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새해 특별새벽기도회 마지막 날, 기도회가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거리에는 눈보라가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휘몰아쳤습니다.

그 날 저는 그 눈보라가 한창 심할 때 밖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앞이 잘 안 보일 정도이고, 누구도 앞서 걷지 않은 눈길을 걸으면서 문득 언젠가 읽었던 책이 생각났습니다.

높은 산을 오를 때 리더들의 역할과 책임을 기록하여 비즈니스 ceo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 한,“극한의 리더십”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교회 와서 책을 다시 보니 책 제목 앞에 작게 쓰여 있는 글씨가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두려움 없는 극한의 리더십

 

어떤 상황에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몇 가지 유익한 교훈을 일러줍니다.

“죽음을 수용하라” “나만 잘되려는 이기심을 버려라” “현실에 유연하라”

“협력하라-자신만 높아지려는 고독한 영웅주의를 버려라”

“용기-진실에 눈을 감지 말라” “끈기-현재에 안주하려는 비겁함을 버려라”...

 

리더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어떤 상황에도 두려움 없는 삶의 비결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46:1-3)

 

8분이면 충분했습니다.

80년의 난제를 해결하는데 말입니다.

무슨 일이냐고요? 들어보세요.

 

지난 화요일, 우리 교회 나오시는 분이라는 말만 듣고 환자분을 찾아갔습니다.

가서 뵈니 등록은 안 하셨지만 한 동안 예배에 참석하셨던 성도였습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엉치 옆뼈를 우두득 부숴 놓았답니다.

괜히 문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쫓아 들어갔다고 후회도 하고, 너무 아프다고 호소도 하시는 그 분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다음 심방 장소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쉽게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 가운데 놀라운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기 나이는 80세가 다 되어 가고 모태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하나님은 믿어지는데 예수님은 안 믿어진다고 하였습니다.

80년을 교회 다녔는데 예수님이 안 믿어진다는 그 말이 안 믿길 정도였습니다.

위로의 말씀 대신 백지 위에“다리”그림을 그려가면서 예수님을 말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이 죄 때문에 떨어져 있는 그림을 그리고, 그다음에 하나님과 떨어진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다리로서 돈, 지위, 지식, 인격 등은 불충분하고, 하나님이 보내 주신 유일한 천국 가는 다리(길)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말하는데 8분 정도 걸렸습니다.

통증으로 힘겹게 예수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분이 깜짝 놀랄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다치게 하신 이유이군요.”

80년의 어둠이 걷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말한 8분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말하면 어디서나 기적은 일어납니다.


정말 뉴욕에는 봄과 가을이 사라진듯 합니다.

며칠전만 해도 에어컨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히터를 틀것을 생각하게 될 정도로 날씨가 제법 차가와졌습니다.

하루의 기온차도 크니 감기 걸리기에 제격인 날씨인데, 우리 교우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덧 행복에의 초대가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성도, 모든 부서가 한 마음이 되어 이 거룩한 행사에 진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동안 몇차례의 노방 전도가 있었는데 오늘 오후에는 전체 부서, 전체 회중이 함께하는 전도대회가 main street 도서관 앞에서 있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전도가 오늘도 펼쳐집니다.

 

교회가 채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 입니다.

교회가 채워지려면 먼저 채워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기도가 그 교회당에 차야합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일곱번 채워졌을 때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온 땅을 적시었듯이 우리의 기도가 먼저 차야 교회에 사람들도 차게 됩니다.

 

내일부터 가을 새벽 부흥회가 열립니다.

기도를 채웁시다.

교회당 안에 사람이 가득 차도록.

기도를 채웁시다.

우리 가정을 향한 하늘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를 채웁시다.

성큼 다가온 영적인 겨울을 넉넉히 이기도록.

그렇습니다.

차야 찹니다.


저에게는 두 손녀가 있습니다.

큰 손녀 이름은 하늘이고 둘째 손녀 이름은 마음이입니다.

그 손녀들의 이름을 제가 지어주었습니다.

제가 지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릴 리 없습니다.

멀리 살고 있습니다만 영상 통화할 때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사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제가 더 기쁩니다.

 

우리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부르십니다.

오늘 행복에의 초대를 맞아 그동안 오래 나오신 분, 오랜만에 나오신 분, 그리고 처음 나오신 분.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이름을 알고 부르십니다.

 

내 이름 아시는지 궁금하면 물어보세요.

“저~~ 내 이름 아시나요?”

“사랑하는 내 자녀야. 알다마다.

나는 저 하늘의 수많은 별의 이름도 다 안단다.

내가 너를 태어나기 전에도 알았고, 내가 너를 지명하였고, 심지어 내 손바닥에 네 이름 새겨 놓았단다.”(시147:4,사43:1,49:16, 렘1:5)

 

내 이름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도, 내 이름을 알지만 불러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하나님 아버지는 내 이름을 아시고 늘 불러주십니다.

내 이름을 부르시며 스스로 감격해 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변함없으신 나의 아빠 아버지이십니다.


부엌살림 하다보면 골칫거리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 중에 하나가 찬밥이 남아도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찬밥을 어떻게 하시나요?

아낌없이 버리시거나 속절없이 냉장고에 놔두시는 분도 있지만, 그 찬밥에 주물주물 손대어 화려한 별미(別味)로 바꾸시는 분도 있습니다.

 

지난 4일,

la 다저스 구장에서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이 있었습니다.

la 다저스 소속 우리나라 류현진 선수가 1차전 선발로 나와 7회 동안 한 점도 주지 않는 빼어난 피칭으로 승리투수가 되었습니다.

작년에도 la 다저스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었습니다.

그 때 류현진 선수는 정규 멤버가 되지 못하고 구경만 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작년에 그는 찬밥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포스트시즌 첫 게임에 팀의 제 1선발로 나서 승리한 것입니다.

찬밥의 화려한 변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도 집안에서 말째로서 찬밥신세였습니다.

다윗은 찬밥신세라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찬밥이 온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는 화려한 변신이 있었습니다.

 

찬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찬밥도 여태 맛 못 보았던 뜨신 밥으로 화려하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 집안의 찬밥, 그 누군가 있지요?

버리지 마세요. 놔두지 마세요.

찬밥이 화려하게 변신하여 별미가 될 수 있는데, 왜 찬밥을 언제나 차갑게만 대하시나요?


저는 밥을 빨리 먹습니다. 밥만 빨리 먹는 것만은 아닙니다.

빨리 걷고 빨리 말하고.... 모든게 빠릅니다.

 

저 스스로 많이 질문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왜 모든 것을 빠르게 하려는지 말입니다.

모든 빠름에는 쉼표의 미학이 없어 볼품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빠름, 특별히 빨리 먹는 모습이 보여주는 수많은 볼품 없음 가운데도 두 가지 고상한(?) 의미가 있음을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면서 드디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래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미래로 빨리 가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미래가 항상 궁금합니다.

“이 시간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런 물음이 제 안에 깊숙이 자리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밥을 먹고 주님을 위해 죽고, 교인들이 주는 밥을 먹고 교인들을 위해 죽으라는 선배 목사님의 가르침도 제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미래로 빨리 가려고 빨리 먹는다는 것은 어이없는 논리일 수 있지만, 혹시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동안은 별로 그렇지 않았더라도 주님이 다시 오실 미래의 촉박한 시간 앞에, 빨리 밥을 먹고 주님과 교인을 위해 일할 시간을 조금 더 확보하는 것이 가능할지 말입니다.


죽기를 연구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삶이 너무 힘들었을 때 죽기를 살짝 생각해 본 적이 있으셨을지는 몰라도 그 누구도 본격적으로 죽기를 연구해 본 적은 없으실 것입니다.

 

며칠 전 찾아가 만난 분이 몸이 아픈 것을 비관하여서 한 달 이상을 본격적으로 죽기를 연구하였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담담하고 상세하게 일러 주셨는데, 병실에서 뛰어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머리를 벽에 세게 부딪히는 것 등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몸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어~어~ 이제는 살아야 하나?”를 생각하셨답니다.

 

아직 그분은 몸의 한 부분이 아프십니다.

그 아픈 곳을 부여잡고 여전히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날 저는 말씀을 전하면서 그분의 안 아픈 곳을 하나하나 집어가면서 물었습니다.

“여기 아프세요?” “아뇨.”

“여기는 어떠세요?” “괜찮아요.”

“여기는요?” “안 아픈데요.“

“안 아프신 곳이 훨씬 많으시군요?” “....그렇네요.”

 

그분은 이제 죽기를 연구하길 포기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대신 잘 살기를 각오하였음을 보았습니다.

“빨리 나아서 교회 갈게요.”

교회와 담쌓고 살던 그분이, 그의 병실을 나서는 우리에게 아픈 곳을 잡고 있던 그 손으로 사랑의 표시를 몇 차례 하였습니다.

그분의 병실 창문 밖에는 올해의 첫눈이 하얗게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없다 song을 아십니까?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 20:6下)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처한 환경을 둘러보며 이곳에 다섯 가지나 없다고 외칩니다.

 

영국의 조지 허버트라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의 마음에 없는 한 가지를 이렇게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한 가지만 더 주시옵소서

감사하는 마음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면 “환경”에 있는 “그 어떤 것들”이 아니라 “마음”에 꼭 있어야 할 “감사”가 아닐까요?


“벌컥 벌컥”제가 물을 마실 때 나는 소리입니다.

저는 평생 이렇게 물을 마시면서 감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변에 얼마든지 있는 물을 가져다가 벌컥 벌컥 마시는 것이 제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물이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물을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감사할 일인지 최근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여름, 그동안 말로만 듣던 아프리카의 열악한 물 사정을 실감 나게 깨닫고 나서 전교인 수련회에서 전 성도들이 아프리카에 우물 파주기 특별 헌금을 드렸고, 그 헌금으로 이미 두 개의 우물을 팠으며 또 한 개의 우물 파기와 큰 물탱크를 설치하는 일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 모금의 물도 없던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답니다.

 

지난 목요일 밤, 아내와 함께 보스턴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암 치료 중인 남위홍 집사님과 그를 간호하고 있던 남편 석뢰 교우님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치료하는 과정 중에 식도가 많이 상하게 된 남 집사님은 사람들이 물 한 모금 먹는 것이 너무 부럽다며 그 물 한 모금에 감사하지 못했던 지난 삶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나직이 말했습니다.

 

“한 모금 물”도 없는 곳....“물 한 모금”의 감사를 잃은 자....

지난 주일 있었던 행복에의 초대에 km, em, cm, rm에 나온 90명 가까운 새 신자들에게는 한 모금의 물이 아닌 풍성한 성령의 생수로 다시는 갈함이 없고, 그동안 물 한 모금의 감사를 잃었던 저와 또 저와 비슷한(?) 자들에겐 뜨거운 감사가 회복되는 감사의 달 11월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그 옛날, 겨울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분주하곤 했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 때문이죠.

겨울나기 준비의 최고봉은 역시 김장김치를 담그는 것이었습니다.

식구 수에 따라 100포기 200포기, 또 그 이상을 담그게 됩니다.

잘 담근 김장 김치는 온 겨울을 든든하고 행복하게 해주었지요.

밥에는 물론, 칼국수, 수제비 같은 밀가루 음식에도 제격이었답니다.

 

김장김치를 만드는 전(全) 과정에 참여해 본 적은 없지만 오가며 김장김치 만드는 것을 보면서 잘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배추 절임과 김장 속 버무림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친 김장김치들이 장독 속에 들어가고 땅에 파묻혔다가 적절한 때에 꺼내져 한 포기씩 또는 반 포기씩 상위에 얼굴을 내밀게 됩니다.

 

겨울나기 김장김치에만 아니라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절임과 버무림입니다.

절임이란 배추로 더 이상 뻣뻣하지 않고 부들부들하게 만듭니다.

우리 각자가 배추 절임처럼 겸손해져야 합니다.

버무림이란 여러 김치 속 재료들을 함께 섞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가 함께 너도나도 없이 어울려져야 합니다.

 

절임과 버무림이 잘 되면 인생 겨울나기 준비는 ok입니다.

이렇게 한 번 외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절여지고 우리는 버무려진다.


지금은 21일, 금요일 이른 새벽입니다.

창밖에 비를 동반한 바람 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요란합니다.

저는 방 안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한 겨울에 불어대는 저 비바람을 밖에서 직접 맞이한다면 누구라도 많이 서럽고 두렵고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일정한 범위 밖에 있는 자들을 아웃사이더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이름이나 처한 위치는 무언가 소외되고 어딘가 힘겨움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사는 어느 곳이든 아웃사이더는 존재합니다.

이천 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때 베들레헴 지역 밖에서 한 밤을 보내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에 그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인류 최대의 소식이 들려졌습니다.

한 밤에, 밖에 있던 그들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천사로부터 직접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구주를 급히 찾아뵙고 돌아가는 길에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들이 성탄 새벽송의 효시(曉示)였을 것입니다.

나는 아웃사이더라고 주눅 들고 슬퍼할 일만이 아닙니다.

세상 나라의 아웃사이더가 하늘나라의 인사이더가 되는 것이 성탄이기 때문입니다.

 

컬럼은 다 써가는 데 비바람은 유리 창밖으로 더 거세집니다.

문득 박인환 시인의“세월이 가면”이 생각나는군요.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파가니니를 아십니까? 니콜로 파가니니.

10대 초 이전의 연주기법을 다 마스터하고도 계속 하루 10시간 이상 격심한 연습으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17세에 큰 명성과 부를 이루었던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그런 일찌감치의 성공이 오히려 파국에 이르게 했다가 다시 일어난 사람.

 

그에게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의 연주회 때 바이올린 줄이 하나씩 끊어지면서 마지막 한 줄이 남았지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 남은 줄 하나로 화려한 연주를 마쳤다는 이야기.

 

11월 달력을 뜯어내셨다면 이제 달랑 한 장만 남아 있는 달력.

그 한 장 남은 달력을 바라보며 “올해도 이렇게 아쉽게 끝나네....”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달력 한 장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 올해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달력 한 장으로 멋진 올해의 마무리를 하십시오.

그렇다면 보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2018년 피날레를.

 

가나 혼인 잔치가 큰 어려움에 빠져 낭패의 잔치로 막을 내릴뻔 했으나 거기 계신 한 분 예수님 때문에 happy ending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잊지 마십시오.

한 줄 바이올린 줄도 소망이 되고, 한 장 달력도 소망이 될 수 있다면, 한 분 주님은 가장 확실한 소망이심을.


최근에 언제 날아가는 새를 보셨나요?

저는 지난 목요일 청년대학부와 함께 겨울수련회 가는 길에서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새떼를 보았습니다.

그들에겐 방향과 속도에 있어서 모두가 함께하는 감탄할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또 중요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어느 새도 뒤돌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인이 이미 갈파한 대로 새는 날아가면서 결코 뒤돌아 보지 않습니다.

사도바울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3:13)

롯의 아내가 뒤돌아보다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한 해가 다 저물어 갑니다. 마지막 시간과 함께 아쉬웠던 것도, 잘못된 것도, 꽤 괜찮았던 것도 다시 오지 못할 과거로 점점 사라져 갑니다.

앞으로 날아가는 새처럼 뒤돌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사라지는 것들 다시 보겠다고 뒤돌아 보다가 우리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묶여있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또 비바람이 몰려올 것입니다.

때때로 먹구름이 펼쳐지기도 할 것입니다.

앞으로 만날 일들이 저만큼 오고 있는데 뒤만 돌아보고 땅을 칠 겨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희망의 날개를 활짝 펴서 높이 치솟아 앞으로 날아 갑시다.

우리 앞의 어떤 먹구름이나 비바람도 점 같이 보이다가 점점 지나가도록.

 

키 153m, 몸무게 48kg.

40대까지만 해도 몸이 허약해 골골했던 출판 편집자.

무언가 제대로 할 수 없던 자신의 바닥난 체력이 부끄러워 시작한 운동을 매일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하다가 지금은 50살이 넘어 철인 3종(옥외수영, 사이클, 마라톤) 경기를 취미 삼게 된 이영미 씨의 이야기를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강연 프로그램)에서 들었습니다.

 

그의 강연 가운데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운동하라는 말이 너무 와닿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체력 약한 그 누구도 몸짱으로 만들어 주는 보석 같은 세 단어들입니다.

매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운동한다면 모두의 몸 안에 깊이 잠자고 있던 건강이 조금씩 깨어나 마침내 놀라운 강인함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언젠가 제주도에 있는 세계적인 분재정원(盆栽庭園)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수십 년 전 돌로 가득했던 척박한 땅이 아름다운 나무들로 가득한 정원으로 바뀌는 과정에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이였음을 기억합니다.

 

지금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영적 성장이든,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직장 생활이든, 가정을 돌보든, 아니면 건강을 회복하려거든 매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해보세요.

그 어떤 분야이든 극심한 스트레스 없이 머잖아 견고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저부터 매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이민 땅에서는 대부분 잊고 지내는 설날이 이번 주(16일)에 있습니다.

하얀 겨울 눈꽃의 고향, 자식들이 찾아올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던 부모님을 향해 두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가 교통체증으로 다섯 시간, 여섯 시간 걸려도 아버님 어머님을 뵐 설레는 마음으로 또다시 가곤 하던 설날.

 

한 손에 부모님께 드릴 새로 나온 내의를 곱게 들고 갖다가 올 때는 양손이 모자랄 정도로 부모님이 싸주신 보따리를 바리바리 들고 오던 설날이 생각나십니까?

 

이제는 그 부모님이 이 세상에 안 계시기도 하고 계셔도 갈 수 없는 이민 땅의 우리들.

우리 하나 잘 되는 소원 가지시고 삶의 현장에서 온갖 서러움과 눈물을 삭이시고 희생하신 부모님 생각이 물밀 듯 떠오릅니다.

 

부모님이 이 땅에 계시든 천국에 계시든 우리가 힘들어도 이민 땅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듣고 보신다면 직접 찾아가 세배드리는 것보다 더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설날, 찾아갈 고향도, 찾아뵐 부모님도 안 계시지만 천국 본향이 있고 그날에 뵈올 부모님이 그곳에 계심을 알기에 결코 슬프지 않은 날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설날은 그날입니다.


사순절을 앞둔 최근에 여러 차례 들으면서 마음에 감동이 된 “너는 결단하라”는 제목을 가진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내가 도적처럼 왔을 때 너는 자신 할 수 있느냐

내가 한밤중에 왔을 때 너는 나와 갈 수 있느냐

말씀의 등불이 네 삶에 꺼져 있진 않느냐

성령의 기름이 오래전 말라 있지는 않느냐

너는 결단하라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너는 그 자리에서 다시 거듭나야 한다

너는 결단하라 세상 소리를 닫고 말씀의 불을 켜야 한다

불을 가진 자만이 그 날에 그 날에 나와 간다

 

내일부터 사순절 서원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이번 주간에도 플로리다 고교에서 17명이 총기로 사망하는 등 세상의 어려움은 멈추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의 기도가 멈추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기도 무릎이 강해지면 모든 어려운 상황이 역전(逆轉)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에 우리가 힘쓸 일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합심 기도의 위력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성경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 44년의 여정 속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순절 새벽 기도, 결단하셨습니까?

내일부터 시작인데 아직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교우들은 없으시겠지요?

그 결단의 실행을 우리 주님이 내일 새벽부터 매일 보실 수 있으시겠지요?

당장 내일부터 결단의 사람들에게 역전승의 은혜가 쏟아지리라 확신합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 설립 4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44년 동안 우리 교회에 베푸신 은총은 44년의 천배, 만 배의 시간이 주어져도 다 헤아릴 수 없는 은총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눈물로 교회를 섬겨 오신 선진(先進)들의 수고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원로목사님과 모든 믿음의 선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뜻 깊은 날에 우리의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의 화합의 장(場)이 되어야 할 올림픽이 시작부터 그러하더니 마지막까지 점점 더 국론(國論)이 분열되는 양상(樣相)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 조국이 일제의 강점기 아래 신음할 때 교회와 성도들은 분연(奮然)히 일어나 3.1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6.25 남침으로 우리 조국이 공산화가 되어가려 할 때 부산 초량교회에 모인 교역자와 성도들은 우리 대한민국을 공산화(共産化)에서 건져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구국(救國)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의 주제로 진행되는 사순절 둘째 주간입니다.

99주년 삼일절도 이 주간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설립되던 해인 1974년도를 비롯해 몇 차례 대한민국을 사랑으로 찾아가 복음을 전하셨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장례식도 이 주간에 있습니다.

44세의 퀸즈장로교회가 이 주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자명(自明)합니다.

표류(漂流)하는 조국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퀸즈장로교회여!

조국을 위해 울라.


2월 첫날, la 한인 타운 인근 한 중학교에서 12세 여학생이 총격을 가해 15세 남학생이 중태에 빠졌고 15세의 여학생은 손목에 총을 맞았다고 합니다.

1월에만 하더라도 한국 밀양의 한 병원의 화재로 적잖은 사상자가 있었습니다.

작년 12월에는 제천의 목욕탕에서 큰 화재가 있었습니다.

11월엔 텍사스의 한 교회에서 총기사고로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월에는 라스베가스의 한 광장에서 미국 최대의 총기 사건이 있었습니다.

살펴 올라가자니 끝이 없습니다.

 

이렇듯 세상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집이든, 길이든, 공공장소든....

교회도 안전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준비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보스턴의 한 경찰 서장은 어려울 때 이런 수칙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run(피하라), hide(숨으라), fight(싸우라)”

 

run: 어려움이 있을 때 밖으로 피할 길을 미리 알아 두어야 합니다.

hide: 밖으로 피하지 못할 상황이면 적당한 곳에 자신을 잘 숨겨야 합니다.

fight: 안전을 해치는 적들과 싸움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rhf는 안전을 위한 수칙일 뿐 아니라 죄의 공격에도 유효한 방식입니다.

run: 죄의 유혹을 피하라.

hide: 피난처이신 주님 품에 숨으라.

fight: 죄와 끝까지 싸우라.

 

험한 세상, 우리 모두 rhf!


지난 수요일은 예고된 대로 폭설이 바람과 함께 쏟아졌습니다.

그 날 예정되었던 선교회 헌신예배와 지도원 성경공부 등을 연기하고 교역자들과 몇몇 성도들이 모여 수요 기도회를 했습니다.

저는 그날“폭풍우 속의 은혜”에 대해 말씀을 전하였고 또 같은 주제로 토론도 하였습니다.

 

폭풍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마르지 않았음을 서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물의 밝은 면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풍경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도 창조하셨습니다. 힘든 것도 그가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 속에서도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이사야 45:7)

 

그 날 기도회가 끝나고 로비에서 헤어지는 시간에 그 날 헌신예배를 드리려던 선교회회원이 그 날 폭설로 헌신예배가 연기된 것에 대해 한 마디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회 헌신예배를 연기하셨네요.

미루어지는 것은 싫은데”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교회 헌신예배를 연기하셨네요.

우리의 준비가 덜 되었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다면 믿음의 눈이 확실히 열려있는 것입니다.


anon이라는 작가의 짧은 글,“긴 침묵(the long silence)”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힘들었던 과거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저런 억울한 사연들로 항변합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심판할 하나님이 사람들의 이런 사정을 아시기나 하냐면서 하나님에 대해 의구심과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심판의 내용을 말씀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내용을 말씀하시는 대신 길게 침묵하셨습니다.

그“긴 침묵”은 어떤 말보다, 어떤 심판보다 더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긴 침묵”으로 말해보십시오.

긴 침묵은 어떤 웅변보다 강할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지혜보다 빛날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행동보다 바를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시간보다 멋질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감정보다 깊을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변명보다 찰질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책망보다 아플 것입니다.

 

오늘날, 수다쟁이(talkative)는 많아도“긴 침묵”의 사람은 드뭅니다.

사순절(四旬節), 묵언(黙言)의 계절(季節).

긴 침묵을 훈련하기에 더없이 좋은 절기(節氣)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억울해도, 어이없어도, 예수님처럼, 긴 침묵으로만 말하며 사순절을 걷고 또 걸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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