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하나님을 매일 만나는 분을 보았는가. 나는 직접 보았다. 그분은 매일 새벽 하나님을 만났고 나는 그 장면을 매일 목격했다. 그분은 아버지였다.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일어나면 아버지는 언제 일어나셨는지 항상 무릎 꿇고 눈물로 기도하고 계셨다. 아버지 앞에는 그 기도에 앞서 읽으셨던 성경이 펼쳐져 있었다. 기도하시던 손이나 무릎 옆에는 눈물 젖은 손수건이 있었다.

 

그 장면은 무엇이었는가. 아버지가 하나님을 만나시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홀로 드리시는 예배였다. 매일 그러시던 아버지는 주일이 되면 너무 좋아하셨다.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을 너무 기다리셨다.

 

아버지는 주일학교 부장을 오래 하셨기 때문에 교회 가는 시간이 어린 나와 같으셨다. 아버지가 교회 가서 여러 차례 하신 일은 무엇이었을까. 예배드리는 것이었다. 집에서 주중에 혼자 매일 새벽에 드리는 예배와 주일날 교회에 가서 많은 사람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다른 것이었을까.

 

혼밥, 혼자 밥을 잘 먹을 수 있다. 혼자 밥을 먹을 때 맛도 느낄 수 있다. 혼자 먹어도 배고픔은 잘 해결된다. 그런데 여러 사람과 같이 먹는 것과는 다르다. 여러 사람과 함께 먹을 때는 맛뿐만 아니라 혼자서는 결코 누리지 못하는 즐거움이 더해진다.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있고 여럿이 밥을 먹을 수 있듯, 혼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여럿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같지만 전혀 다르다.

 

만남이 주는 기쁨은 크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 가운데 만나 주시고 예배 가운데 우리 서로의 만남도 선물로 주신다. “멀리 더 멀리”의 삶이 요청되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 “가까이 더 가까이”가 하나님의 원하심임을 한순간도 잊지 말자.

 

지난 3월 22일 주일 예배는 잊을 수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미국 뉴욕에 걷잡을 수 없이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행정명령에 따라 그날 밤부터 뉴욕의 모든 기관이 문을 닫아야 했고 교회의 문도 모두 닫아야 했다.

 

그날 예배에서 마지막으로 부른 찬송은 222장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였다. 1절부터 목이 메었다. 죽음이 창궐한 세상으로 가야 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니 4절을 부를 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사망 권세 이기도록 지켜 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다시 만나자고 했건만 그날 이후 이 땅에서 다시 못 보게 된 성도들이 여럿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많이 아파하시다가 끝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우리는 그분들이 먼저 가 계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그곳에 없는 것이 있다. 그곳에는 눈물이 없다. 사망이 없다. 애통이 없다. 곡하는 것이 없다. 아픈 것도 없다. 그곳에 있는 것이 있다. 예배가 있다. 이 땅에서 때때로 드렸던 혼자의 예배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가. 각 나라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들리지 않는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큰 소리로 드리는 찬송이. 우리 모두 이 땅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로 살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 하나님께 세세토록 함께 예배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