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쇼핑하는 동안 카타콤을 방문하실 분들은 손들어 주세요.” 나와 함께 6명이 손을 들었고 얼마 후 우리는 일행들과 다른 차를 타고 카타콤으로 향했다. 독실한 크리스천 관광가이드가 아니었다면 그런 제안은 없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의 지하 묘지인 카타콤은 크리스천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가 예배도 드리고 생활도 했던 곳이다. 그곳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마음은 계속 뜨거워졌다.

 

카타콤 곳곳에는 당시 성도들이 가졌던 구원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중에 믿음을 지키다 죽은 여인 체칠리아의 마지막 모습을 빚은 조각에 대한 설명은 압권이었다.

 

옆으로 누운 조각 한 손에는 세 개의 손가락이 펴져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손가락 하나를 펴 그 세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신앙을 고백하며 죽은 것이라고 한다.

 

그 밖에 여러 설명을 들은 후 예배를 드렸다. 그 카타콤 안에 성찬 예배를 드리거나 여러 모임을 갖기에 적절해 보인 공간에서 드린 예배였다. 목사는 나밖에 없어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말씀을 전했다. 그때 예배 중에 불렀던 찬송이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였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내내 북받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너무 불편한 로마 지하의 카타콤에서 드렸던 그 날 예배의 가슴 저민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곳이 믿음을 지키려는 자들이 찬송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들은 장소였음을 기억하며 드린 예배였기 때문이리라. 삼위일체 교리에 충실한 자리였기 때문이리라.

 

하나님의 임재가 확실히 있던 자리, 다시 오실 주님을 낮이나 밤이나 기다렸던 자리,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오롯이 보여준 자리, 믿음의 공동체가 서로를 보듬은 이야기를 남긴 자리였기 때문이리라.

 

사람이 예배드리기에 편리한 곳을 최적의 예배 장소라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임하시기에 합당한 곳이 최고의 예배 자리다. 한때 ‘구도자 예배’ 열풍이 있었다. 구도자 중심의 예배는 꽤 설득력 있어 보이는 단어다.

 

그 예배는 구도자를 VIP로 여기는 어설픈 철학을 담고 있다. 사람들이 듣기에 불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구속, 화목제물, 칭의 등의 용어들을 치우고 쉬운 용어나 이미지를 사용하자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이전의 모든 성도는 그런 단어들을 직접 들으며 신앙을 올곧게 키웠다. 예배의 중심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중심이다. 예배의 공간이 아름다워야 아름다운 예배가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예배자가 드리는 예배가 아름다운 예배이며 그들이 있는 공간이 가장 아름다운 예배 자리다.

 

빌립보 감옥의 깊은 자리가 가장 멋진 예배 자리였음을 바울과 실라도 일깨워 주고 있지 않은가.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