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올해 단기 선교를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올해 단기 선교를 할 수 있었다. 해마다 여러 곳의 단기선교를 섬겨왔는데 올해는 한 곳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았다.

 

예전처럼 많은 사람이 한 번에 모일 수 없는 터라 작은 규모의 선교 바자를 여러 차례 열어 각 선교지로 보내기로 했다. 현지 선교사님들과 단기선교를 기다렸던 성도들이 함께 ‘줌’에 모여 예배와 기도, 교제와 격려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며칠 전에는 미국 퀸즈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알마티 선교사님과 협력하는 키르기스스탄 선교사님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알마티 선교사님이 설교하시면서 여러 차례 우셨다. 처음에는 ‘다른 불’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셨다.

 

그날 설교 본문(레 10:1~7)에서 아론의 아들들이 다른 불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다가 죽게 된 장면을 말씀하셨다. 선교지에서 예배마다 오직 ‘진리의 불’ ‘예수님의 불’로 예배를 드리시겠다며 우셨다.

 

성도 중 한 분이 “죽고 싶지 않아요. 살고 싶어요”라는 전화를 하셨다며 또 우셨다. 최근 알마티에 창궐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여러 가족이 죽었는데 그 죽음이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으니 죽고 싶지 않다며 절박한 목소리로 전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가 환난을 당한 자들에게 이처럼 꼭 필요하다며 눈물 흘리셨다.

 

선교사님의 눈물은 그 눈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외국인과 선교사가 철수하는 가운데 자신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이번에도 현지인과 함께 그 자리에 남아 있으시겠다며 우셨다.

 

감동적인 예배를 마치고 곰곰 생각해 봤다. 그리고 보니 우리는 예배에서 눈물을 잃어버린 지 오래됐다. 예배 중에 춤을 추기도 하고 찬양도 드렸던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눈물을 넘어 통곡으로도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다윗만 사죄의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우리 중 누구도 오늘에 이를 수 없었다.

 

그 사죄의 은총을 깊이 깨달은 자들은 예배 가운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예전에는 모든 예배에 특히 성찬 예배에 곳곳에서 흐느껴 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성찬이 너무 홀대를 받고 있다.

 

성찬은 교회가 1년에 몇 차례 마지못해 시행할 행사가 아니다. 예수님이 지키라고 명령하신 성찬은 어떤 시간인가. 식탁 위의 떡과 잔을 내가 보고 먹고 마시며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이 나의 개인적 구원임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감격의 시간이다.

 

나아가 성찬은 옆에서 나와 함께 떡과 잔을 먹고 마신 자들이 예수님이 세우신 새 언약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전율의 시간이다. 성찬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는 소망의 시간이다.

 

성찬은 성찬에 담긴 생명의 복음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잘 전하라는 사명을 확실하게 다짐하는 비전의 시간이다. 그리고 성찬은 너무 신비로운 바로 그 성찬을 통해 성화가 확연하게 일어남을 경험하는 축복의 시간이다.

 

그런데 말랐다. 눈물이 말랐다. 예배에서 눈물이 말랐다. 무엇보다 성찬에서 흐르던 회개와 감사와 결단의 눈물을 이제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희귀한 일이 돼가고 있다.

 

눈물을 포기하지 말자. 예수님이 초청하신 식탁, 그 상 위에 펼쳐진 떡과 잔을 예수님이 어떻게 만드셨는지, 그리고 그 떡과 잔은 나에게, 그리고 교회에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으면 말랐던 눈물의 강이 다시 흐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