 해를 어떤 걸음을 걸었는가....

모든 걸음에는 발자국이 남는데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가....

남긴 발자국을 뒤돌아 볼 자신이 없었지만 살짝 돌아보았습니다.

 

한 동안 머뭇거린 발자국, 샛길로 갔다 온 발자국, 거기서 쓰러졌던 것이 분명한 작은 발자국을 덮은 큰 몸 자국, 그래도 다시 일어나 걷고 또 걸어온 발자국.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조선 시대의 이양연 문인이 지은 시(詩)입니다.

짧은 시가 나의 발자국은 나의 것만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되돌아가 그 발자국을 지우고 싶지만, 그리고 다시 반듯하게 걸은 발자국을 남기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다시 걸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이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발자국, 뒷사람이 따라오다가 실망하지 않을 나의 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제 막 들어선 11월도 빨리 지나가겠죠.

오래 붙잡고 싶어도 뿌리치듯 달아날 11월이 분명합니다.

부질없이 가지 말라고 말하기 보단 지나가는 11월을 수채화로 그려 내 마음의 벽장에 오래 걸어 두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흙색 물감으로 한창 땅을 파고 있는 새정전 앞마당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웬일이죠? 제 눈에 뭐가 꼈나요?

그 마당의 흙색이 가을 단풍마냥 형형색깔로 보여요.

붉은 김치색, 노란 튀김색.... 지난 10월 건축바자에서 봤던 수십가지 색상들이 앞마당 흙색깔에 섞여 있어요.

 

그토록 어려운 이민 땅에서 본당과 교육관을 묵묵히 세우시더니만 건너편 새성전을 함께 지어가시는 교우들을 생각하니 11월의 수채화는 물감으로 도화지에 그려지기 전에 제 얼굴에 눈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 눈의 눈물은 말라도 결코 마르지 않을 사랑의 물감을 각양각색으로 뿜어내는 성도들 때문에 앞마당 흙색은 화려한 색깔이 되어 놀라운 11월의 수채화를 그리게 될 것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아버지가 많이 기다리셨어요.

오시기까지 힘드신 일이 한둘 아니셨죠?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기고 아버지 집으로 오셨으니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며 우리의 길고 긴 아픈 이야기도 들어주시고 우리의 깊고 깊은 상처도 만져 주실 것입니다.

 

처음이어서 낯설고 오랜만이어서 어색해도 들여다만 보시고 지나가지 마세요.

여기가 아버지 집, 곧 당신의 집이랍니다.

 

가장 아픈 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고독(孤獨)이라는 병이 가장 아픈 것 같아요.

제겐 울 일이 적지 않은데 같이 울어줄 사람이 없고 제겐 웃을 일이 많은데 같이 웃어줄 사람이 없다면 못 견딜 것 같아요.

 

곧 윙윙 찬바람이 불고 펑펑 함박눈이 쏟아질 추운 겨울이 올 텐데,

또다시 그 겨울을 외롭게 지내지 마세요.

“겨울 속의 고독!”생각만 해도 너무 시리고 슬프지 않나요.

“아버지 집에서 함께!”생각만 해도 너무 따뜻하고 기쁘지 않나요.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모두의 아버지 집으로, 정말 잘 오셨습니다.


많이 바쁘시지요?

그래도 질문해야 합니다. 가을에는 질문해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가을이 오면 이렇게 물어보겠다고 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이 가을, 우리는 지금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까?

행복에의 초대를 앞두고 우리에겐 이런 질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에?”

 

그 사람의 물리적 위치를 넘어 영적인 자리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 부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 배우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 자녀는, 내 형제는, 내 친구는, 내 이웃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확실히 천국 가는 길을 걷고 있는지, 지옥의 나락(奈落)인지.

아무리 봐도 전자(前者)가 아니라 후자(後者)라면

이 가을 펼쳐지는 행복에의 초대는 그를 위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많이 슬픈데도 아름다운 아픔이 있습니다.

가슴앓이입니다.

가슴앓이해 보셨지요?

사랑하는 자가 몸이 아플 때 가슴앓이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너무 그리울 때 가슴앓이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시름시름 가슴앓이할 때도 가슴이 시리고 아픕니다.

 

한국에서 운전면허 시험을 2년 넘게 보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면허시험장을 찾던 할머니에게 직원이 왜 그렇게 운전면허를 따고 싶어 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용달차를 몰며 배달하던 아들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못 쓰게 되었는데 운전을 배워 그 아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답변을 하셨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노(老) 어머니의 가슴앓이는 더 이상 가슴만 쓸어내리지 않고 운전면허를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갖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식은 것이 있습니다. 굳은 것이 있습니다.

아예 잃어버리고도 찾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가슴앓이입니다.

나에겐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없다는 듯이 가슴앓이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찾아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 사랑을 찾기까지 얼마나 가슴앓이하실까요.

이 가을에 펼쳐질 행복에의 초대를 예수님의 가슴앓이를 내 아픔으로 삼고 참여한다면 쉽게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가 불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벌써 10월입니다.

가을의 깊은 향취(香臭)가 반가우면서도 뭔가 초조한 시간입니다.

올해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니 화들짝 놀랄 시간인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지”하면서도 올해도 연초의 결심을 적당히 포기하고 싶기도 합니다.

스스로 궁금합니다.“결심”은 강한데“뒷심”은 왜 이리 약(弱)한 지?

 

약한“뒷심”탓을 하며 남은 두어 달을 보내려 하는데 다가온 글자가 있었습니다.

again!

“다시”라는 글자가 선명히 제게 다가온 것입니다.

얼마 전“다시 복음 앞에”라는 복음 성가를 들었습니다.

 

많은 이들 말하고 많은 이들 노래는 하지만 정작 가진 않는 길

두려운 생각보다 많이 힘들고 험한 길 보단 그저 말로만 가려기에

점점 멀어져만 가네 내게 생명 주었던 그 길

점점 이용하려 하네 내게 사랑 주었던 그 길

다시 복음 앞에 내 영혼 서네 주님 만난 그때

나 다시 돌아가 주님께 예배드리며

다시 십자가의 길 걸으리

 

다시, 다시, 다시로 이어지는 단어가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어려운 가운데 다시 일어 난 많은 교우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10월 마지막 주일 있을 “행복에의 초대”주제를“again”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도 다시 일어나 연초(年初)의 결심을 이루고, 장결자들도 다시 일어나 주님 품 안으로 돌아오고, 불신자들이 다시 일어나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렇습니다.

“again”이라는 단어는 모두에게“희망”이라고 읽혀집니다.


맨해튼에 우뚝 솟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29년 착공되었고 1931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건축가에게 물었습니다.

이 건물을 짓는데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냐고.

그로부터 주저 없는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초공사였습니다.”

 

어느 건물 공사나 건물이 완성된 후 기초공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공사가 가장 힘들고 가장 중요하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왜 건물뿐 이겠습니까? 모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소홀히 하기 쉬운 기초.

그 기초에서 이미 모든 승부(勝負)가 결정됩니다.

 

지난 주간에 국제전도폭발 지도자 임상 훈련이 우리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준비위원들과 여러 분야의 봉사자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합심하여 아름다운 행사를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전도폭발의 그 유명한 두 가지 진단 질문은 신앙의 기초를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는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는가를 묻습니다.

이런 신앙의 기초가 흔들린다면 신앙의 높은 경지는 난망(難望)할 것입니다.

 

착공 감사예배를 드린 새 성전은 곧 기초공사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을 기초공사가 잘되어지면, 그 위에 다민족과 다음 세대의“하늘의 문, 세상의 빛”이 될 새 성전이 잘 세워질 것입니다.

오는 토요일의 건축 바자를 위한 손길과 발길이 새 성전의 보이지 않는 기초를 든든히, 보이는 건물을 아름답게 만들리라 기대합니다.


손님이 되어 본적이 많으시지요?

따듯한 환대(歡待)가 좋으세요, 차가운 한대(寒待)가 좋으세요?

20년 전 전도폭발 지도자 임상 훈련에 참여하였을 때 낯선 곳에서 받은 따듯한 환대는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우리 교회에는 많은 손님들이 오셔서 몇 날을 머물다 가십니다.

국제전도폭발 지도자 임상 훈련에 오시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겐 모든 공간, 모든 사람들이 낯설 것입니다.

정중한 영접과 친절한 도움이 그들에게 주어진다면 낯섬이 편함이 되어 오래 동안 잊지 못하실 것입니다.

 

“알로하(aloha)!”

8년 전 하와이에 갔을 때 목에 꽃목걸이를 걸어주던 분이 들려주었던 인사말이었습니다.

그 뜻이 단순히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를 넘어선 인사랍니다.

“당신의 삶을 이해합니다.

저도 함께 무엇인가 나누고 싶습니다.” 라는 의미도 담고 있답니다.

제겐 아직까지 알로하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사인 “welcome!”이 그분들에게 따듯한 환대를 담은 웰컴이요, 알로하 정신을 품은 웰컴으로 기억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누구나 다 행복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행복한 삶보다 더 차원(次元) 높은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놀라는 삶입니다.

놀라움을 한자로 표현하자면 경이(驚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러보면 모든 것에 다 하나님의 경이로움이 가득 차 있는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의 행복만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경이로움이 우리 교회에서도 흘러넘칩니다.

21일, 오는 토요일도 그렇습니다.

오전 7시에는 새 성전 착공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날 오전 10시에는 킹스 아카데미 개교 예배를 드립니다.

다민족을 위한 새 성전도 몇 년 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킹스 아카데미도 몇 년 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각각 몇 년의 기도가 같은 날에 매듭짓게 됨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비전은 안 보이는 것을 보는 힘입니다.

눈에는 안 보였지만 다민족과 다음 세대를 향한 같은 비전을 품고 함께 달려오신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1일은 시작의 비전이 성취되는 날이며 완성의 비전이 새롭게 시작되는 날입니다.

 

전도서 3장에서의 말씀처럼 모든 것에 다 때가 있습니다.

잠잠할 때도 있고 놀랄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는 토요일은 놀랍고 놀라운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날에 그 놀라움을 함께 모여 뜨거운 찬양과 절절한 감사로 표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까요?


지난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신학교 개강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강사로 오신 김풍운 목사님은 귀한 말씀으로 신학생들에게 큰 도전과 깊은 감동을 주셨습니다.

신학생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능력을 나타내는 것보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집을 나서다 자기 아들과 이웃집 아들이 다투는 장면을 보았답니다.

자기 아들에게 이웃집 아들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 아빠는 시장님과 친해!”

그 말을 들은 자기 아들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우리 아빠는 예수님과 친해!”

그 아버지는 출근길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자녀들이 볼 때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요?

“예수님과 친한 아빠!”“예수님과 친한 엄마!”

자녀로부터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 아닐까요.

교우들이 볼 때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요?

“저분은 예수님과 친해!”

다른 이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최고 명예로운 말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친해지는 가을, 그리고 그 가을이 깊어질수록 예수님과의 친함도 더 깊어지고 싶습니다.


달력을 보고 안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원 심방 길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보고 알았습니다.

가을이 살포시 우리 곁으로 걸어온 것입니다.

단기선교와 전교인 수련회로 뜨거웠던 여름, 그 작별의 아쉬움이 가을과의 만남으로 달래어집니다.

 

가을에는 구름이 높아집니다.

하늘을 향해 눈을 더 높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하늘을 향한 기도의 계절입니다.

 

가을에는 낙엽이 떨어집니다.

세상을 향해 몸을 더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세상을 향한 섬김의 계절입니다.

 

가을에는 호수가 파래집니다.

자신을 향해 더 깨끗해지자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자신을 향한 성찰의 계절입니다.

 

가을에는 철새가 날아갑니다.

목표를 향해 나래를 펴고 날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목표를 향한 전진의 계절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반가운 계절입니다.


가난한 청년이 돈 많은 귀족을 찾아가 학비를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귀족이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그 다음은?”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귀족이 그 청년에게 또 물었습니다.

“그 다음은?”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졸업하여 훌륭한 법관이 되겠습니다.”

귀족의 그 청년을 향한 질문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청년의 대답도 계속되었습니다.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미겠습니다.”

 

귀족의 그 청년을 향한 질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은?”

그들의 대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집니다.

청년이 곤혹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러다 늙겠지요.”

끝났는가 싶은 귀족의 질문은 또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청년은 마지막 답이다 싶어 말합니다.

“그리고 죽지요.”

“그 다음은?”귀족의 질문.

“---------”청년의 침묵.

“청년, 그 다음에는 영원한 세계가 있다네.

그 영원을 준비하게.”

 

우리 자녀들, 새 학년을 맞아 학교로 돌아가거나, 처음 겪을 캠퍼스로 떠납니다.

모두 공부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지식만 쌓는 공부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다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가오는 9월에도 우리는 무엇인가 얻기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문제는“그 다음은?”입니다.

나의 삶이 나의 야망을 성취하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다음은?”이라는 물음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답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빨리빨리”입니다.

모든 것이 빨리 되었으면 합니다.

성장도 빨리되고, 성공도 빨리되고, 회복도 빨리되길 원합니다

.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십시오.

열매가 익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어둠이 물러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 시간이 있습니다.

“차츰차츰”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결코 제자리 걷기가 아닙니다.

“걷고 걸었는데 결국 그 자리야”이렇게도 탄식합니다.

아닙니다. 그 자리처럼 보일 뿐입니다.

믿음의 길은 광야의 길이기 때문에 매일매일 사방을 둘러보아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광야 가운데서도 흐르는 시간, 소망의 단어“차츰차츰”을 잊지 마십시오.

 

이렇게 노래 부르는 이들도 있답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지난 주일 저녁 카작스탄 사역을 마치고 키르기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

알마티를 출발한지 4시간 가까이 되어 국경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모두 15명이었습니다.

퀸즈장로교회 9명, 키르기스탄 선교를 돕겠다고 나선 알마티 퀸즈장로교회 6명이었죠.

짐을 가지고 걸어서 통과해야 하는 국경을 서너 그룹으로 나누어 넘었습니다.

앞선 그룹들이 넘어와서 한참 기다리는데 마지막 그룹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그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알마티 교회 교사 중 한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넘어설 줄 알았던 국경을 통과하지 못하고 다시 알마티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교사는 자신의 여권이 지난 7월로 만기된 것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한편 그 마지막 그룹에게 까다로운 국경 경비원이 선교 짐들에 대해 시비를 걸었답니다.

놀랍게도 검색대 컴퓨터가 그 때에 작동하지 않아 모든 짐이 그대로 통과할 수 있었답니다.

 

국경에서 생긴 일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우리의 철저한 준비를 요구한 국경이었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체험한 국경이었습니다.

 

천국문 앞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그곳을 엉뚱한 것을 가지고 통과하려는 사람은 없는지요.

우리의 모든 것을 덮어주시는 은혜가 있는 자리가 천국문 앞인 것을 잊은 사람은 없는지요.

확실히 그 날의 국경은, 훗 날의 천국문 모형이었습니다.


마샤 자매는 신학생입니다.

마샤는 찬양을 잘합니다.

마샤는 교회 봉사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마샤가 울었습니다.

 

알마티에서 신학교 강의를 하는 가운데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뜻밖에 마샤는 자기를 영적인 고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네가 한 일 돌이켜 보라. 지금 행동을 보라.

너 같은 자를 누가 좋아하겠냐? 하나님은 이미 널 버렸어.”

 

우리의 하나님 자녀 됨은 나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우는 마샤 같은 자들이 많기 때문에 단기 선교팀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오늘도 온 땅을 두루 다니며 고아처럼 사는 또 다른 마샤들에게 외칩니다.

“울지 마, 마샤”

 

-사랑하는 성도들의 기도가 생생히 들리는 것 같은 선교 현장에서-


 

“뚫어!”

그 구성진 외침이 동네 구석구석을 울리며 누볐습니다.

굴뚝이나 싱크대, 배수관 등 무엇인가 집안에 막힌 것을 뚫으라는 것입니다.

집안이 무엇인가로 막혀있다면 머잖아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뚫어!”

누군가에게 막힌 혈관을 뚫어야 한다는 의사들의 소견(所見)이 있곤 합니다.

막힌 혈관을 뚫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시술(施術) 또는 수술(手術)을 하지요.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운동일 것입니다.

힘든 일을 만나지 않으려면 혈관을 뚫어야 합니다.

 

“뚫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려워질 때“뚫어!”가 필요합니다.

소통이 막히면 삶은 점점 피폐(疲弊)해 질 것입니다.

소통이 아닌 일방통행의 사람 주변에 누가 있던가요.

 

“뚫어!”

진짜 뚫려야 할 곳이 있습니다. 하늘입니다.

지난 월요일, 마치 하늘이 뻥 뚫린 것 같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 뚫린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복을 받는 인생은 얼마나 좋을까요.

이 땅의 것을 끌어 모으려고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이 뚫리면 하늘의 것이 내려옵니다.

하늘을 뚫는 방법 잘 아시죠?

기도 외에는 하늘을 뚫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아리조나, 중국, 캄보디아, 차례차례 불편한 먼 길을 기쁨으로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저 분은 바쁜데, 이 분은 아픈데, 저 청년은 힘든데, 이 학생은 약한데....”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모두가 다 그 길을 떠나지 않을 충분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 그 복음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구원의 길이 없기에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기 위해 말없이 떠나는 뒷모습이 왜 이렇게 가슴 시리도록 숭고(崇高)한지요.

 

그 뒤를 이어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길 이들이 준비하고 있군요.

필라델피아, 카작스탄, 케냐, 키르키스탄, 온두라스, 에디오피아, 할렘.... 그 누군가 익숙한 자리, 편안한 자리를 떠나는 그 뒷모습을 남겨야 여기 교회도 살고, 저기 세상도 산다면, 우리 교회에서 뒷모습을 남기는 이들의 줄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선교는 사랑인가 봅니다. 선교는 눈물인가 봅니다.

저들이 힘 있게 복음을 전하고 건강하게 돌아오기까지 사랑으로 바리바리 무엇인가 싸서도 보내고 그 무엇인가를 싸던 두 손을 모아 눈물로 기도도 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런 뒷모습이 향기가 되는가 봅니다.


어렸을 적에 “가위 바위 보”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묵찌빠”라고 부르기도 했죠.

이것을 통해 승부(勝負)를 결정짓습니다.

“내가 주먹을 낼 테니 너는 보를 내라”고 심리전을 펴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고는 “가위 바위 보”놀이를 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만 어릴 때 작은 손으로 만들었던 가위 바위 보자기의 모습에 많은 교훈이 있음을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가위”는 자르는 것입니다.

가위는 가차 없이 자릅니다. 나도 자를 것은 잘라야지.

가위는 좌우로 가르면서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도 분명히 결단해야지.

 

“바위”는 땅 위에도 있고 흐르는 강물 속에도 있습니다.

땅 위의 바위는 견고합니다. 나도 흔들리지 않아야지.

흐르는 강물 속의 바위는 매일 자기를 씻습니다.

나도 날마다 성령으로 씻어야지.

 

“보”는 손을 다 펴는 것입니다.

보자기의 모습을 보입니다. 나도 사는 동안 감싸는 인생이 되어야지.

펼친 손은 사람이 이 땅을 떠날 때의 모습입니다.

나도 모든 것을 놓는 연습해야지.

 

우리는 옛 친구들과 “가위 바위 보”놀이를 언제 다시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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