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아이 같은 남자가 있다. 남자 같은 남자가 있다. 그리고 족장(族長) 같은 남자가 있다. 여전히 자기 앞가림을 못 하는 남자라면 나이가 어떻든 아이 같은 남자다. 어이없다.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고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자들은 남자 같은 남자다. 괜찮다. 수많은 사람을 품고 수많은 사람을 먹이는 남자는 족장이다. 멋지다.

 

하나님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즐겨 소개하신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족장이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의 관계인 그들이 삼대(三代)에 걸쳐 족장이 됐는데 무엇이 그들을 족장 되게 했는가.

 

단순히 족장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걸까. 아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이 그들을 족장 되게 한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놀라운 예배자였다는 데 있다. 그들의 예배는 남달랐고 그런 예배를 통해 엄청난 축복을 받았고 수많은 자에게 복의 통로가 되는 족장이 됐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는 순종의 예배를 드렸다.(창 22) 아브라함은 이해가 됐기 때문에 순종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지체 없이 순종한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머뭇거림 없는 순종의 예배에 큰 감동을 받으신 하나님이 다급히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삭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주의 제단에 드리는 희생의 예배를 드렸다.(창 22) 아버지의 칼을 묵묵히 받으려 했던 이삭의 마음은 도대체 어땠을까. 울고 불며 “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를 외치거나 아예 아버지를 밀어제치고 도망을 갈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그 이삭을 어찌 잊으시겠는가.

 

온전한 희생의 예배자였던 그는 마침내 창대하고 왕성하며 거부인 족장으로 살았다.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과 이삭의 예배는 같이 있었다.(창 26)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 지라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야곱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벧엘로 올라가는 결단의 예배를 드렸다.(창 35) 하나님이 오랫동안 기다리셨던 예배였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와 예배를 드리겠다고 스스로 약속해 놓고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수십 년간 기다리셨던 야곱의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은 그가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사실 별 볼 일 없는 남자들을 위대한 족장으로 만든 예배는 하나님께 큰 순종, 큰 희생, 큰 결단으로 드렸던 예배였다.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어 예배자를 족장으로 만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예배가 정녕 오늘에도 있는가. 오늘날 아이 같은 남자를 많이 보고 남자 같은 남자는 적잖이 보지만, 족장 같은 남자를 보기 힘든 이유는 예배에 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