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내일은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입니다.
남북전쟁 때 숨진 군인들을 추모하는 날로 출발하여 지금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군인들을 기억하는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살아간다면 그들의 희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5년 전 메모리얼 데이 때에 이런 기억도 있습니다.

그날 전교인 한마음 축제는 비가 와서 교회 체육관에서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개회 예배 설교는 5분이었는데 20분이나 걸렸습니다.
한국어 설교 한마디를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로 이어서 통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좁은 공간에서 가득 모여 4개의 언어로 통역되는 예배에 감격했던 그날입니다.

바로 그 전날 있었던 러시아권 설립 예배의 벅찬 감동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날들을 살아가고 있고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중에 또렷이 기억하는 날들과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억할 뿐 아니라 무엇인가로 기억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긴 소년으로 기억합니다.
한나는 기도하는 여인으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선교사로,

그리고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아 소금 기둥 된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훗날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기억될까?”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러시아 말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Живи так, чтобы тебя запомнили.”

“남에게 기억되고 싶은 대로 살아라”


“어느 정도인지는 직접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심장혈관 검사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의사도 잘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저도 물론 알 턱이 없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한 시간여의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혈관이 99%가 막혀있고 1%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말의 심각성은 시술 후 의사가 보여 준 모니터를 직접 비교하고 실감하였습니다.

 

의사 말대로 동맥혈관 99%가 꽉 막혀있었던 시술 전의 끔찍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심장과 연관된 세 동맥 중 가장 중요한 혈관이라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스탠스를 넣어 혈관의 피가 힘 있게 흐르는 시술 후의 모습도

모니터를 통해 선명히 보았습니다. 사뭇 감격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었던 두 혈관 중 다른 하나는 회복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혈관을 회복했기에 생활과 일하는 데는 이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셋 중 하나의 혈관으로만 살아오셨다고 놀라워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의사가 밤새 어려움이 없었는지 저의 상태를 살피러 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본 환자 중에 가장 심각했습니다. 동맥 하나는 망가지고
중요한 하나는 1%만 남아 있었는데 벌써 어느 날 갑자기 숨을 멈췄을 것입니다.

제가 밤새 이런 환자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목사님이 믿으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1%의 기적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믿음이 없던 의사가 확신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저의 심장이 이런 상태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얼마 전 어깨가 더디게 회복되어 수영을 하다가 가슴이 아픈 것을 느꼈고
병원에 가서 심장에 문제가 있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년간 부족한 목사를 향한 교우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기도를 들으시고 그 1%의 기적을 허락하셨음을 깨닫고 병원에서 퇴원하였습니다.

 

1%의 기적은 서로 기도하는 우리 교우들에게도 있었고 또 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나님에게 1%는 사용하시기에 넉넉한 숫자이실 것입니다.


일 중심의 사람이 있고 관계 중심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 중심의 사람은 잠시의 쉼도 사치라며 일을 그 인생의 전부처럼 살아갑니다.

관계 중심의 사람은“일”보다“우리”라는 단어에 더 큰 가치를 둡니다.

 

마리아 앤더슨이라는 유명한 흑인 가수는“나”라는 단어보다“우리”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혼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에

나 혼자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작곡을 해주어야 하고
누군가 반주를 해주어야 하고 누군가 도와주어야 내가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의 무대는 자기의 잘남을 드러내는 무대가 아니라 함께 따듯함을 나누는

무대였습니다. 그가 떠난지 오래이지만 우리라는 따스함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어떤 관계입니까? 누군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우리는 아주 작은 몸짓 하나라도 느낄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 하나로 모두 알 수 있는 우리는~~

 

구구절절 아름다운“우리”입니다.

 

오늘 오후 우리는 함께 모여 가정의 달 연합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서로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영원합니다.

그러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부릅니다.


제 목양실에 본당으로부터 찬송이 들려오고 또 들려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경배와 찬양팀의 찬양 연습 소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님은 들려주셨습니다.
일년에도 스무 번 가까이 읽으시던 성경.
목회자가 길을 가기로 결단한
저에게 귀하고 귀한 성경말씀을 늘 들려주셨습니다.

 

저의 서재에는 수천 권의 책이 꽂혀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사랑하는 책은 단 한 권뿐입니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성경이 나의 가장 사랑하는 책이 되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을 펼치니 하늘 길도 펼쳐집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을 읽으니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을 연구하니 설교할 수 있게 됩니다.

 

귀한 성경을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신 어머니가 많이 그리운 날입니다.


4월의 자락에서 서성이던 5월이,
라일락 향기를 짙게 흩트리며 드디어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른다면
조금은 우쭐거리며 납시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요? 어린이들의 노랫소리이군요.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그동안 많이 눌렸었는지 5일은 우리들 세상이라고 목청을 높여 노래합니다.

연이어 들리는 가슴이 먹먹한 5월의 노래가 있네요.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아

 

5월의 노래는 끝나지 않아요. 존경과 감사가 배인 눈물의 노래로 이어집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찬란한 5월인데 5월의 노래들은 왜 이렇게 마음이 아리지요.

저는 그래도 부를 거예요.
어린이날에는 푸르렀던 지난 어린 시절과 그 때의 친구들을 회상하며,

어머니날에는 낳아 주신 어머니 길러 주신 어머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스승의 날에는 사랑으로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을 감사히 생각하며,

5월의 노래들을 목이 메어도 부를 거예요.


사람마다 약한 점이 있습니다.
약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약함을 수치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약함이 수치라면 저는 수치 덩어리 일 것입니다.

약함은 수치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함은 기회일까요?

맞습니다. 약함이 기회가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연주자였던 토스카니니는 글씨를 잘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보를 다 외워서 연주하였습니다.
어느 연주회 때에 지휘자가 무대에 설 수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악보를 다 외우고 있었던 토스카니니가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의 지휘에는 대찬사가 쏟아졌고 명지휘자로 발돋움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약함은 그것을 잘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회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약함은 또 무엇일까요?

바울사도가 말했습니다.
약함은 은혜라고.
약함이 아니었던들 기고만장(
氣高萬丈) 했을 인생들.
약함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고, 사람 앞에 겸손하게 되는 은혜.

약함은 은혜임이 틀림없습니다.

 

약함은 사명이기도 합니다.

나의 약함은 다른 약한 자들을 위한 사명을 일깨워줍니다.
나의 약함을 예수님이 감당하셨듯이 다른 자의 약점을 감당하라는....


한인 미국 이민자 누구에게나 눈물이 마르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 중의 하나가 영화“미나리”에서 펼쳐집니다.
서로의 가치를 내세우는 부부와 한국에서 오신 할머니가 불편한 손주.
뭔가 서로 잘 품어지지 않은 미국 교회와 한인 가정.

 

이민자들은 같은 가족 안에서도

나름대로 중요시 여기는 다른 가치가 있고, 서로가 몰라주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자신의 상처만을 아프다고 내세우면
부부 사이와 세대 간의 골짜기는 더 깊어진다는 것을“미나리”에서 보았습니다.

 

부부는 힘든 삶에서 서로를 구원해 주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힘든 서로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할머니는 딸과 사위, 그리고 아픈 손주와 손녀를 돕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민 땅에서 중요하다는 성공을 잃고 가장 중요한 가족을 함께 건져냅니다.

 

할머니가 한국에서 가져온 값싼 미나리 씨앗이 미국의 어느 강가에 심겨져

풍성히 자라 다음 세대들의 양식으로 전해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그러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우리 이민자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가슴에 맺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깊은 오열을

서로 끌어안고 눈이 짓무르도록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서로 닦아주면서,
질기게 함께 걸어가며 이 땅을 풍성케 하는 이민자 이야기는 여기서도 계속됩니다.

 

미나리는 어느 땅에서도 잡초보다 질기고 무엇보다 더 잘 자란다고 합니다.

미나리 이민자,

그대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모든 인생에는 쉼표와 마침표가 있습니다.
지난 9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공이 100세를

두 달 앞두고 인생의 마침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왕의 남편으로서 무수한 일들이 있었을 것이고
왕실의 자녀 후손들에게서 줄지었던 여러 일들
그리고 개인의 건강에도 부침(
浮沈)이 있어
인생길에서 잠시 서성거렸던 쉼표가 여러 차례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침표는 이제부터 말할 것입니다.
그가 마침표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장영춘 목사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꼭 일 년이 되었습니다.

일 년 전, 목사님의 짙은 아픔이 또 하나의 쉼표이기를 바랐으나

우리 모두의 아픔이 된 마침표였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목사님의 마침표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마침표 전의 삶들을 생각나게 하였고

그 의미를 우리에게 여러 차례 들려주었습니다.
목사님의 마침표는 복음의 이야기로 가득 채운 마침표였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는 쉼표가 이어지고 있지만

언젠간 마침표를 남기고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침표는 그 날부터 그 사람의 삶을 정확히 말하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삶이 그 마침표에 담길 정확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쉼표는 마침표에 담을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는 숨고르기 시간입니다.

쉼표는 아직 마침표가 아니며, 마침표는 결코 쉼표가 될 수 없답니다. 


그 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친구끼리 콧노래 부르면 놀러가는 길인가요? 아닙니다.

그들의 모습과 그 길을 이렇게 묘사한 분이 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이 세상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엠마오의 길은 일탈(逸脫)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그들은 그 날 새벽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하고
절망과 공포에 잠겨 끝없는 슬픔의 내리막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내리막 길에서 오르막 길로 돌이킨 것입니다.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낙심이 환희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 날 새벽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 길로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내리막은 멈추었습니다.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내리막 인생이 오르막 인생으로 바뀐답니다.


주님 가신 길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끝까지 따르겠다는 제자들은 줄행랑
귓가에 들려오는 군사들의 조롱소리, 사람들의 아우성

 

주님 가신 길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너의 죄, 나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

애잔하다 짓눌린 어깨, 애처롭다 비틀린 걸음

 

주님 가신 길

얼마나 아프셨을까?

손과 발에는 못, 허리에는 창,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

온 몸에 붉은 피 뚝뚝...

 

나의 가는 길

주님 가신 길 따라가고 있음이 맞는가?

아직도 봄바람은 차가운데 주님은 어찌하고

나는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시안 혐오 멈춰라”
요즘 여러 매체에서 볼 수 있는 문구입니다.
지난 16일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연쇄 총기 사건이 있었고
8명의 사망자 중 한국인을 포함 6명이 아시안인 이었습니다.

용의자로 체로된 청년이 요즈음 확신일로에 있는 인종혐오의 사건을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이민자의 땅입니다.

본토 인디안이 아니라면 이민자가 아닌 종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백인들의 기득권은 원래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수많은 물줄기가 흘러 들어와 하나의 바다를 이루듯이

어쨌거나 우리는 여러 군데서 모였으나 하나의 바다를 이루어

미합중국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갑니다.

 

멈추어야 합니다.

미움과 증오라는 삶의 방식을 멈추어야 합니다.

미국의 구성원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를

미워할 또는 증오할 이유도 권리도 없습니다.

 

멈추어야 할 것은 인종차별만이 아닙니다.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로 끌려가던 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해드렸던 모든 삶을 이제는 멈추어야 합니다.
멈춘 그 자리는 새로운 시작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멈춰라”에 복음의 진수와 미국의 가치가 담겨 있답니다.


“빠”를“바”로 살짝 바꾸었을 뿐인데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제가 살던 동네 태권도 도장에 이런 간판이 달려있었습니다.

“빠르게 보다는 바르게 가르치겠습니다”
얼마나 가슴에 와 닿은 글귀입니까?

 

“빨리 빨리”는 한국의 생활 문화라고 외국인들이 빗대어 말하곤 합니다.

한국 문화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은근과 끈기”가 원래의 문화였고
속성(
速成)보다 숙성(熟成)이 한국적인 것이었습니다.

 

“고추장”의 숙성을 “케첩”의 속성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김치”의 깊이를 “단무지”의 얕음이 어찌 견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속성이 다 그르고 숙성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속성은 바름을 간과(看過)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는 화요일 16일, 우리 교회 세분의 전도사님이 목사 안수 받으실 예정입니다.

요즈음 태평양 안수식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비행기 타기 전에는 평신도였는데 미국에는 목사님으로 내린답니다.
세 분은“태평양”이 아니라“뉴욕노회”에서 오래 시간을 거쳐 안수를 받습니다.

축하드리며 세분의 숙성이 펼칠 농() 깊은 사역을 기대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던 컬럼버스의 일기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항해하였다.”

의미심장합니다. 바다에 어려움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 바다에는 순풍도 역풍도 광풍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항해하였습니다.

그는 왜 그랬을까요?

 

만일 다니엘의 일기장이 있었다면 어떤 글귀가 많이 보였을까요.

“오늘도 나는 기도하였다.”

아마 위에 문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다니엘의 삶에 대해 이렇게 일러주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다니엘 앞의 상황은 시시각각 무섭게 변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매일 전에 하던 대로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왜 그랬을까요?

 

사순절 둘째 주를 보냈습니다.

퀸즈장로교회 역사는 그 나날을 이렇게 기록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기도했다.”

아직도 팬데믹의 바람이 세차고
여러 어려움이 있었는데 날마다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사순절 셋째 주에도 여전히 나올 사람들은

아마도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앞으로”는

퀸즈장로교회 역사관의 이름입니다.
우리 교회 47년의 역사는

위에서-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총의 역사입니다. 

앞으로-앞으로만 전진했던 역사요 또 미래를 향해 나아갈 역사입니다.

 

아직은 그 규모가 작지만....

첫걸음에는 장영춘 목사님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훗날 적당한 공간을 찾아
다양한 우리 교회 역사 이야기를 더 담아낼 것입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위에서부터의 은총임을 잊지 않는 이야기,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가면서 또 만들 이야기가 담길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 설립 47주년 기념 주일.

하나님께 감사 찬송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47년, 그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를 섬겨 오시고
팬데믹 상황에서도 기둥같이 버텨주신 교우들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교회를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존경하는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말씀과 기도와 눈물로 교회를 이끄셨던 사랑하는 목사님이 많이 그리운

47주년 기념 주일 아침입니다.


기도는 교제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하나님과 친하시군요.

기도는 향기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매우 향기로워요.

기도는 간구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많은 것을 얻겠어요.

 

기도는 맡김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이제 편하실 거여요.

기도는 습관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예수님의 습관과 같네요.

기도는 능력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는 고백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모두 용서받을 것입니다.

기도는 묵상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더 성숙되시겠네요.

기도는 옮김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산을 옮기겠군요.

 

하나님이 받으실 거여요.

사순절에 기도하는 그대를.

예수님이 기쁘실 거여요.

사순절에 기도하는 그대가.

성령님이 도우실 거여요.

사순절에 기도하는 그대를.


키질 하고 또 키질 하면 날라 가는 것이 있고 남는 것이 있습니다.
쭉정이는 날라 가고 알곡은 남습니다. 남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키질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우리를 키질했는데 탐욕, 미움, 불평 등이 남아있다면 너무 부끄러울 것입니다.

 

다들 그러시겠지만 저도 저를 키질하면 무엇이 남을지 궁금합니다.

당장은 그렇지 않더라도 꼭 남았으면 하는 것들이 있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망·애(··)입니다.
다른 것은 다 날라 가도 믿음, 소망, 사랑이 남아있다면

내 삶은 너무 멋질 것 같습니다.

 

믿음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암담한 현실에서 그 너머 희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사랑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고난은 분명히 우리를 키질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키질 속에 이 셋을 남길 수 있다면 최고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제게는 고난의 키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키질이 무엇을 남길 것인지 마음을 조아리며 쳐다보고 있습니다.

신·망·애(··)는 아닐 것 같아....
마음은 부끄러움에 이미 붉어졌고, 그 마음은 벌써 콩닥콩닥 뛰고 있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가 헤롯왕에 의해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두 군인들 사이에서 두 쇠사슬로 묶여있었습니다.
그 감옥 밖에는 파수꾼이 또 따로 베드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죽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교회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밤에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냈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 늘 놀라운 기적이 있었습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기도할 때 기적을 허락하셨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닫힌 문이 열리기도 하고 열린 문이 닫히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과연 기도를 통해 하늘 문을 열고 닫는 교회일까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려울 때 불편과 염려를 드려 죄송합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 금식도 하시고 기도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여러 날 제 몸 곳곳을 짓눌렸던

고통의 착고(着錮)들이 하나씩 풀리고 있습니다.

 

기도로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우리 교회 때문에

저는 곧 다시 일어나 교회로 달려갈 것이고

우리는 또 위대한 행진을 새롭게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새로운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성경통독 입니다.
예전에 성경통독의 시간들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비드 시간에 Zoom으로 하는 성경통독은 처음입니다.

 

성경통독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기대되는 시간입니다.

덤덤히 지나는 시간도 있지만 낭독자나 통독자가

어느 말씀에 깨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깨달음과 놀라운 비전을 찾기도 하고,

말씀 속에 진정한 나를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한 번 시작한 것을 중간에 슬쩍 그만둔 적이 없습니다.

힘들어도 그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기왕 할 때 항상 탁월함을 추구했습니다.
시간을 잘 조정하시어 올해의 성경통독에 완주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완주의 축복과는 견줄 수 없는 놀라운 축복들이 쏟아질 것입니다.

 

자, 우리 모두 성경통독 앞으로!


969년 발표되어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애창되는
프랭크 시나트라의“My Way”는 이렇게 그 가사가 전개됩니다.

 

이제 끝이 가까워져서/ 내 삶의 마지막 막이 내려가려 하네
내 친구여, 확실히 말해둘 게 있다네/ 잘 알고 있는 나의 이야기들 말일세

난 충만한 인생을 살았고/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가보았다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는 것이네 (I did it my way).

 

사람마다 my way 곧 나의 길, 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 my way가 멋진 그의 소신일 수도 있고, 안쓰러운 그의 고집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또 다른“My Way”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천년 전. 사도 바울이 불렀던 마이 웨이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바울의 my way는 소신도 아니고 고집도 아닙니다. 소명의 my way입니다.

그의“나의 달려 갈 길”은 결코 자신을 위한 길이 아닌 복음을 위한 길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 다른 이를 살리겠다는 길입니다.

 

오늘도 걸을 my way. 소신의 my way 입니까, 고집의 my way 입니까, 아니면 소명의 my way 입니까?


새해 들어서 벌써 세 번째 주일입니다.
지금 무엇이 크게 보입니까?
새해의 꿈입니까, 지난해의 후회입니까?
나이에 상관없이 꿈이 크면 청년의 삶을 사는 것이요

후회가 꿈을 대신하면 늙음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갈렙은 85세 때에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꿈을 크게 꾸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부자 관원은 청년이었음에도

앞날의 꿈을 접고 뒤로 내뺐습니다.

 

누군들 지난날에 아쉬움이 왜 없겠습니까?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일을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이런 아쉬움과 후회를 다 내려놓고 2021년의 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꿈을 꾸어 보아요.

요셉도 설레는 큰 꿈이 있었기에
현실의 어떤 고통도 넉넉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사실, 큰 꿈이 없다면
큰 내일도 없는 것이랍니다.
우리 같이 곰곰이 생각해 보아요.
지금 내겐 꿈이 큰지, 후회가 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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