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이러실 수 있나.” 물론 속으로 말했다. 원망 섞인 말이 입 앞에서 멈춘 그날은 나의 삶을 바꾼 날이기도 했다.

 

교육전도사 때 일이다. 예배가 끝난 후 교역자회의 때 담임목사님은 목회자의 길과 성도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날은 헌금에 대해 말씀하셨다. 특별히 감사헌금, 그것도 추수감사헌금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역자들은 헌금 생활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십일조는 물론 감사 헌금을 잘 드려야 합니다. 특별히 추수감사절 헌금은 자기의 한 달 사례비 모두 드리는 것을 기준으로 삼기 바랍니다.”

 

그 당시 결혼해서 아이도 있었던 터라 재정적 어려움이 컸다. 아이 우윳값도 만만치 않았다. 사 봐야 할 책도 많아 적은 사례비로 한 달을 지내기가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선배 교역자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으리라. ‘목사님, 담임목사님은 그래도 조금 여유 있지 않습니까. 우린 어려운데 너무 하십니다.’ 계속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헌금에 대해 말하는 게 쉽지 않다. 재정적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를 생각하면, 기복적이라고 비난하는 세상 사람을 떠올리면 헌금 이야기는 되도록 안 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 태도는 결코 아니다.

 

헌금은 사람들의 아우성 때문에 슬쩍 지나갈 주제가 아니다. 반드시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창 4:4) 하나님은 다섯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에서 합당한 제물을 요구하셨다.(레 1~5장)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즐겁게 자원하여 그리고 풍성히 제물을 드렸다.(대상 29:17, 21)

 

예수님은 제단에 예물을 드려야 함을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으며(마 5:23~24), 사람들이 헌금 드리는 것을 보셨다.(막 12:41~44) 바울은 너그럽게, 넉넉하게 연보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했다.(고후 9:11)

 

십일조의 중요성은 구약의 다양한 가르침에서 나온다.(말 3:8~12) 예수님도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다.(마 23:23) 이렇듯 헌금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헌금은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표시다. 하나님의 놀라운 언약을 머금고 있다.

 

정성어린 헌금 생활 없이 믿음은 잘 자라지 않는다.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는 경시하고 사람에게는 인심을 팍팍 쓰는 자들이 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1년 내내 골프치고 가족들과 외식하고 여행하는 데는 조금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이 되면 한 해 동안 한없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한없이 인색해진다. 어이없는 일이다.

 

재정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교육전도사 때 담임목사님은 역설적으로 넘치는 감사를 가르쳐 주셨다. ‘교육전도사로서 공부와 사역과 생활이 얼마나 힘드냐’는 위로의 말씀을 듣고 싶은 때였다. 그런데 ‘정성을 다해 힘껏 감사헌금 생활을 잘하라’는 말씀은 의외였다. 그 어려운 가르침은 그날 나를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날아오르게 해주신 말씀이었다.

 

‘헌금은 예배와 상관없다’고 쉽게 말하지 말자. 헌금을 가르치는 사역자를 ‘은혜가 아니라 율법을 가르친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 희생과 드림이 없는 예배가 어찌 예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귀한 가르침을 남겨 주시고 하늘나라로 가신 옛 담임목사님을 훗날 만나 뵈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목사님,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는 속으로가 아니라 크게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