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큰아들이 있는 산호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장 크게 들어왔던 성경 구절은 사도행전 11 장의 29 절 마지막과 30 절 처음에 이어지는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저 이방 땅에 세워진 지 얼마 안 되는 안디옥 교회가 큰 흉년을 만난 유대 지역의 성도들을 돕겠다고 작정하였고 또 실행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선한 작정이 아름다운 실행으로 이어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님을 저 자신에게서 많이 보았습니다. 항상 실행을 작정 가까이에 두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첫 손녀를 받아든 제 손과 품은 가슴, 그리고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이 가득 차 있었으나 실상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 아이, 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 아이, 아니 제게 귀찮은 손길을 계속 요청하는 그 아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 아이를 향한 사랑은 아직 짝사랑일 뿐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어린아이 같은 저를 끝없이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저미게 느껴졌습니다.

 

좋은 날씨를 자랑하는 캘리포니아 지역은 실상(實相) 오랜 가뭄에 지쳐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산호세에서 자동차로 1 시간 40 분쯤 떨어진 napa 로 가는 길에 허수아비를 보았습니다.

낡은 옷을 입고 들녘에 초라하게 서 있었지만 실상 허수아비는 어떤 환경에도 한 마디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일군이었습니다.

napa 지역에는 포도나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차에서 지나가면서 바라볼 때는 아무런 열매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차에서 내려서 가까이 가 보니 실상 나무마다 포도송이가 잘 맺혀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 실상이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휴가 동안 묵상하고 있는 예레미야 말씀에는 예레미야와 함께 하나냐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렘 28:10)"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둘 다 선지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다 말을 할 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하나냐는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였던 것뿐입니다.

설교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하는 것이 있음을 다시 가슴에 새겼습니다.


한 사람이 주어진 낱말을 설명하면 다른 사람이 그 설명만을 듣고 원래 주어진 낱말을 맞추는 게임이 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주어진 낱말을 보았습니다.

“천생연분”이라는 네 글자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만만하게 한평생 자기와 같이 살아온 할머니에게 설명하십니다.

“당신과 나 사이를 뭐라고 하지?”할머니가 주저 없이 대답하십니다.

“웬수!”이상한 답변에 당황한 할아버지는 재차 설명하십니다.

“이봐, 당신과 나 사이를 네 글자로 뭐라고 하냐고?”

할머니는 이제야 제대로 알았다는 듯이 힘주어 외치십니다.

“평생웬수!”수년 전 대한민국을 초토화 시켰던 실제 방송 프로그램 이야기입니다.

 

몸만 같이 살아가는 곳은 결코 가정이 아닙니다.

그런 곳은 그저 건물의 기능을 가진 집일뿐입니다.

평생 같이 살아도 서로 원수같이 사는 가정이 많습니다.

부부 사이가 그렇고 부모 자녀 사이가 그렇습니다.

세상의 위기는 가정의 위기입니다.

가정 안에 진정한 권위도 없고 참다운 방향도 없으며 진실한 소통도 없음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가족이 서로를 향해 무례한 태도를 일삼고 폭력적 언어를 쏟아 붓는 것은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닙니다.

짙은 어둠의 가정에 밝은 빛이 들어와야 합니다. 거의 해체 수준에 이른 가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꽤 괜찮아 보이는 가정도 분명한 토대 위에 서 있지 않으면 그 미래를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이번 전교인 여름 수련회 때 강사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 가정예배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기본에 충실한 지혜로운 교회”가 진정으로 맞는다면 “예배가 있는 가정”은 연초부터 기본으로 강조했었어야 합니다.

올해의 반환점을 도는 때에 “가정예배”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라도 그 말씀에 우리 교회가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생원수”같은 위기의 가정을 극복하여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소망한다면 “예배가 있는 가정”이 그 유일한 길입니다.

이미 이 길을 성실하게 걷는 가정도 있지만 이제 우리 교우들의 모든 가정이 “예배가 있는 가정”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일단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지속적으로 반복해봅시다.

좋은 길이든 나쁜 길이든 길은 계속 반복되는 곳에 만들어진다는 강사 목사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아브라함 링컨의 말입니다.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어느 곳에서 각자 살 것인지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롯은 삼촌보다 앞서 선택하였습니다.

눈으로 볼 때 물도 넉넉하고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롯과 자녀들의 삶은 잠시 맛난 음식을 먹고 화려한 옷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재앙, 그 자체였습니다.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죄악이 그 가정에 진을 쳤고 그 후손은 탄식을 쏟으며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머문 땅에서 예배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에게 목숨보다 중요하게 가르친 것 또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예배를 선택한 것을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그 가정을 대대로 축복하셨습니다.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선택은 자녀들의 재앙이나 축복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가정에서 제사장 역할을 제대로 못 하면 하나님은 그 제사장직의 박탈은 물론 그의 자녀들도 잊어버리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 4:6b).

 

아버지의 선택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가정예배를 선택하는 아버지와 예배를 빼놓은 그 밖의 다른 것을 선택하는 아버지입니다.

자녀들을 위한 아버지의 가장 탁월한 선택은 가정예배임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 아버지가 되시겠습니까?

성경은 아버지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가정예배 시간 외에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더 좋은 방법을 알고 계신 아버지가 계시면 저에게 꼭 알려 주십시오.

정말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굳이 매주일 가정예배 드린 분들 손 들어 보시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서른 명의 교우들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잘 다녀왔습니다.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신 교회와 가족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저에게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감격과 충격의 시간이었습니다.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일정은 순간순간 숨이 막히는 감격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땅은 몹시 더운 곳이었고 태어나신 자리는 아주 더러운 자리였습니다.

더운 거리와 좁은 자리에서 예수님의 겸손에 감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사역하셨던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스스로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는 자괴감의 그늘에 앉아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외치신 자리에서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였습니다.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책망하시지 않고 아침을 지어 먹이신 자리에서 예수님의 용서에 감격하였습니다.

모든 자리마다 감격이 아니고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받은 것은 숨막히는 감격뿐이 아닙니다.

질식할 것 같은 영적인 갑갑함 때문에 충격도 받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끝 모를 싸움뿐 아니라 유대인 사이에도 "종교인"이라 불리는 유대인과 "세속인"이라 불리는 유대인의 심각한 갈등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 2 천 년 전에 구원자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자리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감격과 충격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가볍게 지나칠 땅이 아니었습니다. 영성의 첫 자양분과 선교의 마지막 절실함이 공존하고 있는 독특한 땅입니다.

그 영성과 선교를 위해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함께 걸어야 할 땅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 오후부터 수요일 오전까지 뉴욕노회 목회자 가족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장영춘 목사님 내외분과 저희 부부가 참석했습니다.

노회원 목사님 부부와 노회 파송 아프리카 선교사님이 함께 모여 말씀과 친교와 회의(會議)의 시간을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들은 부부, 선교사님은 혼자 참석하셨는데 모(某) 목사님 내외분은 아들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저와 연배가 비슷한 목사님이 데리고 온 아들은 다섯 살 남짓의 아주 어린 아이였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볼 때 오래 전에 그 모(某) 목사님과 나누었던 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오래 전에 그 목사님을 만났을 때 자기에게 늦둥이가 하나 있는데 그 아이 때문에 아주 즐겁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 기억난 것입니다.

 

그 아이가 뛰어 다니는 것을 보고 옆에 앉아 계시던 어느 목사님께 알면서도 물었습니다.

“저 아이가 모(某) 목사님의 늦둥이죠?”

그 목사님이 대답해 주셨습니다.

“네, 맞아요. 모(某) 목사님의 늦둥이가 맞아요.

그런데 진짜 목사님 아이는 아니예요. 미혼모의 아이를 입양한 것이여요.”

저는 더운 여름에 잠시 얼음같이 되었습니다.

오래 전 그 모(某) 목사님의 늦둥이 자랑에 조금은 주책처럼 여겼는데 노회 수련회에서 그 목사님이 미혼모의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신다는 것을 알고는 얼음 같은 순간에서 벗어나 “아~~” 탄식과 함께 그 목사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급히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 아이는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을 “아빠 아빠” 부르면서 응석을 부리기도 하고 즐겁게 뛰어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바쁘신 목회에, 다 키운 아이들이 있으신 상황에 그 누구를 입양(入養)할 필요가 전혀 없으셨던 목사님과 사모님 얼굴에는 피곤과 후회가 아니라 진정한 기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 내외분의 밝은 얼굴에서 우리를 양자(養子) 맞아 주시고 기뻐해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목사님의 늦둥이는 아픔 가운데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사랑 가운데 무럭무럭 자라날 것입니다.


만남은 설렘입니다. 만남을 통해 새로움은 물론 깊은 감동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 누구를 만나 보셨나요? 저도 몇몇 사람을 만나보았습니다.

 

del augusta 목사님: 젊은 흑인 목사님이십니다.

어머니를 네 살 때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 이야기는 없는 거의 고아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비뚤게 자랄 가능성이 컸지만 주님을 만나 사역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가 한국 이민교회에서 사역할 때에 편견과 차별로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제는 가정에서와 한국 교회에서 받은 상처를 씻고 밝고 바르게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기도와 삶이 일치한다면 너무 좋을 것이라는 뼈있는 말과 함께 “만일 세상의 모든 교회마다 한 교회가 한 명의 고아를 돌본다면 이 땅에 슬픈 고아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라는 자신의 아픈 삶에서 우러난 말도 아프게 들려주었습니다.

 

윤동주 시인: 산타 쿠르즈는 산타 크로스의 동생이 아닙니다.

큰아들 집에서 40 분쯤 떨어진 바닷가 지역 이름입니다.

그 바닷가에서 밤에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영롱한 별들이 있었습니다.

별들을 보며 너무 오랫동안 그들을 잊고 산 무심함에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 밤에 "별 헤는 밤"의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별 하나하나에 아름다운 말을 붙여 가던 그 윤동주는 자신이 그 별 하나, 아니 별 무리에 붙여도 좋을 아름다운 사람임을 잘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은 세상은 별 같은 영롱함이 있을 것입니다.

 

강 집사님: 고등학교 때 이민을 와서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일식집 주인.

갑자기 돌아가신 누님의 사업을 떠안았을 뿐, 그는 현재 토목에 관련된 공무원이기도 하였습니다.

식당은 퇴근 후 저녁에만 나와 돌본다고 하는데 토목공사에 깃든 미국의 가치관을 우리 식탁에 앉아 오랜 시간 역설하셨습니다.

토목공사가 미래를 위한 것이 있고 현재를 위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를 위한 공사는 자기들이 누리기 위해 빨리 진행하지만 미래에의 무책임은 물론 자신들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반면에, 미래를 위한 공사는 현재의 사람들이 계속 불편함을 겪으나 견고한 미래를 건설해 간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토목공사는 대부분 미래를 위한 공사라고 합니다.

그 만남에서“미래를 위한 공사”를 다시 가슴에 새겼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의 한 명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인종차별 받던 흑인으로 태어났고, 일곱 살에는 성폭행을 당했고, 열네 살에는 사생아를 낳게 됩니다.

그러다 그녀는 열일곱 살 때 생애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그것은 의붓아버지로부터 주어진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애야,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단다.

첫째는 무엇인가 일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둘째는 남이 만든 일을 보고‘와~~’하고 놀라는 사람이 있고, 셋째는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조차 모르는 지내는 사람이 있단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될래?”

오프라 윈프리는그 질문에 응답했습니다.

“나는 첫 번째 사람이 되겠습니다.”

 

내게 주어진 질문을 잘 들어보십시오.

거기에는 내 생애를 송두리째 바꿀 엄청난 의미와 놀라운 방향이 담겨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의붓아버지의 질문을 흘러보내지 않고 단호히 응답했습니다.

그 날의 질문과 응답이 그녀를 가장 악조건 속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든 힘이 되었습니다.

 

태초에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정말 어디 있는지 모르셔서 질문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 남편이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난 아담에게 네 실존이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보라는 질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도 물으십니다.

“네 자리는 지금 어떤 자리냐?

네가 지금 있는 곳이 남편의 자리, 아내의 자리가 맞느냐?

부모의 자리, 자녀의 자리가 맞느냐?

성도의 자리, 직분자의 자리가 맞느냐?”

반드시 응답하셔야 합니다.

정직한 응답은 새로운 축복의 사건들을 일으킬 것입니다.

 

다음 주일(9 월 6 일) 오후부터 월요일 오전까지 2015 년도 남선교회 연합 수련회가 있습니다.

"남자여,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 하나님께서 이번 수련회에 주신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위치(正位置)에 있는 남자인지, 아니면 이탈(離脫)된 자리에 있는 남자인지 응답하셔야 합니다.

모든 남자들의 정직하고 용기 있는 응답은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생업과 나라를 새롭게 할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답하라 2015!”


하나님은 온 세상에 편재(遍在)해 계시지만 그중 어떤 곳에는 임재(臨在)하십니다.

편재를 하나님의 일반적인 존재하심이라고 한다면 임재는 하나님의 특별하게 함께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에는 하나님의 구별된 사랑과 관심과 보호와 능력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특별한 곳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님은 찬양이 있는 곳에 강하게 임재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시 22:3),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 149:3-4).

그렇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찬양하는 자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아름다운 일을 행하십니다.

 

뜨거운 여름의 끝자락에 있을 오는 8월 30일 주일 오후, 모든 사람들이 지쳐 쉬고 싶어 할 그 시간에 우리 교회에서는 찬양축제가 열립니다.

이 축제를 앞두고 열 개의 찬양부서가 정성껏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재하심에만 만족하며 지나갈 평범한 시간을 일깨워, 하나님의 임재하심까지 갈망하며 나가는 찬양축제는 열 개 부서만의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중에 찬양 안 해도 괜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찬송하는 사람들을 제지하려 할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b)

그렇습니다.

침묵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돌들에게 찬양의 특권과 축복을 빼앗길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우 모두가 함께하는 찬양축제를 통해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날이 되시기를....


남자끼리 떠났던 1박 2일, 남선교회 연합수련회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 시간이었습니다.

남자 자신들이 잘 몰랐던 남자에 대해 성경적인 관점을 갖게 된 것은 이번 수련회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습니다.

아들로서의 남자, 아버지로서의 남자, 남편으로서 남자가 어떻게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말씀과 예화를 통해 일깨운 메시지는 남선교회 회원들의 마음을 회한(悔恨)으로 흔들어 놓았고 결단(決斷)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이 설교 중에 들려주신 자신의 이야기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1남 1녀의 자녀들 두신 목사님에게 사춘기 딸은 힘들기만 했답니다.

목사님이 외국에 나가 계실 때 사모님으로부터 딸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심란한 소식에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는데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네 자식 중에 탕자는 몇 명이니?”

두 자녀 중에 한 명이 속을 썩이고 있는 터라 목사님은“한 명입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생각 못했던 내용이었습니다.

“내게는 탕자가 아주 많단다...”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하면서 눈시울을 붉힌 것은 강사님만이 아니었습니다.

애먹이는 자식 한둘도 힘겨워하는 우리들인데 수많은 탕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감사하고도 죄송해서 설교 중에 함께 눈물을 흘린 남자는 저 말고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마다 아픔이 있습니다.

아내 몰래 자녀 몰래 아픈 가슴 부여잡고 울기도 합니다.

나만 아픈 줄 알았습니다.

우리만 우는 줄 알았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그렇게 많이 아파하시는 줄은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앞으로도 여러 차례 드릴 말씀인 줄 알면서도 하늘 아버지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어 이렇게 나지막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젠 그만 속 썩일게요.”


“악!”지난 목요일 피츠버그팀의 강정호 선수가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 중 외마디와 함께 쓰러졌습니다.

2루에서 수비를 보던 강정호 선수를 향해 컵스의 1루 주자가 거칠게 슬라이딩하면서 그에게 큰 부상을 안겨 준 것입니다.

피츠버그 구단은 강정호선수가 왼쪽 정강이 골절과 십자인대 부상으로 수술했고 6~8개월의 재활 기간이 필요하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올해 신인왕 후보이기도 하고 포스트 시즌에서 맹활약을 기대케 했던 터라 염려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미국 언론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cbs의 스포츠 기자는 컵스팀 선수의 슬라이딩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분석했고, espn의 칼럼니스트는 컵스 팀 선수가 2루 베이스가 아닌 강정호 선수를 향해 달렸고 이것은 역겨운 장면이었다고 비난했습니다.

같은 상황에 대한 해석이 극명( )하게 갈린 것입니다.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자는 물론 그 해석을 듣는 자들에게 전혀 다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새가 운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새가 노래한다”고도 말합니다.

물 반 잔을 보고 어떤 사람은 물이“반 밖에 없네”로 표현하고 어떤 사람은 물이“반이나 있네”로 표현합니다.

누가 소망을 주며 누가 밝게 살지는 분명합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애굽에 팔려와 숱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해석(창45:7-8)하여 위기의 가정을 살려냈습니다.

강정호 선수 부상에 대해 espn의 해석이 더 맞을 것 같은데도 정작 그 자신은 “상대방 선수는 해야 할 플레이를 했다. 나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자신한다” 고 말했답니다.

확실히 인생은 일어난 사건 보다 그 사건에 대한 해석으로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강정호 선수는 홈런 치는 것도 멋있고 수비하는 것도 멋있는데, 고통을 준 사람에 대한 해석은 더 멋있습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메이저 리그 선수, 아니 인생의 따스한 해석자 강정호 씨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느껴지시나요?

우리 교회 예배와 교육에는 뭔가 촉촉함이 있다는 것이. 왜 그런 줄 아세요?

우리 예배당과 교육관에는 그 때 그 분들의 눈물이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 없이 빚어지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가 봅니다.

한 송이의 아름다운 국화꽃이 피어남에도 오래 전부터 누군가의 눈물이 있었다고 서정주 시인은 확신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中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다(多) 민족, 다음 세대의 비전을 머금은 또 하나의 교회당이 필요한 이 때에 그 때 그 분들처럼 눈물로 새 교회당을 적실 분들이 필요합니다.

 

국화꽃 향기 나는 가을날에 펼쳐 질 건축 바자회는 새 교회당을 내 눈물로 촉촉이 적실 시간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니지요?”하지 마시고요^^


9 월이 들어선 어느 날, 새벽 기도를 마치고 키세나 park 을 찾았습니다.

큰 호수를 돌기도 하였고 벤치가 있는 숲을 거닐기도 하였습니다.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

 

8 월을 막 보내고 9 월을 맞이하는 키세나 공원은

박인환 시인(詩人)의 “세월이 가면”의 시구,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이

그대로 펼쳐진 듯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절절히 고백했던

우리의 8 월 30 일 찬양축제는 이제 옛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사랑은...

박인환 시인의 사랑처럼 가지 않았습니다.

나뭇잎처럼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9 월에도 이어 부를 사랑의 노래가 있답니다.

8 월 30 일 그 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노래가 다양했듯이

9 월의 노래도 많을 것입니다.

살펴보면 멀지 않은 주변에 있을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을 찾아 걸으며

당신만의 사랑 노래를 불러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새해를 출발하고 벌써 열흘이 되었습니다.

잘 출발하셨는지요? 그리스도인의 출발은 “자기부인(自己否認)”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내가 언제 어디서든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나자신죽기”로 한 해를 시작한다면 결코 손해 보는 한 해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한 해가 될 것입니다.

 

“나자신죽기”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그것을 펼쳐보면 그리스도를 닮아갈 내용들이 나옵니다.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나자신죽기”를 다음과 같이 펼쳐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을

자람을

신실을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생애, 곧 그의 겸손하게 태어나심, 균형 있게 자라나심, 변치 않으시는 신실하심,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죽으심을 잘 기억하며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입니다. 저는 지난 3년간 송구영신 예배 때마다 말씀 내용을 한 구절로 정리하곤 했습니다.

다음은 그 한 구절과 그 말씀 내용들입니다. 다시 새기고 꼭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지은평(2014)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고 평강 주신다.

기찬믿음(2015)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찬송으로 하루를 지내며 믿음으로 하루를 마친다.

나자신죽기(2016)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그의 나심을, 자람을, 신실을, 죽음을 기억하라.


히브리어“카바나”는“집중”다르게 풀어 쓰면“내면의 참여”란 뜻입니다.

사실“집중”이나“내면의 참여”라는 말로는“카바나”의 진짜 무게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카바나는“집중”을 넘어“집중”의 대상을 향한“심장의 방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카바나는 쉽지 않지만 그 열매는 아주 풍성합니다.

카바나에는 평범한 것을 탁월한 것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예술가가 자기의 예술을 연마(硏磨)할 때나 표현 할 때 카바나가 있다면 틀림없이 격(格)이 다른 예술가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카바나입니다.

예배에 카바나가 있다면 예배는 진동할 것입니다.

기도에 카바나가 있다면 기도는 하늘에 이르를 것입니다.

만물을 카바나로 본다면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업이나 공부에도 카바나가 있다면 사뭇 다른 결과를 자아낼 것입니다.

 

카바나 life!

올해만이 아니라 평생의 life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유사품(類似品)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카니발 life!

단어는 비슷하지만 내용은 정반대랍니다.

먹고 마시고 취하고 춤추자는 육(肉)적인 카니발과 건강한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영(靈)적인 카바나를 결코 혼돈하지 마시기를!


지난 목요일 노방 전도에 앞서 어느 환우를 심방하기 위해 한 건물의 엘리베이터에 교역자들이 올라타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잽싼(?) 저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공간이지만 함께 했던 교역자들이 나름대로 몸을 축소(?)시켜 드디어 다 탈 수 있었고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올라가지 않았고 문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몰랐습니다.

먼저 한 일은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의 숫자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교역자와 아내까지 열넷이었습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몇 명이 탈 수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몇 명인지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전체 2000파운드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열넷이 합하면 2000파운드가 된다 안 된다는 주장이 엇갈린 가운데 누군가 911에 연락하자고 했습니다.

번거로운 일이라고 제가 말렸습니다.

 

밖에 있던 사람들과 큰 소리로 대화하는 가운데 5분 있으면, 또 5분 있으면 오신다던 건물 supervisor는 계속 오시지 않고... 시간은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껴입었던 외투를 벗어야 할 정도로 땀은 나고...

공기가 희박해질지 모르니 숨을 조금씩 쉬라고도 하고...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불렀던 마지막 찬송이 무엇이었는지 묻는 자도 있고...

 

마침내 911을 부르니 쏜 살같이 달려와서 우리 열넷을 구해주었습니다.

몸을 추스려 올라가니 누워 있어야 할 환우가 우리를 걱정하며 일어나 맞아 주었습니다.

예배 후, 늦었지만 둘둘 셋씩 노방전도 길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자성(自省)했습니다.

건물 안에 갇힌 사람을 구조하는데 911이면 충분한데 처음에 왜 내가 말렸을까.

 

그렇습니다.

죄에 갇힌 사람을 구조하는데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열넷만이 아니라 십사만사천 명도, 그리고 무수한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의 큰 무리도.


저는 지금 산호세의 한 숙소에 아내와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

“교회를 여러 날 떠나 계시려면 큰 아드님이 계신 곳이 좋겠습니다”라는 조언도 있으셨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여 큰아들이 가까이 있는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당회의 배려, 교직원들의 협조, 성도들의 기도, 그리고 주치의의 권고 가운데 쉼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급작스럽게 이런 시간을 가지고자 하여 스케쥴을 조정하였는데 교회 안팎의 일정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브레이크 없는 기차와 같은 사역이 멋진 줄 알았습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저의 “약한 부분”을 애써 외면하고 너무“강한 척”한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아무런 스케쥴 없이 성경과 책을 읽고 기도하고 사색하고 반성하고 잠자고 적당히 운동하고 적절히 식사하며 그동안 익숙지 않았던 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스케줄은 없지만 분명한 목표는 있습니다.

“회복!”

 

저는 지금“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 6:31)는 예수님 말씀 가운데는“잠깐”쉬고 몸도 마음도 새롭게 하여 앞으로 힘 있게 사역하라시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하며 지금의 쉼을 단순한 저 자신의“회복”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앞날”을 위한 시간으로도 보내고 싶습니다.

 

교우 여러분. 기도해 주시고 계시지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저를 위해.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happy new year!”

한국에서는 새해 첫날을“설날”이라고 합니다.

“설”의 뜻은“낯설다”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제 낯 설은 날을 시작으로 2016년 새해를 걷고 있습니다.

이 낯 설은 새해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依支)입니다.

의지(依支)는 무엇인가에 기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낯선 새해에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매일 지팡이를 의지해야 하듯이 새해의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우리가 날마다 의지해야 할 분이 있습니다.

누구를 의지하며 새해를 걸어갈까요?

“....의지하세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찬송가 536장의 후렴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주님을 의지해야만 이 낯선 새해를 살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도 의지(意志)입니다.

의지(意志)는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에게 의지가 없다는 것은 그에게 이룰 목표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높은 목표가 없는 사람에게는 거기에 걸맞는 꾸준한 행동도 없습니다.

성경을 통독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 어찌 꾸준히 매일 성경을 펴겠습니까?

체중을 조절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 어찌 꾸준히 매일 30분씩 운동하겠습니까?

그 자신에게 그 어떤 의지도 없는데 누가 도운들 무슨 선한 열매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라.

그리고 자신의 의지(意志)를 가지라.

이 두“의지”가 있는 사람의 낯선 새해는 실패할 리가 없습니다.

신년벽두(新年劈頭)부터 의지(依支)와 의지(意志)로 걸어가면 반드시 남다른 2016년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빈자리, 언젠가는 떠들썩했는데 지금은 조용한 곳.

조용해서 좋겠다고요?

아뇨. 빈자리가 싫습니다.

그리움에 아프고 기다림에 지친 빈자리는 싫습니다.

 

10월 23일, 기다리는 사람들이 와서 앉아 주길 바라며 우리 모두는 빈자리를 채울 초대장을 나누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날도 여전히 그 자리 위로 예배당 공기만 스쳐 지나간다면, 아버지는 마음을 달래시기가 힘드실 것이고, 우리들의 속도 꽤 쓰릴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는 가을새벽부흥회.

23일에 빈자리가 없게 해달라고 기도할 그 자리에 설마, 당신이 만들 빈자리는 없겠지요.

 

만일 당신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내일부터 빈자리로 만들어 놓는다면...

당신의 그 빈자리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일주간 내내 버젓이 앉았다가, 10월 23일에도 아예 아무도 앉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내일부터 채워주세요, 기도의 빈자리가 없도록 꽉꽉.

데워주세요.

10월 23일, 그 사람이 따듯하게 앉을 수 있도록.


어렸을 적에 술래잡기 놀이는 재미있었습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아이들의 노래처럼 저도 잘 숨었습니다.

한동안 술래가 못 찾으면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덜컥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술래와 다른 친구들이 아예 나를 잊어버린 건가.

이러다가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 누가 와서 나를 잡아가면 어떡하지...”

이렇듯 숨어 있는 곳은 계속 재미있거나 편안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먼 옛날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대답했습니다.

“부끄럽고 두려워 숨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그 날 그 후, 아담의 후예들은 여러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고 숨어 있곤 했습니다.

뭔가 불편하거나 부끄러우면 숨을 자리를 찾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 이름 부르며 물으십니다.

“____________아(야),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의 있는 곳을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너무 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집으로 왔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집으로 왔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오니 너무 행복합니다.


뱅쿠버에 계신 셋째 누님은 올해 만 74세, 가족 카톡방에 올리시는 글들은 문학소녀 (文學少女)의 편지와도 같습니다.

얼마 전 담석의 아픔에서 치유 받으시고 이런 감사의 글을 쓰셨어요.

 

한량없는 주님의 은혜와 자녀들의 최고의 사랑과 격려, 생각만 해도 뜨거운 가족들의 기도가 저를 일으켜 세웠지요.

지금도 고마운 눈물이 흐르네요.

 

지난 목요일에는 이런 가을편지를 가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가을 하늘이 너무 맑고 온 천지가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 경이롭지요.

“행복”의 뜻을 음미하며 오래된 가요지만 주옥같은 곡과 가사와 부르는 분들의 목소리가 가을과 함께 애틋이 다가오네요.

 

늘 찬송과 복음송을 즐겨 부르시고 카톡방에 올리시던 누님이 그 날 올리신 노래 가운데 뜻밖에 이동원의 “가을편지”라는 곡이 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누워계시다가 몇 년 전 하늘나라에 먼저 가신 매형님을 몹시도 그리워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동원의 가을편지를 들으며 74세 문학소녀, 누님의 가을앓이가 동생 목사의 마음에 저미어왔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이동원의 가을편지)

 

이 가을, 어디선가 외로움의 아픔을 앓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그대 삼아 주님의 마음을 담은 가을편지를 띄어 보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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