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1991년 8월 19일, 굉음과 함께 탱크들이 모스크바 거리로 진입했습니다.

당시 소련연방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크림반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소련 보수 강경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크림반도로 파송된 쿠데타 세력에 의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고립당했고 모든 통신은 두절되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의 소문은 쿠데타가 성공한 것 같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정변(政變)은 8월 21일,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역사에서 사라질 것 같았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정변 3일만 인 21일에 모스크바로 귀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3일의 여파는 훗날 세계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고 마귀는 환호했을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제 세상인 줄 알았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을 것이며 자신의 손아귀에 하나같이 움직일 인생들을 생각하며 희희낙락(喜喜樂樂)했던 것은 단지 3일뿐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마귀의 음모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그 3일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꾼 3일을 모르는 자들은 어려움이 다가올 때 크게 낙심합니다.

언제 그 고통이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그 시간은 3일뿐인 것을!

2,000여 년 전 죽음에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 역사(役事)하시면서 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의 백성에게 “3일만 참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 못 한 어려움 가운데 있으신 교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삼 일 후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니 3일만, 3일만 참아보십시오.


지금도 고이 간직한 손편지들이 있으시지요?

제게도 있어요.

문득, 그 옛날 우체통에서 편지를 찾아 읽던 그 날들이 그립습니다.

반가운 사람에게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한 날은 마음의 축제가 일어나는 날입니다.

어떨 때 그 사람의 편지는 그 사람이 찾아오는 것보다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반가운 그 사람은 언제가 떠나지만 그 사람의 편지는 늘 내게 있어 읽고 또 읽다가 슬프거나 답답한 날, 마음대로 또다시 꺼내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이며 신학자이며 문필가이며 마침내 순교자가 된 디트리히 본회퍼.

그가 옥중(獄中)에서 그의 약혼녀 마리아와 주고받은 편지가 “옥중연서(獄中戀書)”라는 책으로 꾸며져 발간되었습니다.

그 한 토막

 

“당신에게 방금 편지를 보냈지만, 또 편지를 쓰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자면서도 당신 꿈을 꿀 거예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훨씬 이상으로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것,

그리고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꿈이 아니랍니다.”

용감하고 신령한 내 사랑 디트리히,

언젠가 당신의 아내가 될 당신의 마리아

 

마지막으로 손편지를 쓰신 적이 언제이신지.

5월은 가정의 달.

나의 신랑 되신 그리운 주님에게,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아니면 가족 같은 친구나 이웃에게 손편지를 써 보내는 것은 어떨까요?


4월이 되었습니다.

4월이 이토록 설레는 것은 봄비로 적셔진 봄꽃들이 흐드러진 향내와 함께 피어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4월에 부활절이 있기에 기다림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다시 와서 네 번째 맞는 부활절.

그 날짜만 돌이켜 보면

2014년에는 4월 20일,

2015년에는 4월 5일,

2016년에는 3월 27일,

올해는 4월 16일.

그런데 왜 이렇게 부활절 날짜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일까요?

 

기독교회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공의회가 325년 5월부터 8월까지 오늘날의 터키 지역인 니케아에서 열렸습니다.

이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날짜를 정했습니다.

부활절은 춘분 직후, 보름달이 뜬 후, 바로 다음 주일.

춘분은 언제나 3월 21일.

그러므로 이 원칙에 따르면 부활절은 3월 22일보다 빠를 수 없으며 4월 25일보다 늦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부활절은 왔다 갔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시니 부활신앙 결코 흔들리지 마시고 4월을 힘껏 노래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세상에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이스라엘 땅을 아합이 통치하던 어두운 때, 세상에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멋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와 아벳느고는 금신상에 무릎 꿇지 않은 신앙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으로 창이 열린 방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의 한 다락방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깊은 감옥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스덴반은 돌이 날아오는 자리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낙타는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자기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야고보는 하도 무릎 꿇고 기도해서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의 생애 가운데 깊이 체험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으면 결국 세상에 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무릎 꿇으면 마침내 세상이 내게 무릎 꿇는 것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평생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너무 분명합니다.

무릎과 그리스도인.

이 둘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습니다.

시작은 미약해도 끝이 좋아야 합니다.

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서둘러 또는 할 수 없이 끝내야 하는 마감이 있고, 보람 있고 묵직한 결과로 끝내는 완성이 있습니다.

 

그의 시작은 말구유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십자가였습니다.

그의 끝은 결코 마지못해 접게 된 마감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고 선포한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자기가 태어난 봄, 그 같은 날짜에 땅에 묻힌 사람이 있습니다.

외동딸로 쓸쓸히 태어난 그가 수백 명의 애도 속에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누가 보아도 서둘러 마감한 인생이 아니라 아름답게 완성된 인생입니다.

故장정자 권사님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끝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누구도 시작을 되돌릴 수 없으나 누구나 멋진 끝은 만들 수 있습니다.

모두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갑자기 “끝내라” 하실 수가 있다는 것...


교우님, 당황하셨어요?

하지만 맞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에 금식합니다.

물론 힘들겠지만 사순절에 금식하면 참 좋아질 것입니다.

이 좋은 것을 저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교우와 같이 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매일매일 너무 많이 먹었습니다.

영적으로 해악된 것들을요.

염려, 근심, 포기, 미움, 자만....

 

그래서 사순절 금식을 어떻게 하나면요

하루에 하나씩만 금식합니다.

어떤 날은“분노”를 금식하고, 그 어떤 날은“절망”을 금식하고,

다른 날은“불안”을 금식하고, 또 다른 날은“비방”을 금식하고,

언젠가는“비교”를 금식하고. 또 언젠가는“고독”을 금식하는...

 

“너를 고쳐 주리라-건강할지어다”라는 주제로 30회 사순절 서원기도회가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영혼을 피폐케 하고 가정과 교회 등 모든 삶의 자리를 힘들게 하는 상기(上記) 품목들 중 하루에 하나씩 금식하며 걷다보면 어느 덧 사순절이 지나갈 것이고, 어느 덧 우리는 영적으로 건강해 질 것이고, 어느 덧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들은 밝아질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내일 새벽에 꼭 다시 만나요.

사순절 매일의 금식 품목을 좌악~~ 알려 드릴게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기도하는 당신을 세상이 이길 수 없어요.


.....

돌아가야 하겠지.

언제나 처음의 마음으로.

그 누구도 무엇이 옳은지 당신에게 말해 주지 못할 때

해답도 없고 출구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을 때

돌아가야 하겠지, 늦기 전에.

처음의 마음으로.

류시화 -처음의 마음으로

 

그렇습니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 처음의 마음으로.

결혼생활 처음의 마음으로.

이민생활 처음의 마음으로.

직장생활 처음의 마음으로.

 

지금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에 대한 답이 처음의 마음에 있을 개연성(蓋然性)이 높습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빛이 처음의 마음에 있을 가능성(可能性)이 높습니다.

 

그렇게 살겠노라고 다짐했던 처음의 마음, 그 때 그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지금보다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그렇데 눈이 오던 날, 크게 놀랐습니다.

교우들이 심한 눈보라를 뚫고 나와 새벽기도회 자리를 꽉 메워서.

 

새벽 예배 후 몇몇 교역자들과 함께 눈 폭풍을 헤치고 심방 길에 나섰습니다.

길거리에 오가는 차는 거의 없었습니다.

 사방이 다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마중 나왔다는 사람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상타 싶어 찬찬히 둘러 표지판을 보니 우리가 서있는 곳은 “murray st”

웁스, 우리가 찾는 집은 “149st”에 있는 집. 눈길에 지나친 것입니다.

다섯 명이 자기들이 서 있는 위치를 집단적으로 몰랐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결혼한 지 몇 해 안 된 부부의 가정이었습니다.

심방 날짜를 한 번 미루어 잡은 날이 그날 눈 오던 날.

남편이 얼마 전 아내에게 부탁하더랍니다.

“우리 한 번 더 심방을 미루면 안 될까?”

“안 돼요. 한 번 미루었는데 또 어떻게 미뤄요?”

“그럼, 나 이번 심방에 참석 못해.

꼭 가야할 업무 관련 show가 있단 말이야.”

“그게 말이 돼요?

심방은 미룰 수는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심방에 꼭 참석해야 해요.

당신이 심방에 참여하도록 기도할 거여요.”

그런데 전 날 통보가 왔답니다.

남편이 가야할 show가 눈 때문에 일주일 미루어졌다고.

그 남편은 그 소식을 듣고 “소름”이 돋았답니다.

우리 눈엔 평범하게 심방 받는 두 부부, 하지만 그들에겐 이미 기적의 자리였습니다.

 

예배 후 작은 방에서 예고(?) 없이 내 놓은 곰탕, 어제 아내가 하루 종일 국물을 끓이고, 추가로 남편이 밤에 세 시간을 잠을 안 자고 더 끓였다는 곰탕을 후룩 후룩 먹을 때 

광풍과 함께 쏟아지는 창밖의 눈이 따듯한 눈같이 느껴졌습니다


그 때 그랬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급우들과 함께 민둥산을 향해 줄지어 올라가 나무를 심었습니다.

어린 저 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던 어른들, 중고등학교 형님 누나들도 어디서 장만했는지 손에 들려진 작은 묘목들을 심기 위해 풀 한포기 찾을 수 없는 산에 올라갔답니다.

그 때 고사리같은 손으로 심었던 나무들이 지금은 뭐를 하고 지낼까 궁금합니다.

 

나무에는 나이테가 있다고 합니다.

그 나이테를 찬찬히 드려다 보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큰 비바람, 천둥번개, 산불 등의 흔적이 나이테에 묻혀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내가 심었던 나무가 그동안 얼마나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는지, 계절을 따라 꽃은 피우고 또 열매는 잘 맺었는지, 진한 향은 주변 나무 친구들과 지나가는 동물들에게 잘 풍기어 주었는지, 때때론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그늘이 되어주었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30년 전에 심은 사순절의 기도나무가 온갖 눈비를 다 맞아가며 오늘에 이르러 수많은 기도의 열매도 거두었고, 지나는 이들에게 향이 되었으며, 지친 자들의 그늘도 되어주었습니다.

 

“나무야 뭐하니?”

오늘 묘목을 심는 자만이 훗날 부를 수 있는 노래이듯이

“사순절 나무야 뭐하니?”

오늘 기도의 씨앗을 심는 자만이 훗날 그 사순절 기도나무에서 열매와 향과 그늘을 누릴 수 있답니다.


육상에는 장애물 경주가 있습니다.

그 중 여자는 100m, 남자는 110m 경주가 있습니다.

모두 10개의 허들을 넘어야 합니다.

허들(hurdle)의 뜻은 장애물, 어려움입니다.

첫 번째 장애물부터 하나하나 잘 뛰어 넘어야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2017년도 여지없이 장애물 경주와 같지 않습니까?

이제 2월이 되었는데 누구나 첫 장애물을 만날 즈음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장애물 앞에서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단 하나의 방법 밖에 없는 것 아시지요?

그것은 무력하게 주저앉는 것도 아니고, 비겁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첫 번째 장애물을 힘차게 뛰어 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은 첫 번째 장애물“여리고”를 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리고”는 낙공불락의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첫 장애물 앞에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2017년, 내 앞에 첫 번째 장애물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제게도 첫 번째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의 이름도 잘 압니다.

“제 자신”입니다.

두렵다고 하는 제 자신, 안주하려는 제 자신이 첫 장애물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그 첫 장애물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cheer up!” ”힘내라!”

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응원소리....


오늘은 우리 교회 설립 43주년 기념주일입니다.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고 또 흘렀던 43년입니다.

척박한 이민의 땅에서 언어의 장벽, 문화의 충격, 불안한 미래 가운데 살아가던 우리들을 하나님은 교회로 부르시고 모아주셨습니다.

 

사실, 모든 이민 교회는 이민자들에게 고향과도 같고 피난처와도 같습니다.

이민자들의 정체성과 전통을 지켜나가는 데도 이민교회의 역할은 지대합니다.

우리 교회도 지난 43년 동안 이 지역의 이민교회로서 수많은 한인 이민자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서로 위로하며 지내왔습니다.

 

같은 한인이지만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어느 덧 우리의 다음 세대는 영어가 더 익숙해져 소통이 점점 쉽지 않음에도 우리가 43년을 잘 지내오게 된 것은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존을 넘어 포용으로 사는 삶.

공존(共存)은 대화와 이해 없이 그냥 같이 존재하는 것에 머무를 수 있지만 포용(包容)은 서로에 대한 배려나 품음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제 43년 된 우리 교회 안에는 한국어권, 영어권 한인 이민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와 나라의 이민자들이 각각 또는 함께 예배드리고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43년의 삶의 방식이 더 적극적으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존을 넘어 포용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삶의 방식으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실 교우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더 멋질 포용으로 빚어질 44주년이 기대가 됩니다.


김현태 시인의“겨울편지”는“그대가 짠 스웨터”로 시작됩니다.

 

그대가 짠 스웨터

잘 입고 있답니다.

입고, 벗을 때마다

정전기가 어찌나 심하던지

머리털까지 쭈뼛쭈뼛

곤두서곤 합니다.

그럴 때면 행복합니다.

해가 뜨고, 지는

매 순간 순간마다

뜨거운 그대 사랑이

내 몸에 흐르고 있음이

몸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올해가 그렇게 추운 겨울은 아니지만 열흘 전 목요일은 센 눈보라가 미국 동부에 휘몰아쳐 참 추웠습니다.

그날따라 집 밖에서 더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된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우들이 그 가정이 입을 스웨터를 짜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서 그 따듯한 스웨터를 짜는데 조용히 한 올 한 올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사정, 제가 알아요. 저도 문이 잠겨서 집에 못 들어 가 본적이 있거든요.

이것 좀 그 가정에 전해 주세요.”이렇게 어떤 교우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교우들의 따듯한 손길로 짠 마음의 스웨터가 잘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월요일(6일)부터 우리 교단의 동부지역 목사 장로 기도회가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있었습니다.

개회 말씀 때에 총회장 고택원 목사님이 “태도는 삶을 바꾼다.”하시면서 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노부부가 필라델피아 지방의 한 작은 호텔에 들어와 방을 찾았습니다.

호텔은 이미 만원이었습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노부부에게 조지 볼트라는 종업원이 다른 호텔의 상황을 알아보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호텔도 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부부가 더욱 당황해 할 때 볼트는 자기 방에서 주무시라고 했습니다.

그 종업원의 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떠난 그 노부부가 몇 년 후에 볼트에게 뉴욕으로 와 달라는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 호텔을 보여주며 이 호텔이 내가 당신을 위해 지은 것인데 이 호텔의 총 지배인을 맡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호텔을 지은 사람은 윌리엄 월도프 아스토, 그 호텔 이름은 그 유명한 월도프 아스토리아.

볼트의 태도가 볼트의 삶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지요.

 

태도가 무엇일까요?

위키 백과라는 데서 찾아보니 태도는“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나타나는 행동 및 감정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태도는 한두 번 보여 지는 행동이나 감정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지속적으로 보여 지는 행동과 감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나의 태도는 내가 만난 환경보다 더 중요합니다.

똑 같은 환경인데 거기서 항상 어려운 점만 말하고 할 수 없다는 핑계만 대는 태도를 가진 사람과 그 환경에서 늘 감사하고 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진 자는 사뭇 다른 삶을 살 것입니다.

아무래도 태도가 삶을 바꾸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제 아침, 11월 달력을 천천히 뜯어내었습니다.

그 장면을 못내 아쉬워하던 마지막 달력 한 장이 원망의 눈초리로 저를 응시하더군요.

처음에 받았을 땐 많은 친구와 함께 제법 으스대던 달력이 하나 둘, 친구를 떠나보내다가 이제는 홀로 벽에 남게 되었습니다.

문득, 그 모습이 내 모습 같았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결국 혼자가 된다는....

 

마지막 달력이 내게 묻는 듯합니다.

“자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남은 시간에 뭘 할 건데?”

정말, 내 인생의 마지막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폐암 말기를 지내고 계신 목사님이 최근에 여러 지인들에게 보낸 글이 있었는데 목사님은 이 시간에 무엇을 가장 아쉽다고 하시는지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여러 일을 하다 보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남이 보기에는 괜찮았을지라도 하나님과 단 둘이 갖는 깊은 대화의 시간들이 점점 줄어졌다....”

목사님의 글을 다시 보니 그동안 너무 분주하게 주님의 일을 하시다가 정작 주님과는 친밀하게 지내시지 못하셨음을 크게 아쉬워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다 떠나도 12월 마지막 달력이 결코 외롭지 않은 것은 25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운 우리들을 향해 “내가 너와 영원히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주님이 찾아오신 그 날이 마지막 달력에 빨간 글씨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젠 외로워하지 말고 남은 시간,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과 친밀하게 지내는데 보내자고 마지막 달력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944년 8월,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러시아 전선으로 떠나는 독일 군인 클레멘스는 아내와 딸에게 크리스마스까지 돌아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독일의 패배로 클레멘스는 25년 형을 받고 러시아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클레멘스는 탈출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장교 카메네프에게 잡히면서 이 두 사람은 도망과 추적, 잡힘을 반복합니다.

추적과 잡힘 뿐 아니라 수많은 여러 역경이 계속되었지만, 클레멘스는 가족을 떠난 지 10년 후의 크리스마스 때에 약속대로 남편과 아내를 기다리고 있던 가족의 품으로 마침내 돌아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독일 영화“마지막 한 걸음까지”의 줄거리입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결코 잊지 못할 장면이 나옵니다.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마지막 한 걸음까지” 포기하지 않은 클레멘스를, 10년이나 추적하던 카메네프가 그 추격을 포기하는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마지막 한 걸음까지”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마지막까지 다 이루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서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마지막 한 걸음까지”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를 포기시키려던 마귀가 그 시도를 포기할 것입니다.

 

올해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나 가족,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내가 한 약속들을 생각해 보시고 “마지막 한 걸음까지”포기하지 마신 후, 새해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어느 미국 형제가 한눈에 반한 한국 자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who are you?)”

“나는 유입니다(i am yu).”

그 자매는 유씨 성(姓)을 가졌기에 당연히 자기의 last name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너무 깜짝 놀랐고 너무 감격했습니다.

그 자매의 대답이“i am you(나는 당신입니다).” 라고 들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형제는 그 자매에게 프러포즈하였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당신입니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사고로 죽은 사람의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이 죽음으로 비로소 살게 된 사람의 이야기, “안녕하세요.

나는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입니다”

이 말은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요?

그 말을 듣는다면 상대방이“이게 무슨 말인가”하고 가슴도 뛸 것이고, 목도 멜 것이고, 눈물도 쏟아질 것입니다.

 

성탄절의 흥분 속에 나를 위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나의 진정한 생명이며, 주인이신 것을 잊은 것은 아닌지요,

동방박사들이 보배 합을 열어 아기 예수님께 최고의 예물을 드렸듯이 이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런 선물을 예수님께 드릴 수는 없을까요?

“예수님, 저의 생명은 예수님 것입니다.”


오늘, 본당 앞을 보셨나요?

화분마다 솟아 오른 빨간 포인세티아를.

겨울 꽃, 크리스마스의 꽃으로 알려진 포인세티아는 “내 마음은 불타고 있다”

“축복합니다”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력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포인세티아는 그 줄기에서 나오는 흰 액이 “해열제(解熱劑)”로 쓰인다고 합니다.

 

저 앞의 작은 화분에는 아름답고 유용한 포인세티아가 피어올랐는데 내 인생의 화분에는 어떤 꽃이 피었는지 궁금합니다.

색깔은 무엇인지, 향기는 있는지, 모양은 어떤지, 필요는 한지. 아니면 아예 아무 것도 없는 빈 화분인지.

 

곰곰 생각해 보니 몇 주 있다가 사라질 화분, 겨울에 잠깐 피는 꽃이라고 포인세티아를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포인세티아 같은 꽃만 피어도 너무 괜찮은 화분이 되겠더라고요.

 

“내 마음은 불타고 있다” - 내 마음도 예수님을 향해 불타고 싶다.

“축복합니다” - 나도 만나는 사람에게 복이 되고 싶다.

“강력한 아름다움” - 내 짧은 삶도 강력한 아름다움으로 살다 지고 싶다.

“해열제” - 나도 여러 일로 열 받은 사람에게 꼭 필요하고 싶다.

 

꽃아 피어라, 내 인생의 화분에서.

비록 겨울을 사는 인생이지만, 겨울에 피는 꽃도 있더라.

겨울 꽃 포인세티아를 보니 참 멋지더라.

내 인생의 화분에서, 꽃아 피어라.


며칠 전 사진 한 장 보았습니다.

우리 캄보디아 선교지의 담 안에 심어진 한 그루 나무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함께 보시던 분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목사님, 이 넓은 땅에 우리 교인들이 한 그루씩 나무를 심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확정된 사업은 아니지만 저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만약 나무를 심는다면 그냥 심지 말고 조경(造景)을 생각하고 심어, 훗날 멋진 수목원(樹木園)이 되면 좋겠네요.”

차가운 12월에“나무와 숲”이야기를 나누니 뭔가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오늘, 각각 나무 같은 다섯 개 교회가 함께 숲을 이루며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란 이름으로 두 번째 찬양 축제를 합니다.

다섯 교회 모임을 바라보시던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교회가 나뉘고 분열하는 이때, 서로 성향이 다른 다섯 교회가 함께 모여 성탄찬양 축제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놀라운 일입니다.”

 

또 하나의“나무와 숲”이야기가 쓰일 것입니다.

오늘은 그동안 각각 수고하고 활동하던 30대 선교회가 청장년부란 이름으로 함께 처음 모이는 날입니다.

각자“나무”로도 멋졌지만, 이젠 함께하는 아름다운“숲”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펼치시던 30대, 혼자가 아닌 형제들 그리고 자매들과 함께 숲을 이루어 사역하시던 30대. (눅 8:1-3)

그 예수님을 따라 30대 나무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겸허한 기도와 한 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

가을이 점점 깊어져 가는데 우리의 기도와 한 분을 향한 사랑도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겸손한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만난 자리가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예수님의 자기 부인의 겸손한 기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흐르던 곳이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성공, 나의 건강, 나의 재산, 나의 명성.....

끝없이 이어지는“나”가 멈추어지고 아버지 하나님만이 가장 큰 갈망이 된다면 우리의 가을도 자기를 비우는 겸허한 기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계절이 될 것입니다.


식당에서 남들은 맛있게 식사를 하는데 금식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렇게까지 식사하는 분들에게 부담을 주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았습니다.

며칠 전 뉴저지에서 몇몇 목사님들과 만남이 있었습니다.

모두 주문하는데 한 분 목사님은 주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 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들어보니 금식할만한 큰 제목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마다 금식의 이유가 많겠지만 자신을 위한 이유를 뛰어넘어 식당에서까지 금식하시는 모습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날, 제가 시킨 대구지리를 쉽게 삼킬 수 없었습니다.

가시가 많아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받은 감동에 목이 멘 것도 있고, 그가 붙잡은 진리를 흔드는 자들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자들이라는 불편한 사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의 싸움의 대상은 저 마귀들인데....

우리끼리 싸워서는 안 되는데....

그동안 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감사절 주간을 지나며 우리 교회 안에, 우리 노회 안에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다는 것에도 큰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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