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서로 인사할 때 “마라나타!”라고 외쳤습니다.

원문 성경 고린도전서 16 장 22 절에 나오는 “마라나타”는 우리 성경이 번역한 대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제 곧 우리 주님이 오십니다.

어떤 어려움도 잘 참고견딥시다.”라는 의미로 마라나타를 그들의 인사로 삼은 것입니다. 

오늘날은 초대 교회의 상황이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외칠 것도 마라나타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요한계시록을 강해합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에도 마라나타를 풀어 쓴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22:20)라는 간절한 외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나타의 신앙을 일깨워 줄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잘 이해하시고 요한계시록 전체를 읽으시며 사순절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험한 세상을 넉넉히 이기시는 모든 교우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1-3 장에는 서론과 일곱 교회 이야기가 있다 

4 장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 예배 광경이 보인다

 

5,6 장에는 일곱 인이 떼어진다 

7 장에는 많은 무리가 예배드리는 광경이 있다

 

8,9 장에는 일곱 나팔 이야기가 있다 

10 장에는 일곱 우레 소리가 있다

 

11 장에서는 두 증인이 죽는다 

12 장에는 용과 여자의 싸움이 나온다

 

13 장에는 666 숫자가 나온다 

14 장에는 144,000 명이 나온다

 

15 장에는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가 있다 

16 장에는 일곱 대접이 부어진다 

17 장에서는 음녀가 망한다 

18 장에서는 바벨론이 망한다

 

19 장에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있다 

20 장에는 천년왕국 이야기가 있다 

21 장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인다 

22 장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우리 모두가 가슴 저미게 외치고 외칠 그 말, 마라나타! 마라나타!

   


스펙은 제품설명서를 뜻하는 specification 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펙이 좋다는 것은 남다른 기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펙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남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궁금해 하고 스펙이 많고 다양한 사람일수록 대단히 여기는 풍토가 있습니다.

 

스펙으로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의 화려한 스펙보다 더 찬란한 스펙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두바이에는 세계 최고의 칠성급(七星級)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최고의 호텔이었던 5 성급 호텔을 누른 7 성급 호텔이 탄생했다면 그 언제가 9 성급 호텔도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라 스토리입니다.

스토리는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스토리가 쏟아져도 걱정하거나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스토리를 빼앗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시간과 장소는 스펙처럼 특별한 곳과 특정한 때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日常) 속에서도 남다른 특이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낫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펙의 사람이고, 남들과는 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토리의 사람입니다.

스펙을 지향할 것인가 스토리를 지향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은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스펙보다 스토리가 자신을 더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조금 더 다가가면 모든 일상 속에서 나의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간다면 위대한 영적 스토리–간증까지 생긴답니다.

스펙의 시대에 스펙이 없어도 당당함을 뛰어 넘어 압도하는 사는 길, 스토리의 삶입니다.


일주일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2015 년 사순절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한 걸음씩 내디딘 걸음이 머잖아 부활절을 지날 것이요, 그 언젠가는 주님의 존전 앞에도 이를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으실 질문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기철 목사님은 이런 글을 옥중에서 남기셨습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른 것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이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리이까?”

목사님은 주님께서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할까를 늘 생각하면서 이 땅을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목사님은 5 년의 옥고(獄苦)를 치르면서도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시고 47 세이시던 1944 년 4 월, 가장 아름다운 고난의 잔, 순교(殉敎)로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아흔 여섯 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2015 년 삼일절을 맞고 있습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그 해 열일곱 살 꽃다운 나이의 여학생 유관순은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소망의 미래로 일깨우기 위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조선의 해방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다 함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나는 대한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 만 18 세가 되기도 전(前)인 1920 년 9 월 순국(殉國)한 어린 소녀의 마지막 말은 이랬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스펙은 제품설명서를 뜻하는 specification 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펙이 좋다는 것은 남다른 기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펙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남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궁금해 하고 스펙이 많고 다양한 사람일수록 대단히 여기는 풍토가 있습니다.

 

스펙으로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의 화려한 스펙보다 더 찬란한 스펙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두바이에는 세계 최고의 칠성급(七星級)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최고의 호텔이었던 5 성급 호텔을 누른 7 성급 호텔이 탄생했다면 그 언제가 9 성급 호텔도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라 스토리입니다.

스토리는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스토리가 쏟아져도 걱정하거나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스토리를 빼앗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시간과 장소는 스펙처럼 특별한 곳과 특정한 때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日常) 속에서도 남다른 특이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낫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펙의 사람이고, 남들과는 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토리의 사람입니다.

스펙을 지향할 것인가 스토리를 지향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은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스펙보다 스토리가 자신을 더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조금 더 다가가면 모든 일상 속에서 나의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간다면 위대한 영적 스토리–간증까지 생긴답니다.

스펙의 시대에 스펙이 없어도 당당함을 뛰어 넘어 압도하는 사는 길, 스토리의 삶입니다.


내일부터는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자 고난주간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지만 그 너무나 힘겨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이토록 아름다운 일곱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첫째 말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고통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품으신 용서의 십자가여!

 

둘째 말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지옥 갈 도적을 천국으로 초청한 구원의 십자가여!

 

셋째 말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26,27)

새로운 가족 관계, 교회를 탄생시킨 사랑의 십자가여!

 

넷째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

내 죄 때문에 하나님께 대신 버림받은 희생의 십자가여!

 

다섯째 말씀: 내가 목마르다 (요 19:28)

주님의 목마름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사명의 십자가여!

 

여섯째 말씀: 다 이루었다 (요 19:30)

맡으신 일들을 온전히 이루신 승리의 십자가여!

 

일곱째 말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모든 것을 의탁할 아버지를 알게 해 준 안식의 십자가여!

 

생각해 보니 이천년 전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울려 퍼진 일곱 말씀은 모두가 우리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애절한 그 사랑의 말씀이 너무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아 시린 가슴을 눈물로 쓰다듬어 봅니다.

 

어느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이상한 욕을 듣고 살게 되었답니다.

간암 말기 진단을 받은 그는 3 개월 밖에 못 산다는 최후통첩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시한부 인생임을 자신도 주변의 모든 사람도 다 알고 눈물로 하루하루 지내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를 보고 “살 놈!”이라고 외치고 지나 간 것입니다.

놈이란 욕을 들어 언짢았으나 그 앞에 있는 수식어에 너무 감동이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곧 “죽을 놈!”이라고 여기며 지내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말은 안 해도 자기와 똑같은 시각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뜬금없이 “살 놈!”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이 시한부 인생의 시각은 그 때부터 바뀌었습니다.

“나는 죽을 놈이 아니다.

나는 살 놈이다.

나는 살 수 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삶에 대한 뜨거운 용기를 가지고 말이나 태도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없이 들어도 좋은 나는 “살 놈!”

 

그 시한부 인생에게 “살 놈!”이라고 욕(?)하신 분은 다름 아닌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시한부 인생에게 “살 놈!”이라고 욕한 것이 아니라 “샬롬!”이라고 인사한 것입니다.

평안을 기원한다는 “샬롬”을 “살 놈”으로 잘 못 들었으나 아무튼 그는 교회도 다니고 기도도 하면서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샬롬”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로 화목의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미안한 표현이긴 합니다만 우리 모두는 “살 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크게 이해를 간구하며 인사합니다.

오해 없이 들어주십시오.

하지만 그 내용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살 놈이여 샬롬!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여성들이여, 관계에서 성공합시다”라는 주제로 여선교회 연합 수련회가 quality inn 에서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가졌던 작년과 달리 오랜만에 외부에서 갖는 수련회이어서 그런지 모두 새로운 분위기 속에 은혜롭고 즐거운 2 박 3 일의 일정을 보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강사 정정숙 전도사님의 네 차례에 걸친 말씀은 모든 여선교회 회원들에게 매우 유익한 교훈이요 지침이었습니다.

사실, 강사 전도사님의 줄기찬 외침은 하나였습니다. 모든 성공적인 관계는 나의 변화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의미 있게 회자(膾炙)되던 말이 있었습니다.

“내 탓이요”라는 단 네 글자의 짧은 구절입니다만 그 구절이 끼친 선한 영향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내 탓이오’라는 뜻은 영어로는 ‘my fault’로 표현하고 라틴어로는 ‘메아 쿨파/mea culpa’라고 말합니다.

‘내 탓이오(메아 쿨파)’는 문제의 원인을 다른데서 찾지 않고 자기성찰(自己省察)로부터 출발하는 태도로서 사회를 한결 밝게 해주었습니다.

 

젊은이들의 즐겨 부르는 ‘나로부터 시작되리’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그 가사의 마지막 부분은 ‘주의 꿈을 안고 일어나리라 선한 능력으로 일어나리라 이 땅의 부흥과 회복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가사는 교회부흥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가정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밝게 만들고, 교회도 부흥시키는 비결에는 모두 “내”가 담겨 있습니다.

“네 탓이다”하면 모두 무너지지만 “내 탓이오”하면 같이 살아납니다.

자, 이제 그대는 모두 무너지는 길로 가시겠습니까, 같이 살아나는 길로 가시겠습니까?

너무 고민 마시고 오늘 배운 라틴어 그 한 마디를 외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렇게 말이죠.

“메아 쿨파!”


저는 지난 주간에 올랜도에서 있었던 the gospel coalition conference (복음주의 연합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미국 전역과 세계 각국에서 모인 6,000명의 복음주의 목회자, 신학자, 선교사, 신학생 등이 모여 강의, 찬양, 패널토의 형식으로 진행된 컨퍼런스였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듯이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도“복음”밖에는 없음을 선포하고 그 선포에 걸맞은 내용들로 가득 찬 집회였습니다.

 

이번 집회에 참석하면서 아직 미국에는 순수한 복음에 대한 열망을 품은 목회자들과 교회가 많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내에 동성연애자들의 목사안수 허용을 비롯해 세속화된 신학 및 신앙이 보여주는 반성경적(反聖經的) 흐름이 만만치 않으나, 미국 전체의 영적 상황은 아직 절망할 수준은 아닌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린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또 하나 느낀 것은 서구(西歐)인들에게는 신앙의 내면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여러 면에서 엿보였는데 그중 하나, 집행부의 어느 누구도 무엇인가를 아무것도 당부하지 않았지만 수천 명이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에게서 배우려는 높은 공동체 의식은 장엄한 화음이었고 성숙한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임이 분명했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그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모였는데 뜨거운 기도의 시간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컨퍼런스에서 채워지지 않았던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기도 영성이 탁월한 한국에 맡기실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인 목회자 1세들은 많이 눈에 뜨이지 않았으나 1.5세, 2세의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적잖이 보였습니다.

그들이 향후 이런 큰 복음주의 집회에 리더십을 발휘하여 복음에 대한 강의뿐 아니라 복음을 복음 되게 하고 복음을 전진케 하는 기도의 불을 붙여 나간다면 복음주의는 이 시대에 결코 마이너리티(minority/소수)가 안 될 것입니다.

돌아와 금요일부터 다시 함께한 우리 교회 새벽기도회는 영적 호흡을 다시금 가파르게 해주었고, 다음 세대 가운데 균형 있는 복음주의 리더십 배출을 위한 기도제목을 더 추가시켜 주었습니다.


선교에 대한 열심이 특심하여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남미 과테말라로 달려간 미국의 젊은이 캐머런 타운센드(cameron townsend)는 그곳에서 사용하는 스페인어로 된 성경을 보급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과테말라 안에 사는 칵치퀼(cakchiquel) 인디언족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종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추장이 캐머런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똑똑하다면, 왜 우리 말은 할 줄 모릅니까?”

1917 년의 일입니다.

이 질문은 세계 선교역사를 새롭게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선교는 모두“나라”를 단위로 하여 접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 이후 선교는“언어종족” 단위로 접근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나라 안에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많은데 어떻게 그 나라의 공용어로 된 성경만을 가지고 선교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성(自省)이 캐머런에게 일어났습니다.

그 자성의 열매로 1929 년에는 칵치퀼 종족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1942 년에는 모든 종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다는 뚜렷한 비전을 가진 위클리프성서번역회(wbt: wycliffe bible translators)가 설립되었습니다.

선교의 최종 목표는 모든 나라, 족속, 백성, 방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요한계시록 7:9-10). 

이렇듯“종족 복음화”에 대한 개념은 이미 성경에 있음에도 교회역사는“종족 복음화”에 오랫동안 눈이 감겨 있었고 귀가 닫혀 있었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perspectives 훈련은 선교에 대한 관점을 매우 새롭게 해준 유익한 훈련이었습니다.

그중에 선교가“나라”보다“종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도 새롭게 깨달은 점입니다.

그리고“나라”에서“종족”으로 선교 초점을 바꾼 역사적인 질문을 100 년 만에 다시 받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당신들은 선교 대상을 이미 여러 차례 돌아보았고 또 많은 교회들이 반복해서 찾는 지역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왜 우리 같이 아무도 찾아보지 않는 땅과 종족에는 계속 무관심한 것입니까?”

자성과 함께 우리가 진지하게 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2 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철물점을 경영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 이른 아침 거칠게 생긴 로마군인이 들어와 아주 커다랗고 뾰족한 못을 찾았습니다.

마침 한 구석에 처박아둔 뾰족하고 큰 못이 생각났습니다.

오랫동안 팔리지 않아 녹슨 큰 못 세 개가 있어 내 보였습니다.

군인은 그거면 되었다고 돈은 던지듯, 못은 빼앗듯 하며 가져갔습니다.

철물점 주인은 안 팔리던 못이 팔리게 되어 수지맞았다고 생각하며 녹슨 세 개의 못을 가지고 뒤돌아 가는 군인에게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 녹슨 못을 무엇에 쓰려고 합니까?”

군인이 그 주인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를 못 박으려고, 왜?” 철물점 주인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판 못으로 예수님을 못 박는데 사용하려한다니.

“이봐요, 군인양반. 안 됩니다.

내가 판 그 못으로 예수님을 못 박는다고요?

그 것만은 안 돼요. 돈은 여기 있으니 그 못을 돌려주세요.

제발.” 군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며 가던 길을 갑니다.

“한 번 팔았으면 끝나거지 뭘 물러달라는 거야!”

 

얼마 시간이 지난 후 골고다 언덕에서 망치 소리가 철물점 주인의 귀에 들려 왔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자기가 판 녹슨 못을 망치로 내리치는 소리가 들였습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그 철물점 주인의 가슴에 져며왔습니다.

그는 몸부림치며 외쳤습니다. “아아, 내가 저 못을 팔지 말아야 했는데...”

 

“팔지 말아야 했는데...” 가롯유다도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후회했습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영원”을 팔아 “잠시”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혼”을 팔아 “육체”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어 버리라고 팔아버린 예수님,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을 값싸게 판자들은 내가 왜 그랬을까하며 벌벌 떨 것입니다.

끝까지 그 무엇으로도 예수님을 팔지 않은 자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팔지 말아야 했는데...” 후회의 탄식이 우리 것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이사라 집사의 묘” 저는 오랫동안 어머님의 이름이“사라”이신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묘지 앞 비석에 그렇게 분명히 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본명이 따로 있었습니다.

어머님의 본명보다 사라라는 이름이 마지막 묘비에 남아 있게 된 것은 어머니가 저를 서른아홉에 낳으셨기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처럼 늦게 아들을 낳았다고 주위 분들이 붙여 준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머니가 젊으셨을 때부터 “사라”라고 부르셨다고 합니다.

저를 낳으신 어머니는“성국이는 어떻게 하고?”라는 사람들의 외침과 여섯 살 반이었던 저를 뒤로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저에게는 그 낳으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보다 상상이 훨씬 많습니다.

“사라”라는 이름을 남기신 어머니가 어떻게 사셨을까 어떻게 기도하셨을까를 상상해보곤 하였습니다.

개나리 진달래가 흐드러진 봄날에 헤어진 낳으신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험한 시험 물 속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노한 풍랑 지나도록 나를 숨겨 주소서 주여 나를 돌아보사 고이 품어 주시고 험한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 주소서”

저의 새 어머니가 가장 많이 부르신 찬송입니다.

때론 눈물도 흘리시면서 부르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점점 그 곡조와 가사, 그리고 그 눈물이 저의 것이 되어 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섯 명의 자녀가 있는 가난한 집에 오셔서 몸도 마음도 힘드시고 어려우 실 때마다 그 찬송은 위로가 되셨을 것입니다.

저를 길러주신 새 어머니는 제가 태평양같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불 같이 뜨겁게 설교하는 목사가 되길 기도해 주셨습니다.

살아생전 태평양 같고 불같은 아들의 모습을 못 보셨고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언제나 그렇게 될까 바라보고 계실 기르신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훗날 천국에 올라가 낳으신 어머니와 기르신 어머니를 다시 뵈올 때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도 복음을 들고 달려갈 길을 달리겠노라 다짐해봅니다.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길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 합니다 어머님!!


스승, 그 위대함이여!

 

5월 15일, 스승의 날. 언제부터인가 스승의 날은 부끄러운 날이요 잊고 싶은 날이 되었습니다.

부모들로부터 촌지(寸志)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 아예 스승의 날에 부모가 학교를 찾는 것을금지시키는가 하면, 스승들이 가르치는 제자 또는 그 부모들로부터 폭행 폭언을 당하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이 서글프다 하여도 스승의 위대한 가치를 손상(損傷)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이 그 척박한 상황 속에서 말과 문화와 신앙을 유지하며 각 시대에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자들을 계속 배출한 것은 유대인 교육에 있고 그 교육의 자리에 랍비(스승)들이 견고히 자리 잡고 있는 것에 있습니다.

위대한 스승 없이 의미 있는 인물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묵묵히 기도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수고하시는 교회학교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힘든 뿌리가 되어 나무 같은 영광을 우리 아이들이 누리라고 희생해 오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뿌리가 나무에게

이현주

 

네가 여린 싹으로 터서 땅 속 어둠을 뚫고 태양을 향해 마침내 위로 오를 때

나는 오직 아래로 아래로 눈 먼 손 뻗어 어둠 헤치며 내려만 갔다.

 

네가 줄기로 솟아 봄날 푸른 잎을 낼 때

나는 여전히 아래로 더욱 아래로 막힌 어둠을 더듬었다.

 

네가 드디어 꽃을 피우고, 춤추는 나비 벌과 삶을 희롱 할 때에도

나는 거대한 바위에 맞서 몸살을 하며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바늘 끝 같은 틈을 찾아야 했다.

 

어느 날 네가 사나운 비바람 맞으며, 가지가 찢어지고 뒤틀려 신음할 때

나는 너를 위하여 오직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었으나

나는 믿었다. 내가 이 어둠을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있는 한 너는 쓰러지지 않으리라고

 

모든 시련이 사라지고 가을이 되어 네가 탐스런 열매를 가지마다 맺을 때

나는 더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잎 지고 열매 떨구고 네가 겨울의 휴식에 잠길 때에도

나는 흙에 묻혀 가쁘게 숨을 쉬었다.

봄이 오면 너는 다시 영광을 누리려니와

나는 잊어도 좋다. 어둠처럼 까맣게 잊어도 좋다.


은혜의 강물이 넘쳐 흐르게하라

사랑하는 우리 교우들의 기도 가운데 저는 우리 교단 제 39회 총회를 총대 장로님들과 함께 잘 다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라질 이과수 지역에서 열린 총회는 지역 분위기와 맞게 그 주제도 "은혜의 강물이 넘쳐 흐르게하라"였습니다.

 

모든 회의가 그렇지만 일 년에 한번 모이는 교단총회에는 산적한 안건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대부분의 안건이 많은 논의를 거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총회의 주제처럼 은혜의 강물이 넘쳐 흘러서 수년 동안 갈등을 겪고 있던 노회가 하나 되는 일도 있었고 많은 교단의 발전적인 결론들도 도출되었습니다.

 

이번에 우리 교단의 세계선교대회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두 명의 선교사 파송 식도 있었습니다.

한 분은 캠퍼스 사역을 하시게 되고 다른 한분은 아마존 강을 타고 다니시며 선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위험한 정글 속에 펼쳐진 아마존 강도 언젠가는 은혜의 강물이 되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총회 중 회의를 잠시 정회하고 총대들이 이과수 폭포를 다녀왔습니다.

듣던 대로 이제껏 보았던 폭포들과는 규모가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 웅장한 이과수 폭포의 물줄기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넘치게 흘러왔고 앞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흘러올 은혜의 강물과 견주어 생각해 보니 아주 초라한 물줄기에 불과해 보였답니다.


어느덧 5 월 31 일이 되었습니다.

5 월, 가정에나 교회에는 물론 개인이나 나라에서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월요일만 해도 전교인 한마음 축제, 어제는 함께하는 선교 바자회가 있었습니다.

모든 교구와 선교회에서 마음을 모아 주었기에 풍성한 은혜를 나누며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에 뜻을 힘 있게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함께한 모든 분들의 수고와 정성에 감사를 드립니다.

 

역사 속의 5 월은 늘 그렇지는 않았는가 봅니다.

슬픈 5 월을 보내고 6 월을 맞이하여서도 힘겨웠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그 주인공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느 해 일기”에 따르면 그분의 5 월과 6 월 초는 이랬습니다.

 

5 월 5 일 오전: 세인트 앤 교회에서 설교. 그들의 반응 “가서 다시 오지 마시오!”

5 월 12 일 오전: 세인트 유다 교회에서 설교. 다시는 그곳에 갈 수 없음.

5 월 12 일 오후: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설교. 다시 쫓겨남.

5 월 19 일 오전: 세인트 앤드류 교회에서 설교. 다시 오지 말 것을 요청받음.

5 월 19 일 오후: 거리에서 내쫓겼음.

5 월 26 일 오전: 초원에서 설교. 풀어 놓은 황소에게 쫓김.

6 월 2 일 오전: 마을 변두리에서 설교. 경찰에게 추방당함.

6 월 2 일 오후: 어느 목장에서 설교. 일만 명의 사람들이 참석!!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6 월 2 일 오전에 “이만하면 됐다.

내가 이토록 복음을 위해 노력해도 사람들은 몰라주고 내 마음과 몸만 고달프니 전도자의 삶을 이제는 포기하자.”라고 했다면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삶과 기독교의 역사가 아름답게 바뀌지 못했을 것입니다.

6 월 2 일 오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요한 웨슬레 목사님에게 대반전의 시간이 찾아 왔습니다.

일만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설교를 듣고 그 삶을 주님께 의탁했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 사역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6 월 2 일 오후는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잊지 말고 끝까지 견뎌야 하겠습니다.

6 월 2 일 오후까지는 말입니다.

어? 그리고 보니 내일모레가 6 월 2 일이네요!


지난주일 오후에 성경 암송대회가 있었습니다.

연세 많으신 사모님으로부터 신학을 꿈꾸는 고 3 학생까지 여러 교우가 사순절 때 주어진 36 구절의 요한계시록 말씀을 외워 펼친 열띤 암송대회였습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긴 성도들의 모습이 참 귀했습니다.

그 날, 긴장과 흥미 속에 진행되던 암송대회에 출연한 유아부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

드레스 또는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어린이들이 나름 진지한 눈빛에 작은 입을 열어 말씀을 곡조에 실어 암송한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교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아, 예뻐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이들은“아, 예뻐라”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5 월은 가정의 달인데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가 예쁘다고 노래한 믿음의 시인이 있습니다.

임종호 시인의 “어린이”를 들어 보십시오.

 

어린이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보배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상으로 보내어 행복의 웃음꽃

피우게 하는 신비로운 보배

 

이 세상의 희망

우리나라의 희망

우리 교회의 희망

우리 마음의 희망

우리 집의 희망

 

알아줘야 하고

믿어줘야 하고

기대를 걸어줘야 하고

기다려줘야 하고

돌봐주고

사랑해줘야지

 

아, 예뻐라

 

시인은 어린이를 보고 예쁘다고 감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알아줌과 믿어줌, 기대와 기다림, 그리고 돌봄과 사랑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오늘뿐 아니라 언제나 벅찬 감탄과 복된 행동이 우리 어린이들에게 부어진다면 그들이 빚을 미래는 참 맑고 밝을 것입니다.


캄보디아 시엠립에는 우리 교회가 지은 건물이 있습니다.

드넓은 땅에 이 층으로 지어진 건물은 예쁘고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일행을 맞아 주었습니다.

이곳에서 현재 주일 예배가 드려지고 있고 주 중에는 영어 교육이 진행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유치원 사역을 곧 시작할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오후, 우리 선교지에서 20 분 가까이 떨어진 곳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사역을 하고 계신 선교사님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였고 그 질문을 뛰어넘는 유익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9년째 캄보디아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는데 2 년은 프놈펜에서 언어를 배웠고 7년은 시엠립에서 한국에서부터 그토록 하고 싶으셨던 어린이 선교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외가 거의 없다시피 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는 어린이들을 모아 성경 말씀도 가르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독신 여성으로서 잘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운영하는 곳은 우리 건물과 달리 10년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유치원 초등학교가 있는 곳에는 망고나무가 많이 있엇고 그 땅 주인이 매년 수확기가 되면 따서 내다 팔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간간이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올해는 아이들이 유난히 많이 망고 열매를 따서 먹었다고 합니다.

땅 주인이 선교사님에게 문제로 삼아 항의와 경고를 하였답니다.

선교사님이 너무 속이 상하셔서 아이들을 전체 조회로 불러 세우셨답니다.

 

아이들이 망고가 심겨 있는 이 땅의 무서운 주인을 떠올리며 겁에 질려 대답할 것을 예상하며 “이 땅이 누구 땅입니까?”라고 다그쳐 물었답니다.

어린이들이 합창하듯 대답한 내용은 선교사님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땅이요!”

저는 그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뻔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이 땅에서 기독교 유치원 교육을 꼭 그리고 잘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다졌습니다.


알마티 퀸즈장로교회에는 21 년 동안 교회를 섬겨오신 따시아 알렉산드리아 권사님이 계십니다.

교회의 모든 일에 아무 말 없이 봉사하시고 기도에 앞장서신 권사님이십니다.

권사님이 아프신데 그 자녀들이 저와 선교팀이 와서 기도해 주었으면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목요일 오전 김관중 선교사님 내외분과 우리 선교팀이 권사님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말없이 봉사하시는 이유는 조용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기도 하지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집으로 심방해 보니 신장도 안 좋고 혈압도 높고 발은 퉁퉁 부어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살림은 매우 궁색해 보였지만그의 믿음만은 부요했습니다.

 

그의 딸 이리나 니깔라예보나는 장애인이 많은 알마티 퀸즈장로교회에서 수화 통역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장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도 십일조만은 철저히 드린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 간증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쎄리게이 니꼴라예보치는 권사님의 아들인데 이혼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술로 마음의 상처를 달래곤 하던 그는 교회의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신학을 공부하여 알마티 퀸즈장로교회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권사님의 외손주들이자 이리나 니꼴라예보나의 아들들은 교회의 찬양팀을 열심히 섬기고 있었습니다.

따시아 알렉산드리아 권사님의 말 없는 봉사는 대를 이어 알마티 퀸즈장로교회를 강건케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 안에 말 없는 봉사만큼 아름다운 봉사는 없는 것 같고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교육만큼 강력한 신앙교육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잘 안 지켜지는 약속들이 여럿 있으시지요?

그중에 “언제 같이 한 번 식사해요.”라는 약속이 앞자리를 차지할 것 같습니다.

잘 안 지켜지는 약속이지만 적어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표현이며 더 나아가 좋은 우정을 맺고 싶다는 의사(意思) 표시입니다.

식탁(食卓)은 서로를 향한 열림의 자리요, 회복의 자리요, 친밀의 자리요, 기쁨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식탁의 교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그 식탁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식탁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베푼 디베랴 호숫가 식탁의 자리에서처럼 용서의 표현이시기도 하고, 죄인들과의 식사자리에서처럼 그들과 친구 되고 싶으시다는 강력한 메시지의 나눔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훌륭한 식탁을 준비하시어 초청하십니다.

내일부터 있을 전교인 여름 수련회의 성찬(盛饌)입니다.

시편 23 편 5 절에 보면 다윗이 만난 목자(牧者)는“내게 상을 차려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 수련회에서 내가 꼭 먹어야 할 양식을 잘 차려 주실 것입니다.

그 양식으로 영적 강건함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반전(反轉)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무튼, 식사초청장을 이 지면으로 제가 대신 전하오니 넓은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초청장

이박삼일간 믿고 먹는 영적 산상 뷔페!

식재료: 하늘産

2015년 여름특선요리를 위해 특별 요리사 한국에서 초빙!

안와서 후회 말고 알아서 후히 먹자!

초청인 "너의 선한 목자, 예수"


그날, 그 시간의 조짐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1941 년 12 월 7 일 오전 7 시 50 분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전투기가 하늘을 덮고 날아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해 수많은 미군 전함과 비행기를 폭파했고 2 천 명이 넘는 군인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하와이 공격은 아무 조짐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본이 미국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제보도 있었고, 진주만 연안의 일본 상선들이 스파이처럼 보인다는 첩보도 있었고, 진주만 연안 200 마일 지점에 잠수함이 있다는 정보도 있었고, 심지어 그날 아침 7 시에 미군 레이더에 수백 개의 새까만 점이 미국을 향해 오고 있다는 다급한 보고가 있었어도 그 모든 경고를 받은 자들마다 그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레이더에 포착된 새까만 점들은 진주만을 폭격하려는 일본 전투기였는데 그 보고를 받은 당직 장교의 말은 이랬습니다.

“별거 아냐, 신경 꺼! (well, don't worry!)”

 

신(神)도 가라앉힐 수 없다고 큰소리치며 출항한 타이타닉호에 다른 배의 선장으로부터 전문(電文)이 왔습니다.

‘타이타닉호 선장께.

서쪽으로 향한 증기선들이 북위 42 도, 서경 49~51 도 사이에 빙산과 작은 얼음덩이 및 얼음 벌판을 보고하고 있음. – 바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타이타닉호의 무전사들이 무시하다가 몇 번씩 계속 오는 전문에 마지못해서 그것을 선장에게 갖다 주었고, 선장이 그 배의 소유주에게 그 전문을 건네주었을 때 그는 그것을 꾸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습니다.

별거 아닌 줄 알고 신경을 껐으나 타이타닉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사람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괜찮겠지 뭐”하는 정부의 허술한 초기대응과 “나 하나쯤이야”하는 시민들의 안일한 보건의식이 한국에서 전염병 메르스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첫 이유로 꼽히는 데는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눅 21:11),”마지막 심판이 이르기 전의 징조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온 세상에서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목격되고 있는데“별거 아냐, 신경 꺼! (well, don't worry!)”의 태도가 내게는 없는지요?

퀸즈장로교회가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있음을 오늘 단기선교사 파송예배를 통해 드러내고자 합니다.

전염병의 확산보다 더 빠르게 복음의 확산이 있도록 우리 모두 분연히 일어나 헌신합시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는 사도행전 8 장 4 절 같은 삶은 누가복음 21 장 11 절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가벼운 흙먼지를 날리며 택시가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적잖은 체중의 한 부인이 지팡이를 의지하며 한참 만에 마당에 내려오셨습니다.

그 마당에서 부엌을 향해 놓인 계단은 불과 다섯 개의 짧은 계단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그 계단으로 오르시려다가 끝내 포기하시고 경사진 곳으로 돌아가 부엌 안으로 사라지셨습니다.

중국 도착 첫날, 운남 성에서 오고 있는 현지 지도자들을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 눈에 비친 그 부인의 모습은 오랫동안 몸 관리를 제대로 안 하셔서 큰 불편을 겪으시는 수양관 여주인이셨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운남성에서 출발하신 분들이 도착하셨고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들과 함께 교회지도자 세미나는 시작되었습니다.

사역이 자유롭지 못한 현장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참석한 현지 지도자들이 세미나가 진행되는 몇 날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회복의 시간을 갖는 것을 여실히 보았습니다.

 

다른 선교팀보다 앞서 귀국하기 위해 지난 목요일 밤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제 숙소로 돌아오려 할 때에 그 마당까지 나와서 제게 기도부탁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그 부인이었습니다.

첫날 이후 간간이 몇몇 사람들과 식사 준비를 하던 그분을 뵈곤 하였는데 그는 결코 자기관리가 소홀했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몇 달 전 그 부인의 가족이 탄 차가 교통사고를 당하였을 때 그 자리에서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부인은 마음도 몸도 깨어진 어려운 상태에 있다가 이번 세미나 앞에 몸과 마음을 추스려 지팡이를 의지하여 일어나 그 불편한 부엌을 드나들며 우리를 섬겼던 것입니다.

제가 첫날 쉽게 판단했던 그 마당에서 그 부인을 가운데 두고 우리 단기선교팀이 둘러섰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니 그 부인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왜 저렇게 밖에 못하는 거야?”라고 우리가 쉽게 판단하던 그 사람은 서는 것도 기적이요 걷는 것도 기적일 수 있고, 흐르는 눈물을 남 몰래 닦으며 나름대로 생명을 다해 교회를 섬기는 아름다운 분일 수도 있음을 깨달은 그 마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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