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예술(藝術)은“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갖고 있습니다.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가진 예술은 막강한 힘이 있어 많은 사람들을 각 예술이 표현하는 아름다움의 대상 앞으로 이끕니다.

 

자신의 예술이 b급임을 자처하는 가수 싸이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예술관을 가지고“강남 스타일,”“젠틀맨”을 비롯 최근 발표된“나팔바지,”“대디” 등의 뮤직 비디오를 통해 수억, 수십억의 사람들을 흔들고 노는 곳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헨델은“메시야”라는 작품을 통해 예수님을 너무 아름답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로 예수님에게 이끌어 마침내 예수님을 “king of kings” 로 찬송하게 하였습니다.

헨델의 “메시야”는 혼탁한 세상 속에 빛나는 탁월한 예술입니다.

 

사람은 예술과 분리되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통속적 예술에 취하여 삶이 점차 저급해지거나 참된 예술을 만나 삶을 계속 고양(高揚)시키게 됩니다.

오늘 오후에는 우리 찬양대가 지난 9월부터 준비한 메시아 연주가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몹시 힘들었을 찬양대원들이 맑은 영을 가지고 주일 저녁마다 모여 4개월을 연습하였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주일 밤 본당에는 그들만 있었습니다.

오늘은 아니지요?

진짜 예술을 만나는 자리, 그 예술이 하나님께는 예배가 되고 우리에게는 감동이 될 자리에서 못 뵙는 성도들은 없겠지요?

여러분을 믿쉽니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허스키한 목소리의 서유석씨가 부르던 노랫말입니다.

아무도 가는 세월을 잡지 못하여 어느 덧 우리 모두는 2015년 12월 중순을 같이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힘써 일했는지 올해를 자평(自評)한다면 어떤 점수를 줄 수 있겠습니까?

 

“일 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12월 13일이 기어코 왔듯이 일하고 싶어도 일 할 수 없는 인생의 밤도 머잖아 올 것입니다.

요나는 주님의 일을 피하다가 거친 풍랑을 맞기도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흔들림 없이는 아름다운 꽃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흔들어 댄다고 피어오르는 꽃이기를 거부하고 비열하게 땅에 묻혀 살지 마십시오.

 

오늘은 각 선교회 총회의 날입니다.

지난 회기에 수고하신 모든 회장단과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 왕의 주실 상급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오늘“내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소명의 외침이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19개 선교회 총회 장소에서 아름답게 울려 퍼지길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교회 어느 부서에 지도자로 쓰임 받는다는 것은 내 생애 큰 축복입니다.

축복을 버리고 추구하는 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일을 결코 다시 할 수 없는 밤이 정말 속히 옵니다.


저는 지금 교회를 떠나 휴스턴에 있습니다.

이곳 교회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오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리인 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몇 날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 사역이 끝나면 그 열매는 주님께 맡기고 오늘 밤 다시 뉴욕으로 돌아갑니다.

제 가슴을 늘 뛰게 하는 퀸즈장로교회로요.

 

저는 지금 아내를 멀리 떠나있습니다.

여러분이 눈치채신 정도가 아니라 분명히 아시겠지만 저는 허술한 면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더 더 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요.

삼십여 년 동안 그 많은 부족한 부분을 아내가 말없이 감싸 주었습니다.

그런 아내가 지난 목요일 갑상선 수술을 했습니다.

교우들의 기도 가운데 악성 종양이 아닌 것 같아 감사할 뿐입니다.

제 손길이 삼십 년 만에 꼭 필요할 때 이처럼 멀리 떠나 있어서 아내에게 진 빚은 계속 못 갚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교 현장에서 교회와 아내를 그토록 오래 떠나 계시면서도 묵묵히 그 소임을 다하시는 임정 장로님이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유로 남편 없이 아내 없이 오랜 세월을 지내시면서도 외롬을 외롭다, 힘듦을 힘들다 하지 않으시고 교회를 꿋꿋이 섬기시는 교우들도 생각나 이래저래 눈물지어 보는 가을입니다.


한국에“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여 “사람은 죽어서 이야기를 남긴다”고 해도 무방(無妨)할 것 같습니다.

 

1927년 태어나 지난 22일 서거하신 김영삼 전(前) 대통령, 그는 많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중학교 때 대통령의 꿈을 갖고 어떻게 그 과정을 걸었는지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서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 마지막까지 어떻게 사셨는지, 사람마다 해석은 다르지만 그의 이야기가 다시 회자(膾炙) 되고 있습니다.

서거하시기 얼마 전 가족과 모였을 때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를 부르자고 하셨다는 이야기도 남기셨습니다.

 

前 대통령의 서거에 다소 묻히긴 했으나 지난 25일이 탄생 100년째 날이라는 고(故) 정주영 현대회장, 그도 숱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지금도 리더십의 교범(敎範)이 될 만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권사 며느리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생애 끝자락에 세례를 받았고,“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복음송을 즐겨 불렀고,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물이나 권력이 아니라“믿음, 오직 믿음”이라고 강조한 이야기도 남기셨답니다.

 

몇몇 사람만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야기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남기는 사람일까요?

하나님과 그의 영광만을 생각한 사람,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환히 보면서 살았던 사람, 언제나 희망을 심고 어디서나 소망을 노래한 사람, 부르심을 향해 주저 없이 달렸던 사람, 아니면 매사에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닌 사람, 헌신의 시간에 핑계가 많았던 사람...

 

감사하게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우리들을 위해, 더 미뤄서는 안 될 적은 기회가 아직은 남아 있답니다.


언제 미국에 오셨습니까?

그 날 누가, 그리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저는 1994년 5월 21일 토요일에 꿈에 그리던 미국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날 케네디 공항에서 따듯이 맞아 주시던 분들은 미국에 앞서 와 사시던 가족들과 몇몇 교역자님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그 날 처음 참석한 행사는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교회 결혼식이었습니다.

 

미국의 첫 이민자라 할 수 있는 영국 청교도 102명이 신앙의 박해와 바다의 위험을 거쳐 미국 땅에 처음 도착한 것은 1620년 11월 9일 메사추세츠 주 케이프 코드 였습니다.

그곳 상황이 열악하여 그들은 그곳 건너편의 플리머스에 정식으로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추위와 질병, 배고픔과 인디언들이었습니다.

몇 개월 안에 절반의 사람이 죽고 말았습니다.

청교도들은 아파도 하고 울기도 하였지만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영국에서의 위협과 바다에서의 위험에서도 그러했듯이 미국에서의 위기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견고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1621년 봄, 사랑하는 가족들을 눈물로 묻은 땅 옆에 소망을 품은 씨앗들을 뿌렸습니다.

마침내 그 해 가을, 감격적인 첫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 미국의 첫 이민자들이 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첫 추수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날, 청교도들은 처음으로 거둔 곡식과 과일에 칠면조를 잡아 식탁을 꾸미고 인디언들을 초청해 함께 감사의 만찬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11월 마지막 목요일이 미국의 추수감사절로 지켜지다가 1941년에 11월 넷째 목요일로 조금 조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오는 우리 교회의 11월 넷째 목요일의 추수감사예배와 추수감사만찬은 청교도들의 첫 추수감사절 내용과 형식을 많이 닮고 있습니다.

11월 넷째 목요일의 추수감사절, 누군가는 꼭 지켜가야 할 신앙적 전통이며 성경적 문화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작곡가인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항상 그가 작곡한 악보 맨 위에 j.j를 써 놓았고 그 악보 끝에는 sdg를 적어 놓았습니다.

j.j는 라틴어 jesu, juva 의 이니셜로서 “예수님, 나를 도우소서”의 뜻입니다.

sdg는 역시 라틴어 soli deo gloria의 약어로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흐는 그의 신앙을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음악에는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모두를 향한 심오한 신학까지 담겨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성경의 또 다른 번역처럼 살아낸 바흐의 모든 출발은 j.j 였고 모든 마침은 sdg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적고 나의 한계가 분명해도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도우신다면 말입니다.

한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시작하는 것 같아도 예수님이 돕지 않으시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시작한 일은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열매를 맺을 것이고 또 맺어야만 합니다.

 

오늘은 11월 1일, 벌써 한해의 끝자락이 보이는 시간입니다.

무엇으로 올 한해를 시작하셨습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한 해를 마감하시려 하십니까?

우리의 모든 시작도 j.j가 되고 그 끝도 sdg가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j.j의 시작과 sdg의 마침 사이에는 어떤 삶이 있을지 즐겁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연필로 무엇이든지 처음이라면 j.j를, 마지막이라면 sdg를!


싹이 이 땅에 살포시 얼굴을 내민 이후 줄기로 자라 푸른 잎을 내다가 마침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히는 그럴듯한 나무가 되기까지 언제나 그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이 있습니다.

뿌리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뿌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연약한 싹이 아름드리 나무되기까지 그를 안아도 주었고 버텨도 주었습니다.

열매마다 나무마다 뿌리와 얽힌 이야기를 듬뿍 품고 있습니다.

 

나무가 뿌리의 수고를 기억하고 고맙다고 외친다면 나무가 서 있는 온 산마다 천둥소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는 바람 소리는 있을 뿐 뿌리야 고맙다는 나무 소리는 없습니다.

참 뻔뻔한 나무.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언제나 함께해주시면서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나를 붙잡아 주신 분이 있습니다.

내 생명의 근원이요 내 성장에 은총을 부으신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거두어 간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흉측한 존재입니다.

 

사람마다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표현하면 온 땅은 큰 화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날마다 끓어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계절에도 온 땅은 적막하여 작은 들썩임조차 없습니다.

뿌리의 은혜를 모르는 나무만 참 뻔뻔하다고 혀를 찰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 둘 떨어지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부쩍 외로움을 느끼는 가을.

날씨가 점점 추워져가면서 뭔가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가을.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 옛 누군가를 기다리는 가을.

그래서인지‘가을을 탄다’는 말이 옛 부터 있었나 봅니다.

 

가을을 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을을 타는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가을을 타는 사람들을 초청하는 소리, “그렇다면 가을 새벽 부흥회에 오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가을 새벽 부흥회

“두나미스, 능력을 주옵소서!” 10월 19일(월)-24일(토) 매일 새벽 5시 45분

 

두나미스!

능력이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두나미스를 받으면

아무리 가을이 깊어져도 쓸쓸하거나

의기소침해질 수 없습니다.

 

두나미스는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남의 것을 빌릴 수도 없기에 직접 오셔서 받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가을을 타지 않으니 안 가도 되지요?”하는 사람들에겐 더욱 필요한 가을 새벽 부흥회입니다.

왜냐구요?

가을을 안 타는 사람들도 진짜 매서운 겨울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나미스는 이 가을은 물론 다가 올 겨울을 넉넉히 이길 하늘의 능력입니다.


오는 토요일(31일)은 마틴 루터에 의해 촉발(促發)된 종교개혁이 498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수도사 신분의 루터는 비텐베르그(wittenberg) 성 정문에 서슬 퍼런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던 것입니다.

1521년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출교하려고 하였고 이 일에 세상의 정부도 동의하라고 압박했습니다.

독일 황제 칼 5세는 루터를 보름스(worms) 제국회의에 소환하여 심문하고자 했습니다.

루터는 두려워하지 않고 보름스 제국회의장으로 향했습니다.

 

1521년 4월 16일, 보름스 제국회의장의 심문관은 루터에게 그의 저작물 20권을 철회시키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심문관에게 하루 동안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루터는 자기의 저작물들은 말씀에 비추어 거리낌이 없기에 철회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노했고 좌중은 소란했고 루터의 앞날은 어려워졌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hier stehe ich, ich kan nicht anderst, got helffe mir, amen)

 

하나님은 루터의 기도대로 그를 도우셨습니다.

출교만이 아니라 생명까지 위협받게 된 루터를 하나님이 도우시사 그를 통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게 하셨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떠십니까?

나의 현실이 너무 버거워 포기하고 싶으십니까?

이 시대의 교회가 처한 상황에 절망하십니까?

진정 498년 전보다 더 힘들고, 보름스 제국회의보다 더 위협적인 상황이 내 앞에 있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면 이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문제보다, 이 시대의 어려움보다 더 크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got helffe mir)!”

포기한 성도여 다시 일어나 기도하라! 잠자는 교회여 다시 깨어나 기도하라!


아마존닷컴(amazon.com)은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파는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회사입니다.

창업자는 월스트리트에서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던 제프 베조스(jeff bezos)입니다.

그가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직장 상사가 뜯어 말리는 길을 가려고 했을 때 선택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80세 되었을 때 지금을 돌아보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 무엇인가가 그의 선택 기준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훗날, 내가 가장 후회할 것은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은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익숙한 길을 버리고 아마존닷컴 창업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로버트 프스트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이 선택의 기준이었고 그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그의 시(詩)“가지 않은 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 앞에도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내일부터 시작 되는 가을 새벽 부흥회는 우리 모두에게 두 갈래 길을 보여줍니다.

“그냥 익숙한 그대로 지날 것인가, 아니면 하늘의 능력을 전심으로 구하는 길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은 자유이나 그 선택의 결과는 나의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들 것입니다.

 

훗날 이 가을을 돌이켜 볼 때,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을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어떠신지요?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에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사랑해~너를 너를 사랑해~

노사연씨가 부른‘만남’입니다.

사랑의 만남도 언젠가는 헤어지니 눈물이 납니다.

잘못된 만남은 후회의 눈물을 철철 흐르게 합니다.

그래서 만남은 눈물입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통째로 그 사람의 생애를 만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아픔과, 그가 가진 그리움과 남아 있는 상처를 한꺼번에 만나기 때문이다.

김재진 시인의‘만남’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단지 얼굴을 맞대는 정도가 아니라 만나는 자의 전생애(全生涯)를 맞닥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남은 두려움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아모스 선지자의‘외침’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과 만날 순 없지만 모든 사람은 그 날에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남은 준비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새로운 선교역사(宣敎歷史)의 장(章)을 열게 되었습니다. 중국어예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중국어 예배는 매 주일 오전 9 시 45 분 양순관에서 드려집니다.

낯선 미국 땅에서 우리처럼 이민자(移民者)로 살아가는 중국인들을 애틋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부터 우리도 중국이민자들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몇 달 동안 기도하며 준비해 온 중국어 예배가 드디어 오늘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하나님은 그를 불러 중국 복음화의 문을 열도록 하셨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삶의 법칙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뜻 앞에 순종하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습니다.

그의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의 후손을 비롯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 선교사로 자원을 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국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중국어 예배, 우리의 시작은 미약합니다. 우리는 시작이 미약하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또 시작하며 가는 길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반드시 창대케 될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시작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롭게 결심하며 해보시려는 일들이 각자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미약한 일들이 대부분일터인데, 그 미약함을 함부로 멸시하지 마십시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는 약속의 시각, 미래의 눈으로 오늘의 미약함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앞에는 더 크고 더 좋은 일(bigger and better) 이 약속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미약함 속에 깃든 창대한 미래를!


고(故)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는 한 살 때 소아마비가 걸려 평생 두 발을 쓰지 못하였고 암에도 걸리고 또 재발도 하여 투쟁 이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서 그 제목을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기적이란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단지 하나님에 의해 행해졌다고 굳게 믿어지는 기이한 일을 지칭합니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기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어 기적을 펼치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닌 사건들이 우리의 지난 삶이었고 또 우리들 앞날의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어린 아이의 점심 도시락,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 오병이어는 수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을 충분한 재료였습니다.

내 인생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계산하지 마십시오. 상상 못할 기적도 있습니다.

 

장영희 교수는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생생하게 제 생애에 기억되는 사람입니다.

어디선가 ‘장영희’하면 하던 것을 멈추고 ‘장영희씨에게 또 무슨 아름다운 일이 있었다는 거야?’ 궁금해 하면서 둘러보게 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는 분이 기억되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모습을 인간의 관점으로만 보지 않고 그 모습 위에 펼쳐질 기적을 기대하며 노래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삶이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기억이 된다면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은 삶을 산 것입니다.

 

올 한해도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우리에게 기적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살아온 것이 기적인데 살아갈 것도 기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경이로운 열매를 거두는 기적의 삶,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루어 가실 나의 삶이 될 것입니다.

현실을 탓하지 않고 기적을 기대하며 기적을 베푸실 하나님을 노래하며 살 때, 먼 훗날 나의 삶을 아름다운 삶으로 기억해 줄 사람들이 몇이라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예배 후, 모(某) 집사님을 제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집사님의 부친께서 한국에서 소천 하시어 위로 차 뵙게 된 것입니다.

올해 아흔이 되신 그 부친께서는 북한이 고향이라고 하셨습니다.

20 세 때 떠나온 고향을 70 년 동안 그리워하셨고 마지막에는 북에 계신 어머님을 그토록 부르셨다고 합니다.

 

이산가족의 문제는 아직도 우리 민족에게는 크나 큰 고통의 현실입니다.

현재 1,000 만 명 이상의 관객이 보았다는 영화 ‘국제시장’도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온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 흥남에서 미군 함정에 올라타려는 수많은 피난민 중에 나이 어린 덕수의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배에 오르면서 덕수는 등에 업었던 여동생을 잃어버립니다.

덕수의 아버지는 그 딸을 찾으려고 이미 올랐던 배에서 다시 내립니다.

그 때 자기의 저고리를 어린 장남 덕수에게 건네주면서 아버지가 없으면 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남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줍니다.

 

덕수, 그는 한평생 홀로된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묵묵히 험한 길을 걸으며 아버지가 부탁한대로 모두가 행복해 하는 가정을 일구어 냅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노는 그 시간, 할아버지 덕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쓸쓸히 놓여 있는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목 놓아 흐느낍니다.

“아버지, 내 약속 잘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그 옛날 아버지가 건네준 저고리를 껴안으면서 그의 통곡은 계속됩니다.

 

저는 이 영화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절망 중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버지, 내 약속 잘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살았지예....”라는 덕수의 독백에서 예수님의 치열하셨던 구속사역이 가슴 저미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저와 우리 교우들도 이 땅의 소명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아버지를 뵈올 그 날 “이만하면 내 잘살았지예”라고 눈물 콧물 흘리며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생각도 함께 떠올려 보았습니다.


짐 지고 가는 자, 우리 모든 인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짐이 있습니다. 보이는 짐도 있고 보이지 않는 짐도 있습니다.

무거운 짐도 있고 가벼운 짐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있는데 너무 무거워 감당할 수 없다고 이렇게 신음하고 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시 38:2). 우리 모두의 신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죄의 짐을 대신 져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아십니까?

날마다 우리의 죄의 짐을 지시는 분의 이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 58:19).

 

자신이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짐, 죄의 짐을 계속 지고 가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죄의 짐은 주님께 맡기십시오.

무거운 그 죄는 심판까지 기다리고 있기에 무서운 짐이기도 합니다.

그 옛날 바라바는 놀라고 또 놀랐을 것입니다.

흉악한 죄의 값으로 죽어야 할 사형수 바라바 자기 대신 예수님께서 사형수로 돌아가시고 자기는 자유롭게 된 사건,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의 그 바라바입니다.

 

우리 짐 가운데는 이렇듯 맡길 짐이 있는가 하면, 맡은 짐이 있습니다. 사명의 짐입니다.

이 짐은 다른 자에게 떠맡길 수 없습니다.

남편으로의 사명, 어머니로서의 사명, 누가 대신해 주겠습니까? 내가 맡은 직분, 누구에게 떠넘기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날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맡은 사명의 짐이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내 등의 짐"이라는 시를 이렇게 시작하고 이렇게 마칩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를 못했을 겁니다.

내 등에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 내 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 짐, 슬픈 이별의 짐들이 내 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시인은 맡은 짐들이 선물이라고 합니다.

 

.... 성도는 자기가 맡은 짐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원위치

 

원위치!”

조교의 말 한마디면 모든 훈련생은 즉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원위치를 잊고 무엇인가 계속 진행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하다 싶으면 원래의 위치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 지름길이고 바른 길입니다,

 

원위치기본으로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산만했던 여름 방학을 끝낸 자녀들이 다시 돌아갈 자리입니다.

성도에게 원위치는 신앙생활의 기본인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원위치는 건강을 잃은 사람이 너무나 부러워하는 자리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모든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지만 그 옛날 건강했던 시간들을

떠 올리며 다시 한번만 건강을 주옵소서라고 누구나 기도합니다.

 

원위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의 자리입니다.

자기의 원위치를 떠난 인류는 그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리운 자리, 원위치!

가야 할 자리, 원위치!

 

허물어진 세대, 회복이 필요한 이때에 그 기준은 단 하나 원위치!”입니다.


가을에는 무엇을 해야할까?

 

 

~가을인가 가~을 인가봐~

 

 

9월이 왔습니다. 가을 소리, 가을 내음도 살포시 9월과 함께 찾아 왔습니다.

아직은 농익지 않은 가을이지만 8월과의 이별이 있어야 했습니다.

김영남 시인은 “9월이 오는 소리에서 이렇게 들려주었습니다.

 

 

덥다고 너무 덥다고

저리 가라고 밀어 보내지 않아도

머물고 떠날 때를 알고 있는 여름은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많은 이야기를 담아냈던 여름은 머뭇거리지 않고 훌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가을도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떠나면서 곧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회없는 가을나기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요?

이렇게 답한 분이 있습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을이라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가을이라면,

가을이 마냥 외롭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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