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울보 아버님

 

아버지, 성국이 왔어요.’

말없이 누워계시던 아버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눈물로 쏟아내신 아들을 향한 아버님의 마지막 사랑 표현.

그러시고 곧 아버님은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 어머님이 묻히신 망우리 공동묘지로 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아버님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찬송을 부르시면서 눈물지셨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찾기 방송 때에 북에 두고 온 딸을 생각하시면서 흐느끼셨습니다.

그때 아버님 눈에 맺힌 눈물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하나님 앞에서도 한없이 우셨습니다.

매일 새벽, 아버님 옆에 놓인 손수건이 그 눈물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었습니다.

목사님과 성도들을 섬겨야 할 장로님으로서, 여섯 자녀를 먹어야 할 아버지로서,

그 삶과 책임의 무게감 때문에 간청의 눈물이 마르지 않으셨음이 분명합니다.

울보 아버님.

 

오늘은 아버지 날입니다.

아버지들도 잘 운답니다.

아내들과 자녀들이 잘 눈치채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 꼭 아셔야 할 것은,

아버지가 우는 것은 결코 약하기 때문만이 아니랍니다.

 

 

 

 

 

 


놀라운 장터

 

장터는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하는 장터는 없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어제 선교바자회가 그랬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잊은 희생뿐인 선교바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중심적인 분냄이나 고성(高聲)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대신 서로를 격려하는 소리나 즐거운 함성은 가득했습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교환한 장터는 맞지만

그 결과는 자신들의 이익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놀라운 교환이 이루어진 곳이 또 있습니다.

우리의 죄와 예수님의 의가 교환된 곳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런 놀라운 교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적인 희생이 없었다면 이런 교환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제, 놀라운 장터를 지나다니면서

선교회, 중국교포부, 청년, 교육부, 영어권회중, 중국어회중, 러시아권 회중들의

희생을 품은 미소 속에서 십자가 희생과 사랑의 예수님 형상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의 놀라운 장터는 예수님의 놀라운 십자가에서 배운 것임이 분명합니다.

 

 

 


목사가 이유

 

장로님은 중학교 2학년때 은혜받아 목사가 되기로 서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끝내 목사가 안된 이유가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님들의 주일 대표기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제 새벽, LA 열매 교회에서 말씀을 전한

아침식사는 맛있는 설렁탕이었습니다.

식사를 대접해 주신 열매교회 장로님은  부산 초량교회 출신이셨습니다.

장로님은 중학교 목사가 되기로 서원하고 어른 예배에 참석하셨답니다.

그런데  모든 장로님들의 대표 기도 가운데 빠지지 않는 구절이 있었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초량 교회가----"

 

부산 초량 교회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셨던 교회입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하신 장로님은 대표 기도를 들으며

목사는 반드시 순교를 해야 하는 줄로 생각하셨답니다.

순교가 두려우셨던 장로님은 목사가 되겠다는 서원을 철회하셨다고 합니다.

 

순교가 목사 됨의 기준이라면 저는 아직도 제대로 목사가 아닙니다.

희생에 인색한 제가 목사의 직분을 고민 없이 유지하고 있음에 놀랐습니다.

목사다운 희생을 없으니 목사의 길을 가지 않으시겠다는 양심고백이

 

저를 계속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부르심, 더 큰 그림으로

 

 

총회가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총회 모든 순서가 잘 진행되었습니다.

총회 기간 동안 교우들이 보여주신 아름다운 헌신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저는 이번 총회에서 하나님이 저를 교단 총회장으로 부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미 맡은 일도 많은데 또 총회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적잖이 부담되었습니다.

그런데 총회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총회를 진행하면서

 

 

하나님은 저만을 부르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더 큰 그림 가운데 부르신 것입니다.

퀸즈장로교회가 교회와 총회만을 섬기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민 땅의 목회자와 사모님을 끊임없이 위로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예배와 찬양의 벅찬 감동을 모든 교회와 함께 하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적 비전이 어떻게 현실이 되는지 온세상에 보이도록 부르셨습니다.

 

 

어느 사모님이 총회를 떠나시면서 저와 우리 교회에 남겨주신 편지를 읽으며

더 큰 그림으로의 우리를 부르셨음을 보다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 그 편지가 있습니다.

 

 

 

KAPC 총회와 사랑의 섬김으로 훈련된 뉴욕 퀸즈장로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

 

산골 생활 23년 동안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거대한 도시 뉴욕에서 열린 이번 총회 참석을 하면서 무엇보다 은혜로운 예배와 찬양. 그리고 그동안 늘 목사님 그늘에서 총알받이를 하던 사모들을 특별히 섬겨 주시는 은혜를 입으며 천국 잔치에 참석한 느낌입니다.

 

급하게 준비됐다고 하기엔 믿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와 악기로, 오빠밴드까지 동원된 힐링 콘서트로 하나 되게 해 주시고 교인들 누구나 드는 코치 핸드백조차도 눈치거리가 되어 몇 번이나 망설이며 숍을 드나들기만 했던 사모들 마음을 읽으신 듯... 이젠  총회에서 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성경이 들어갈 만한 큼직한 가방을 하나씩 들고 행복하게 숙소로 돌아갈 때는 일울 마치고 돌아와 지난밤 한 시간 자고 뉴욕으로 날아온 피곤도 잊게 했습니다. 

 

한 번도 우리집 식탁에는 올라와 보지 못한 랍스터 한 마리를 들고 그 것이 에피타이저 라는 소리를 들을 땐  ! 내가  이런 삶도 살아보는구나! 마치 하나님이 옆에서 지켜보시며 그동안 수고 했다.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어서  맘껏 먹으라며 등 두드려  주시는 그분의 손길을 느끼는 듯했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카페에서 성심껏 기쁨으로 섬겨 주시고  미국 와서 처음 먹어본 싸만코 아이스크림까지 챙겨 주신 놀라운  카페 또한 천국이었습니다.

 

가는 길목마다 기쁘게 미소를 잃지 않고  손뼉을 쳐 주시면서 격려해 주시던 봉사자들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합니다. 생일 맞은 사람들에게 손수 만든 귀한 보석 왕관과 장미꽃 그리고 3단 케익까지...외식 없는 사랑으로  잘 섬겨 주셔서 그저 감사하고 송구합니다.

 

때론 어린아이 같이 권위를 내려놓고 함께 웃어 주시고 때론 강력한 영적 파워로 타임 스퀘어에서 인도하신 그 우렁찬 기도의 울림의 선봉에 서서 함께 해 주신 총회장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총회를 위해 수고하신 분들과 퀸즈장로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축복합니다!!!

 

이제 받은 그 사랑을 돌려 드리기 위하여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코로나의 긴 어둠의 터널을 이겨낸 우리에게 풍성한 감사를 안고  돌아가  받은 사랑으로 잘 섬기는 충성된 종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산골 마을 한 모퉁이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사모 드림 -

 

 

 

 

 

 

 

 

 

 


한 단어만 주옵소서

 

한 단어만 주옵소서

팬데믹 이후 온 세상에 필요한 한 단어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단어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충만이었습니다.

 

충만은 짧은 한 단어이지만 그 끝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충만은 다른 헛된 것들을 몰아내는 힘입니다.

충만은 목마른 자만이 마실 수 있습니다.

충만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권고가 아닌 명령입니다.

 

사실 세상은 이미 충만합니다.

그런데 그 충만은 절망과 슬픔의 충만이요, 어두움과 두려움의 충만입니다.

이런 가짜 충만을 몰아낼 진짜 충만이 필요합니다.

 

이런 진짜 충만은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교회여,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라는 이번 총회의 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이 우리 교회와 총회로부터 시작되어

온 세상을 가득히 채우길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세 글자

 

그럭저럭 견딜만한

인생살이 같다가도

세상살이가 힘겨워

문득 쓸쓸한 마음이 들 때

나지막이 불러보는 세 글자

 

(정연복)

 

우리 때문에 강 같은 눈물을 흘린 어머니.

모든 어머니의 눈물로 빚어진 우리들.

누구나 그러시듯이 저도 이토록 나이가 들었는데

어머니 품이 그립습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하루만이라도

이 땅 나들이 나오신다면,

어머니 품에 안겨, 왜 그렇게 일찍 떠나셨냐고 투정부리며

사랑하는 어머니를 놓아드리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럴 리는 없겠기에 그날을 기다리며,

Mother’s Day 아침에 하늘을 향해 먹먹한 마음으로

세 글자를 불러봅니다.

 

 

 

 

 


열두 번째 어린이 헌장

 

대한민국 정부는 제가 태어나던 해에 어린이 헌장을 제정하였습니다.

1988년에 개정된 열한가지 어린이 헌장은 지금까지 바른 지침과 깊은 울림을 줍니다.

 

1.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

2. 어린이는 고른 영양을 섭취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받으며----살아야 한다.

3. 어린이는 좋은 교육시설에서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한다.

4. 어린이는 빛나는 우리 문화를 이어받아, 새롭게 창조하고----힘을 길러야 한다.

5. 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공간을 제공받아야 한다.

6. 어린이는 예절과 질서를 지키며----책임을 다하는 민주 시민으로 자라야 한다.

7.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는 마음과 태도를 길러야 한다.

8. 어린이는 해로운 사회 환경과 위험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

9. 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나쁜 일과 힘겨운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다.

10. 몸이나 마음에 장애가 있는 어린이는 필요한 교육과 치료를 받아야----한다.

11.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

 

어린이를 위한 열한가지 내용의 훌륭한 헌장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든 어린이가 자라나 민주 시민이나 세계인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두 번째 내용을 담은 어린이 헌장이 필요합니다.

 

12. 모든 어린이를 그리스도에게로!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 정부도 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입니다.

 


힘드시지요?

 

힘드시지요? 준비하시기에.

여기저기 들러보니 모두 분주하시더라구요.

뜨거운 기도, 섬김의 손길, 교회당의 예쁜 단장(丹粧)들을 보니

힘들어도 총회 손님 맞이할 즐거운 잔치집이 맞습니다.

 

힘드시지요? 소통하시기에.

내 일도 바쁜데 다른 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돕는 일도 쉽지 않으실 것입니다.

힘들어도 서로 함께는 우리 교회가 일해 왔던 방식입니다.

 

힘드시지요? 참으시기에.

잘 못참는 것은 우리의 기본 성품인데

오래 참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답니다.

힘들어도 주님 뜻 이루어지길 참고 견디면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힘드시지요? 기다리시기에.

나의 힘듬을 통해 빚어질 아름다운 일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먼 길에서 오실 목사님 사모님 장로님들이 많이 행복하실 것입니다.

힘들어도 힘든 것은 지나가지만 기다리던 그 날에 받을 상급은 영원할 것입니다.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오늘이 423일이니까 앞으로 딱 한달 남았습니다.

오는 523일은 우리 교단의 제 47회 정기총회 개회일입니다.

많은 손님들이 각처에서 찾아 올 총회입니다.

아브라함은 손님들을 이렇게 맞이 하였습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창세기 18:4-5a)

 

뉴욕의 한 모퉁이에서

50년을 자라온 퀸장이라는 나무는

과연 각처에서 오실 수백명의 귀한 손님들이 쉴만한 나무일까요.

 

그런 나무이고 싶습니다.

퀸장 나무는 오십년을 깊은 은총의 뿌리 위에 자라나

이제는 누구든 쉴만한 적절한 그늘이 있답니다.

나무의 가지가 손을 들고 누군가를 부르듯이

우리도 환영의 손을 들고 각처의 목사님 사모님 장로님들을 이렇게 맞이해요.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그동안 교회를 섬기시느라 많이 힘드셨지요.

몇날을 주님이 만들어 주신 퀸장 나무 아래에서 편히 쉬시며 힘내세요.

 

 

 


그대가 그리운 날

 

     곱게 물든 은행나무 길을 걷다가 그리움만 줍고 왔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지만 솔직하게 고백하면,

     오늘 그 병에 걸리고 싶더군요.

       -윤보영의 시(詩) 가운데-

 

그대가 벌써 그립습니다.

한 주전에 헤어졌는데 말이지요.

그리움도 병이라면, 오늘 그 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그대 이름은 사순절.

 

캄캄한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던 차량부,

반갑게 맞이하던 안내부와 조용하게 섬겼던 서기부,

잘 준비된 4개국 찬양가사와 많은 영상들을 기쁨으로 띄워주던 방송부,

늘 뜨거웠던 경배 찬양팀과 정성 어린 반주자들,

초롱초롱한 아이들과 그들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던 젊은 부모들,

아름다운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주방과 통역 봉사자들,

은혜로 가득찬 대표기도자와 영성 깊은 목소리의 성경봉독자들,

토요일 찬양에 함께 했던 모든 사랑하는 교육부서와 헌신된 교사들,

여러 아름다운 특별찬양대, 그리고 빛나는 청년들,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내고 맞이한 부활절에 감격의 찬양을 올려드린 찬양대원들,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준 다민족 회중들,

본이 되는 리더십을 보여주신 장로님들과 충성된 교직원들.

 

놀라지는 마십시오. 올해 사순절을 다시 연장하자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내년 사순절까지 그대가 몹시 그리울 것입니다.

 


노래를 듣지 못하는 자는

춤추는 자에게 어이없다고 말한다

 

노래를 듣지 못하는 자는

춤추는 자를 보곤

어이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무런 소리도 없는데 멀쩡한 사람들이 덩실덩실 춤추고 있으니 말입니다.

 

부활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

지난 주간, 우리 교회가 함께했던 두 번의 장례식을 보았다면

어이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을 다시 만날 것이라 소망하며 함께 찬양하고 감사했으니 말입니다.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춤추는 사람을 보고 멋있다고 박수칠 뿐 아니라

자신도 마침내 그 들리는 음악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춥니다.

부활을 아는 사람은 장례식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망의 찬양에 아멘 할 뿐 아니라

자신도 죽음을 이긴 부활의 찬양을 어디서나 소리 높여 부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성도의 소망은 어이없는 것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있다면

성도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너 무엇하느냐?

 

2023년 사순절,

내가 사는 이유를 묻고 또 물으며 걸어온 사순절입니다.

작은 꽃망울로 시작된 사순절이 화사한 꽃들로 만개(滿開) 되어 가며

이제는 딱 한 주간, 고난 주간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이유를 분명히 답하고 계신지요, 아직은 아닌지요.

 

주님 지신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들려옵니다.

죄 중에 빠 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거만 너 무엇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어제 새벽에,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단 불을 꺼트리지 말라

 

주님께 이런 대답을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단의 불이 온 교회에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

내 삶을 기도로 드리나이다

제단의 불이 온 세상에 점점 퍼지게 하기 위해

내 삶을 선교로 드리나이다

 

이제 곧 부활의 주님을 만날 터인데, 아무런 대답 없이 만날 순 없잖아요.

 

 

 


피데스 레포르마타

Fides Reformata

 

피데스 레포르마타

우리가 걸어온 길입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피데스 레포르마타개혁신앙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피데스 레포르마타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믿는 것이 피데스 레포르마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찬양하며 사는 것이 피데스 레포르마타입니다.

성경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은 결코 피데스 레포르마타가 아닙니다.

 

지금, ‘피데스 레포르마타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피데스(신앙)는 피데스인데 언제부터인가 레포르마타(개혁)는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앞에, 피조물 인간이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맞서려 합니다.

하나님이 그 뜻 가운데 감추어 놓은 일들을 들추어보려는 경망(輕妄)스런 태도는

우리의 선진(先進)들이 보여 준 레포르마타의 삶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암흑 같은 시기에

우리가 보고, 따르고, 남길 선명한 이정표는 피데스 레포르마타뿐입니다.

 

 

 

 


세게 무릎치며 기도하다

 

교우들의 동업하는 사업의 개업예배 때에 손요한 목사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모든 기도에서 그렇듯이 목사님의 기도는 힘있게 이어졌습니다.

목사님 기도 중에 저는 무릎을 치며 반응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세게 쳤습니다.

여기까지 너무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새로 개업한 사업은 속 눈썹을 붙여 사람들을 예쁘게 해주는 서비스 사업입니다.

롱아일랜드에 있는 사업장의 이름은 LuLu Lash(룰루 라쉬)였습니다.

손님들이 부르기도 좋고, 외우기도 좋은 이름을 지어 등록까지 마쳤다고 합니다.

설명도 듣고 카운터 앞에 크게도 써 붙인 이름, LuLu Lash.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 중에 룰루랄라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차 싶으신 목사님은 급히 원래 이름 룰루라쉬로 바꾸어 기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무릎을 친 것은 원래 은혜로운 기도에의 반응이였지만, 세게 치기 시작한 것은

(너무 죄송한데) 웃음을 참으려는 의도도 살짝 있었습니다.

 

룰루랄라는 행복한 상태를 표현하는 밝고 긍정적인 단어입니다.

저도 룰루라쉬’ shop에 오는 사람마다 룰루랄라하며 돌아가길 축복했습니다.

저의 마음에서 잠자던 단어 룰루랄라

목사님 때문에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오늘 새벽 어깨에 담이 걸려 아직 뻐근하지만, 지금도 룰루랄라하고 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일주일도 안된 시간인데 우리 교우들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교우들의 뜨거운 기도를 모든 사역의 현장에서 강력히 느꼈습니다.

너무 놀라웠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도착한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한국은 봄날씨였습니다.

아직 마스크를 사람도 있었지만 길었던 팬데믹의 겨울은 끝났습니다.

자영업자들의 꽁꽁 얼었던 매출에도 봄바람이 불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부흥의 봄이 왔습니다.

청년들이 부흥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이 부모님과 함께 금요일 밤에 몰려나와 기도합니다.

장년들의 예배도 다시금 뜨겁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뉴욕에도 이미 부흥의 봄이 왔습니다.

오는 봄을 막을 겨울은 없었습니다.

사순절 부흥의 봄바람은 '내가 사는 이유' 강력하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겨울 옷을 껴입고는 지낼 없는 봄이 벌써 왔습니다.


웅덩이와 바다

 

 

저에게는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이 주신 숙제입니다.

김목사, 불같이 뜨겁고 바다같이 넓어야 해.”

때때로 생각해 봅니다. ‘나는 불같이 뜨거운가, 나는 바다같이 넓은가

 

 

바다는 넓어서 모든 것을 다 받아줍니다.

이것 저것 마다하지 않고 다 품어줍니다.

그러고도 무엇이 좋은지 항상 웃으면서 넘실넘실 춤을 춥니다.

바다같은 사람은 가까이 갈수록 푸근해집니다.

 

 

웅덩이는 워낙 작은 데다가 밖에서 무엇이라도 들어가면 곧 흙탕물을 일으킵니다.

바다가 썩는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웅덩이는 시간 문제이지 썩는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저는 바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풀지 못한 숙제가 제게만 있나요?

이번 사순절 주제인 내가 사는 이유를 찾으셨는지요.

사순절은 그 숙제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어서 나오셔서 함께 그 답을 찾아갑시다.

지난 주간에는 내가 사는 이유를 찾고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았습니다: 나는 지음받은 자, 나는 약속받은 자, 나는 축복받은 자,

 

 

나는 사랑받은 자, 나는 열매맺는 자, 나는 승리하는 자입니다.


저 오늘 쇼파르 불어요

 

입술이 몇 번 부르텄다가 가라앉았습니다.

뿔나팔 쇼파르 부는 연습 때문이었죠.

제대로 된 소리보다 헛바람 소리가 더 자주 나왔지요.

오늘 오후 4시 예배 때에도 어떤 소리가 날지 궁금해요.

 

짧은 연습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49년을 지켜 주시고 희년을 맞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올려드릴 뿔나팔 소리, 쇼파르 소리.

 

이따가 쇼파르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기로 목소리로 몸으로, 모든 회중의 아이부터 어른까지

존귀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요

희년의 자유와 기쁨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쁜 날, 웬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요.

이곳에 49년 전에 믿음의 씨앗을 뿌리시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우리 퀸즈장로교회를 묵묵히 일구어 오신 존경하는 믿음의 선진들과

지금도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랑하는 성도들 때문이 아닐까요.

 

 

 

 

 

 

 


같이 못 가는데요?

 

같이 못 가는데요?”

그 대답을 듣고 저는 살짝 놀랐습니다.

늘 밝은 미소를 가지고 계신 목사님의 무뚝뚝한 답변이라 더 당황했습니다.

 

얼마 전 총회 일로 LA와 산호세를 이틀 동안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저를 밤늦게 ride 해 주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오는 5월 뉴욕 총회에는 사모님과 꼭 함께 오십시오.”

 

그때 그 목사님이 주신 답이 같이 못 가는데요.”였습니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지난 후에 목사님이 이야기를 이어가셨습니다.

아내는 6년 전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밝은 미소 속에 그런 아픔이 잠겨 있으시다니.... 저는 더 놀랐습니다.

 

사모님은 암으로 2년 투병하시다가 목사님과 세 자녀를 두고 떠나셨답니다.

저도 어머니가 일찍 천국 가셔서 아버님이 홀로 계셨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버님은 김목사님을 키우느라 힘드셨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나셨을 것입니다.

저도 언니 오빠와 나이 차이가 많은 어린 막내 딸을 홀로 키울 때,

잘 키워보겠다는 생각으로 항상 힘을 냈었습니다.”

 

이후 묵묵히 차를 운전하셨습니다. 조용한 차 안에서

 

저의 눈물은 눈가에 맺혔지만, 그 목사님의 눈물은 마음에 흘렸을 것입니다.


울지마요 튀르키예

 

눈물이 떨어져 강이 되어 흐르고, 이제는 바다가 되어 넘치고 있습니다.

지난 6일 새벽 지진이 일어나 한순간에 모든 것이 허물어진 튀르키예의 눈물입니다.

지난 한 주간, 온 세상 사람들이 가슴을 졸이며

그 잔해 속에 파묻힌 죽음과 다침과 신음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보려고 필사의 구조 작업을 펼치다가 누군가를 건져내면

구조대와 시민들의 가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환호가 들려옵니다.

살았다

멀리서 TV로 지켜보던 우리의 입에도 환호가, 눈에는 눈물이 떠나지 않습니다.

 

6.25 전쟁 때, 공산군 남침으로 풍전등화(風前燈火)와도 같았던 대한민국에

14,936명의 군대를 파병해 주었던 친구 나라 터키, 오늘의 튀르키예.

우리를 살리려 대신 죽어 주었고, 자유를 주려고 대신 포로가 되어주었던 튀르기예.

한순간에 부모와 자녀를 잃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며 어서 일어나라고 했던 터키.

 

울지마요 튀르키예.

일어나요 튀르키예.

그때 그대들이 전쟁 가운데 있던 우리들의 손을 잡아 주었듯이

이제 우리들이 지진 가운데 있는 그대들의 손을 잡아 주겠어요.

 

 


우정은 무엇을 만드는가?

 

요나단이 왕자인 자기만 생각했다면

어떻게 자기가 이어받을 왕의 자리를 포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요나단은 자기보다 다윗을 낫게 여기며 자기 생명을 걸고 우정을 이어갔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어도 요나단과의 우정을 잊지 않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그의 사는 날까지 왕의 식탁으로 초대했습니다.

 

갈렙이 자기의 견고한 위치를 생각했다면

어떻게 85세 때에 여호수아에게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했겠습니까.

자기보다 여호수아를 존중하며 우정을 이어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자기를 존중해준 갈렙을 축복하며 기업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친구 리더십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친구의 우정은 자기 자신들에게 축복일 뿐 아니라

그 시대가 함께 누릴 감동과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이번 수련회와 부흥회의 강사로 오신 권호 목사님과 임도균 목사님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우정을 보여주십니다.

매사에 서로 높이고 배려하며 아끼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두 분은 우정을 통해 아름다운 감동과 놀라운 기적을 계속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다윗과 요나단처럼,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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