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한 영국 시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는 무엇을 져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나를 돌보셨습니다.

나는 누구를 돌보아야 하겠습니까?

 

 

 

..................

 

나도 묻고 대답해야 하는데,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2019.03.03 00:00

[2019-3-3] 기대하라

“고도를 기다리며”는“고도(高度)를 기다리며”가 아닙니다.

“고도(godot)를 기다리며”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제목입니다.

이 책에서는 두 친구가 날마다“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고도”라는 사람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서“고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紛紛)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어떤 대상을 말한다고도 하지만 그러나 원작의 제목에 쓰인 단어를 유심히 보면 “고도(godot)”는“신(god)”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을 기다리지 말라, 그는 결코 오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기대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가졌기 때문일까요, 기다려보았자 별것 없기 때문일까요.

이런 세태를 거슬러 가야 합니다.

“기대하라”는 오는 3월 11일 월요일부터 시작될 올해 사순절의 주제입니다.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서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6주간 동안 진행될 사순절에 6개의 소주제가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기대하라.

지금, 어떤 상황이든지 기대하라.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라.

여기, 어떤 곳이든지 기대하라.

놀라운 회복과 기적을 기대하라.

십자가를 기대하라.

 

사무엘 베케트는“고도(godot)”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고 슬퍼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대하는 모든 자에게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황금률(golden rule) 아시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이 황금률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거울입니다.

거울은 결코 먼저 웃지 않습니다.

거울을 바라보는 자가 먼저 웃을 때 거울도 따라 웃습니다.

거울 앞에서 찡그려 보세요. 여지없이 거울도 나를 향해 찡그립니다.

거울 속의“나”는 결코 다른“나”가 아닙니다.

 

어렸을 적에 엄마와 아빠가 다투었는데 엄마가 집을 나가겠다며 보따리 싸고 나서면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하였답니다.

“넌 필요 없어. 난 네 형이면 돼.”

엄마에게 거절당한 상처를 수십 년 안고 살아가던 분을 보았습니다.

 

나를 향해 더 이상 상처를 말하지 마세요.

그 상처 치유 안 됩니다. 그 상처가 나의 진짜는 아니잖아요.

나를 향해 부정적인 태도 던지지 마세요.

일그러진 자화상으로 살게 됩니다. 그 자화상이 내 본 모습 아니잖아요.

그런 모습을 거울에 비추지 마시고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해 보세요.

“너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작품, 난 널 좋아해. 자랑스럽고.”

곧 거울이 나를 행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작품, 난 널 좋아해. 자랑스럽고.”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수년 전에 높은 시청률을 보였던 프로그램 제목입니다.

유아들의 여러 문제들을 고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아이들의 문제는 아이들 자신보다 부모의 문제가 더 크다는 전체 결론이 기억됩니다.

 

“내 몸이 달라졌어요”

누구나 외치고 싶은 말입니다.

모두가 군더더기 살 대신에 근육질 몸매가 되고, 골골했던 몸이 회복을 넘어 강건하게 되길 고대하지만 거기에 걸맞는 운동을 꾸준히 하는 자를 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내 영이 달라졌어요”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영적 약골(弱骨)이 즐비한 시대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한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근육질 사람은 가끔 보았는데 이제는 깊은 영의 사람, 강한 영의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사순절이 2주가 지났습니다.

내 영이 변화되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닙니다만 내 영이 변화되는 강력한 조짐을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그동안에 동참했던 분들은 꾸준히, 아직 참여하지 않은 분들은 아무도 늦지 않았으니 내일부터라도.

그리하여 부활절을 절기로만 맞지 말고, 실제 내 영이 변화되어 가슴 벅찬 그 날을 모두 맞이합시다.

 

겨우내 닫아 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창 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던 봄이

왜 이제야 문을 여느냐는 듯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봄은 따스함입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녹이는 따스함입니다.

봄은 소리입니다.

아니 함성입니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예쁜 꽃들의 함성입니다.

 

봄은 희망입니다.

각양 씨앗들이

녹은 땅을 찾아들어 희망을 싹 틔우려고 들썩이고 있습니다.

 

봄은 향기입니다.

살짝 머리 아픈 샤넬 파이브가 아닌

가슴까지 싱그러운 자연산 향기입니다.

 

봄은 그대 앞에 와 있습니다.

봄의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봄과 함께 사순절의 여정을 즐기십시오.

 

벌써 봄이 그대 앞에 와 있는데

왜 아직 겨울 자락을 덮고 있습니까?

이제는 그렇게 춥지 않잖아요?

어서 겨울 자락을 거두고 우리 같이 봄을 노래해요


숨이 막혀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미세먼지 때문에 한국에서 울려 퍼지는 탄식입니다.

유치원에 가는 어린아이들까지 마스크를 쓰여 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 오가는 사람이 없어 장사를 할 수 없다는 상인들의 마음은 참담하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먼지들은 교육, 경제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심각하게도 사람들에게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거나 그 목숨을 앗아 갑니다.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한국을 다녀오시는 많은 분들이 뉴욕의 공기가 이렇게 좋다는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공기가 맑고 좋은 곳을 청정지역이라고 합니다.

조사(調査)를 통해 보니 뉴욕은 미세먼지 농도가 낮은 청정(淸淨) 도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난날 뉴욕도 최악의 미세먼지로 시달렸으나 그런 먼지들을 방출(放出)하는 원인들을 꾸준히 퇴출(退出)시킨 결과입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입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영적 미세먼지도 있습니다.

마귀의 변함없는 전략은 영적 미세먼지입니다.

마귀는 사소(些少)한 이유들로 영적 미세먼지를 빚어 성도들의 기도를 조금씩 틀어막다가 마침내 치명적인 영적 손상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날 기도의 호흡이 전혀 막히지 않는 최고의 영적 청정지역은 어디일까요?

더 이상 마귀의 영적 미세먼지 전략이 조금도 먹히지 않는 곳입니다.

내일 새벽에 이 시대에 최고의 영적 청정지역이 어디인지 볼 수 있을까요?


지난 주간에 신학교가 개강했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첫 삼일 동안 개강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개강 부흥회에는 y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높으신 연세에도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월요일 첫날에 목회 중에 있으셨던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른 교단 교회에 잠시 파송 사역을 하시게 되었답니다.

아주 젊으셨을 때였죠. 그런데 그 교회 제직들이 희한(稀罕)했다는 것입니다.

맥주도 마시고, 고스톱도 치고, 사교(社交) 댄스도 추는....

원래 정치운동 색깔이 짙은 교회였지만“이것은 결코 아닌”제직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사교댄스를 추려던 그들에게 y 목사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셨답니다.

“댄스든지 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시오.”

그들이 잠시 의논한 후 답을 가져왔답니다.

“우리는 댄스를 택하겠습니다.”

 

쿵짜작 짝짝~~

음악과 함께 사교댄스를 추는 그들에게 목사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등짝을 때리면서

“들어가시오”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댄스는 멈춰지고 목사님은 집으로 돌아 오셨답니다.

그날 저녁,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 전화를 많이 받으셨답니다.

성도들이“목사님, 잘하셨습니다. 도대체 제직들이 그게 무슨 짓입니까?”

그 후 교회는 변화되었고, 그 제직 가운데 사역자들도 나오게 되었답니다.

 

“우리는 댄스를 택하겠습니다.”

“들어가시오”

저와 젊은 신학도(神學徒)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노(老) 목사님의 목회 단상(牧會斷想)이셨습니다.


죄가 사람에게 안겨준 것은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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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저 외로움을 견디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요?

여리고 성에 살던 삭개오는 외로웠습니다.

돈은 있었지만 친구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비난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도 뽕나무 위에서 싸늘히 흐르는 고독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런 자기에게 다가와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신 분이 있으셨습니다.

그분은 삭개오에게 구원과 공동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애에 언제나 나를 품어주는 공동체,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어디선가 외로움에 지쳐 울고 있을 것입니다.


습관은 버릇이 되고 버릇은 점차 익숙한 것이 됩니다.

습관도 버룻도 버리기 힘든데 익숙한 것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익숙의 영역은 다양합니다. 보는 것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만 보려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대한 발전은 더딥니다.

 

10년 20년을 같은 길을 다녀도 그곳에 언제나 있었던 가게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다가“이런 가게가 여기 있었어?”하고 놀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익숙한 것만 보이는 안타까움의 현장입니다.

 

1990년 지구궤도에 발사된 허블우주망원경이 있습니다.

지상의 우주망원경과는 달리 더 높은 해상도의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 허불망원경이 관찰하는 행성은 익숙한 것만 관찰합니다.

로버트 윌리암스는 허블망원경의 각도를 틀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방향을 관찰해 보자고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방향을 주시하고 주시하였더니 그동안 물랐던 아름다운 은하계를 발견한 것입니다.

1995년의 일입니다.

 

성경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들인데, 성경 전체를 읽긴 읽어도 익숙한 이야기만 보면서 그 수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지나쳐 가곤 합니다.

익숙함을 넘어설 때 우리의 삶과 신앙은 더욱 풍성해 질것입니다.

저는 지금 멀리서 익숙함을 넘어서는 성경 읽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77세이신 아버지는 건강하셨답니다.

급작스런 아버지의 담도암 소식을 듣고 황급히 한국으로 날아갔습니다.

일주일간 간호해드리는데 어느 토요일 아침 그의 눈앞에서 아버지는 떠나신 것입니다.

목사님이신 아버지의 죽음.

많은 일을 하셨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의외로 짧았습니다.

“천국에서 만나자”

 

장례식이 예배로 가득 찼답니다.

하루에도 20번 정도의 예배가 드려진 장례식.

많은 분들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한결 같았습니다.

“네 아버지는 훌륭하셨다.”“네 아버님은 좋으신 분이셨지.”“네 아버지는....”

 

장례식을 다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 온 그는

아름다운 삶을 남기신 아버지의 죽음 앞에 자기의 삶을 돌이켜 보게 되었답니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세상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좋다고 먹고 마셨던 것들이 다 부질없었어.”

“천국에서 아버지를 어떻게 뵐까.”

 

그에게도 아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자기 아들이 사람들에게 들을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 아버지는....”“네 아버님은....”“네 아버지는....”

훗날 천국에서 만날 아버지. 훗날 자신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를 들을 아들.

두 시간 가까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 갖게 된 상념을 나직이 말한 던 그가, 스스로 밝힌 나이는 올해 50입니다.

50세면 삶을 바꾸기에 늦은 것일까요?


 

그 날이 있습니다.

그 날, 뭔가 좋은 결과를 얻는 사람들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시상대 위에서 상 받는 그 날의 모습을 그리며 연습했고, 근육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건강한 그 날을 상상하며 운동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이후에 주님 뵈올 날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맡긴 일은 어떻게 하였느냐?”

아무도 숨김없이 대답해야 할 그 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긴 훈련의 시간을 묵묵히 감당하고 오늘 귀한 임직감사예배를 드리는 임직자들이여, 축하도 드리지만 오늘 직분을 맡긴 그분 앞에서 결산할 날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날이 있습니다.

지난 일 년도 함께 걸어오며 울고 웃었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회계(會計)의 그날이 회개(悔改)의 그 날이 아니라 상 받는 그 날이 되도록 오늘도 아름다운 수고와 동행을 멈추지 말아요.    


“결론은 나중에 냅시다.”

이런 말이 잦으면 그 누구도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결론을 미룰 수도 없습니다.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데 올해의 결론을 어떻게 미룬단 말입니까?

 

올해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은혜입니다.

봄의 은혜, 여름의 은혜, 가을의 은혜, 겨울의 은혜가 다 달랐고 넘쳤습니다.

고난도 은혜, 평안도 은혜였습니다. 약함도 은혜, 강함도 은혜였습니다.

 

올해의 또 다른 결론은 이것입니다.

감사입니다.

고맙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가슴이 뭉클한 시간, 눈시울이 붉어진 시간, 콧잔등이 시큰한 시간.

우리 교역자, 우리 장로님, 우리 성도들이 만들어 주신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

 

올해의 결론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준비입니다.

올해 찾아온 여러분의 죽음.

가족들도 사랑하고 우리 모두도 사랑하던 분들.

올 한 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우리 곁을 떠나면서 들려준 외침.

“준비하라. 준비하라. 준비하라. 하나님 만나기를.”

 

그렇습니다. 은혜, 감사, 준비는 미룰 수 없는 올해의 세 가지 결론입니다.


사실, 저도 꿈꾸었었죠. 크리스마스에 눈이 와서 온 세상이 하얗게 되기를.

그래서 이 감미로운 노래를 좋아하곤 했답니다.

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

그러나 성탄절을 하얀 눈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혹시, 가보셨나요.

성탄절 전후로 록펠러 센터 앞으로.

크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번쩍이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아무리 멋있어도 크리스마스트리로 성탄절을 바꿀 수 없지요.

 

간혹, 참여해 보셨나요.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에.

딸랑딸랑 종소리를 좇아가 이웃을 돕는 마음을 담는 것은 좋습니다.

그래도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성탄절을 바꾸는 것은 아니랍니다.

 

많이, 기쁘셨나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서.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준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정말로 성탄절을 선물을 주고받는 계절로 바꾸자고 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비장(悲壯)한 날입니다.

성탄절은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내가 꼭 안아야하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전무후무(前無後無) 날입니다.

성탄절은 구원이라는 인류 최대의 소망(所望)이 임한 날입니다.

 

엿 장수 맘대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고귀한 성탄절을 엿 장수가 맘대로 엿을 바꾸어 주듯 더 이상 다른 것과 함부로 바꾸지 말아요..


“마이 달링”이란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my darling (나의 사랑)

can i call you darling (내가 당신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darling darling darling (사랑, 사랑, 사랑)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저의 칼럼 제목은“마이 달링”이 아닙니다.

“마이 달랑”입니다.

달랑 한 장 남은, 나의 달력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매월 초(初) 하나하나 내 손에 의해 아프게 뜯겨져 나간 달력들.

주어진 한 달에 대한 부끄러움은커녕 대단한 한 달을 산 것 마냥 그것을 교만히 뜯곤 했던 내가, 마지막 달랑 남은 달력 앞에 겸손히(?) 서 있습니다.

여유(餘裕)는 사라지고 초조(焦燥)가 깃든 달랑 한 장 남은 달력 앞입니다.

한껏 가벼워진 한 장 달력이 한 해의 마지막이라는 부담으로 매우 무겁게 보입니다.

 

미안하오. 2019년 달력들이여.

지금까지 열한 장의 그대들에게 매우 무례했음을 고백하오.

이제라도 마지막 한 장 달랑 남은 당신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사랑하겠소.

마이 달랑, 마이 달링이여!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 모두에게는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있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1954년,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시골 작은 교회의 젊은 목사님 부부가 낡은 교회의 이곳저곳을 고치며 성탄을 준비하고 있는데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센 바람이 그 마을을 휘몰아치면서 교회의 강단 뒷벽에 큰 구멍을 내었습니다.

목사님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시장에서 아주 싼 가격에 오래된 금빛과 아이보리색의 레이스를 가진 테이블 덮개를 샀습니다.

덮개로 강단 뒷벽의 큰 구멍을 잘 덮을 수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성탄절 이브 예배가 있는데, 그날 낮 젊은 목사님은 교회 앞 추운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나이 든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버스가 오려면 멀었으니 교회에 들어와 계시라고 했습니다.

그 마을에 일자리 인터뷰를 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교회 안에 들어온 여인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강대 뒤에 걸려 있는 테이블 덮개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이건 내 것입니다.

예전에 내 남편이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이지요.

전쟁 때에 남편과 헤어졌는데 훗날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 테이블 덮개를 가져가라는 목사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여인은 떠났습니다.

 

그 날 저녁 성탄 이브 예배를 마친 후 나이 든 마을 남자가 목사님에게 다가와 “저 강대상 앞에 걸려 있는 것은 아내를 위해 내가 만들었던 것입니다.

전쟁 때 헤어졌는데 이제는 하나님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로 죽은 줄 알았던 부부는 살아 있었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탄의 이야기는 언제나 소망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오후, 헨델의 성탄 이야기를 꼭 들으러 가요.

그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꾼 이야기, 그가 만난 메시아 이야기는 우리 찬양대의 찬양으로 아름답게 펼쳐질 것이랍니다.


이제 막 들어선 11월도 빨리 지나가겠죠.

오래 붙잡고 싶어도 뿌리치듯 달아날 11월이 분명합니다.

부질없이 가지 말라고 말하기 보단 지나가는 11월을 수채화로 그려 내 마음의 벽장에 오래 걸어 두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흙색 물감으로 한창 땅을 파고 있는 새정전 앞마당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웬일이죠? 제 눈에 뭐가 꼈나요?

그 마당의 흙색이 가을 단풍마냥 형형색깔로 보여요.

붉은 김치색, 노란 튀김색.... 지난 10월 건축바자에서 봤던 수십가지 색상들이 앞마당 흙색깔에 섞여 있어요.

 

그토록 어려운 이민 땅에서 본당과 교육관을 묵묵히 세우시더니만 건너편 새성전을 함께 지어가시는 교우들을 생각하니 11월의 수채화는 물감으로 도화지에 그려지기 전에 제 얼굴에 눈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 눈의 눈물은 말라도 결코 마르지 않을 사랑의 물감을 각양각색으로 뿜어내는 성도들 때문에 앞마당 흙색은 화려한 색깔이 되어 놀라운 11월의 수채화를 그리게 될 것입니다.


10가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두 아들 장례식에서 10가지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전도하다 순교당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7가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신앙의 자유를 찾았던 청교도들이 혹독한 어려움 가운데 7가지 감사를 드렸습니다.

 

80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였지만 그런 배라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합니다.

폭풍으로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

고통스러운 삼 개월 항해 중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었음을 감사합니다.

 

그들은 극심한 고통의 자리에서도 감사에 감사,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넘어서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았기에 그토록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들이었다면 몇 가지를 감사할 수 있을지 스스로 궁금합니다.


내일 모레가 11월 19일, 오는 목요일이 21일이네요.

11월 19일 케이프코트만(灣) 경유(經由), 11월 21일 프로린스타운에 입항(入港).

1602년 9월 16일 영국 잉글랜드 항구도시 프리머스에서 102명의 청교도를 태우고 출발했던 배가 미국 땅에 다다르던 날자와 장소 입니다.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 fathers)이라고 일컫는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 앞에는 바다의 파도부터 시작하여 온갖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는 이듬해 봄에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그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결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역경 앞에 그들이 외쳤던 말은“힘들다, 죽겠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였습니다.

감사는 어떤 역경도 이깁니다.

역경 중의 감사가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습니다.

탱큐, pilgrim fathers!


연말이 점점 가까워오며 바쁜 일들은 더 몰려오지만 문득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한 해를 어떤 걸음을 걸었는가....

모든 걸음에는 발자국이 남는데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가....

남긴 발자국을 뒤돌아 볼 자신이 없었지만 살짝 돌아보았습니다.

 

한 동안 머뭇거린 발자국, 샛길로 갔다 온 발자국, 거기서 쓰러졌던 것이 분명한 작은 발자국을 덮은 큰 몸 자국, 그래도 다시 일어나 걷고 또 걸어온 발자국.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조선 시대의 이양연 문인이 지은 시(詩)입니다.

짧은 시가 나의 발자국은 나의 것만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되돌아가 그 발자국을 지우고 싶지만, 그리고 다시 반듯하게 걸은 발자국을 남기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다시 걸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이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발자국, 뒷사람이 따라오다가 실망하지 않을 나의 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벌써 10월입니다.

가을의 깊은 향취(香臭)가 반가우면서도 뭔가 초조한 시간입니다.

올해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니 화들짝 놀랄 시간인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지”하면서도 올해도 연초의 결심을 적당히 포기하고 싶기도 합니다.

스스로 궁금합니다.“결심”은 강한데“뒷심”은 왜 이리 약(弱)한 지?

 

약한“뒷심”탓을 하며 남은 두어 달을 보내려 하는데 다가온 글자가 있었습니다.

again!

“다시”라는 글자가 선명히 제게 다가온 것입니다.

얼마 전“다시 복음 앞에”라는 복음 성가를 들었습니다.

 

많은 이들 말하고 많은 이들 노래는 하지만 정작 가진 않는 길

두려운 생각보다 많이 힘들고 험한 길 보단 그저 말로만 가려기에

점점 멀어져만 가네 내게 생명 주었던 그 길

점점 이용하려 하네 내게 사랑 주었던 그 길

다시 복음 앞에 내 영혼 서네 주님 만난 그때

나 다시 돌아가 주님께 예배드리며

다시 십자가의 길 걸으리

 

다시, 다시, 다시로 이어지는 단어가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어려운 가운데 다시 일어 난 많은 교우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10월 마지막 주일 있을 “행복에의 초대”주제를“again”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도 다시 일어나 연초(年初)의 결심을 이루고, 장결자들도 다시 일어나 주님 품 안으로 돌아오고, 불신자들이 다시 일어나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렇습니다.

“again”이라는 단어는 모두에게“희망”이라고 읽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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