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식당에서 남들은 맛있게 식사를 하는데 금식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렇게까지 식사하는 분들에게 부담을 주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았습니다.

며칠 전 뉴저지에서 몇몇 목사님들과 만남이 있었습니다.

모두 주문하는데 한 분 목사님은 주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 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들어보니 금식할만한 큰 제목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마다 금식의 이유가 많겠지만 자신을 위한 이유를 뛰어넘어 식당에서까지 금식하시는 모습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날, 제가 시킨 대구지리를 쉽게 삼킬 수 없었습니다.

가시가 많아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받은 감동에 목이 멘 것도 있고, 그가 붙잡은 진리를 흔드는 자들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자들이라는 불편한 사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의 싸움의 대상은 저 마귀들인데....

우리끼리 싸워서는 안 되는데....

그동안 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감사절 주간을 지나며 우리 교회 안에, 우리 노회 안에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다는 것에도 큰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침묵하라. 그렇지 않으면 침묵보다 나은 말을 하라.”

 

우리는 말을 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침묵보다 못한 언어가 있고, 침묵보다 나은 언어가 있습니다.

 

침묵보다 나은 언어는 감사입니다.

침묵보다 못한 언어는 불평입니다.

침묵보다 나은 언어는 진리입니다.

침묵보다 못한 언어는 거짓입니다.

 

행복은 감사를 통해 들어오고 행복은 불평을 통해 나갑니다.

살리는 것은 진리이고 죽이는 것은 거짓입니다.

 

감사의 계절입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세요.

주변을 둘러보세요.

우리가 태어날 때 싸 들고 나온 것이 하나라도 있던가요.

그 모든 것 일체가 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침묵보다 나은 언어인, 아니 결코 침묵하면 안 되는 언어인 감사가 넘치는 계절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해요.”


최근에 갈대밭을 거닌 적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갈대처럼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 흔들림이 오래될 때 본인에겐 힘겨움을, 주변 사람들에겐 염려를 자아냅니다.

 

신앙생활의 흔들림은 빨리 안정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간혹 누가 흔들린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일에 지쳐서, 따듯한 돌봄이 없어서, 변화가 없어서, 예배에 집중이 안 돼서, 애들이 걱정되어서....

사실, 한 번 흔들리면 모든 것이 다 흔들림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흔들리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담임목사로서 여러 생각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흔들리는 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겠다고 약속도 하고, 누구를 내보내고 누구를 초청하고, 환경을 개선하고, 제도를 바꾸고....

하지만 압니다.

이런 방법들이 결코 흔들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아휴, 정말 답답해.

목사님은 우리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

흔들리는 사람들이 이같이 말씀하신다면 저는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그리스도인은“그리스도의 충족성”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변화의 요구하는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예수님만이 견고함의 유일한 근거임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겸허한 기도와 한 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

가을이 점점 깊어져 가는데 우리의 기도와 한 분을 향한 사랑도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겸손한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만난 자리가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예수님의 자기 부인의 겸손한 기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흐르던 곳이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성공, 나의 건강, 나의 재산, 나의 명성.....

끝없이 이어지는“나”가 멈추어지고 아버지 하나님만이 가장 큰 갈망이 된다면 우리의 가을도 자기를 비우는 겸허한 기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계절이 될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교회 앞 도로가 새롭게 포장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시작된 공사가 오후 늦게 마치었고 그동안 울퉁불퉁 고르지 않았던 도로가 평탄하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인들도 불편했고, 임직 예배에 많은 분이 찾아오실 때 고르지 않은 곳을 지나오시겠다는 안타까움도 있던 차에 도로공사가 멋지게 끝난 것입니다.

 

이런 노래가 있는 것 아세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길목에 서서....

그대를 맞으리.... 사뿐히 밟으며 와주오”

사랑하는 이를 맞이하기 위해 주단을 준비하여 마음에 깔아 놓았으니 사뿐히 밟으며 와달라고 합니다.

흥,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연인은 참 좋겠어요.

마음에 주단을 깔아 맞이하겠다니까요.

사뿐히 거닐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 신랑, 우리 주님은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면서 그것은 고르지 않은 곳을 평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임직예배에 오시는 분들이 평탄하게 오시도록 교회 앞 도로공사는 끝났는데 주님이 거니실 내 마음은 여기저기 패이고 고르지 않아 울퉁불퉁 한 것은 아닌가요.

누구는 주단 위를 사뿐히 거니는데, 우리 주님은 거니시기를 난감해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그때 왜 그랬을까?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책상에 금을 그어 놓고 평소 내 짝꿍이라고 부르던 친구가 팔꿈치 끝이라도 넘어오면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왜 호들갑을 떨었을까?

 

그때 왜 그랬을까?

우리 집도 가난하면서 맛있는 찐빵 장사 집의 아들인 친구에게 왜 무안을 주었을까?

 

그때 왜 그랬을까?

아무런 감정도 없던 친구였는데 다른 옆 친구들의 응원(?) 속에 “너, 나하고 뜰래(싸울래)”하고 왜 세지도 않은 주먹을 내밀었을까?

 

이 가을에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옛 친구들 생각이 나는데 같이 있었던 그때 왜 잘 대해 주지 못했는지 혼자 부끄러워하며 노래 불러 봅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몇 달 전, 다소 멀고 복잡하고 처음 가는 길을 운전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 따라갔습니다.

한 번도 헷갈리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한 마디로 no problem!

 

오는 길이었습니다.

가는 길을 잘 갔으니 오는 길은 더 빠르게 오겠다며 두 개의 내비게이션을 켰습니다.

차에 장착된 내비게이션,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

둘을 바라보는데 약간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길을 잘못 들어서면서 결과적으로 big problem!

 

종말의 내비게이션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복잡한 종말, 성경만이 분명하고 안전하고 완전하게 우리의 길을 안내합니다.

내일부터“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주제의 가을 새벽 부흥회입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은 종말을 일컫는 징조입니다.

종말의 내비게이션이 확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성경을 열면 종말의 내비게이션이 선명히 보입니다.

 

내일부터 일주일간, 종말을 헤쳐 나갈 말씀을 집중적으로 전하려고 합니다.

종말의 때에 다른 것들은 환희 켜고 성경은 덮어 놓으면 점점 헷갈리다가 큰일을 만납니다.

5시 45분부터 시작되어 피곤하시니까

그대로 성경 덮고 주무실래요, 그래도 성경 들고 나오실래요?

 

10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이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도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열 드라크마 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고 낙심한 여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3과 완전을 나타내는 7의 합산인 10이라는 숫자는 성경적으로 너무 중요한 숫자임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어 중에 이렇듯 중요한 10을 상징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의외로 가장 작은 단어인 요드(י(입니다.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어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 중국교포부가 설립된 지 10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중국교포부 설립 10주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겸손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교회를 섬겨 오신 중국교포부 모든 분과 지도자들에게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

이들과 함께 행복한 교회를 일구어 오신 모든 성도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져가는 모습을 중국교포부 설립 10주년을 통해 보면서, 이후에 펼쳐질 더 벅찬 미래를 기대하게 됩니다.

 

중국교포부!

그대들의 함께 함이 우리 모두에게 큰 축복입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을 보셨습니까?

군인 출신의 아버지 아래서 군대식으로 키워지던 7명의 자녀가 그 가정의 가정부로 온 마리아에 의해 변화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이기에 많은 노래가 불리고 있는데, 그중에 그 가정의 큰딸이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난 열여섯 살, 열일곱 살이 되죠(i am sixteen going on seventeen)”

자기에게는 무엇을 할지 일러줄 나이도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필요하다고 노래합니다.

“i need someone older and wiser telling me what to do.”

 

우리 자녀들에게도 계속 변화가 필요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지 일러 줄 지혜로운 분도 필요합니다.

우리 교사들이 이 일을 위해 예수님 안에서 늘 수고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힘을 다해 우리 자녀들에게 진정한 변화와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일깨워 주고 있답니다.

 

이번 금요일(6일)과 토요일(7일), 청소년 할렐루야 대회가 우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요셉은 17세 청소년 때에 이미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있었고, 힘든 이국(異國) 땅에서 꿋꿋이 살았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이 힘든 땅에서 예수님이 주신 꿈을 품고 꿋꿋이 살길 기도하면서 집회 자리에 꼭 데리고도 나오시고 또 뒤에서 열렬히 응원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수요일과 목요일 청장년 찬양 집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 번의 집회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이민 생활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우리 청장년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위로해 주시고 또 새롭게 해주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강사로 오신 정유성 목사님은 목요일 새벽에 “상처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모든 상처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 그리고 허리에 난 상처가 우리를 위한 구원의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듯이 우리의 상처마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살펴보실래요?

당신은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으신지.

들려주실래요?

당신의 상처가 갖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바울은 자신의 상처이름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의 상처에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겐 과거의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꿈도 있습니다.

강사님은 목요일 저녁 말씀을 통해 우리의 꿈이 크지 않더라도 그 꿈 끝에 반드시 예수님이 계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은 과거의 상처와 예수님이 그 끝에 기다리고 계신 미래의 꿈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멀리 어디까지 가보셨습니까?

다음 빈칸에 여러분이 가보신 가장 먼 곳을 떠올려보세요.

______________________

 

우리 모두에게 먼 길이 있어요.

저 남미도 아니에요, 유럽도 아니고 아프리카도 아니지요.

머리에서 마음, 그리고 마음에서 입술까지가 참 멉니다.

 

 

하나님에 대한 머리의 생각들이 마음으로 내려와 하나님 사랑이 되고, 마음의 하나님 사랑이 입술의 하나님 찬양이 되기가 왜 이렇게 멀고 먼지.

 

오는 수요일, 그리고 목요일 찬양 집회가 있는 것 아시죠?

평일, 찬양 드리러 나오시기가 너무 먼 거리이신가요?

혹시 마일리지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가 먼 것은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시기까지 참 멀었는데.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한 걸음으로 내려오셨는데.

 

머리에서 마음이, 마음에서 입술이, 그리고 우리 집에서 교회가, 이렇게 먼 줄 몰랐어요.


우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텍사스, 플로리다 등 남부지역을 강타한 태풍 하비(harvey)와 어마(irma)로 인해 많은 것을 상실한 자들의 통곡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나 혼자만 천국 가는 데 만족하라는 부분적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복음은 총체적이며 온전한(whole)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미래에만 아니라 현재의 삶에도 소망이 되는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개인적일 뿐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의 아픔에도 참여하는 복음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동사무소(?)에선가 나누어 준 우윳가루를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맛도 있었고 배도 고파서 잘 먹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알았습니다.

그 우윳가루가 미국에서 보내 준 구호 물품이었던 것을.

훗날 알았습니다.

복음은 우는 자들에게 실체적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지금, 우리가 건너와 사는 미국 땅에 눈물이 철철 흐릅니다.

저 남녘에서 들려오는 울음에 동참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울 때 우리를 도왔던 그들을 우리가 도울 차례가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그들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흐르는 눈물을 조금이라도 닦아 주기 위해 위로와 사랑이 담긴 손길을 모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복음, 우리가 경험한 복음이기에.


“더”는 부사(副詞)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계속하여. 또는 그 위에 보태어. 어떤 기준보다 정도가 심하게. 또는 그 이상으로.

이렇듯,“더”는 짧지만,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벌써 찬바람이 이는 9월이 되었습니다.

이제 곧 한 해를 결산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가 가슴에 새기고 발길에 확인되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예루살렘에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길을 가슴 아프게 걸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으셨던 그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홀로 두고 도망갔거나 멀찍이 따랐던 길입니다.

그 때,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 눈물로 걸었지만 지금 저의 모습은 그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오는 9월 20일(수)-21일(목) 청장년을 위한 찬양 집회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청장년이라 함은 청년 선교부와 30~40대 선교회를 지칭합니다.

청장년은 물론 우리 교우 모두가 다시 회복해야 할 삶입니다.

더 먹고, 더 놀고, 더 편하고, 더 갖겠다는 이 시대의 풍조 속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싶은데...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옵니다.

이제 각 가정의 자녀들이 가을 학기를 맞아 학교로 다시 돌아갑니다.

쉼, 여행, 아르바이트, 새로운 경험 등 방학도 필요하지만 역시 학생은 학교로 돌아가야 가장 잘 어울립니다.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긴 방학을 이제는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back to school.

 

힘들고 어려울 때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하던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back to basic.

 

지금을 멈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돈스런 지금을 끌고 더 불투명한 미래로 걸어갑니다.

그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안 봐도 video입니다.

 

개혁교회의 기본은 말씀입니다.

장년세대의 기본도 말씀입니다.

다음세대의 기본도 말씀입니다.

말씀에 지금의 길이 있고, 말씀에 미래의 답이 있습니다.

역시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가장 잘 어울립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멈추고 back to the bible.


지난 8월 5일부터 13일까지 런던에서 세계육상 선수권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의 마지막 은퇴경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번개같이 빠르다고 하여 라이트닝 볼트라는 별명을 가진 우사인 볼트는 100m, 200m, 400m 계주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세계육상계를 좌지우지하였던 그에게도 마침내 은퇴의 시간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12일에 있었던 그의 마지막 공식 경주, 400m 계주의 마지막 주자로 달리던 그가 쓰러졌습니다.

우승은커녕 결승라인을 통과도 못한 채 동료들의 부축 속에 경기장을 씁쓸히 떠나야 했습니다.

육상황제의 너무나 안타까운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 후의 보도에 의하면 그가 다리에 경련이 있었다고도 하고, 경기를 앞두고 새벽까지 음주 가무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그의 마지막은 결코 “finish well”이 아니었습니다.

 

최근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사모님이 방송 인터뷰를 하게 되었답니다.

“사모님, 목사님께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방송 진행자의 질문에 사모님의 대답은 이러하셨답니다.

“끝까지 사고 안치시고(?) 목회를 마치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너무나 어수선한 세상이라 남편 목사님의 “finish well”을 기원하는 사모님의 표현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it is finished.”라고 외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외침과 선언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의 finish well”, 기도의 제목이며 삶의 소원입니다.


둘째 손녀 “마음”이는 태어난 지 한 달 하고 열흘을 막 지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갓난아기입니다.

아직까지 먹고 잠을 자는 일이 주 업무(?)입니다.

제가 처음 안아 줄 때 뭔가 불편하다는 듯이 끙끙거리며 작은 손과 발, 온몸도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며칠이 지난 지금은 편하게 안겨 있습니다.

 

저는 이번 휴가 중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에 있었던 “global leadership summit 2017” 에 등록하여 참석하였습니다.

이 리더십 컨퍼런스는 매년 이맘때 시카고의 윌로우 크릭 church 주관으로 열립니다.

올해는 123 국가의 수천 개 교회가 각 지역에서 참여하여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강의를 들었는데, 대략 400,000명의 지도자들이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갔었던 지역 교회는 1,500명 정도가 모인 “church on the hill”이었습니다.

 

“구도자예배”를 앞세우며 지난 20-30년간 영향을 끼쳐오던 윌로우 크릭 church의 빌 하이블스 목사님이 지금은 세계적 리더십 컨퍼런스를 통해 새로운 영향력을 끼치고 계십니다.

저명한 교계의 지도자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강의 또는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 이번 컨퍼런스의 개강 강의에서 빌 하이블스 목사님은 마지막에 한 사진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큰 손 안에 쥐어져 있는 갓난 아기의 작은 손”의 사진이었습니다.

빌 하이블스 목사님은 아버지의 큰 손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갓난 아기의 작은 손은 이 땅의 연약한 리더들의 손으로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붙들린 리더들의 작은 손. 아무리 작아도, 아무리 약해도 괜찮습니다.

진정한 리더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그 약한 손들을 꼭 붙잡고 리더의 길을 이끄실 것이니까요.

이번 휴가 때에 “마음”이의 갓난 아기 손만 본 것이 아닙니다.

제 손이 갓난 아기 손으로 새롭게 보였습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두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지속적으로 실험 발사하는 북한의 태도에 대해 미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것 같습니다.

미국은 그냥 좌시하지 않겠다며 심각한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음을 여실히 보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8월 위기설(危機說), 8월 전쟁설(戰爭說)이 허황되이 들리지 않는 이 때에, 걱정하고 두려워할 일만이 아닙니다.

이 8월, 우리가 부를 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에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 데 없네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

 

그렇습니다.

여기저기서 발사되는 미사일이 잘난 듯이 저 하늘 높이 솟구쳐도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먼지만도 못한 시시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각 나라의 정권이 제 아무리 힘 있다고 떠들어도 우리 주 목소리 한 번만 발하면 천하의 모든 것이 다 망합니다.

우리에게 8월에 부를 노래가 있는 한, 난리의 소문이 끊이지 않는 8월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만 ♬...”


지난 화요일(25일) 오전, c국의 k시에 있는 지하 신학교를 l선교사님의 안내로 방문하였습니다.

허름한 아파트의 베란다를 개조해 신학교 교실(?)로 만들었는데 40여명의 남여신학생들이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1년에 네차례 모여 한번에 2-3주 동안 합숙하며 수업을 진행한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아침에 1시간 20분 동안 l선교사님의 통역으로“소명”에 대한 특강을 하였습니다.

2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에 이르는 신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였습니다.

강의 중반 즈음에 그들에게“우리가 다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각각 은사가 다르니 주어진 자기의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잘 섬겨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립시다” 라고 강의하면서“이 자리에 음악의 재능을 가진 분들이 있으면 나오셔서 특송을 하시면 좋겠습니다”라는 제안을 드렸습니다.

 

6명의 신학생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나와 잠시 의논 후, 그 중에 한명이 키보드를 치고 5 명은 찬양을 진지하게 불렀습니다.

중간 즈음에 제가 나지막히 l선교사님께 그들이 부르는 찬양에 대해 물었습니다.

“무슨 뜻이죠?”

선교사님은 뜻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모르겠는데요.

”청산유수로 통역하시던 선교사님의 그 뜻을 모르신다는 데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목사님, 저들은 지금 c국 말로 통일된 찬양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수민족 언어로 각각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릅니다.”

 

찬양 후 선교사님이 키보드를 친 분에게 물어 그 내용을 알게 된 선교사님이 제게도 일러 주셨습니다.

찬양의 내용은“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나는 존재하지 못하네...” 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을 뛰어넘어 공부하러 모이고,

매시간 눈물로 강의를 경청하는 이유가“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는 고백적 찬양 가운데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현지 지도자 세미나를 위해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저들의 순전한 고백적 찬양이, 중요한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제 귓가에서 오래동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더위에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선교팀들이 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하고 또 출발할 팀도 있고…

여러분들이 더위 가운데서도 뜨겁게 중보기도 해 주셔서 이렇듯 힘있게 선교를 할 수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캄보디아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으실 즈음에는 한국에 있을 것이고 오는 주간에는 중국도 다녀옵니다.

캄보디아 이야기입니다.

 

캄보디아에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어느 학교에서건 음악교육이 없습니다.

음악은 단지 노래방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접할 뿐입니다.

인구의 삼 분의 일에 달하는 2백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킬링필드(1975-78) 때에 이미 그들은 노래를 잃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새가 운다”고 말하지만, 미국에서는“새가 노래한다”고 표현합니다.

캄캄한 밤에도 노래하는 새가 있습니다.

나이팅게일이라는 새입니다.

이 새는 밤이라도 노래를 부르는데, 캄캄한 밤의 시간에 캄보디아 사람들은 노래를 잃은 것입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복음은 노래를 잃은 사람에게 노래를 되찾아 준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복음을 가슴에 품은 자마다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이번 단기선교를 통해 보았습니다.

 

캄보디아 단기 선교팀은 이번 선교 중에 주님의 사랑으로 말씀을 전해 주었고, 안경도 맞추어 주었고, 영어도 가르쳐 주었고, 미술도 가르쳐 주었고, 머리도 깎아 주었고, 머리도 감겨 주었고, 참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도폭발 등을 통해 구원의 예수님을 증거도 하였고, 지도자들에겐 제자의 비전에 대한 세미나도 진행했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결과로 캄보디아인들의 가슴에서 출발한 노래가, 그것도 하나님을 송축하는 노래가 저들의 입을 통해 크게 불려졌습니다.

큰 상처를 입고 슬픔 가운데 잠겨 노래를 잃은 캄보디아가 다시 노래를 부르는 나라가 되기까지 무엇을 하여야 할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50번째 주(州)인 하와이는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와이 주(州)의 수도 호놀룰루는 오하우 섬에 있고, 코나 열방 대학은 하와이 주에서 가장 큰 섬인 빅 아일랜드에 있습니다.

 

몇 년 전 코나 열방 대학에서 진행하는 한인 목회자 제자훈련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업 장소는 야외였고 바다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불렀던 많은 찬송 중에 가장 격한 눈물 가운데 부른 찬송은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였습니다.

 

주 품에 품으소서

능력의 팔로 덮으소서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보이는 바다에 거친 파도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출렁이는 바다 물결을 보면서 부르는 찬송 가운데 나를 품으시고 나를 날아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히 느꼈습니다.

 

저는 압니다.

거친 파도가 날 향해 와도 그 파도는 저를 삼키지 못한다는 것을.

폭풍우 때문에 떨지 않고 주와 함께 날아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거친 폭풍우 위에서 잠잠히 주를 바라볼 것입니다.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17 Nex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