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미국의 50번째 주(州)인 하와이는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와이 주(州)의 수도 호놀룰루는 오하우 섬에 있고, 코나 열방 대학은 하와이 주에서 가장 큰 섬인 빅 아일랜드에 있습니다.

 

몇 년 전 코나 열방 대학에서 진행하는 한인 목회자 제자훈련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업 장소는 야외였고 바다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불렀던 많은 찬송 중에 가장 격한 눈물 가운데 부른 찬송은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였습니다.

 

주 품에 품으소서

능력의 팔로 덮으소서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보이는 바다에 거친 파도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출렁이는 바다 물결을 보면서 부르는 찬송 가운데 나를 품으시고 나를 날아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히 느꼈습니다.

 

저는 압니다.

거친 파도가 날 향해 와도 그 파도는 저를 삼키지 못한다는 것을.

폭풍우 때문에 떨지 않고 주와 함께 날아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거친 폭풍우 위에서 잠잠히 주를 바라볼 것입니다.


어제, 선교바자회 치르시느라 많이 힘드셨지요?

몸살 나지 않으셨나요? 큰 수고 하셨습니다.

사실 어제 바자회가 있었다는 말은 충분한 표현이 아닙니다.

더 더 오래전부터 많은 분들의 기도와 생각과 준비와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고도 싶을 것입니다.

“굳이 고생하면서 시간 들여 바자회를 할 필요가 있느냐.

바자회의 결산에 걸맞는 금액을 선교기금으로 모으면 안 되나... ?”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 계산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옥합을 깨어 그 안에 담긴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어드렸을 때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노라”고 책망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계산적으론 맞는 말인데 예수님은 그들을 나무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계산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선교 바자의 최종목적도 몇만 불이라는 결산이 아닙니다.

물론 그 소중한 결산이 이번 단기 선교 각처에서 아름답게 쓰일 터이지만

우리의 선교 바자는 돈으로는 결코 계산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며, 선교 소명에 대한 각자의 응답이며,

우리 공동체에 대한 결속의 다짐이랍니다.

 

올해도 돈으로 결코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을 함께 일구신 우리 교우들.

이런 멋진 분들과 같이 한 주님, 한 교회를 섬기는 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6.25전쟁 67주년의 날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역사를 잊으면 제대로 된 자신의 미래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6.25. 우리는 그 날을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됩니다.

특별히 남침을 감행한 무리에 죽음으로 맞선 군인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6.25전쟁 피난길에 한 군인의 죽음을 목격(目擊)한 모윤숙 시인은“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詩)를 썼습니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

 

조국의 자유를 지키다 죽어간 25세의 군인.

그는 자기 죽음의 이유를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와 같은 이들의 이유 있는 죽음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도 33세에 자신 죽음의 이유가 대속(代贖)의 죽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 자기 죽음의 이유가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죽음을 뛰어넘는 죽음이 될 것입니다.


소리 없는 화음을 들어보셨습니까?

소리 없는 설교를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들어 보았습니다. 아주 선명하게.

교우 여러분들의 기도와 후원 속에 다녀온 알마티에서.

 

지난 주일(11일)은 알마티 퀸즈장로교회 설립 25주년 기념 주일이었습니다.

오전에는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고 오후에는 기념 감사 찬양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찬양제에는 우리 단기선교팀을 비롯해 12팀이 참여하였습니다.

그 중에 4명의 농아 장애우로 구성된 찬양팀도 있었습니다.

맨 앞의 인도자가 수화(手話)로 솔로(?)를 하면 그 솔로의 양옆과 뒤에 서 있던 장애우들이 중간 중간에 손으로 화음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설명을 들어보니“나를 진주와 같이 만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뜻의 찬양이었습니다.

고난 속에 만들어진 진주와 같은 존재가 바로 자기들임을 감사한 것입니다.

마음의 소리로만 드려진 수화 사중창, 어떤 화음보다 아름다운 화음이었답니다.

 

“제가 설교해본 지가 7년이나 되었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있었던 현지교역자, 한인 지도자 세미나 때에 어느 선교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선교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제도와 상황 속에서 입으로 하는 설교 대신 삶으로 복음을 증거해 오신 선교사님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삶으로 외쳤던 설교가 얼마나 진실했는지를, 그를 존경하며 따르는 사람들과 그가 끼친 다양한 영향력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침묵의 찬양이 더 간절할 수 있고,

침묵의 설교가 더 진실할 수 있음을 이번 알마티선교 중에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여러분들의 뜨거운 기도와 정성 어린 후원 가운데 카자흐스탄 단기선교 팀과 함께 알마티에서 사역 중에 있습니다.

알타미 퀸즈장로교회 설립 25주년 예배와 여러 사역이 있었고, 내일부터는 현지 목회자와 한인 지도자들을 위한 세미나도 진행될 것입니다.

전도폭발 사역, 미용 사역, 그리고 네일 사역도 계속 될 것입니다.

 

각기 주어진 소명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10개의 단기선교 팀을 위한 선교바자회가 아름답게 마무리되었지만, 바자회를 준비하다가 또는 바자회 가운데 모든 교우들이 피곤하셨을 것이고, 피곤함을 넘어 아프기도 하셨을 것이고, 아픔을 넘어 눈에 보이는 상처를 가지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교우들의 피곤과 아픔과 상처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느끼면서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저는 분명히 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 가운데 새겨진 예수의 흔적입니다.

예수의 흔적으로 승화된 상처와 아픔에는 가슴 저민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그 날, 우리 때문에 손, 발, 옆구리, 머리, 온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많이 가지신 예수님을 다시 뵈올 그 날.

이런 일 저런 일 가운데 갖게 된 예수의 흔적들이 우리에게 있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위로해 주시지 않을까요?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 긴 신앙 여정 가운데 예수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면 예수님은 속으로 이렇게 의아해하시지 않겠습니까.

“어? 이건 뭐지?”

 

야바위꾼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여기 한 번 와보라”고 외치면서 동시에 이런 으름장 섞인 말도 합니다.

“자 자 애들은 가라.”

야바위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장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눈에 자기들이 사기 치는 것이 들통날까 봐 걱정스럽기도 한 것입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애들은 가라”는 야바위꾼의 쉰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과 말하다가 뭔가 불리한 듯 싶으면 갑자기 그 아이를 위아래로 째려보다가 퉁명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어디서 쪼그만 게 까불어. 저리 가!”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애들은 가라.”

“어디서 까불어!”라고 차갑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참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뿐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어른도 좋아하십니다.

왜 그러신 줄 아세요?

이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3b-5)

 

예수님은 어린아이를“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정의(定義)하셨습니다.

예수님은“자기를 낮추는”어린아이와“자기를 낮추는”어린아이 같은 어른들을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따듯하게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어서 와라.

이 천국은 너희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란다.”


충청도에서 8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충청도 말이 길고 느리다고 생각하시는데 의외로 짧고 의미가 분명합니다.

예를 들면 “춤을 같이 추시겠습니까?” 라는 말을“출텨?”하면 상대방이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또“보양탕을 먹으십니까?” 라는 질문은 “혀?”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와 같이 가시겠습니까?”라는 긴 문장은 “갈텨?”하면 됩니다.

제가 오늘 칼럼에서 몇 번“갈텨?”라는 말을 사용할 터인데 무례한 말로 여기지 마셨으면 합니다.

 

오늘 오후 예배에 갈텨, 안 갈텨?

오늘 오후 예배는 러시아어권 설립 1주년 예배로 드립니다.

가족 안에 돌잔치가 있다면 웬만하면 다 갑니다.

러시아어권 예배의 설립 첫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같이 가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들을 축하하고, 다민족 선교 비전을 다시 새롭게 합시다.

그런 예배 같텨, 안 갈텨?

 

내일 한마음 축제에 갈텨, 안 갈텨?

내일은 일 년 동안 설레며(?) 기다린 전교인 한마음 축제입니다.

1-4부 예배, 교육부 예배, 청년 예배, 영어 예배, 중국어 예배, 러시아어권 예배로 나뉘어 있는 우리 모임이 한마음인 것은 내일과 같은 모임에 함께 함으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축제 갈텨, 안 갈텨?

 

토요일 선교 바자에 갈텨, 안 갈텨?

오는 토요일은 선교바자회 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성취에는 선교라는 방법이 큰 역할을 합니다.

모두들 벌써 이 일에 얼마나 열심을 내는지... 참 아름답습니다.

아무튼 10개 팀으로 나가는 올 여름 단기 선교에 동참하는 방법은 이번 토요일 선교 바자에 함께하시면 됩니다.

그런 바자 갈텨, 안 갈텨?

 

세상 여정 끝나고 천국에 같텨, 안 갈텨?

우리의 세상 생활은 눈물 골짜기를 비롯 다양한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의 최대 소망은 이 세상 여정이 모두 끝난 후, 눈물 없는 천국에서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성삼위 하나님을 영원토록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런 천국 갈텨, 안 갈텨?


지난 월요일 밤 첸위지 전도사님으로부터 힘든 소식을 받았습니다.
목사고시를 치루기 위해 총회가 열리는 알라스카로 며칠 전 떠났던 첸 전도사님이 그 결과를 알려온 것입니다.
“목사님, 다른 모든 과목은 pass했는데 설교 과목에서 fail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과목이면 몰라도 설교에서 떨어지다니.
아시는대로 첸 전도사님의 열정적인 설교는 중국어 회중은 물론 한국어 회중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어왔고 중국어 예배 부흥에 견인차 역할을 해왔습니다.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총회 장소에 도착한 장로님들은 총회와 고시부 관계자들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저는 이 상황을 하나님 앞에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 몇가지 묵상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펼치시는데 그것은 항상 신실하신 것이며 가장 좋은 것이다.
총회와 고시부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이번 일로 총회 지도부가 각 교회의 비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첸전도사님은 더 겸손하고 더 위대한 설교자가 될 것이다.
중국어 예배는 더 부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다민족선교의 비전은 기도와 성찰을 통해 더 힘있게 전개될 것이다.
우리 교회가 너무 귀하고, 성도들이 참 아름답고 너무 보고 싶다...”


싸움질은 기본이요 온갖 나쁜 짓을 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이 아들이 결국 교도소에 갈 것을 아버지는 압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죄를 짓고 교도소로 들어갑니다.

면회 온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여기는 절대 올 곳이 아니니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살아라.”

 

후에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아버지가 교도소를 가게 된 진짜 이유를 알려 줍니다.

“아버지는 너를 위해 일부러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간 것이란다.

네가 교도소에 들어오지 말라고 미리 들어가 막고 있는 것이란다.”

 

이 놀라운 말을 들은 아들은 변하여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이철환 씨의 작품에 나오는“먼 불빛”이란 실화 내용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스스로 어둠이 되었다.

빛을 거부했던 아들의 어둠 속으로 들어와 끝내는 그르치고야 말 그의 인생 앞에 불빛 하나를 밝혀주었다.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인생에서 표류할 때마다 두고두고 바라볼 먼 불빛, 아버지, 아버지….”

 

우리 부모님들은 모두 그런 분들이십니다.

방황하는 우리 인생길 앞에서 희생으로 밝히신 먼 불빛이 되시어, 가서는 안 되는 길을 일러 주시고 가야만 하는 길을 비추어 주십니다.


1991년 8월 19일, 굉음과 함께 탱크들이 모스크바 거리로 진입했습니다.

당시 소련연방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크림반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소련 보수 강경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크림반도로 파송된 쿠데타 세력에 의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고립당했고 모든 통신은 두절되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의 소문은 쿠데타가 성공한 것 같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정변(政變)은 8월 21일,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역사에서 사라질 것 같았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정변 3일만 인 21일에 모스크바로 귀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3일의 여파는 훗날 세계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고 마귀는 환호했을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제 세상인 줄 알았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을 것이며 자신의 손아귀에 하나같이 움직일 인생들을 생각하며 희희낙락(喜喜樂樂)했던 것은 단지 3일뿐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마귀의 음모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그 3일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꾼 3일을 모르는 자들은 어려움이 다가올 때 크게 낙심합니다.

언제 그 고통이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그 시간은 3일뿐인 것을!

2,000여 년 전 죽음에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 역사(役事)하시면서 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의 백성에게 “3일만 참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 못 한 어려움 가운데 있으신 교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삼 일 후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니 3일만, 3일만 참아보십시오.


지금도 고이 간직한 손편지들이 있으시지요?

제게도 있어요.

문득, 그 옛날 우체통에서 편지를 찾아 읽던 그 날들이 그립습니다.

반가운 사람에게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한 날은 마음의 축제가 일어나는 날입니다.

어떨 때 그 사람의 편지는 그 사람이 찾아오는 것보다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반가운 그 사람은 언제가 떠나지만 그 사람의 편지는 늘 내게 있어 읽고 또 읽다가 슬프거나 답답한 날, 마음대로 또다시 꺼내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이며 신학자이며 문필가이며 마침내 순교자가 된 디트리히 본회퍼.

그가 옥중(獄中)에서 그의 약혼녀 마리아와 주고받은 편지가 “옥중연서(獄中戀書)”라는 책으로 꾸며져 발간되었습니다.

그 한 토막

 

“당신에게 방금 편지를 보냈지만, 또 편지를 쓰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자면서도 당신 꿈을 꿀 거예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훨씬 이상으로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것,

그리고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꿈이 아니랍니다.”

용감하고 신령한 내 사랑 디트리히,

언젠가 당신의 아내가 될 당신의 마리아

 

마지막으로 손편지를 쓰신 적이 언제이신지.

5월은 가정의 달.

나의 신랑 되신 그리운 주님에게,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아니면 가족 같은 친구나 이웃에게 손편지를 써 보내는 것은 어떨까요?


4월이 되었습니다.

4월이 이토록 설레는 것은 봄비로 적셔진 봄꽃들이 흐드러진 향내와 함께 피어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4월에 부활절이 있기에 기다림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다시 와서 네 번째 맞는 부활절.

그 날짜만 돌이켜 보면

2014년에는 4월 20일,

2015년에는 4월 5일,

2016년에는 3월 27일,

올해는 4월 16일.

그런데 왜 이렇게 부활절 날짜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일까요?

 

기독교회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공의회가 325년 5월부터 8월까지 오늘날의 터키 지역인 니케아에서 열렸습니다.

이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날짜를 정했습니다.

부활절은 춘분 직후, 보름달이 뜬 후, 바로 다음 주일.

춘분은 언제나 3월 21일.

그러므로 이 원칙에 따르면 부활절은 3월 22일보다 빠를 수 없으며 4월 25일보다 늦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부활절은 왔다 갔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시니 부활신앙 결코 흔들리지 마시고 4월을 힘껏 노래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세상에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이스라엘 땅을 아합이 통치하던 어두운 때, 세상에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멋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와 아벳느고는 금신상에 무릎 꿇지 않은 신앙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으로 창이 열린 방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의 한 다락방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깊은 감옥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스덴반은 돌이 날아오는 자리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낙타는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자기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야고보는 하도 무릎 꿇고 기도해서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의 생애 가운데 깊이 체험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으면 결국 세상에 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무릎 꿇으면 마침내 세상이 내게 무릎 꿇는 것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평생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너무 분명합니다.

무릎과 그리스도인.

이 둘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습니다.

시작은 미약해도 끝이 좋아야 합니다.

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서둘러 또는 할 수 없이 끝내야 하는 마감이 있고, 보람 있고 묵직한 결과로 끝내는 완성이 있습니다.

 

그의 시작은 말구유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십자가였습니다.

그의 끝은 결코 마지못해 접게 된 마감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고 선포한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자기가 태어난 봄, 그 같은 날짜에 땅에 묻힌 사람이 있습니다.

외동딸로 쓸쓸히 태어난 그가 수백 명의 애도 속에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누가 보아도 서둘러 마감한 인생이 아니라 아름답게 완성된 인생입니다.

故장정자 권사님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끝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누구도 시작을 되돌릴 수 없으나 누구나 멋진 끝은 만들 수 있습니다.

모두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갑자기 “끝내라” 하실 수가 있다는 것...


교우님, 당황하셨어요?

하지만 맞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에 금식합니다.

물론 힘들겠지만 사순절에 금식하면 참 좋아질 것입니다.

이 좋은 것을 저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교우와 같이 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매일매일 너무 많이 먹었습니다.

영적으로 해악된 것들을요.

염려, 근심, 포기, 미움, 자만....

 

그래서 사순절 금식을 어떻게 하나면요

하루에 하나씩만 금식합니다.

어떤 날은“분노”를 금식하고, 그 어떤 날은“절망”을 금식하고,

다른 날은“불안”을 금식하고, 또 다른 날은“비방”을 금식하고,

언젠가는“비교”를 금식하고. 또 언젠가는“고독”을 금식하는...

 

“너를 고쳐 주리라-건강할지어다”라는 주제로 30회 사순절 서원기도회가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영혼을 피폐케 하고 가정과 교회 등 모든 삶의 자리를 힘들게 하는 상기(上記) 품목들 중 하루에 하나씩 금식하며 걷다보면 어느 덧 사순절이 지나갈 것이고, 어느 덧 우리는 영적으로 건강해 질 것이고, 어느 덧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들은 밝아질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내일 새벽에 꼭 다시 만나요.

사순절 매일의 금식 품목을 좌악~~ 알려 드릴게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기도하는 당신을 세상이 이길 수 없어요.


.....

돌아가야 하겠지.

언제나 처음의 마음으로.

그 누구도 무엇이 옳은지 당신에게 말해 주지 못할 때

해답도 없고 출구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을 때

돌아가야 하겠지, 늦기 전에.

처음의 마음으로.

류시화 -처음의 마음으로

 

그렇습니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 처음의 마음으로.

결혼생활 처음의 마음으로.

이민생활 처음의 마음으로.

직장생활 처음의 마음으로.

 

지금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에 대한 답이 처음의 마음에 있을 개연성(蓋然性)이 높습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빛이 처음의 마음에 있을 가능성(可能性)이 높습니다.

 

그렇게 살겠노라고 다짐했던 처음의 마음, 그 때 그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지금보다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그렇데 눈이 오던 날, 크게 놀랐습니다.

교우들이 심한 눈보라를 뚫고 나와 새벽기도회 자리를 꽉 메워서.

 

새벽 예배 후 몇몇 교역자들과 함께 눈 폭풍을 헤치고 심방 길에 나섰습니다.

길거리에 오가는 차는 거의 없었습니다.

 사방이 다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마중 나왔다는 사람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상타 싶어 찬찬히 둘러 표지판을 보니 우리가 서있는 곳은 “murray st”

웁스, 우리가 찾는 집은 “149st”에 있는 집. 눈길에 지나친 것입니다.

다섯 명이 자기들이 서 있는 위치를 집단적으로 몰랐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결혼한 지 몇 해 안 된 부부의 가정이었습니다.

심방 날짜를 한 번 미루어 잡은 날이 그날 눈 오던 날.

남편이 얼마 전 아내에게 부탁하더랍니다.

“우리 한 번 더 심방을 미루면 안 될까?”

“안 돼요. 한 번 미루었는데 또 어떻게 미뤄요?”

“그럼, 나 이번 심방에 참석 못해.

꼭 가야할 업무 관련 show가 있단 말이야.”

“그게 말이 돼요?

심방은 미룰 수는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심방에 꼭 참석해야 해요.

당신이 심방에 참여하도록 기도할 거여요.”

그런데 전 날 통보가 왔답니다.

남편이 가야할 show가 눈 때문에 일주일 미루어졌다고.

그 남편은 그 소식을 듣고 “소름”이 돋았답니다.

우리 눈엔 평범하게 심방 받는 두 부부, 하지만 그들에겐 이미 기적의 자리였습니다.

 

예배 후 작은 방에서 예고(?) 없이 내 놓은 곰탕, 어제 아내가 하루 종일 국물을 끓이고, 추가로 남편이 밤에 세 시간을 잠을 안 자고 더 끓였다는 곰탕을 후룩 후룩 먹을 때 

광풍과 함께 쏟아지는 창밖의 눈이 따듯한 눈같이 느껴졌습니다


그 때 그랬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급우들과 함께 민둥산을 향해 줄지어 올라가 나무를 심었습니다.

어린 저 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던 어른들, 중고등학교 형님 누나들도 어디서 장만했는지 손에 들려진 작은 묘목들을 심기 위해 풀 한포기 찾을 수 없는 산에 올라갔답니다.

그 때 고사리같은 손으로 심었던 나무들이 지금은 뭐를 하고 지낼까 궁금합니다.

 

나무에는 나이테가 있다고 합니다.

그 나이테를 찬찬히 드려다 보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큰 비바람, 천둥번개, 산불 등의 흔적이 나이테에 묻혀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내가 심었던 나무가 그동안 얼마나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는지, 계절을 따라 꽃은 피우고 또 열매는 잘 맺었는지, 진한 향은 주변 나무 친구들과 지나가는 동물들에게 잘 풍기어 주었는지, 때때론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그늘이 되어주었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30년 전에 심은 사순절의 기도나무가 온갖 눈비를 다 맞아가며 오늘에 이르러 수많은 기도의 열매도 거두었고, 지나는 이들에게 향이 되었으며, 지친 자들의 그늘도 되어주었습니다.

 

“나무야 뭐하니?”

오늘 묘목을 심는 자만이 훗날 부를 수 있는 노래이듯이

“사순절 나무야 뭐하니?”

오늘 기도의 씨앗을 심는 자만이 훗날 그 사순절 기도나무에서 열매와 향과 그늘을 누릴 수 있답니다.


육상에는 장애물 경주가 있습니다.

그 중 여자는 100m, 남자는 110m 경주가 있습니다.

모두 10개의 허들을 넘어야 합니다.

허들(hurdle)의 뜻은 장애물, 어려움입니다.

첫 번째 장애물부터 하나하나 잘 뛰어 넘어야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2017년도 여지없이 장애물 경주와 같지 않습니까?

이제 2월이 되었는데 누구나 첫 장애물을 만날 즈음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장애물 앞에서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단 하나의 방법 밖에 없는 것 아시지요?

그것은 무력하게 주저앉는 것도 아니고, 비겁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첫 번째 장애물을 힘차게 뛰어 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은 첫 번째 장애물“여리고”를 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리고”는 낙공불락의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첫 장애물 앞에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2017년, 내 앞에 첫 번째 장애물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제게도 첫 번째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의 이름도 잘 압니다.

“제 자신”입니다.

두렵다고 하는 제 자신, 안주하려는 제 자신이 첫 장애물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그 첫 장애물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cheer up!” ”힘내라!”

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응원소리....


오늘은 우리 교회 설립 43주년 기념주일입니다.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고 또 흘렀던 43년입니다.

척박한 이민의 땅에서 언어의 장벽, 문화의 충격, 불안한 미래 가운데 살아가던 우리들을 하나님은 교회로 부르시고 모아주셨습니다.

 

사실, 모든 이민 교회는 이민자들에게 고향과도 같고 피난처와도 같습니다.

이민자들의 정체성과 전통을 지켜나가는 데도 이민교회의 역할은 지대합니다.

우리 교회도 지난 43년 동안 이 지역의 이민교회로서 수많은 한인 이민자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서로 위로하며 지내왔습니다.

 

같은 한인이지만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어느 덧 우리의 다음 세대는 영어가 더 익숙해져 소통이 점점 쉽지 않음에도 우리가 43년을 잘 지내오게 된 것은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존을 넘어 포용으로 사는 삶.

공존(共存)은 대화와 이해 없이 그냥 같이 존재하는 것에 머무를 수 있지만 포용(包容)은 서로에 대한 배려나 품음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제 43년 된 우리 교회 안에는 한국어권, 영어권 한인 이민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와 나라의 이민자들이 각각 또는 함께 예배드리고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43년의 삶의 방식이 더 적극적으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존을 넘어 포용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삶의 방식으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실 교우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더 멋질 포용으로 빚어질 44주년이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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