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추석이 다가옵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명절이면 부모님이 새 신과 새 옷을 사주시곤 했습니다.

 

새 신을 신고 뛰어 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명절 아침, 새 신을 신고 하늘까지는 아니어도 고소한 음식 냄새가 흐르는 동네 사이를 흥분 속에 씽씽 달려보곤 했습니다.

새 신을 신고 동네를 뛰어다녔던 명절 아침은 이제 추억 속에만 있습니다.

 

명절에 새 신을 신지 않아도 흥분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발돋움입니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둘려 모여 있는 곳이 적잖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무슨 일이 있을까 궁금하여 발돋움하곤 했습니다.

어릴 적엔 선반 위에 있는 먹을 것을 꺼내 먹으려 발돋움한 적도 있습니다.

요즘도 가끔 발돋움을 합니다.

다소 높은 곳에 꽂혀있는 책을 빼어보려고 그렇게 합니다.

 

발돋움은 멀리 가는 일이 아닙니다. 무슨 돈이나 별다른 시간이 드는 일도 아닙니다.

그저 있는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향해 발뒤꿈치만 들면 됩니다.

그 작은 행동, 발돋움에도 간절함이 배어 있으면 새로운 세계를 볼 수도 있고 맛난 것, 필요한 것 등을 손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올 추석도 우리 대부분은 고향에 갈 수 없을 터인데...

명절이라고 새 신을 사주실 부모님이 안 계신 분도 많으실 터인데...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갈망하는 발돋움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느 마을, 그 동안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아 주던 의사 선생님이 은퇴하시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못내 아쉬워하며 송별회를 만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제안에 의해 그 송별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집에 있는 포도주 중에 가장 비싸고 맛난 것을 가져오기로 하였습니다.

 

송별회 그 날, 참여하는 사람들이 입구에 놓인 큰 항아리에 자기가 가져온 포도주를 부으면서 입장하였습니다.

송별회는 시작 되었고 천하제일의 맛을 기대하며 항아리에서 포도주를 건져내어 은퇴하시는 의사선생님에게도 드렸고 자신들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의 얼굴빛이 변하였습니다.

그들이 마시고 있는 것은 기대했던 맛난 포도주가 아니라 맹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송별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빚어진 씁쓸한 결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맛난 포도주를 가져올 것이고, 거기에 나 하나쯤이야 맹물을 갖다 부어도 티가 안 날거야.”

 

희석(稀釋/dilut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원액(原額)에 맹물을 갖다 부어 원액의 농도(濃度)를 낮추는 것입니다.

10월 23일은 “행복에의 초대” 날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누군가를 데려올 것이고 나야 그냥 참석해도 티가 안 날거야.” 라는 계산된 확신(?)을 갖고 계시다면, 그 날 우리 모두는 맹물을 마시거나 아주 희석된 물을 마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티가 안 날거야” 라며 내게 주어진 작은 책임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의 최선을 쏟아 부어야 할 잔치 날, 스리슬쩍 맹물타기 없깁니다. ^^


내 생애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입니까?

다윗에게 그 생애 가운데 꼭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의 살아생전에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선지자 나단을 통해 이런 답변을 주셨습니다.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대상17:4b)

 

다윗은 훗날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자신이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많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절절히 들려줍니다. (대상22:1-16)

성전건축은 다윗도 이루지 못한 꿈이었습니다.

성전건축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축복이 아닙니다.

성도로서 그 생애 가운데 단 한번이라도 성전을 건축할 수 있다면 축복 중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현재 성전 건축은 성도들의 눈물겨운 기도와 끊임없는 헌신, 그리고 건축위원들의 민첩하고 묵묵한 수고를 통해 금주에 설계사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

설계사 인터뷰 단계까지 상상을 초월한 꼼꼼하며 견고한 과정이 있었답니다.

 

성전 건축으로 가는 그 길목에 건축바자회가 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만들고 사먹고,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건축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는 토요일, 10월의 문을 여는 첫 날.

선교회 교육부 청년 등 한어회중, 영어회중, 중국어회중, 그리고 러시아어회중이 정성과 기도로 함께 준비한 건축바자회의 문도 열린답니다.

내 생애 단 한번이 될지 모를 성전건축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린답니다.

 


8월과 9월이 교차했던 지난 주간, 땅위의 더위를 식히고, 길가의 코스모스를 일으킬 빗소리와 함께 여름의 문이 살포시 닫혀 지고, 가을의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멀게만 느껴지던 가을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 왔습니다.

 

가을 뜨락에 떨어진 나뭇잎위로 돋보기를 손에 잡고 햇빛을 부르면 오래지 않아 나뭇잎 사이에 하얀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다가 마침내 그 나뭇잎 전체가 태워집니다.

거기에는 햇빛을 모으는 초점(焦點)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을에도 할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다 펼쳐 놓으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마무리 못하고 찬 겨울을 맞을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그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해야 할 그 많은 일 가운데 초점이 필요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난 목요일, 6기 제자훈련과 4기 영성훈련이 개강되었습니다.

연합해서 드려진 개강 예배를 마치고 모든 훈련생과 훈련자들이 훈련에 참여하는 소감을 한 마디씩 밝혔습니다.

그 한 마디 속에 훈련을 앞둔 갈등, 훈련을 통한 기대 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초심(初心)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가을에 다시 찾아야 할 것이 있다면 초심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을의 입구에서 이 가을에 구할 기도 제목이 생겼습니다.

 

주여, 이 가을에는 두 개의 초를 주소서.

초점(焦點)을,

초심(初心)을.


“으라 차라!”

무술(武術)의 고수(高手)가 기(氣)를 집중하여 모을 때 외칩니다.

모아진 기(氣)에서 장풍(掌風)도 나오고 공중부양(空中浮揚)도 나옵니다.

중학교 때 읽었던 무협소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신앙(信仰)의 고수(高手)도 기를 잘 모아야 합니다.

특별히“오기”를 잘 모아 사는 것이 신앙의 고수가 사는 삶입니다.

“오기”란 고집스러운“오기(傲氣)”가 아니라“다섯 가지 기”를 말합니다.

“다섯 가지 기”는 도, 대, 댐, 쁨, 다림입니다.

 

1. 도-쉬지 말고 기도하자

2. 대-말씀을 기대하자

3. 댐-성도끼리 서로 기대자

4. 쁨-항상 기뻐하자

5. 다림-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자

 

이 다섯 가지 기가 모아지면 장풍이 아니더라도 우리 앞에 모든 원수는 저 멀리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공중부양이 아니더라도 믿음으로 독수리같이 하늘을 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한 해의 여명(黎明)이 솟았습니다.

하루하루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오기를 가지고 살아 우리 모두가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신앙의 고수가 되면 좋겠습니다.


새해 첫날입니다.

새해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만복이 온 가정에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첫날이 되면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아이들의 설날노래가 울려 퍼지던 고향나라, 지금은 새해 설날도 잊은 채 진통을 겪고 있는 조국이 그립습니다.

 

설날에서“설”의 뜻은“낯설다”“익숙하지 않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새해 이 첫날은 우리 모두에게“낯선 날,”“익숙하지 않는 날”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닥 낯설지 않습니다.

아니 다 그대로입니다.

새해라고 하지만 길도 건물도, 사람도 환경도 다 그대로 있습니다.

 

달력을 바꾸어 놓은 것 외에 새로운 것이 없음에도 진정한 새해를 맞이하려면 내 자신이 새롭게 변화가 되어야만 합니다.

내 자신이“낯설고”“익숙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화된 말, 가까이만 보던 데서 먼 곳을 바라보는 변화된 눈,

사람의 소리만 듣다가 하늘의 소리를 먼저 듣는 변화된 귀....

아름답게 변화 된 내가“낯설어야”오늘이 진짜 나의“설날”이 되는 것입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껜데요

나의 나의 설날은 오늘일까요?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은 흘러흘러 낮은 데로 갑니다.

 

꽃들아 피어피어 어디에 사니?

꽃들은 피어피어 낮은 데서 삽니다.

 

낮은 곳에 뜻밖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 낮은 곳에 로고스도 있답니다.

 

헬라어 로고스(λογος)의 뜻은“말씀”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초월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낮은 이 땅에 임하신 것입니다.

 

“생명”이란 로고스가 낮은 곳 베다니에 임하여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사랑”이란 로고스가 낮은 곳 수가성에 임하여 절망의 한 여인이 회복되었습니다.

“구원”이란 로고스가 낮은 곳 여리고에 임하여 외톨박이 삭개오가 찾아졌습니다.

 

로고스라는 초월적(超越的) 존재가 낮은 이 땅의 내재적(內在的) 존재로 임하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낮은 곳은 로고스가 임하여 환희를 일으키는 자리이며,

낮은 곳은 우리의 삶이 잘 흘러가야할 골짜기이며,

낮은 곳은 우리의 말이 꽃 피어나야할 동산입니다


지난 수요일“자유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표어를 가진 서부의 명문 스탠포드 대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날 거대한 고급 휴양지 같은 캠퍼스에는 한점의 바람도 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바람들이 강하게 불고 있었습니다.

 

지성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스탠포드는 동부의 아이비리그가 부럽지 않는 자긍심과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뭔가 조심스런 방문객들과는 다르게 당당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학교의 학생이나 직원인듯 하였습니다.

1891년 개교한 스탠포드 대학은 다른 명문 사학에 비해 역사가 짧으나 학문적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학문적 척도를 나타내는 다수의 노벨상이나 지난 여러 업적들을 비롯하여 현재와 미래의 각 분야에 끼칠 지성의 바람은 여전히 회오리와 같다고 하여도 시비 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옥의 바람도 불고 있었습니다.

학교 박물관 입구에 커다란 미술품이 있었습니다.

그 제목은“지옥의 문”이었습니다. 로댕의 작품입니다.

그 유명한“생각하는 사람”을 비롯하여 수 많은사람들이 지옥의 문에 매달려 있거나 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괴로운지 모두 뒤틀려 있었습니다.

수치스러운지 머리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한심한지 후회의 표정도 역력했습니다.

스탠포드 캠퍼스는 지옥도 바람을 일으켜 지성의 사람조차 여지 없이 꺽어 버리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진리의 바람도 불었습니다.

지옥의 문이 있는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학교 교회가 있었습니다.

캠퍼스 전체를 둘러보지는 못했으나 교회에서 바라본 캠퍼스 전경이나 그 옆에 높이 솟은 타워를 볼 때 교회가 전체 캠퍼스의 중심인 것 같았습니다.

교회당 안팎에 여러 모습과 오르간 등 시설들이 인상적이었으나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고풍스런 강단이었습니다.

진리가 외쳐질 강단. 그곳이“자유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표어를 구현해 줄 유일한 진원지임이 분명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하지만 짧은 방문으로는 스탠포드 대학교 구성원들이 자유의 바람을 지성에서 기대하는지 진리에서 기대하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딱 일주일이 지났을 뿐입니다.

새해의 시간이.

지난 송구영신 기도의 시간에 온 회중과 함께 불렀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웬일입니까? 내 맘에 모신 주님을 찬송하며 시작한 새해 일주일 만에 제게는 이 노래가 더 어울리는 듯합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왜 아직도 내 속엔 내가 그렇게 많은지, 스스로 슬프고 주님께 미안할 뿐입니다.

내 속에 있는 헛된 바램들을 버림으로 주님이 거하시기에 편한 곳이 되길 바라며 김남조 시인의 “그대 있음에”를 나직이 불러봅니다.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

그대 있음에

삶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주님 있음에 내가 있을 뿐입니다.

빠르게 다가와 서둘러 지나갈 새해의 나날 가운데 잊지 않으려 합니다.

나를 불러 손잡아 주시고, 삶의 뜻 배우게 하시고, 그 빛에 살게 하신 주님 있음에 내가 있음을.

 

몇 달 전, 다소 멀고 복잡하고 처음 가는 길을 운전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 따라갔습니다.

한 번도 헷갈리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한 마디로 no problem!

 

오는 길이었습니다.

가는 길을 잘 갔으니 오는 길은 더 빠르게 오겠다며 두 개의 내비게이션을 켰습니다.

차에 장착된 내비게이션,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

둘을 바라보는데 약간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길을 잘못 들어서면서 결과적으로 big problem!

 

종말의 내비게이션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복잡한 종말, 성경만이 분명하고 안전하고 완전하게 우리의 길을 안내합니다.

내일부터“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주제의 가을 새벽 부흥회입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은 종말을 일컫는 징조입니다.

종말의 내비게이션이 확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성경을 열면 종말의 내비게이션이 선명히 보입니다.

 

내일부터 일주일간, 종말을 헤쳐 나갈 말씀을 집중적으로 전하려고 합니다.

종말의 때에 다른 것들은 환희 켜고 성경은 덮어 놓으면 점점 헷갈리다가 큰일을 만납니다.

5시 45분부터 시작되어 피곤하시니까

그대로 성경 덮고 주무실래요, 그래도 성경 들고 나오실래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을 보셨습니까?

군인 출신의 아버지 아래서 군대식으로 키워지던 7명의 자녀가 그 가정의 가정부로 온 마리아에 의해 변화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이기에 많은 노래가 불리고 있는데, 그중에 그 가정의 큰딸이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난 열여섯 살, 열일곱 살이 되죠(i am sixteen going on seventeen)”

자기에게는 무엇을 할지 일러줄 나이도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필요하다고 노래합니다.

“i need someone older and wiser telling me what to do.”

 

우리 자녀들에게도 계속 변화가 필요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지 일러 줄 지혜로운 분도 필요합니다.

우리 교사들이 이 일을 위해 예수님 안에서 늘 수고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힘을 다해 우리 자녀들에게 진정한 변화와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일깨워 주고 있답니다.

 

이번 금요일(6일)과 토요일(7일), 청소년 할렐루야 대회가 우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요셉은 17세 청소년 때에 이미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있었고, 힘든 이국(異國) 땅에서 꿋꿋이 살았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이 힘든 땅에서 예수님이 주신 꿈을 품고 꿋꿋이 살길 기도하면서 집회 자리에 꼭 데리고도 나오시고 또 뒤에서 열렬히 응원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때 왜 그랬을까?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책상에 금을 그어 놓고 평소 내 짝꿍이라고 부르던 친구가 팔꿈치 끝이라도 넘어오면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왜 호들갑을 떨었을까?

 

그때 왜 그랬을까?

우리 집도 가난하면서 맛있는 찐빵 장사 집의 아들인 친구에게 왜 무안을 주었을까?

 

그때 왜 그랬을까?

아무런 감정도 없던 친구였는데 다른 옆 친구들의 응원(?) 속에 “너, 나하고 뜰래(싸울래)”하고 왜 세지도 않은 주먹을 내밀었을까?

 

이 가을에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옛 친구들 생각이 나는데 같이 있었던 그때 왜 잘 대해 주지 못했는지 혼자 부끄러워하며 노래 불러 봅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지난 수요일, 교회 앞 도로가 새롭게 포장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시작된 공사가 오후 늦게 마치었고 그동안 울퉁불퉁 고르지 않았던 도로가 평탄하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인들도 불편했고, 임직 예배에 많은 분이 찾아오실 때 고르지 않은 곳을 지나오시겠다는 안타까움도 있던 차에 도로공사가 멋지게 끝난 것입니다.

 

이런 노래가 있는 것 아세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길목에 서서....

그대를 맞으리.... 사뿐히 밟으며 와주오”

사랑하는 이를 맞이하기 위해 주단을 준비하여 마음에 깔아 놓았으니 사뿐히 밟으며 와달라고 합니다.

흥,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연인은 참 좋겠어요.

마음에 주단을 깔아 맞이하겠다니까요.

사뿐히 거닐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 신랑, 우리 주님은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면서 그것은 고르지 않은 곳을 평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임직예배에 오시는 분들이 평탄하게 오시도록 교회 앞 도로공사는 끝났는데 주님이 거니실 내 마음은 여기저기 패이고 고르지 않아 울퉁불퉁 한 것은 아닌가요.

누구는 주단 위를 사뿐히 거니는데, 우리 주님은 거니시기를 난감해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10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이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도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열 드라크마 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고 낙심한 여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3과 완전을 나타내는 7의 합산인 10이라는 숫자는 성경적으로 너무 중요한 숫자임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어 중에 이렇듯 중요한 10을 상징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의외로 가장 작은 단어인 요드(י(입니다.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어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 중국교포부가 설립된 지 10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중국교포부 설립 10주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겸손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교회를 섬겨 오신 중국교포부 모든 분과 지도자들에게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

이들과 함께 행복한 교회를 일구어 오신 모든 성도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져가는 모습을 중국교포부 설립 10주년을 통해 보면서, 이후에 펼쳐질 더 벅찬 미래를 기대하게 됩니다.

 

중국교포부!

그대들의 함께 함이 우리 모두에게 큰 축복입니다.


최근에 갈대밭을 거닌 적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갈대처럼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 흔들림이 오래될 때 본인에겐 힘겨움을, 주변 사람들에겐 염려를 자아냅니다.

 

신앙생활의 흔들림은 빨리 안정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간혹 누가 흔들린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일에 지쳐서, 따듯한 돌봄이 없어서, 변화가 없어서, 예배에 집중이 안 돼서, 애들이 걱정되어서....

사실, 한 번 흔들리면 모든 것이 다 흔들림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흔들리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담임목사로서 여러 생각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흔들리는 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겠다고 약속도 하고, 누구를 내보내고 누구를 초청하고, 환경을 개선하고, 제도를 바꾸고....

하지만 압니다.

이런 방법들이 결코 흔들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아휴, 정말 답답해.

목사님은 우리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

흔들리는 사람들이 이같이 말씀하신다면 저는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그리스도인은“그리스도의 충족성”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변화의 요구하는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예수님만이 견고함의 유일한 근거임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피타고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침묵하라. 그렇지 않으면 침묵보다 나은 말을 하라.”

 

우리는 말을 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침묵보다 못한 언어가 있고, 침묵보다 나은 언어가 있습니다.

 

침묵보다 나은 언어는 감사입니다.

침묵보다 못한 언어는 불평입니다.

침묵보다 나은 언어는 진리입니다.

침묵보다 못한 언어는 거짓입니다.

 

행복은 감사를 통해 들어오고 행복은 불평을 통해 나갑니다.

살리는 것은 진리이고 죽이는 것은 거짓입니다.

 

감사의 계절입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세요.

주변을 둘러보세요.

우리가 태어날 때 싸 들고 나온 것이 하나라도 있던가요.

그 모든 것 일체가 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침묵보다 나은 언어인, 아니 결코 침묵하면 안 되는 언어인 감사가 넘치는 계절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해요.”


식당에서 남들은 맛있게 식사를 하는데 금식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렇게까지 식사하는 분들에게 부담을 주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았습니다.

며칠 전 뉴저지에서 몇몇 목사님들과 만남이 있었습니다.

모두 주문하는데 한 분 목사님은 주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 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들어보니 금식할만한 큰 제목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마다 금식의 이유가 많겠지만 자신을 위한 이유를 뛰어넘어 식당에서까지 금식하시는 모습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날, 제가 시킨 대구지리를 쉽게 삼킬 수 없었습니다.

가시가 많아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받은 감동에 목이 멘 것도 있고, 그가 붙잡은 진리를 흔드는 자들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자들이라는 불편한 사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의 싸움의 대상은 저 마귀들인데....

우리끼리 싸워서는 안 되는데....

그동안 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감사절 주간을 지나며 우리 교회 안에, 우리 노회 안에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다는 것에도 큰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겸허한 기도와 한 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

가을이 점점 깊어져 가는데 우리의 기도와 한 분을 향한 사랑도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겸손한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만난 자리가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예수님의 자기 부인의 겸손한 기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흐르던 곳이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성공, 나의 건강, 나의 재산, 나의 명성.....

끝없이 이어지는“나”가 멈추어지고 아버지 하나님만이 가장 큰 갈망이 된다면 우리의 가을도 자기를 비우는 겸허한 기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계절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사진 한 장 보았습니다.

우리 캄보디아 선교지의 담 안에 심어진 한 그루 나무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함께 보시던 분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목사님, 이 넓은 땅에 우리 교인들이 한 그루씩 나무를 심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확정된 사업은 아니지만 저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만약 나무를 심는다면 그냥 심지 말고 조경(造景)을 생각하고 심어, 훗날 멋진 수목원(樹木園)이 되면 좋겠네요.”

차가운 12월에“나무와 숲”이야기를 나누니 뭔가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오늘, 각각 나무 같은 다섯 개 교회가 함께 숲을 이루며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란 이름으로 두 번째 찬양 축제를 합니다.

다섯 교회 모임을 바라보시던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교회가 나뉘고 분열하는 이때, 서로 성향이 다른 다섯 교회가 함께 모여 성탄찬양 축제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놀라운 일입니다.”

 

또 하나의“나무와 숲”이야기가 쓰일 것입니다.

오늘은 그동안 각각 수고하고 활동하던 30대 선교회가 청장년부란 이름으로 함께 처음 모이는 날입니다.

각자“나무”로도 멋졌지만, 이젠 함께하는 아름다운“숲”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펼치시던 30대, 혼자가 아닌 형제들 그리고 자매들과 함께 숲을 이루어 사역하시던 30대. (눅 8:1-3)

그 예수님을 따라 30대 나무들


오늘, 본당 앞을 보셨나요?

화분마다 솟아 오른 빨간 포인세티아를.

겨울 꽃, 크리스마스의 꽃으로 알려진 포인세티아는 “내 마음은 불타고 있다”

“축복합니다”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력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포인세티아는 그 줄기에서 나오는 흰 액이 “해열제(解熱劑)”로 쓰인다고 합니다.

 

저 앞의 작은 화분에는 아름답고 유용한 포인세티아가 피어올랐는데 내 인생의 화분에는 어떤 꽃이 피었는지 궁금합니다.

색깔은 무엇인지, 향기는 있는지, 모양은 어떤지, 필요는 한지. 아니면 아예 아무 것도 없는 빈 화분인지.

 

곰곰 생각해 보니 몇 주 있다가 사라질 화분, 겨울에 잠깐 피는 꽃이라고 포인세티아를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포인세티아 같은 꽃만 피어도 너무 괜찮은 화분이 되겠더라고요.

 

“내 마음은 불타고 있다” - 내 마음도 예수님을 향해 불타고 싶다.

“축복합니다” - 나도 만나는 사람에게 복이 되고 싶다.

“강력한 아름다움” - 내 짧은 삶도 강력한 아름다움으로 살다 지고 싶다.

“해열제” - 나도 여러 일로 열 받은 사람에게 꼭 필요하고 싶다.

 

꽃아 피어라, 내 인생의 화분에서.

비록 겨울을 사는 인생이지만, 겨울에 피는 꽃도 있더라.

겨울 꽃 포인세티아를 보니 참 멋지더라.

내 인생의 화분에서, 꽃아 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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