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지난 월요일(6일)부터 우리 교단의 동부지역 목사 장로 기도회가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있었습니다.

개회 말씀 때에 총회장 고택원 목사님이 “태도는 삶을 바꾼다.”하시면서 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노부부가 필라델피아 지방의 한 작은 호텔에 들어와 방을 찾았습니다.

호텔은 이미 만원이었습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노부부에게 조지 볼트라는 종업원이 다른 호텔의 상황을 알아보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호텔도 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부부가 더욱 당황해 할 때 볼트는 자기 방에서 주무시라고 했습니다.

그 종업원의 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떠난 그 노부부가 몇 년 후에 볼트에게 뉴욕으로 와 달라는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 호텔을 보여주며 이 호텔이 내가 당신을 위해 지은 것인데 이 호텔의 총 지배인을 맡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호텔을 지은 사람은 윌리엄 월도프 아스토, 그 호텔 이름은 그 유명한 월도프 아스토리아.

볼트의 태도가 볼트의 삶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지요.

 

태도가 무엇일까요?

위키 백과라는 데서 찾아보니 태도는“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나타나는 행동 및 감정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태도는 한두 번 보여 지는 행동이나 감정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지속적으로 보여 지는 행동과 감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나의 태도는 내가 만난 환경보다 더 중요합니다.

똑 같은 환경인데 거기서 항상 어려운 점만 말하고 할 수 없다는 핑계만 대는 태도를 가진 사람과 그 환경에서 늘 감사하고 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진 자는 사뭇 다른 삶을 살 것입니다.

아무래도 태도가 삶을 바꾸는 것은 분명합니다.


육상에는 장애물 경주가 있습니다.

그 중 여자는 100m, 남자는 110m 경주가 있습니다.

모두 10개의 허들을 넘어야 합니다.

허들(hurdle)의 뜻은 장애물, 어려움입니다.

첫 번째 장애물부터 하나하나 잘 뛰어 넘어야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2017년도 여지없이 장애물 경주와 같지 않습니까?

이제 2월이 되었는데 누구나 첫 장애물을 만날 즈음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장애물 앞에서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단 하나의 방법 밖에 없는 것 아시지요?

그것은 무력하게 주저앉는 것도 아니고, 비겁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첫 번째 장애물을 힘차게 뛰어 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은 첫 번째 장애물“여리고”를 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리고”는 낙공불락의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첫 장애물 앞에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2017년, 내 앞에 첫 번째 장애물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제게도 첫 번째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의 이름도 잘 압니다.

“제 자신”입니다.

두렵다고 하는 제 자신, 안주하려는 제 자신이 첫 장애물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그 첫 장애물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cheer up!” ”힘내라!”

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응원소리....


지난 수요일“자유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표어를 가진 서부의 명문 스탠포드 대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날 거대한 고급 휴양지 같은 캠퍼스에는 한점의 바람도 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바람들이 강하게 불고 있었습니다.

 

지성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스탠포드는 동부의 아이비리그가 부럽지 않는 자긍심과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뭔가 조심스런 방문객들과는 다르게 당당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학교의 학생이나 직원인듯 하였습니다.

1891년 개교한 스탠포드 대학은 다른 명문 사학에 비해 역사가 짧으나 학문적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학문적 척도를 나타내는 다수의 노벨상이나 지난 여러 업적들을 비롯하여 현재와 미래의 각 분야에 끼칠 지성의 바람은 여전히 회오리와 같다고 하여도 시비 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옥의 바람도 불고 있었습니다.

학교 박물관 입구에 커다란 미술품이 있었습니다.

그 제목은“지옥의 문”이었습니다. 로댕의 작품입니다.

그 유명한“생각하는 사람”을 비롯하여 수 많은사람들이 지옥의 문에 매달려 있거나 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괴로운지 모두 뒤틀려 있었습니다.

수치스러운지 머리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한심한지 후회의 표정도 역력했습니다.

스탠포드 캠퍼스는 지옥도 바람을 일으켜 지성의 사람조차 여지 없이 꺽어 버리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진리의 바람도 불었습니다.

지옥의 문이 있는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학교 교회가 있었습니다.

캠퍼스 전체를 둘러보지는 못했으나 교회에서 바라본 캠퍼스 전경이나 그 옆에 높이 솟은 타워를 볼 때 교회가 전체 캠퍼스의 중심인 것 같았습니다.

교회당 안팎에 여러 모습과 오르간 등 시설들이 인상적이었으나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고풍스런 강단이었습니다.

진리가 외쳐질 강단. 그곳이“자유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표어를 구현해 줄 유일한 진원지임이 분명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하지만 짧은 방문으로는 스탠포드 대학교 구성원들이 자유의 바람을 지성에서 기대하는지 진리에서 기대하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은 흘러흘러 낮은 데로 갑니다.

 

꽃들아 피어피어 어디에 사니?

꽃들은 피어피어 낮은 데서 삽니다.

 

낮은 곳에 뜻밖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 낮은 곳에 로고스도 있답니다.

 

헬라어 로고스(λογος)의 뜻은“말씀”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초월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낮은 이 땅에 임하신 것입니다.

 

“생명”이란 로고스가 낮은 곳 베다니에 임하여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사랑”이란 로고스가 낮은 곳 수가성에 임하여 절망의 한 여인이 회복되었습니다.

“구원”이란 로고스가 낮은 곳 여리고에 임하여 외톨박이 삭개오가 찾아졌습니다.

 

로고스라는 초월적(超越的) 존재가 낮은 이 땅의 내재적(內在的) 존재로 임하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낮은 곳은 로고스가 임하여 환희를 일으키는 자리이며,

낮은 곳은 우리의 삶이 잘 흘러가야할 골짜기이며,

낮은 곳은 우리의 말이 꽃 피어나야할 동산입니다


“으라 차라!”

무술(武術)의 고수(高手)가 기(氣)를 집중하여 모을 때 외칩니다.

모아진 기(氣)에서 장풍(掌風)도 나오고 공중부양(空中浮揚)도 나옵니다.

중학교 때 읽었던 무협소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신앙(信仰)의 고수(高手)도 기를 잘 모아야 합니다.

특별히“오기”를 잘 모아 사는 것이 신앙의 고수가 사는 삶입니다.

“오기”란 고집스러운“오기(傲氣)”가 아니라“다섯 가지 기”를 말합니다.

“다섯 가지 기”는 도, 대, 댐, 쁨, 다림입니다.

 

1. 도-쉬지 말고 기도하자

2. 대-말씀을 기대하자

3. 댐-성도끼리 서로 기대자

4. 쁨-항상 기뻐하자

5. 다림-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자

 

이 다섯 가지 기가 모아지면 장풍이 아니더라도 우리 앞에 모든 원수는 저 멀리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공중부양이 아니더라도 믿음으로 독수리같이 하늘을 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한 해의 여명(黎明)이 솟았습니다.

하루하루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오기를 가지고 살아 우리 모두가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신앙의 고수가 되면 좋겠습니다.


딱 일주일이 지났을 뿐입니다.

새해의 시간이.

지난 송구영신 기도의 시간에 온 회중과 함께 불렀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웬일입니까? 내 맘에 모신 주님을 찬송하며 시작한 새해 일주일 만에 제게는 이 노래가 더 어울리는 듯합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왜 아직도 내 속엔 내가 그렇게 많은지, 스스로 슬프고 주님께 미안할 뿐입니다.

내 속에 있는 헛된 바램들을 버림으로 주님이 거하시기에 편한 곳이 되길 바라며 김남조 시인의 “그대 있음에”를 나직이 불러봅니다.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

그대 있음에

삶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주님 있음에 내가 있을 뿐입니다.

빠르게 다가와 서둘러 지나갈 새해의 나날 가운데 잊지 않으려 합니다.

나를 불러 손잡아 주시고, 삶의 뜻 배우게 하시고, 그 빛에 살게 하신 주님 있음에 내가 있음을.

 

새해 첫날입니다.

새해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만복이 온 가정에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첫날이 되면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아이들의 설날노래가 울려 퍼지던 고향나라, 지금은 새해 설날도 잊은 채 진통을 겪고 있는 조국이 그립습니다.

 

설날에서“설”의 뜻은“낯설다”“익숙하지 않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새해 이 첫날은 우리 모두에게“낯선 날,”“익숙하지 않는 날”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닥 낯설지 않습니다.

아니 다 그대로입니다.

새해라고 하지만 길도 건물도, 사람도 환경도 다 그대로 있습니다.

 

달력을 바꾸어 놓은 것 외에 새로운 것이 없음에도 진정한 새해를 맞이하려면 내 자신이 새롭게 변화가 되어야만 합니다.

내 자신이“낯설고”“익숙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화된 말, 가까이만 보던 데서 먼 곳을 바라보는 변화된 눈,

사람의 소리만 듣다가 하늘의 소리를 먼저 듣는 변화된 귀....

아름답게 변화 된 내가“낯설어야”오늘이 진짜 나의“설날”이 되는 것입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껜데요

나의 나의 설날은 오늘일까요?


이렇게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니 또 일 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새해로 건너가시기 전, 올해를 잠시 돌이켜보세요. 어떤 단어가 떠오르시는지요?

제게는“도전”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돌이켜보니 사계절(四季節)마다 도전이 있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 있었던 임직식을 지나 “응답하라 4150”이라는 제목으로 문을 연“선교회의 밤”은“우리가 중심이다” “bravo my new life” “great dreamer” “삼삼한 밤” 참신한 도전이었습니다.

 

여름

러시아권 설립예배, 여름 비 오는 주일 오후, 다양한 퍼포먼스와 다양한 언어로 복음을 전한 노방전도,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 열방을 향한 여름단기 선교 뜨거운 도전이었습니다.

 

가을

낙엽이 곱게 물들어 가던 가을, 10월 23일“행복에의 초대”가 있었습니다.

“집으로”라는 주제 아래 수백 명의 다민족이 몰려왔던 그 날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겨울

가을에 시작된 연습, 12월 11일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성탄칸타다“사랑의 왕” 12월 18일은 처음 시도된 다섯 교회의“성탄연합찬양축제” 비범한 도전이었습니다.

 

새해에도 또 다른 도전은 계속될 것입니다.


성탄절이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곤 하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도 아니고, 예수님을 장사지낸 아리마대 요셉도 아닙니다.

요한나바드의 요셉입니다. 홍요셉.

잘 모르시겠다고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적잖은 분이 아실 것입니다.

 

홍요셉, 그 분은 우리 교회 출신 홍황식 선교사님입니다 .

제가 부교역자시절 함께 동역하셨던 선교사님.

기도하시고, 기도하시고 또 기도하시던 선교사님.

다른 데는 관심이 없으시듯이 묵상하듯 감은 눈을 아래로만 향하시던 선교사님.

 

근황이 궁금하던 차에 한 청년이 전해 준 선교사님의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책 제목은“요한나바드에서 학교하기”입니다.

요한나바드는 파키스탄의 최대 기독교 마을이면서 가난, 문맹, 술, 담배, 마약도 유통되는 도시입니다.

 

선교사님은 2009년 1월 23일, 가족들과 함께 이민 가방 10개를 끌고 그곳에 도착한 후 1년의 준비기간을 보내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50명의 임직원과 1,000명의 학생들이 함께하는 기독교학교를 세우셨고 또 그 너머를 향해 전진하고 계십니다.

 

그 책 첫 page에는‘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이 쓰여 있었고 다음 page에는“현장에서의 첫 걸음”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현장,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해 처절히 살아가는 그 삶의 현장에 누군가가 함께 살아주면서 위로하고 보담아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기”부터 “골고다에서 대신죽기”까지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위로하시고 보담아 주셨던 예수님 이야기처럼, “요한나바드에서 학교하기”는 가장 성탄(聖誕)스러운(?) 요셉 이야기였습니다.


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여 높은 산에 올라 외치라.

유대 고을마다 고하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오 예루살렘 딸들아 보라 왕이 네게 오셨네.

머리 들라.

너의 머리를 들어라.

영광의 왕이 들어오신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전능의 왕이 다스리시네...

 

지난 목요일 밤, 맨해튼 fifth avenue에 있는 saint thomas church에서 소년 합창단의 메시야 공연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헨델의 메시야 공연에 여러 차례 참석해 보았지만 소수의 남성과 소년들로 구성된 합창단의 공연은 처음 경험해 보았습니다.

소수의 찬양대원들이 왕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며 미성(美聲)으로 부르는 찬양 속에서 겸손하신 왕, 진짜 왕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두 시간이 훌쩍 넘는 연주회가 끝나고 들어 올 때보다 다소 추워진 맨해튼 거리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코트 깃을 한껏 세우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여러 블록을 걸었습니다.

높은 건물에서 화려한 조명들이 춤추는 모습에 눈은 휘둥그레 해졌지만 그 화려함 뒤에 숨어있는 성탄의 일그러진 상업화에 마음은 아팠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고을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맨해튼에도 오셨습니다.

맨해튼에는 예수님이 진짜 왕이라며 그 분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자들도 있고, 나의 진짜 왕은 성탄절 매출을 올려줄 손님들이라며 그들에게만 문을 활짝 여는 자들도 있습니다.

맨해튼의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2천 년 전의 유대 고을 베들레헴 사람들처럼 진짜 왕 예수님에게 “내겐 당신을 맞을 빈 방이 없네요.”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는 오늘 오후 플러싱 퀸즈장로교회 찬양의 자리에 오실 “사랑의 왕”을 맞이하실 방은 있으시지요?


주화씨를 아시나요?

송주화씨.“용서”라는 신학적 주제를 다룬 영화“밀양”의 제작에도 참여하시고 현재는 한국에서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계신 목사님.

잘 모르실 것입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분이 참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목회자 월간지인“목회와 신학”12월호에 쓴 글을 보았습니다.

제목이 조금 깁니다.

“성도들과 함께하면 좋은 크리스마스 영화들.”그는 그의 글에서 성탄절에 볼만한 영화들,“멋진 인생”,“크리스마스 캐롤”,“작은 아씨들”,“메리 크리스마스”,“34번가의 기적”,“내티비티 스토리-위대한 탄생”등 여러 편의 영화를 간단한 해설과 함께 친절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친절은 친절을 베푸는 자에게 기쁨을, 친절을 받는 사람에게는 유익을, 그리고 그 친절을 받은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신비함이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주화씨가 친절히 소개한 영화를 보게 되면 저는 그 감동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아직 그 영화들을 못 보았지만 친절이 전달되는 짧은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도로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가 길가에 쓰러진 청소년을 일으켜 주고, 그 청소년은 무거운 짐을 든 나이 드신 여자 분을 도와주고, 그 여자 분은 자동차를 파킹하고 미터기에 넣을 동전이 없어 쩔쩔매는 사람에게 동전 몇 개를 건네주고, 그 사람은 지갑을 떨어뜨린 자의 지갑을 집어 전해주고....

이어지는 친절을 받은 마지막 사람이 맨 처음 친절을 베풀었던 공사장 인부에게 물을 친절히 전달해 주는 것으로 끝나는 영상이었습니다.

 

이 12월이 친절을 주고받는 날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왕 예수님이 절망으로 쓰러진 우리를 찾아오셔서 친절히 일으켜주셨는데, 사랑의 왕의 이름으로 다른 자들을 친절히 도와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왕을 친절히 소개해 주고, 그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사랑의 왕께 찬양을 아주 친절한(kind) 목소리로 올려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입 밖에 나간 말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말은 입 안에 있으면 내 얌전한 종이 되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나가면 내 거친 주인이 됩니다.

당황스럽게도 내 입을 떠난 말은 결코 다시 내게로 돌아오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크고 작은 일들을 벌일 뿐입니다.

 

지나간 세월도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흘러간 시간으로 그 어떤 일도 다시 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과 함께 찾아오는 좋은 기회들도 빨리 붙잡지 않으면 그 시간과 함께 곧 멀리 흘러가 다시는 만져볼 수 없게 됩니다.

 

겨울이 몇 걸음 앞에 다가왔습니다.

12월 초(初)를 가을이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1월 말(末)을 아직 가을이라 불러도 크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 더 늦기 전에 꼭 찾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거울 앞입니다.

싫어도 귀찮아도 내 모습이 어떤지 거울 앞에서 다시 살펴야 합니다.

 

내 인생의 겨울이란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맨해튼 높은 빌딩들을 가소롭게 내려 보던 태양이 늦가을의 짙은 노을을 남기며 허드슨 강 서쪽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풍경(風景)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주님 만나기 전의 내 영적인 상태를 잘 살펴보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입니다.

아시지요?

말씀은 거울과 같다는 것. (야1:23)

 

겨울 전(前)에 거울 전(前)에 서십시오. 꼭!


기적 같은 일들이 있습니다.

올해 어떤 기적을 경험하셨나요?

기적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은혜입니다.

기적, 크게 감사해야 합니다.

 

기적보다 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일상(日常)입니다.

올해도 공기, 물, 햇볕을 날마다 누리고 하루하루 일하고, 먹고, 자고 살아온 일상(日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상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입니다.

일상, 확실히 감사해야 합니다.

 

가시는 아픕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올해 어떤 가시 같은 일이 있으셨나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가시가 아니었으면 깨닫지 못했을 일들이 많았고 그 가시 때문에 더 큰 위험을 막거나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폴 브랜드라는 사람이 한 나병 환자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하나님께 받고 싶은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게 고통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의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가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은 고통이었습니다.

 

가시는 하나님의 숨어있는 은혜입니다.

가시, 그래도 감사해야 합니다.


토끼는 빠른 경주자입니다.

하지만 거북이가 마지막에 먼저 도착한 선착자가 되었습니다.

빠르긴 했지만 교만한 토끼는 성실한 거북이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빠른 경주자와 선착자가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솝 우화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자주 목격되는 일이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전 9:11)

 

저는 중학교 때 육상부에 있었습니다.

빠른 경주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저의 존재감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달릴 때도 그랬고 그 후에도 저 보다 빠른 경주자들에게 조바심을 내곤 하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race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자기의 결론을 지금 말하지 마십시오.

조금 앞서거나 약간 뒤처진 사람들에게 신경 쓰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저“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라는 엄중하면서도 소망어린 말씀을 품고 자기 길을 묵묵히 달리면 됩니다.

finish line에 이를 그 날까지.


11이란 숫자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한국의 어느 학생이 생각했답니다.

“11은 길쭉한 과자 빼빼로 닮았다...”

그래서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빼빼로 데이(11월 11일)가 한국에서 제정(?) 되었습니다.

빼빼로 과자공장 사장님, 올해도 대목을 잘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어느 시인은 11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한 사람이 서 있네

그 옆에 한 사람이 다가서네

이윽고 11이 되네

서로가 기댈 수 있고 의탁이 되네

직립의 뿌리를 깊게 내린 채

나란히 나란히 걸어가시네

......”

 

11이란 숫자를 과자 모양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11이란 글자를 사람 모습으로 보는 시인이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그 11이란 글자에서 서로 함께 걷는 다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답니다.

하지만 누가 그 옆 가까이서 함께 걷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대통령이라도 그 옆에 걷는 한 사람 때문에 큰 수치를 당할 수 있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그 옆에 함께 걸으시는 주님 때문에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11은 예사로운 숫자가 아닙니다.

11월은 연말 정리 때문에 바쁘다고 무심코 지낼 달이 아닙니다.

11, 지금 내 옆에서 함께 걷는 분은 누구입니까?


지난 화요일, 성인대학 야외예배 및 학습이 베어 마운틴에서 있었습니다.

맑고 잔잔한 호수, 그 위에서 엄마 같이 호수를 따듯이 감싸며 펼쳐진 산들, 그 산 속 나무마다 형형색색의 가을 단풍 끝자락을 다정히 붙잡고 있었고, 사이좋은 친구처럼 푸른 잔디밭이 파란 호숫가 옆에 가지런히 누워있었습니다.

 

다소 춥긴 했지만 그 날 함께 부른 찬송은 분명 탄성이기도 하였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나 알 듯하도다”

 

산과 바람과 시냇물이 각각 자기 자신만을 드러내기보다 함께 어울릴 때가 더 아름답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하나씩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고 모든 것을 다 지으신 다음에는“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답니다.

 

“행복에의 초대”가 각 언어의 예배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던 지난 주일, 그 날 오후예배 다민족 기도 합주회는 다민족, 다세대가 함께 어울려진 참 아름다움의 절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서로 개성과 문화와 역사와 언어가 달랐지만 그 날, 한 주님 한 믿음 안에서 서로주고 받은 감동이 너무 컸고 그 어울림 가운데 주님 음성도 들리는 듯 하였답니다.

“너희 모두가 함께 사랑하며 어울리니 내가 보기에 심히 좋단다.”

 

다민족 선교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자 소중한 사명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열방이 함께 할 천국의 소망과 모습이 참 아름답게 새겨져 있답니다.


어렸을 적에 술래잡기 놀이는 재미있었습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아이들의 노래처럼 저도 잘 숨었습니다.

한동안 술래가 못 찾으면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덜컥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술래와 다른 친구들이 아예 나를 잊어버린 건가.

이러다가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 누가 와서 나를 잡아가면 어떡하지...”

이렇듯 숨어 있는 곳은 계속 재미있거나 편안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먼 옛날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대답했습니다.

“부끄럽고 두려워 숨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그 날 그 후, 아담의 후예들은 여러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고 숨어 있곤 했습니다.

뭔가 불편하거나 부끄러우면 숨을 자리를 찾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 이름 부르며 물으십니다.

“____________아(야),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의 있는 곳을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너무 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집으로 왔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집으로 왔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오니 너무 행복합니다.


빈자리, 언젠가는 떠들썩했는데 지금은 조용한 곳.

조용해서 좋겠다고요?

아뇨. 빈자리가 싫습니다.

그리움에 아프고 기다림에 지친 빈자리는 싫습니다.

 

10월 23일, 기다리는 사람들이 와서 앉아 주길 바라며 우리 모두는 빈자리를 채울 초대장을 나누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날도 여전히 그 자리 위로 예배당 공기만 스쳐 지나간다면, 아버지는 마음을 달래시기가 힘드실 것이고, 우리들의 속도 꽤 쓰릴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는 가을새벽부흥회.

23일에 빈자리가 없게 해달라고 기도할 그 자리에 설마, 당신이 만들 빈자리는 없겠지요.

 

만일 당신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내일부터 빈자리로 만들어 놓는다면...

당신의 그 빈자리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일주간 내내 버젓이 앉았다가, 10월 23일에도 아예 아무도 앉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내일부터 채워주세요, 기도의 빈자리가 없도록 꽉꽉.

데워주세요.

10월 23일, 그 사람이 따듯하게 앉을 수 있도록.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쓰여 있는 병법도 아니고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지략(智略)도 아닙니다.

무공무방(無攻無防)은 어느 경건 서적에서 보았고 제 마음에 진하게 남아있는 단어입니다.

무공무방(無攻無防),“공격도 하지 않고 방어도 하지 않는 삶.”

물론 마귀와 싸움을 벌이는 영적 전쟁터에서의 태도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무공무방(無攻無防)은 내 인생을 바꿀 놀라운 삶의 자세가 될 것입니다.

 

이 가을, 타인에 대한 공격과 자신에 대한 방어가 삶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왔던 우리들에게 어느 시인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은 깊은 자성(自省)을 자아내게 합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저도 이 아름다운 시에 편승(便乘)해서 저 자신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무공무방(無攻無防)이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피하고 싶은 답변이 제 속에서 또렷이 들려옵니다.

 

아니었잖아...


뱅쿠버에 계신 셋째 누님은 올해 만 74세, 가족 카톡방에 올리시는 글들은 문학소녀 (文學少女)의 편지와도 같습니다.

얼마 전 담석의 아픔에서 치유 받으시고 이런 감사의 글을 쓰셨어요.

 

한량없는 주님의 은혜와 자녀들의 최고의 사랑과 격려, 생각만 해도 뜨거운 가족들의 기도가 저를 일으켜 세웠지요.

지금도 고마운 눈물이 흐르네요.

 

지난 목요일에는 이런 가을편지를 가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가을 하늘이 너무 맑고 온 천지가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 경이롭지요.

“행복”의 뜻을 음미하며 오래된 가요지만 주옥같은 곡과 가사와 부르는 분들의 목소리가 가을과 함께 애틋이 다가오네요.

 

늘 찬송과 복음송을 즐겨 부르시고 카톡방에 올리시던 누님이 그 날 올리신 노래 가운데 뜻밖에 이동원의 “가을편지”라는 곡이 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누워계시다가 몇 년 전 하늘나라에 먼저 가신 매형님을 몹시도 그리워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동원의 가을편지를 들으며 74세 문학소녀, 누님의 가을앓이가 동생 목사의 마음에 저미어왔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이동원의 가을편지)

 

이 가을, 어디선가 외로움의 아픔을 앓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그대 삼아 주님의 마음을 담은 가을편지를 띄어 보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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