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길 떠나는 형제여

 

둘러 보십시오.

크고 작은 가방을 가지고 길을 떠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물어보십시오.

더운 여름날, 도대체 어디로 가시는 것인지.

혼두라스,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케냐, 그리고 킹덤미션을 통한 무슬림과 중국.

그 어느 곳도 편한 장소는 아닙니다.

 

한 번만 더 물어 보십시오.

왜 그곳에 가시는지?

모두에게 들을 답은 단 하나일 것입니다.

주께서 가라시니

 

복음을 들고 길 떠나는 형제들이여.

힘드시겠지만 잘 다녀오십시오.

그대들이 가는 곳은 거친 광야,

그러나 그 광야에 샘이 솟아나고 꽃은 우거질 것입니다.

 

그 길이가 길든 짧든, 떠남은 새로운 경험의 시작입니다.

길 떠나는 형제여,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담아 오십시오.

그대들을 떠나보내고 교회를 굳게 지킬 형제들은 계속 눈물로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 곧 다시 만나 이 여름에 각 처에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을 높여 드려요.

 

 

 

 


정해진 시간은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또 지나갑니다.

기다렸던 2024년 전교인 여름 수련회가 정한 날짜에 시작되었고

오늘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장으로 넘어갑니다.

수련회는 지나도 강사님이 뿌리신 영원한 말씀은 삼십, 육십, 백배로 자라날 터이니

잔치를 베푸신 하나님께 영광, 말씀을 심어주신 윤영민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정해진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또 지나갑니다.

하나님은 사랑은 영원히 풍성하게 부어지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정해진 시간에 가볍게 끝이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6)

 

영원한 사랑 가운데 정해진 시간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멋지게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무한 신뢰하기에

우리는 그 시간까지 잘 버티고 견디면 됩니다. 이렇게 외치면서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대 있음에

 

오늘은 한해의 절반이 막을 내리는 날입니다, 모두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습니다.

지난 6개월, 아니 지난 한달만 해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요.

 

6월을 돌아보려니 함께 떠오른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리운 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선교회여, 그대 있음에 선교바자회가 있었습니다. 땅끝을 불러 손을 잡은.

청소년이여, 그대 있음에 시와 찬미의 밤이 있었습니다. 만물을 불러 손을 잡은.

교우여, 그대 있음에 특별새벽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불러 손을 잡은.

사역위원회여, 그대 있음에 수료예배들이 있었습니다. 변화된 자를 불러 손을 잡은.

 

선생님이여, 그대 있음에 ‘VBS와 특별집회가 있었습니다. 다음 세대를 불러 손을 잡은.

예배자여 봉사자여, 그대 있음에 예배, 구역, 섬김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불러 손을 잡은.

청년이여, 그대 있음에 곳곳에 따듯한 불이 있었습니다. 귀한 시간을 불러 손을 잡은

어린이여, 그대 있음에 강단 앞에 불이 있었습니다. 부모 언니 동생을 불러 손을 잡은.

 

이제 한해 절반의 막을 여는 날이 서서히 다가옵니다.

우리는 6월에 부르던 노래를 멈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운 주님이여, 존귀하신 주님이 있음에 우리가 있나이다.

우리를 불러 우리의 남은 날들을 손잡고 가소서

 

 

 

 

 


광야에서 들려오는 노래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서 잔잔하게 들려오는 노래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광야에는 위험을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서 우렁차게 들려오는 노래가 있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광야에는 마실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서 감미롭게 들려오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광야에는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서 확신 있게 들려오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적막함과 두려움의 광야에 있지만

다윗이 광야에서 불렀던 그 노래를 잘 따라 부르며 걷노라면

다윗이 그랬듯이 우리의 광야 길도 어느덧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를 듣고

광야에 쓰러져 있던 그 누군가가 다시 잘 일어날 것입니다.

 

 

 


약을 먹으려다 문득

 

병원에 갈때마다 반복해서 제게 묻는 것이 있습니다.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복용하는 약. 이미 알고 있음에도 매번 확인합니다.

제가 먹는 약이 여럿 있습니다.

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약은 매 4시간마다 먹어야 하는 진통제입니다.

그 약을 제시간에 먹지 않으면 진통이 크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새벽에 깨어 그 진통제를 찾았는데

다른 약들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그 약을 집어 먹으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고통보다 천만배 이상 아프셨는데

진통제는 물론 다른 약도 드시지 않으셨다는---

 

나의 죄 때문에 받으신 고통을 묵묵히 참으신

사랑의 예수님을 문득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울면서도 복용시간이 많이 지나갈까 하여 허겁지겁 약을 먹었답니다.

약을 먹고 또 울었습니다.

 

이번에는 자그마한 고통도 잘 참지 못하고 여전히 시간 맞추어

진통제를 먹은 제가 스스로 너무 얄밉고, 예수님께 죄송해서 울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아프지 않을 천국까지 연약한 인생들에게 약을 보내시어 먹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너무 고마워 눈물이 잘 멈추지 않았던 그날 새벽이었습니다.


섞어 놓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섞어 놓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로.

하나님은 그때마다 우리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라고 하십니다.(7:14)

자기에게 주어진 환난의 시간을 이렇게 묵상하여 찬송으로 만든 분이 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고난은 허락된 하나님의

거친 광야를 지날 더욱 낮아지게 하소서

환난의 바람 때에 오직 주만 바라보게 하소서

비록 벼랑 끝에 있다 해도 희망의 놓지 않게 하소서

내게 있는 모든 고난과 시련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김성조씨가 작사 작곡한 찬송의 제목은 "허락된 고난"입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허락없이 일어난 고난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놀라운 계획을 담아 고난이 허락된 것입니다.

"허락된 고난" 다른 이름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달았기에 그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 벼랑 끝에 있다 하여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리"

 

나의 벼랑 "" 하나님이 허락하신 희망의 ""입니다.

우리 인생을 "" ""으로 섞어 놓으신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를 희망으로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 너무 멋진 선물입니다.


Well Done!

 

새벽을 깨우는 찬양과 기도와 말씀으로 6월의 첫날은 시작되었습니다.

잠시 후 형형색색의 음식과 물건은 친교실부터 교회마당까지 이어져 춤추었습니다.

다양한 언어가 어우러지는 마당으로 중천(中天)의 태양 빛은 부어졌습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바자회 사람들은 모두 그리고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라

이 시대에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고자 분투하는 사람들,

편하게 살려하지 않고 선교의 고난에 거침없이 참예한 사람들,

예수님이 보시면서 무어라 말씀하실까 궁금했습니다.

 

“Well Done!”

잘하였도다!”

 

“Well Done!”은 예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칭찬입니다.

잘하였도다는 예수님이 그의 자녀들을 자랑스러워하시는 표현이십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존재의 이유를 분명히 할 때,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선교라는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을 때,

예수님은 “Well Done!”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또 들려주실 것입니다.

“Well Done! 그 한마디면 우리는 충분합니다.

 

 

 


기억하고 기대하자

 

기도해 주셔서 샌프란시스코 총회, 장로님들과 함께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제 48회 교단총회의 주제는 기억하고 다시 기대하자였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잘 기억해야, 베푸실 은혜를 또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베푸신 풍성한 은혜를.

 

내일은 기억하는 날,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한 군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죽음으로써 말합니다. “내 나라를 이렇게 사랑하노라

기억하십니까? 대한민국과 미국의 오늘을 있게 한 군인들의 고귀한 희생을.

 

오늘의 우리 모두는 숱한 만남을 통해 빚어진 것입니다.

나를 품어주는 가족, 나를 바꿔주는 스승, 나를 위로하는 친구---

오늘은 러시아권 예배 설립 8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

기대하십니까? 우리가 만난 다민족과 함께 계속 만들어갈 더 놀라운 미래를.

 

여러분의 시력은 어떻습니까? 독수리의 시력은 9.0 라고 합니다.

멀리 보는 독수리와 그렇지 않은 새들과는 기대치가 다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같이 날아오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40:31)

 

기대하십니까? 독수리같이 날아오르면 모든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버팀목

 

앉지도 않습니다.

눕지도 않습니다.

불평도 없습니다.

원망도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보듬은 것을 애써 살리려 합니다.

자기 모양새는 하나도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자기가 안고 있는 것이 멋지게 잘자라면 됩니다.

 

자기에게 기댄 것이 아무리 무거워도,

따가운 볕 매서운 풍우가 밤낮으로 몰아쳐도,

미동(微動)도 없이 눈물겹도록 버텨냅니다.

그 이름은 버팀목입니다.

아름드리 자라난 모든 나무는 자기만을 위했던 버팀목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여정에 그런 버팀목이 없었다면 우린 벌써 뒤틀려졌거나 꺾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그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버팀목 같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 이름은 부모님이십니다.

속만 썩이던 우리에게 이토록 멋진 인생을 주시려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이제야 눈물로 버텨주셨던 사랑의 그 자리가 보입니다.

너무나 그립고 감사한 버팀목 부모님.

 

 

 

 


자기를 낮추는 사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답변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자기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특권의식이나 이해타산이 없습니다.

그는 좋은 일을 하고도 부끄러운 듯 자신을 감춥니다.

모든 것을 자기 혼자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으스대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세상에서 정말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찾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으로 어린아이를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아아~~ 예수님이 불러내신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 사랑스러운 우리 자녀들을 함께 축복해요.

그들도 우리도 끝까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으로 살아가

 

모두 천국에서 우리 예수님께 큰 자로 불리길 함께 기도해요.


사랑으로 길을 내다

 

북한 가보셨나요?

북한에 가실 계획이나 북한에 가서 계획이 있으신가요?

아마 없으실 거예요.

북한에서 목숨 걸고 탈출하려 하는데 북한에 가서 살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아내와 다섯 자녀를 데리고 미국에서 북한으로 아주 이사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여인과 결혼한 의학박사 윤상혁 교수님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곳에서 어린이들을 돌보고 아픈 이들을 고쳐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길을 어떻게 그는 그의 가족과 함께 것일까요.

사랑하면 어떤 장벽이나 어려움이 있어도 다가갈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길을 내다"

교수님이 지은 이름인데, 지인으로부터 선물을 받아 읽어보았습니다.

 

북한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일깨워준 책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없는 길을 만듭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늘로부터 낮고 천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어떤 길을 걸었는지 묻고 싶은 4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조용필씨는 이라는 제목의 노래에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길을 왔는 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빌딩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화려하지만 쓸쓸한 맨해튼의 모습을 그대로 노래에 옮겨 놓은듯합니다.

맨해튼의 지친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곳에 담대한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담대한 교회는 오늘, 우리 교회 출신 허장길 목사님을 통해 설립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두 명의 정탐꾼이 다녀왔듯이

허장길 목사님과 사모님이 맨해튼을 미리 엿보시고

그곳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임을 확신하셨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오늘은 분명히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날입니다.

 

 

 

 


사람을 키우다

 

자전(自傳): 자신들이 직접 복음을 전한다.

자립(自立): 자기 스스로 재정을 감당한다.

자치(自治): 자기들 가운데 지도자를 세운다.

중국에서 40(1854-1893)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네비어스의 선교정책입니다.

 

이일훈 선교사님은 네비어스의 선교정책을 캄보디아의 선교정책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많은 예산을 쏟아붓고도 아무런

소득 없이 미군이 철수하자 그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자주국방의 의지가 없는 나라에 미군의 원조(援助)와 철수(撤收)는 재앙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선교사를 의존하는 캄보디아 교회도 선교사가 철수하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 자전, 자립, 자치의 선교를 펼치고 계신 것입니다.

선교사가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너희 스스로 전해라.

선교사가 직접 재정을 돕지 않는다, 너희 스스로 재정을 만들어라.

선교사가 직접 지도하지 않는다, 너희 스스로 지도하라.”

 

어제 새벽에 말씀을 전해주셨던 이일훈 선교사님은

캄보디아의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하셨습니다.

교우들의 기도와 헌신 가운데 완공을 눈앞에 둔 캄보디아 벧엘 국제학교는

사람을 키우는 학교입니다. 너무 필요하고 뜨거운 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하나 꽃 피어

 

나 하나, 별 것 있겠느냐며 가끔 자조적(自嘲的)인 말을 던지시나요?

이제 그런 말은 내 입에서 멀리~멀리 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나도 매우 소중하지만, 그 하나가 여럿과 어울리면 또 다르게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 혜안(慧眼)을 가졌던 조동화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내가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른 것 아니겠느냐

 

오늘은 임직 감사 예배를 드리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임직자마다 나만 바라보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내려놓고 최선을 다해 내 꽃을 피우면 됩니다.

그러면 여기저기 함께 핀 꽃들로 우리 교회는 마침내 온통 꽃밭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 선진(先陣)들부터 지금의 성도들까지 십자가로 짙게 물들어 있으니

임직자마다 너도나도 그 십자가에 물들면

우리 교회는 더욱 활활 타오는 붉은 산이 되어

세상이 주목하고 세상을 바꾸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셨나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가장 무거운 질문을 고난의 예수님께 던집니다.

예수님,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돌아오는 답변은 없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53:7)

침묵이 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아프셨는지 끝까지 말씀을 안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산과 들과 초목은 그 눈물로,

그리고 해는 그 잃은 빛으로 예수님의 처절한 아픔을 절절히 일러줍니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박힌 그 손과 발

죄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

하늘도 산과 들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빛을 잃고 캄캄하게 되었네

오 놀라운 사랑 크시고 끝없도라

오 주님 사랑에 구원의 강물 넘치네

 

이제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아프신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침묵하신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봄이 오면

 

산에도 들에도 봄이 왔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짙은 향기를 날리며 여기저기 핀 꽃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진 겨울바람에도 죽지 않고 견디다가

봄과 함께 꽃들이 아름답게, 굳세게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봄이 내 마음에도 오면 좋겠습니다.

그 꽃이 내 마음에도 피면 좋겠습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꽃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펴~~

 

눈이 시리게 찬란한 진분홍색 진달래 꽃도 좋습니다.

눈이 부시게 고결한 샛노란색 개나리 꽃도 좋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절이 성큼 다가오는데

내 마음에도 봄의 꽃이 어서 활짝 피어나면 좋겠습니다.

 

 

 


후반전(後半戰)을 달리다

 

얼마 전 지인(知人)으로부터 “Half Time”이라는 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하프타임 이후 후반전이 중요하듯이,

인생 후반전의 중요성에 대한 책입니다.

사실 모든 것의 최종승부는 후반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갈렙은 후반전의 사나이들이었습니다.

한나나 에스더도 후반전이 멋있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11월의 미국 대통령 선거는 인생의 후반전에 있는 자들의 대결입니다.

윤여정씨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74세 때 수상(受賞)하였습니다.

그들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더라면 그들과 역사(歷史)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딱 절반, 2024년 사순절 서원 기도회가 어제로 딱 절반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순절의 후반전이 남아 있습니다.

잘 달리다가 멈칫거리면 안 됩니다.

아쉬운 전반전이었다고 후반전을 통째로 포기하면 안됩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설레는 후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늦지 않았습니다.

멋진 후반전을 기대하며 준비하십시오. 다시 신발끈을 잘 조여 매십시오.

그리고 다시 달리는 것입니다. 완주(完走)의 그 날까지.

 

 

 

 

 

 

 


Why Me?

 

“Why me?”

하나님,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일어난 것입니까?”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묻고 싶고, 또 물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원한 답을 듣곤 하십니까?

 

아니지요. 아무런 답을 듣지 못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질문을 받는 것 같습니다.

너 고난 가운데에서도 나를 여전히 신뢰하니?”

 

고난의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고통 가운데 물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으로부터의 대답은 없었으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으셨습니다.

힘드신 일이 있어 “Why me?”라고 하나님께 물으셨습니까?

대답은 없어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거두거나

우리의 가는 길을 멈추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주 먼 옛날

  

오늘은 퀸즈장로교회 설립 50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충격적이고도 경이로운 50년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 이야기는 50년 전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아주 먼 옛날까지.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퀸장을 향한 계획 있었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 옛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계획의 첫 50년이 베일을 벗은 것입니다.

그 첫 50년을 돌아보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고난 가운데 성장하는 웅장하고 멋진 것임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50년의 커튼이 올라갑니다.

어떻게 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크게 기대하셔도 됩니다.

아주 먼 옛날의 계획은 지난 50년으로 끝난 것이 아니니까요.

 

 

 

 


출발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탄자니아 선수 존 스티브 아쿠와리.

출발선을 빠져 나가려는 순간 옆 사람과 부딪쳐 넘어졌습니다.

피가 많이 흐르는 큰 부상을 입었고 의료진들은 그만 뛰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 뛰었고 쓰러지면 또 다시 일어나 절뚝 거리며 달렸습니다.

 

날이 어두워 결승점에 도착한 그는 따듯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도 받았습니다.

부상을 입고도 왜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끼?”

그는 눈물과 미소로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이 이 먼곳까지 나를 보낸 것은 마라톤 경주를

출발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끝까지 완주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출발한 모든 자가 아니라 완주자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의 선언이십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 바울의 외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서원 새벽기도회.

같이 출발해요. 힘들어도 모두 완주해요.

그리고 마지막 날, 완주자의 노래를 뜨겁게 함께 불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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