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출발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탄자니아 선수 존 스티브 아쿠와리.

출발선을 빠져 나가려는 순간 옆 사람과 부딪쳐 넘어졌습니다.

피가 많이 흐르는 큰 부상을 입었고 의료진들은 그만 뛰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 뛰었고 쓰러지면 또 다시 일어나 절뚝 거리며 달렸습니다.

 

날이 어두워 결승점에 도착한 그는 따듯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도 받았습니다.

부상을 입고도 왜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끼?”

그는 눈물과 미소로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이 이 먼곳까지 나를 보낸 것은 마라톤 경주를

출발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끝까지 완주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출발한 모든 자가 아니라 완주자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의 선언이십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 바울의 외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서원 새벽기도회.

같이 출발해요. 힘들어도 모두 완주해요.

그리고 마지막 날, 완주자의 노래를 뜨겁게 함께 불러요.

 

 

 


험한 세상을 이기려면

 

사자와 양은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이 둘이 결코 같이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둘이 멋진 조화를 이루었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5:5-6)

 

예수님은 사자의 위용과 어린 양의 겸손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십니다.

불의 앞에는 강한 사자와 같으셨고 약한 자에게는 부드러운 양의 모습이셨습니다.

그 멋진 조화로움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세상을 이기려면 강인함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부드러움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그 안에 사자와 양을 동시에 같이 가진 사람이 세상을 이깁니다.

당신은 사자이시면서 동시에 양이십니까?

그러시다면 당신은 이 험한 세상에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기적의 행진

 

2024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첫 주일임에도 신년을 맞은지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작년 마지막 주일 이후 송구영신예배, 신년하례예배,

그리고 닷새 동안의 신년 특별 새벽기도회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어제 새벽 어느 성도께서 짧은 문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이번 특새를 기적의 행진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금년 신년 특새의 주제로 지금도 기적이 일어난다

그리고 손들면, 드리면, 외치면, 믿으면, 손 떼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퀸즈장로교회는 기적이 일상이 되는 교회,

우리 교회는 오늘도 기적을 체험하는 교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손들고 기도하는데, 주님께 드리는데, 대적을 향해 외치는데

그리고 믿음으로 행하며, 주님이 일 하시도록 내 손을 떼는데 힘쓰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 빰빰빠-

이제 막 2024년도 기적의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한해를 그 어떤 놀라운 기적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사는데 만족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놀라움으로 가득 찰 기적의 행진에, 그대를 열렬히 초대합니다.

 

 

 


드디어 의문이 풀리다

 

너무 그리운 교우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휴스턴 한인중앙장로교회 청지기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해 주심이 말씀의 현장에서 선명히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여기 청지기수련회는 우리  제직수련회와 내용과 형식이 똑같습니다.

 

45주년 교회의 따듯한 장로님들과 밝은 교역자님들

순박하게 말씀을 사모하는 제직, 순서 맡은 분들이 최선을 다하는 찬양 등이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몰랐던 담임 목사님께서 저를, 초청하셨는지.

쨔자잔, 드디어 의문이 풀렸습니다. 이곳 교회는 우리 신문사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담임 이재호목사님께서 칼럼을 매주 읽으시면서 저를 초청하고 싶으셨답니다.

 

금요일 저녁 식사대접 해주시던 장로님도 Y 신문방송학과 출신이셨습니다.

자연스레 종이 신문의 역할과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가운데 문서 선교를 섬겨오던 제게 위로와 새로운 다짐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문서 선교에 기도와 후원을 아끼지 않으신 교우들과 후원교회, 그리고 필진이 얼마나 고마우신지.

 

이번 금요일부터는 우리의 제직수련회가 열립니다.

혹시 우리 교우들께 무슨 의문이 있으십니까?

수련회 중에 말씀으로 은혜도 받으시고, 의문도 풀리시길 기원합니다.

 

~기대되는 수요일의 일일 부흥회도 있군요. 오는 수요일부터 뵈여요. 저도 갑니다.


고백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고백입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언어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말이 있습니다.

고백입니다.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임하고 마귀는 도망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말이 있습니다.

고백입니다.

상대방에게 먼저 잘못을 고백하면 모든 것이 회복되고 일이 잘 풀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이 있습니다.

고백입니다.

고백하기를 주저주저 하다가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선택하십시오. 고백하기를

용기내십시오. 고백하기로

 

 

승리하십시오. 고백하셔서


겨울에 내리는

 

우리가 사는 동네가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겨울이면 눈이 펑펑 쏟아져 사람도 자동차도 며칠씩 다닐 없었습니다.

상점마다 모자, 목도리, 장갑, 부츠 겨울 물품은 없어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그런 정경을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눈이 와야 때에 비가 내리니 이상 기후에 대한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를 다르게 생각하고 다시 바라 보았습니다.

새로운 생각으로 바라본 비는 계절을 앞서 찾아온 희망의 전령이었습니다.

 

겨울 틈속에 잠깐 찾아온 비는머잖은 곳에 봄이 있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비는 눈처럼 살포시 내려 앉아있다 슬며시 떠나지 않았습니다.

봄에 틔울 자리를 미리 알아보듯 돌아다니다 기약의 여운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손이 시려워

    발이 시려워

    겨울 바람 때문에----"

 

며칠 손도 발도 시려울 날씨가 예고되어 있긴 해도, 우린 압니다.

 

희망의 봄을 이길 혹독한 겨울이 없음을.


동방의 작은 나라

 

동방의 작은 나라. 오랜 역사 가운데 수많은 외침(外侵)이 있었고

가난과 온갖 우상숭배와 공산당의 침략으로 가슴 아팠던 나라.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아주 쓰러진 것 같아도 다시 일으켜 주시어

오늘날의 경제(經濟)대국, 문화(文化)대국으로 세워 주신 나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넘치게 받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아직도 거짓과 인본주의 죄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라.

 

우리의 선진(先陣)들이 기도로 풍전등화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듯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또 다시 절절히 필요한 나라.

이러한 기도와 찬송이 있습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의 끝까지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며 주님만 섬기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의 주님 교회 위에 하늘의 생기 부어 주소서

열방을 치유하는 주 백성 주님의 군대를 일으켜 주소서

 

성령의 새 바람 이 땅에 불어오소서 주의 영 그 생기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땅에 하나님 영광 거하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열방에 하나님 영광 비추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살리사 하나님만 높이고

복음으로 열방을 치유하는 선교(宣敎)대국 되게 하소서.

 

 

 

 

 

 

 

 

 

 

 


마지막 한 마디

 

2024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평범했을 남은 몇날도 마지막이란 관점으로 보니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올해도 무수(無數)한 말을 주고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 말 가운데 위로가 되는 말도 있었고 상처를 안긴 말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가르쳤던 D. L 무디는 마지막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

프랑스의 이교도(異敎徒) 볼테르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소!----나는 지옥으로 갈거요.----”

그 마지막 말이 소망으로 가득찬 사람도 있고, 절망의 언어인 사람도 있습니다.

 

일년내내 불평과 탐심의 언어를 쏟던 사람의 마지막 말이 은혜롭긴 어렵습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삶을 살던 사람의 마지막 말이 험악(險惡)할리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한 마디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감동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감사합니다는 필경(畢竟) 감동의 언어 가운데 앞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 감사해요.” “교우님, 감사해요.”

 

늦지 않도록, 후회하지 않도록, 2024년도가 저물어가기 전에 말해보아요.


잃어버린 주인공을 찾아서

 

심리학 교수 한 분이 40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상테스트를 하였습니다.

성탄절이라는 단어를 주고 생각나는 것을 하나씩 적으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의 대답에는 추리, 선물, 휴일, 캐럴, 산타클로스등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40개의 대답 가운데 예수님이란 단어는 없었답니다.

아무도 성탄절의 진정한 주인공을 몰랐던 것입니다.

 

주인공을 잃어버린 잔치이야기, 그 학생들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성탄절의 거리를 걸어보십시오.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치장이 성탄절을 앞두고 거리를 메우고 있지만

정작 성탄의 주인공은 외롭고 쓸쓸한 거리.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의도하여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음받은 존재이고, 지으신 이의 의도가 있는 존재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내 인생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연말연시, 가짜 주인공들로 들뜨기 쉬운 성탄절.

이 세상이 잃어버린 주인공을 찾아뵙는 성탄절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는 25, 교회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성탄의 진짜 주인공을 만나보아요.

 

 

 

 

 


마지막 한 달은

 

202412월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큰일을 하는 교회라는 표어로 출발한 한 해였습니다.

벌써 마지막 달이 되었습니다.

 

정녕 믿음으로 살아온 한해였던가.

어떤 도전을 하였으며,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가.

아쉬움이 큽니다.

 

마지막 한 달이 남았습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년을 기약하며 주저앉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2024년도의 센 물살이 여전히 우리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물살에 떠내려갈 것 같은 두려움도 있지만

믿음으로 발을 내딛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면

마지막 한 달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데 충분한 시간입니다.

 

 

 

 

 


왕이 나셨도다

 

세상에는 가짜 왕이 너무 많습니다.

왕이 되려는 싸움이 치열합니다.

“내 것은 내 것이다, 네 것도 내 것이야.”

우리도 이런 싸움판에 한명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말합니다.

“내 방, 내 컴퓨터, 내 옷....”

착각입니다. 부모님이 그 값을 지불했지 자녀들이 지불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쓰고 있을지언정 자기들의 소유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위탁받은 것을 사용할 뿐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요 통치하는 왕이 단 한 분 있습니다.

그 이름 예수.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왕노릇하면 안 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왕이 나셨습니다. 놀라운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을 송축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11

 

어느덧 11월이 되었습니다.

나뭇잎도 떨어지고 들판의 곡식도 추수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11이라는 숫자를 가만히 보면 결코 외로운 시간이 아닙니다.

112달 중에 이렇게 멋진 숫자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리로도 저리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동일한 숫자 11,

동행의 시간, 11.

 

외로우십니까?

힘드십니까?

내 옆에 계신 분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좋은 친구이신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

내 맘이 아플적에 큰 위로 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11, 많은 것들이 보이고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는 시간일터인데

친구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묵상하며 걷는다면

잊지 못할 2024년도의 멋진 11월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

 

미국은 청교도들의 세운 나라입니다.

1620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으로부터 항해 끝에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

항해 길에 위험과 도착한 땅의 어려움 가운데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감사였습니다.

 

그들에겐 황량한 환경이 크게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이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신앙이 청교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풍요해진 강대국 미국이지만 감사는 초라해지는 것은 아닌지요.

청교도 나라 미국이 가장 먼저 회복해야 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입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고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진정한 축복은 감사드리는 자들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받은 은혜 잊지 말고 감사하며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성찬과 세례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성찬과 세례,

당연한 것인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성찬과 세례가 있는 것입니다.

 

성찬과 세례의 집례,

당연한 것인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집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찬과 세례를 당연히 여겼던 죄악을 회개하며

눈물과 감사로 예수님이 베푸신 생명의 식탁에 나아갑니다.

 

하늘의 양식을 먹은 답게 세상을 넉넉히 이기겠습니다.


입맛은 그대로

 

어느 마을에 가난한 감사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습니다.

고기가 드시고 싶어 정말 오랜만에 마음을 가지고 소고기 반근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들고 가시다가 길바닥에 떨어뜨리셨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개가 귀한 고기를 물어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광경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있으셨습니다.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무엇이 감사하시냐고 물었습니다.

"감사하지요. 비록 고기는 없어졌으나, 입맛은 그대로 있으니까요. 하하하"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시는 할아버지의 감사를 꺾을 것은 없었습니다.

 

감사의 달입니다.

올해 살아오면서 잃은 것도 적잖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러보십시오. 얻은 것과 남아 있는 것에 풍성함이 보일 것입니다.

입맛은 그대로 있어 감사하신 할아버지처럼, 영적인 입맛이 남아 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영적인 입맛은 기도의 갈망입니다.

나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에 대한 갈망입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내게 하나님께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여전히 끓어오르십니까.

 

그렇다면 두려워할 것도 염려할 것도 전혀 없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인 가을은 우리로 겸손케 만듭니다.

무엇인가를 정리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도 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제 새벽에도 황계덕 권사님이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우리의 남은 날을 잘 계수해야 할 숙연한 계절입니다.

 

남은 시간, 우리 앞에는 세 종류의 일이 놓여 있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기에 봄이나 여름처럼 무엇인가 여유롭게

이것 저것 선택하며 지낼 시간이 없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제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할 일에 함께 마음과 정성을 모았습니다.

 

베드로전서 47절부터는 마지막 때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일러줍니다.

정신 차리고 기도하라.

뜨겁게 사랑하라.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

마지막 고지가 보이는 가을, 기도하며 사랑하며 봉사하며 걸어요.

 

 

 


덩실 덩실

 

 

 

나비는 사이로 다니면서 멋진 춤을 춥니다.

 

벌도 꿀을 만나면 신나게 춤을 춥니다.

 

고래도 칭찬을 들으면 묘기에 가까운 시원한 춤을 춥니다.

 

아버지도 아들이 돌아오자 풍악에 맞춘 춤의 자리를 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 자녀들이 기뻐 춤추는 모습을 여러번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덩실 덩실 춤을 추신 적이 있으십니까?

 

성경을 보다 너무 좋아서, 주님을 묵상하다 너무 감격해서 나홀로 춤을 춘적이 가끔 있습니다.

 

오늘도 춤추는 날이 아닐까요.

 

오랜만에 형제자매를 만나니 즐거워서

 

어떤 분은 주안에서 처음 만나기도 하니 반가워서 어깨가 들썩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무엇이 기쁜지 밤새 이상한 춤을 춘다고 합니다.

 

새벽에는 공허와 고통만을 남겨주는 허탈한 춤을.

 

 

 

즐거움이 없는 것인지, 즐거움을 표현 못하는 것인지  진정한 춤이 멈추어진 시대입니다.

 

가장 즐거움인 구원의 즐거움을 덩실 덩실 춤으로 표현하시지 않겠습니까?

 


괜찮다를 넘어

 

아버지는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기다림이 바로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탕진한 아들이었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한 가지가 있었답니다.

놀랍게도 아버지의 기다림, 아버지의 사랑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것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기다리던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체면을 차리지 않고 달려가 맞았습니다.

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어찌 이렇게 되었느냐?”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며 얼싸안고 입을 맞춘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아들에게 용서이상의 것을 주었습니다.

괜찮다, 아들아. 괜찮다.”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넘어입니다.

네가 돌아와 너무 기쁘다, 같이 즐기자하며 큰 잔치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아버지는 실패한 아들에게 잔치를 열어주며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어 준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행복에의 초대 주일입니다.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집밖으로 나간 아들만 탕자가 아니었습니다.

집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아들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집 안팎의 탕자에게 괜찮다넘어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나는 너희들을 여전히 사랑한다. 너희들을 기뻐한다.

일어나라. 다시 시작이다.”

 

 


가불

 

가불은 월급날에 앞서 미리 그달의 봉급을 일부 또는 전부를 받아가는 것입니다.

돈을 사정이 급하기 때문에 가불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시절에 사례비를 가불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재정이 갑자기 필요했었기에 가불을 신청했고

흔쾌히 허락을 받아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가불이란 제도는 남용하면 어려워 지기도 하지만 적절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불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재정" 가불이 아닌 "염려" 가불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 6:34a)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는 염려하지 않지만 매일 매일 먹고 살아갑니다.

들에 백합화는 염려하지 않지만 매일 매일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신뢰하는 자는 염려대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새와 꽃도 하나님을 신뢰하건만 사람은 신뢰대신 염려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재정의 가불은 간혹 필요하겠지만 염려의 가불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염려는 주권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요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평생 염려 가불 금지!!!


그녀의 태도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진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그 사람에게 닥친 상황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능력과 상황이 어느 정도 영향력은 있겠지만 미미(微微)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녀가 만난 환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통했습니다.

그녀에게 없는 것이 많았습니다.

남편도 없었고 돈도 없었습니다.

익숙한 고향집을 떠난 지도 오래입니다.

 

없는 것이 많았던 그녀에게 확실히 있었던 것은 긍정적인 태도였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쓰라린 과거를 회상하며 형성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걷고자 한 “The Way”의 미래를 볼 수 있었기에

‘The Way’ 앞에서 암울한 현실을 뛰어넘는 승리자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입니다.

‘The Way’를 따르던 룻은 마침내 “The Way’의 족보에 이름이 올랐습니다.

‘The Way’를 선명히 보는 자는 태도가 선명하고 또 그런 삶을 삽니다.

 

50주년을 맞아 지금 내 앞에 펼쳐진 ‘The Way’ 곧 예수님.

그녀가 그랬듯이 ‘The Way’에 대한 나의 태도가 나의 인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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