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위에서 앞으로”는

퀸즈장로교회 역사관의 이름입니다.
우리 교회 47년의 역사는

위에서-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총의 역사입니다. 

앞으로-앞으로만 전진했던 역사요 또 미래를 향해 나아갈 역사입니다.

 

아직은 그 규모가 작지만....

첫걸음에는 장영춘 목사님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훗날 적당한 공간을 찾아
다양한 우리 교회 역사 이야기를 더 담아낼 것입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위에서부터의 은총임을 잊지 않는 이야기,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가면서 또 만들 이야기가 담길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 설립 47주년 기념 주일.

하나님께 감사 찬송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47년, 그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를 섬겨 오시고
팬데믹 상황에서도 기둥같이 버텨주신 교우들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교회를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존경하는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말씀과 기도와 눈물로 교회를 이끄셨던 사랑하는 목사님이 많이 그리운

47주년 기념 주일 아침입니다.


기도는 교제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하나님과 친하시군요.

기도는 향기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매우 향기로워요.

기도는 간구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많은 것을 얻겠어요.

 

기도는 맡김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이제 편하실 거여요.

기도는 습관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예수님의 습관과 같네요.

기도는 능력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는 고백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모두 용서받을 것입니다.

기도는 묵상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더 성숙되시겠네요.

기도는 옮김입니다.

기도하는 그대는 산을 옮기겠군요.

 

하나님이 받으실 거여요.

사순절에 기도하는 그대를.

예수님이 기쁘실 거여요.

사순절에 기도하는 그대가.

성령님이 도우실 거여요.

사순절에 기도하는 그대를.


키질 하고 또 키질 하면 날라 가는 것이 있고 남는 것이 있습니다.
쭉정이는 날라 가고 알곡은 남습니다. 남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키질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우리를 키질했는데 탐욕, 미움, 불평 등이 남아있다면 너무 부끄러울 것입니다.

 

다들 그러시겠지만 저도 저를 키질하면 무엇이 남을지 궁금합니다.

당장은 그렇지 않더라도 꼭 남았으면 하는 것들이 있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망·애(··)입니다.
다른 것은 다 날라 가도 믿음, 소망, 사랑이 남아있다면

내 삶은 너무 멋질 것 같습니다.

 

믿음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암담한 현실에서 그 너머 희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사랑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고난은 분명히 우리를 키질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키질 속에 이 셋을 남길 수 있다면 최고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제게는 고난의 키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키질이 무엇을 남길 것인지 마음을 조아리며 쳐다보고 있습니다.

신·망·애(··)는 아닐 것 같아....
마음은 부끄러움에 이미 붉어졌고, 그 마음은 벌써 콩닥콩닥 뛰고 있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가 헤롯왕에 의해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두 군인들 사이에서 두 쇠사슬로 묶여있었습니다.
그 감옥 밖에는 파수꾼이 또 따로 베드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죽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교회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밤에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냈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 늘 놀라운 기적이 있었습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기도할 때 기적을 허락하셨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닫힌 문이 열리기도 하고 열린 문이 닫히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과연 기도를 통해 하늘 문을 열고 닫는 교회일까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려울 때 불편과 염려를 드려 죄송합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 금식도 하시고 기도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여러 날 제 몸 곳곳을 짓눌렸던

고통의 착고(着錮)들이 하나씩 풀리고 있습니다.

 

기도로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우리 교회 때문에

저는 곧 다시 일어나 교회로 달려갈 것이고

우리는 또 위대한 행진을 새롭게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새로운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성경통독 입니다.
예전에 성경통독의 시간들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비드 시간에 Zoom으로 하는 성경통독은 처음입니다.

 

성경통독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기대되는 시간입니다.

덤덤히 지나는 시간도 있지만 낭독자나 통독자가

어느 말씀에 깨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깨달음과 놀라운 비전을 찾기도 하고,

말씀 속에 진정한 나를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한 번 시작한 것을 중간에 슬쩍 그만둔 적이 없습니다.

힘들어도 그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기왕 할 때 항상 탁월함을 추구했습니다.
시간을 잘 조정하시어 올해의 성경통독에 완주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완주의 축복과는 견줄 수 없는 놀라운 축복들이 쏟아질 것입니다.

 

자, 우리 모두 성경통독 앞으로!


969년 발표되어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애창되는
프랭크 시나트라의“My Way”는 이렇게 그 가사가 전개됩니다.

 

이제 끝이 가까워져서/ 내 삶의 마지막 막이 내려가려 하네
내 친구여, 확실히 말해둘 게 있다네/ 잘 알고 있는 나의 이야기들 말일세

난 충만한 인생을 살았고/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가보았다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는 것이네 (I did it my way).

 

사람마다 my way 곧 나의 길, 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 my way가 멋진 그의 소신일 수도 있고, 안쓰러운 그의 고집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또 다른“My Way”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천년 전. 사도 바울이 불렀던 마이 웨이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바울의 my way는 소신도 아니고 고집도 아닙니다. 소명의 my way입니다.

그의“나의 달려 갈 길”은 결코 자신을 위한 길이 아닌 복음을 위한 길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 다른 이를 살리겠다는 길입니다.

 

오늘도 걸을 my way. 소신의 my way 입니까, 고집의 my way 입니까, 아니면 소명의 my way 입니까?


새해 들어서 벌써 세 번째 주일입니다.
지금 무엇이 크게 보입니까?
새해의 꿈입니까, 지난해의 후회입니까?
나이에 상관없이 꿈이 크면 청년의 삶을 사는 것이요

후회가 꿈을 대신하면 늙음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갈렙은 85세 때에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꿈을 크게 꾸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부자 관원은 청년이었음에도

앞날의 꿈을 접고 뒤로 내뺐습니다.

 

누군들 지난날에 아쉬움이 왜 없겠습니까?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일을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이런 아쉬움과 후회를 다 내려놓고 2021년의 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꿈을 꾸어 보아요.

요셉도 설레는 큰 꿈이 있었기에
현실의 어떤 고통도 넉넉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사실, 큰 꿈이 없다면
큰 내일도 없는 것이랍니다.
우리 같이 곰곰이 생각해 보아요.
지금 내겐 꿈이 큰지, 후회가 큰지요.


가로수 길에 서 있는 나무들.
가만히 보면 홀로 서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 주위에 버팀목이 서너 개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은 홀로 서 있는 나무도 맨 처음 그 나무를 심었을 때

한동안 그 주위에 어김없이 버팀목들이 있었습니다.

 

버팀목은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주목받기를 꿈도 꾸지 않습니다.
자기가 받쳐주는 나무가 어떤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잘 자라면서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주목을 잘 받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듯합니다.

 

내 인생은 홀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고비마다 나를 일으키고 지탱해준 여러 버팀목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선생님, 선배, 친구, 믿음의 가족들....
내 인생을 빚은 너무 고마운 분들입니다.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버팀목이 되어준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침묵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한 우리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견고한 버팀목 십자가 때문에 2021년 하루하루 어떤 세찬 바람 불어와도

우리는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매일매일 견고히 서 있을 것입니다.


2021년, 그 닻을 올렸습니다. 미래를 향한 출항입니다.

어떤 일이 있을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래를 지금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미래가 지금 왔다고 외칩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b)

 

미래가 현재로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나라인데 그 나라가 이미 현재에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미래는 미지의 영역도 두려움의 대상도 아닙니다.

 

미래가 여기에 왔습니다. 희망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습니다.

현재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점점 완성의 미래로 나갈 것입니다.

오늘에 찾아온 미래가 희망임을 보았기에
오늘은 두려움 없이 그 희망의 미래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현실의 고통이 높은 산이나 거친 들과 같이 거칠어도

이렇게 희망찬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사람마다 감동을 받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중에 이 노래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가사가 절절하고 선율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괴로움이 밀려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때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 while with me

당신이 내 옆에 앉으실 때까지 나는 여기에서 고요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있을 수 있고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당신이 나를 떠받쳐줄 때 나는 강인해 집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여기서“You”를“하나님”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2020년 힘든 세월을 보냈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2021년 신년 특별 기도회의 주제는“다시 일어나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힘드셨지요. 지치셨지요.
그래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다시.


시간에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세 시점이 있습니다.

과거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현재는 둘러보아야 합니다.
미래는 내다보아야 합니다.

 

돌아보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인간의 위대함을 얼마나 과시해 왔습니까.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우리 힘으로 이 엄청난 2020년을 살아낸 것이 아닙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온 나날입니다.

 

둘러보니 측량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지금도 임마누엘로 함께 계신 예수님.
오늘의 모든 필요를 넉넉히 채우시는 예수님의 은총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내다보니 측량할 수 없는 성령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미래의 보증을 우리에게 인치셨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잘 몰라도 우리의 미래가 성령님께 달려 있음은 확실히 압니다.

 

오늘은 2020년 성탄주일입니다.
오늘 오후 4시에는 성탄축하 찬양예배가 있습니다.
2020년 성탄축하 찬양예배의 주제는“측량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함께 모여 성삼위 하나님을 송축한다면 측량할 수 없는 은총을

베푸셨고, 베푸시고, 베푸실
성삼위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베일에 가렸던 북 카페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름은 “토기장이 북 카페”(Potters Book Cafe)입니다.

아주 예쁘고 멋진 카페가 지하에 만들어졌습니다.
커피 향기는 진하게 퍼지고 멋진 음악은 잔잔히 흐르고.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상처, 아픔, 두렴, 염려 다 가지고 오셔도
토기장이이신 하나님 손에 치유되고 새롭게 빚어집니다.

누군가와 함께 오시면 하나로 뜨거워지는 자리도 됩니다.

 

작년 여름, 전교인 수련회에 때에 하나님께 드려진 특별헌금이

거룩한 마중물이 되어 지난여름부터 공사를 시작해
이 겨울에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카페,
그 준비에 여러 사람들의 손길을 사용하셨고
이제 우리 모두의 발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향기와 서로를 향한 밝은 미소가 가득 찰 토기장이 북 카페.

기대되고 설레지 않으신가요?


일찍이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를“도전과 응전”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
역사를 멀리 조감하고 깊이 통찰한 자의 간결하고도 심원한 표현입니다.
예기치 못했던 도전들이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그 도전에 나 몰라라 눈을 감을 수는 없습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타협도 정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도전에는 단 하나 응전이 있을 뿐입니다.

 

역사는 어려운 도전에 적절히 응전함으로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일구어왔고

반대로 적절치 못한 응전은 역사 속에서 소멸되어 갔습니다.

2020년의 역사도 도전과 응전의 역사였습니다.
지난 11개월 내내 어렵고 어려운 일들이 물밀 듯 우리에게 도전해 왔습니다.

치열한 응전의 이야기가 한둘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역사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롭고 용기 있는 자들을 통해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재앙 같은 도전은 멋진 역사 이야기를 남기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지금까지 퀸즈장로교회는 그 어떤 도전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올해의 남은 한 달,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여러 도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도전을 항상 새롭게 비상하는 도약대로 삼았던 우리는
도전에 감사하며 담대히 응전할 것입니다.


지금은 몰라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일들을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한 없이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2020년에 행하시는 일들을

한계를 지닌 사람들이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몰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은 변치 않으시기에

교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이유를
내가 잘 모를 뿐, 무엇이 걱정 되겠습니까?

 

지금은 몰라도
감사가 넘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추수감사 주일인 오늘,
불안의 한숨보다 감사의 찬양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몰라도
언젠간 압니다.

그렇다고 그 언젠가만 기다리며 오늘을 쉽게 살겠다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래도 오늘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있을 터이니
지금 그것을 부단히 찾아 오늘도 성실히 행하려 합니다.


손가락이 열 개인 이유를 아시나요?

어느 시인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가가 엄마 배속에서
한달에한번손을꼽아보다가
열 번을 헤아리고 세상에 나오는 가 봅니다.
아가는 자기의 생명을 열 달이나 품어 준 엄마를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손꼽아 보아요.
열 손가락을 열 번 접었다 펴도 다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받은 축복을 헤아려보지 않고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가 봅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고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안녕하세요.
주일 잘 지내고 계시지요.
저는 지금 교우 여러분들의 기도 가운데
이곳 영생장로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혼자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우들의 간절한 기도가

함께함을 매시간 생생히 느끼는 현장입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아침에는 이곳에 계신 우리 퀸즈장로교회 출신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식사의 시간을 가졌답니다.
이곳에는 우리 교회에서 성장하시고 사역하셨던 목사님들도 계십니다.

복음을 위해 진력하시는 그들을 뵈면서
다음 세대를 향한 우리 교회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았다면 웃음이 그치지 않았던 이야기가 결코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우리 모두는 멀리 흩어져 있어도
여전히 한 가족임을 다시 확인한 시간이었습니다.

퀸장의 가족 됨이 이렇게 귀하다는 것을 멀리(?) 나오니 새삼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가족임이 맞습니다.
그래서 이토록 여러분을 뵙고 싶은 것 같습니다.
이제 곧 필라에서 뉴욕으로 올라갑니다. 가서 뵙겠습니다.

어려울 때 조심하며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팬데믹의 바람은 거셌습니다.
많은 것들을 앗아간 바람이었습니다.
잃은 것이 많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잃기만 한 것은 아니라 얻은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은 늘 손익을 계산하시지요?

우리도 이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얻었는지.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의 꿈을 잃었습니다.

꿈을 잃었다고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꿈을 잃고 나서야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굳이 이루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음을 안 것입니다.

부질없는 것을 앗아간 팬데믹은
가장 중요한 것을 얻게 하였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지난주 전 세계의 관심을 끌어모은 미국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 누구든 선거의 결과에서 잃은 것만 가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선거의 패배를 통해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 같은 그 자리는
진짜 보석을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자리임을 누구도 간과해서는 안 된답니다.


11월 3일 화요일 내일모레는 미국의 Election Day 입니다.

대통령, 상원의원 일부, 하원의원 전체에 대한 선거가 있습니다.

선거는 선택입니다. 그 선택의 결과는 매우 큽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향후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다른 영향을 크게 끼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표퓰리즘을 앞세운 정치가들의 감언이설에 속고
또 눈앞의 자기 이익만을 좇아 선택하기보다
미국 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더 넓고 긴 안목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선택하려는 사람이
어떤 가치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세우는 사람인가,

허무는 사람인가는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힘든 상황에도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가,

인권이란 이름으로 법과 질서를 유린하는가.

물론 그런 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포용과 배려와 경청의 리더십을
선명히 갖추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 향후 몇 년 또는 그 이상을 좌우할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11월에 선택해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그 출구를 알 수 없는 팬데믹이 여전히 11월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때 두려움을 선택할 수도 있고 담대함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때“아직까지 이게 뭐람”하고 불평을 선택할 수도 있고
우리는 이 때“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많도다”하며 감사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불평과 감사,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느냐 보다 더 중요합니다.


503년 전, 곧 1517년 10월 31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 날 독일 비텐베르크 성벽에 95개 조항의 글이 붙여졌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글이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렇게 하였고
이 일은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일깨우는 자명종이기도 하였습니다.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은 종교개혁의 횃불을 밝히 들었고

오늘날까지 그 빛을 온 세상에 비추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했던 것을“The Five Solas”라고 합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는 수요일은 종교개혁 기념 찬양 예배로 드립니다.
종교개혁의“The Five Solas”를 주제로 말씀과 찬양 연주가 있을 것입니다.

함께 참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물음에도 답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오백 년 동안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이 답했던 것입니다.

그대는 진정“오직 다섯”인가?


어제 장례식을 마쳤습니다.
지난 목요일 새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권사님.
며칠 전 아흔한 번째 생신을 지내셨습니다.
어머님의 상황이 안 좋아지신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에 사시는 따님이 서둘러 뉴욕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 때문에 그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평소 일 년에 두 차례 찾아 뵐 때 걸리던 시간의 몇 배를 보내고야

뉴욕에 도착하여 그리운, 그리고 아프신 어머니를 뵙게 되었습니다.

따님이 미국에 체류하는 시간을 넉넉히 갖지 못한 상황에서

여러 날 식사를 드시지 못하여 점점 쇠약해지시던 권사님은

자신의 건강보다 더 걱정되시는 것이 있으셨습니다.
따님이 자신 때문에 힘들어지지 않으시길 바라신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 품에 어서 안기고 딸은 어려움 없이

자기가 사는 곳으로 안전히 돌아가길 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라”는 위대한 유언을 따님에게 남기신 권사님.

하나님 품에 안기시던 날 새벽,
따님에게 가슴이 답답하시다는 말씀을 하시고
따님의 손을 잡은 채 따님의 기도 속에

이 땅을 떠나신 권사님은 끝까지 따님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다 그러신가 봅니다.
살아생전 자신보다 애절히 자녀를 돌보시느라
그 몸이 약하고 약해지신 어머니들은
이 땅에서 호흡이 멈추는 마지막 순간에도 여전히 자녀 걱정이신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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