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날 이때까지 익숙하게 들었던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라는 말과 정반대의 말이 아닌가.

 

그러나 잘못 들은 말이 아니다. 오늘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다 뿔뿔이 흩어져 홀로 살아가는 시대가 되는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도 없다. 바벨탑 건설은 사람을 흩었고 오순절 성령강림은 사람을 모았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인류의 역사의 마지막 방향은 사람의 흩음을 지향하지 않고 사람의 모음을 향해간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었던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예배는 다양한 지방의 사람이 모여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듣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항상 주변에 머물며 일어나는 모든 일의 구경꾼과 같았던 자들이 하나로 어울려 자신들의 문화, 자신들의 언어, 자신들의 지역을 초월해 모여 예배하는 일이 초대교회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천국까지 이어진다.

 

흩음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고, 모음의 배후에는 성령이 계시다. 마귀는 역사적으로 흩음을 좋아해 교회 안에 수많은 분열을 조장했다. 마귀는 오늘날도 교회의 흩음을 도모한다.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를 교회를 향해 역설한다. 그 말에 분노하면서도 일말의 고마움을 갖는 것은 그 말에 반응하는 교회와 교회 지도자를 보며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여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많이 모이는 것이 교회가 아님을 작금의 현실을 통해 절절히 알게 됐다. 그동안 교회는 많이 모여 그 숫자를 자랑했다. 그 많은 숫자가 모두 알곡이 아님을 보았다. 단순히 숫자만 많아서는 예배의 진정성도 없었고 세상을 향한 힘도 없었다. 그동안 숫자라는 뿌연 안개 속에 또렷이 보지 못한 것들, 무엇인 본질인지를 이제는 잘 보고 있다.

 

예배에 있어서 모인 수는 결코 본질이 아니다. 교회가 숫자에 연연함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보고 있지 않은가. 교회 지도자들이 그 숫자 뒤에 숨어 비겁을 자행함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가득한 교회보다 성령이 가득한 사람이 중요하며, 그 숫자가 어떠하든지 성령으로 가득한 자들이 예배를 예배 되게 하고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본질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는 아무렇게나 모인 다수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사람과 진리의 사람만을 예배자로 인정하셨다.(요 4:23~24) 그동안 익히 알았지만, 간과해 온 말씀이다.

 

뭉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흩어지라는 시대에 다시 단순히 뭉치는 것만을 간절히 기도하지 말자. 이미 있었던 그런 단순한 뭉침을 기대하셨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도, 교회의 가슴도 몹시 아픈 흩음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