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고오올~~~~~~~~

또 고고오오오올~~~~~~~

믿기지 않는 일이 지난 수요일 일어났습니다.

세계 57위 한국축구가 세계 1위 독일축구를 2:0으로 무너뜨린 것입니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지만 개미 같은 한국이 코끼리 같은 독일을 들어 올린 것입니다.

 

“코끼리를 들어 올린 개미”라는 제목의 우화(寓話) 같은 책이 있습니다.

개미가 코끼리를 들어 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빈스 포센트가 지은 이 책에서는 들어 올립니다.

여기서 개미는 사람에게 있는 5% 의식이며, 코끼리는 사람에게 숨겨진 95%의 잠재의식을 의미합니다.

 

내게 깨어 있는 5%의 의식이, 마냥 잠자고 있는 95%의 잠재의식을 들어 올려

더어어~~~~~~~~~~

또 더더어어어어~~~~~~~~~

믿기지 않는 놀라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깨어있는 5%가 되어 무언가에 취해 잠자는 95%의 사람들을 흔들어 일으켜야 합니다.

 

오늘 있을 qbc 전체 특강과 내일부터 있을 전교인 여름 수련회는 내 안에서 쿨쿨 잠자는 코끼리를 깨울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코끼리를 들어 올린 개미”이야기는 내게 우화(寓話)가 아니라 실화(實話)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20일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 200구를 북한으로부터 돌려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이제 곧 모든 사람들이 확인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유해는 너무 많습니다.

 

비목(碑木)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한명희씨가 한국 전쟁에서 희생된 무명용사들의 비목(碑木) 꽂힌 돌무덤을 보며 그들을 생각하며 쓴 시(詩)입니다.

그 시에 장일남씨가 곡(曲)을 입혀 많은 한국인들이 애창하는 곡이 되었습니다.

저도 뺨에서 가슴으로 눈물을 흘려보내며 수없이 부르곤 하였습니다.

 

내일은 6월 25일, 남침(南侵)에 의한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어언 6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어머니도 그립고, 친구도 보고 싶으나 자유를 지킨다는 가치 때문에 깊은 계곡에서 죽어간 우리 젊은이들, 이름도 몰랐던 한국 땅에서 한국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이국(異國)의 청년들, 그들이 지펴준 자유의 횃불을 잘 들고 있다가 다음 세대에 잘 전해 주어야 할 터인데...

 

자유를 사랑하다 이름 모를 비목 아래 잠든 젊은 영웅들의 유해라도 속히 가족 품에, 그들의 조국 품에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을 찾는 그들의 조국이 있듯이, 우리의 영원한 조국, 하나님 나라는 진정한 자유의 복음을 위해 살다 죽어 십자가 아래 묻힌 영웅들을 찾고 또 찾고 있답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 때면 저는 애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밤에 저를 꼭 데려가 주십시오.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지난 목요일, 필라델피아에 사시는 이규성 원로장로님을 심방하였습니다.

공원 같은 집에서 아드님 가족과 함께 사시는 장로님 내외분을 심방하여 예배드리고, 자리를 옮겨 준비하신 풍성한 식사를 마친 자리에서는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해방 후, 나이 어린 학생 때 5년을 북한 공산당 치하에서 믿음을 지키신 이규성 장로님과 허경화 장로님의 이야기는 충격 이상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을 반동분자라고 핍박하는 공산당 때문에 평일은 물론 교회를 다녀온 다음 날이면 더욱 혼나고, 매 맞고, 자아비판을 강요당하셨다는 두 분의 이야기는 마음을 졸이게도 하였고 아프게도 하였습니다.

기독교인과 사귀는 자도 반동분자로 몰렸기 때문에 두 분과 사귀려는 친구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셨던 이규성 장로님은 그 어려운 시절, 서산(西山)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 때면 이렇게 애절히 기도하셨답니다.

 

“하나님, 오늘 밤에 저를 꼭 데려가 주십시오.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하나님은 어린 소년의 기도대로 그 때 데려가지 않으시고 산 넘어 월남(越南)케 하셨고, 물 건너 이민(移民)케 하시어 퀸즈장로교회가 세워져 가는데 믿음의 초석(礎石)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다 서산에 떨어진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지 않으신 이유가 분명 있으실 것입니다.


나오미는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저도 한 사람 정도는 사랑 할 수 있어요.”

목사인 아버지 고이치는 외동딸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건 용서하는 것이란다.

한두 번 용서하는 게 아니라 끝없이 용서하는 것이지.”

 

미우라 아야꼬의 책“양치는 언덕”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건달 같은 료이치와 결혼하겠다는 나오미는 부모님의 만류에 “저도 한 사람 정도는 사랑 할 수 있어요.”라고 자신만만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음을 나오미는 살면서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던“사랑은 용서”임을 절절히 체험하기까지 나오미에겐 수많은 눈물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내 사랑의 그릇은 어느 정도일까?”

“정말 나는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스스로 답하기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용서, 끝없는 용서로 빚어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니,“당신을 끝없이 용서합니다.”라는 말이어야 합니다.

한 사람에게도 이렇게 말하기가 힘든 나, 나 한 사람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끝없는 용서로 사랑하시기에 너무나 힘드셨을 예수님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6월의 어느 날입니다.


힘들긴 하지만 난 외롭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겐 그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대의 이름은,

선교회, 청장년부, 청년부, 교육부 그리고 em, cm, rm.

사랑하는 아름다운 이름이여....

부르고 또 불러도 여전히 그리운 이들이여....

올해도 멈출 수 없는 긴 나의 여정에,

동반을 자청하고 나선 그대 있음에 나는 결코 고단치 않습니다.

 

어제 바자회가 끝났습니다.

어제가 오기 여러 날 전부터,

나의 손을 따듯하게 잡아 같이 춤을 추어 준

그리고 끊임없이 나를 기도로 안아 울고 웃어 준

그대 있음에 나는 한 없이 행복합니다.

 

그대 같은 나의 친구가 또 어디 있으리오.

그대 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게 되었고

그대 있음에 아버지의 마음을 더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대여,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그대의 배웅 가운데 하나, 둘, 나의 먼 길을 떠나려 합니다.

나의 이름은,

그대의 섬김과 사랑을 듬뿍 받은

2018년 단기선교랍니다.


지난 주간에는 우리 교단 총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예배를 통해 많은 은혜도 받았고, 숱한 회의(會議)를 통해 교단의 여러 현안도 잘 처리하였습니다.

총회 폐회 예배 때 마지막에 부른 찬송은 222장이었습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사망권세 이기도록 지켜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총회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작년 5월 총회 후 올해 총회 때까지 일 년 동안 네 분의 목사님과 한 분의 사모님이 천국 가셨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또 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났다가 오늘 헤어지는 사람 중에 이 땅에서 또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헤어지는 그 사람,

혹시 이 땅에서 다시 못 만나더라도 천국에서는 다시 만나야 합니다.

 

내 삶에 승차했던 어떤 사람이 금방 내리든 아니면 조금 오래 같이 가든 언젠가의 헤어짐이 영원한 이별의 순간이 되지 않도록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어딜 가든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어디서든 다시 만날 때는 예수님 앞에서 만나는 것 맞죠?”

 

모두 일어서서 부른 폐회 예배의 마지막 찬송은, 총대들의 헤어짐의 아쉬움을 넘어 총대들의 사명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며 총회 장소에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지난 목요일 한글 서예 작품전에 갔었습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의 작품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이 깊은 내용과 바른 글씨체로 마음의 감동과 생각의 정돈을 주었습니다.

그곳에 출품한 분들을 지도하신 선생님의 작품도 있었습니다.

내용은 안중근 의사(義士)의 어머니가 쓴 글이었습니다.

 

... 옳은 일 하고 받은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대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뭔가 울림이 있으시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습니다.

여태까지 제가 가본 서예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종이에 글을 쓴 것입니다.

작품이 써진 종이 위 여기저기에 먹물이 뚝뚝 떨어져 번져있는 것입니다.

그 선생님이 사연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누군가 하얀 종이 위에 실수로 먹물을 흘렸는데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 위에 글을 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먹물 사이에 쓰인 애절한 글들을 보니 그 먹물들은 실수로 떨군 먹물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눈에서 떨어진 굵은 눈물 같았습니다.

 

아직 버리지 마십시오.

구겨져 버릴 것들이 작품이 될 수 있고 감동을 자아낼 수도 있습니다.

한 작가의 손에서도 그렇게 바뀔 수 있다면 하나님의 손에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버려지는 것이 당연했던 저와 여러분이 그분의 손에서 변화되었듯이 그만 버리려고 생각했던 것, 하나님 손에 맡겨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앞길이 까마득한 신학생 남편 때문이었는지, 엄격한 시어머니 아래서의 시집살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가 보고 싶었는지, 신혼 초 아내는 많이 울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두 번째 이유가 가장 컸을 것입니다.

제가 가난한 신학생인 줄 알고 결혼했고, 같은 교회 다니셨던 친정어머니는 주일날이면 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엄격하셨습니다.

아니 엄격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1남 5녀의 자녀가 있는 집에 시집오셔서 대충 말씀하시고 적당한 태도로는 집안 살림을 이끄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말을 많이 아끼셨고 행동으로 교훈을 많이 주셨습니다.

 

아프셨던 어머니의 생애 마지막에는 많은 시간을 한국과 미국에서 며느리와 보내셨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 사역하던 2006년 3월 어느 날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을 아내와 함께 찾아뵈었습니다.

그 날 어머니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환한 표정과 따스한 목소리로 외치듯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보세요. 우리 며느리 참 예쁘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저는 의아해했습니다.

아들에 대해 한 말씀도 안 하시고 며느리 이야기만 하시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 세상에서 들었던 어머님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며느리 참 예쁘지요?”

23년간 어머님의 마음속에 숨겨둔 마지막 말씀에 아내는 또다시 울었답니다.


“자~자~~애들은 가요!”

어렸을 적에 간혹 듣곤 했던 말입니다.

누군가의 주위에 어른들이 몰려 있을 때, 뭔가 궁금해서 저 같은 아이들도 까치발을 들고 그 안을 보려 했습니다.

훗날 그들의 이름을 알았지만, 그 안에는 야바위꾼의 책상이 펼쳐있었고 카드 석 장이나, 주사위를 조그만 공기 사발 세 개로 덮어가면서 어느 하나에 돈을 걸게 했습니다.

그런 사기 치는 모습을 애들에게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인지, 사기 치는 것이 순수한 애들 눈에 발각될 것이 두려워서인지, 야바위꾼 앞에서 바람 잡는 아저씨들이“애들은 가라”고 외칩니다.

 

애들은 가라고 했기에 망정이지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저도 집으로 돌아와 카드나 주사위로 부단히 야바위를 연습하여 잠시라도 그 바닥에 발을 들였을지 모를 일입니다.

 

애들은 보는 대로 배우고 따릅니다.

폭력적 가정에서 폭력적 아이가 자라 무서운 어른이 되고, 사랑의 가정에서 사랑의 아이가 자라 따듯한 어른이 됩니다.

 

“흔들리는 둥지에 성한 달걀 없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달걀의 안전과 미래는 그 둥지에 달려있음이 분명합니다.

부모의 믿음이 흔들리는 가정에서 견고한 믿음을 가진 아이들이 자라나길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흔들리는 둥지에 성한 달걀이 없다는 것이 상식적인 이치라면 무언가 아이들이 문제가 있다고 탓하기 전에 부모 된 우리가 우리를 먼저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부모는 아이들의 둥지이니까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원래 한 나라였습니다.

나라가 둘로 깨어지고 오랫동안 서로에 대한 반목과 갈등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들에겐 평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평화를 만들 수 있는 분은 한 분이셨습니다.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겔 37:19)

 

그 평화를 위해서 왕이 둘이 되면 안 되었습니다.

두 왕이 있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겔 37:22)

 

진정한 평화는 무엇보다 먼저 각자 더러운 우상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겔 37:23)

 

그리고 그들만의 평화가 최종 목적으로서는 부족했습니다.

그들만의 평화를 넘어 더 중요한 목표가 있어야 했습니다.

서로 하나되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평화의 궁극적 방향이어야 했습니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겔 37:26)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뜨와리 뚜와^^)”

저는 지금 그 노래의 장소인 나성(la)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내의 언니와 형부를 만나 오랜만에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니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30여 년 전에 갓 태어난 아이와 함께 언니 가족이 la에 이민을 왔는데 그 아이가 두 살을 넘긴 즈음인 어느 주일날 아침, 교회를 갈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너무 아파 남편에게 아이와 함께 교회에 다녀오라고 하고 자신은 화장실로 들어갔답니다.

거기서 자궁외임신이 되었던 둘째 아이가 유산되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귀로는 소리가 다 들리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언니는 실신한 사람처럼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답니다.

화장실에 들어간 아내를 보고 아이와 함께 교회를 가려던 남편이 그때 마침 울린“따르릉”전화 벨소리를 듣고, 나가다 말고 그 전화를 받았답니다.

한국에서 오래전에 알긴 알았지만, 전혀 친하지도 않았고 평생 전화도 한 통 없었던 어떤 사람이 수소문해 전화번호를 알았다며 뉴욕에서 전화를 걸어온 것입니다.

보통 통화와는 다르게 긴 통화를 마친 남편이 다시 교회를 가려다가 화장실에 들어간 아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겨 화장실 문을 열어 보았고, 피를 하염없이 흘리며 쓰러진 아내를 발견하여 급히 911을 불러 병원으로 옮겨가 극적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 날 전화가 없었다면, 그 날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그 날 통화를 짧게 했더라면, 남편과 아이는 교회로 곧바로 떠났을 것이고 언니는 홀로 죽었을 것이랍니다.

놀라운 것은 그날 전화를 건 사람은 그 이전에도 전화를 건 적이 없었지만,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전화 온 적도 없고 다시 연락도 안 되었답니다.

그 날 그 시간에“따르릉”하고 전화를 건 어떤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삶에도“따르릉”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몇 년 전 뉴욕에서 땅콩 회항 사건이 있었습니다.

“땅콩 회항?

뭔 말이여?”

모르시는 분들에게 상세한 답변을 이 지면을 통해 드리기가 사정상 어려우니 정말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건의 여동생이 최근 어느 미팅에서 자기의 질문에 답변을 못 했다고 그 상대방 얼굴에 물을 뿌렸다고 합니다.

“땅콩”언니에 이어“물”동생도 사법처리를 받을 듯합니다.

 

상대방을 업신여기면 마침내 그 대가를 치르고, 상대방을 존중하면 나 또한 존중함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이 길을 갑니다.

얼마쯤 가다가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업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가만 계셔도 될 것을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나 무거워요?”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응, 무거워.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 깔았지, 간땡이는 부었지, 가벼울 리가 있나?”

그렇게 갔던 길을 돌아올 때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업어 달라고 하고 등에 업혀 물었습니다.

“나 무거워?” 할머니가 대답합니다.

“무겁긴요, 하나도 안 무거워요.

너무 가벼워요.

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쓸개는 빠졌지....”

 

봄입니다.

심은 대로 가을에 거두지만, 이 진리는 저 멀리 가을에서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계속 확인되는 진리이니 좋은 것을 심고 좋은 것을 거두시는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가치를 존중해 주십시오.

말이나 태도로 그를 존중해 주시면 격조 높은 대접을 나 또한 받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누가 하신 말씀일까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예수님”네, 맞았습니다.

답을 잘 아시는군요.

이제 그렇게 살면서 대접받을 일만 남았습니다.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 깔았지....”

말해놓고 “나 무거워?”라고 물으면 안 되는 것 아시지요?


2005년 4월 23일부터 방영되어 지난달 3월 31일로 종영된 한국의 대표적인 tv 프로그램이었던 무한도전, 그 도전이 잠시 멈추었는지 아예 끝났는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와 남다를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나와서 펼친 무한도전에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고, 공감하고, 도전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 보았던 무한도전이 저에게 가장 큰 도전을 주었던 것은 출연자들의 상상력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과제가 주어지면 그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냥 주저앉아 있지 않았고, 또 그렇게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 본 무한도전에서도 그들의 상상력을 보았습니다.

어느 엄청 추운 날 멤버들이 둘로 나뉘어 한 팀은 밖에서, 한 팀은 실내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엄동설한에 밖에서 놀아야 하는 팀이 조금 투덜거리는 것은 있었지만 주어진 상황을 탓하지 않고 정말 잘 노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매주 놀라운 상상력으로 “무한도전”의 이름값을 하였습니다.

 

상상력이 넘치는 사람은 즐겁게 삽니다.

일상생활에서 남은 반찬으로 최고의 비빔밥을 만들기도 하고 자투리 시간으로 멋진 글을 쓰기도 합니다.

조앤 롤링은 무일푼에 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1990년 여름,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있던 그녀는 4시간 동안 지연된 열차 안에서 그 유명한 소설“해리 포터”를 착상했고, 집에서나 커피숍에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세계적인 소설을 썼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이 막혀도 너무 꽉 막혀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더 멋진 삶으로 나갈 수 있건만 쉽게 포기하고 적당히 안주하는 태도가 나의 것은 아닌지요.

tv의 무한도전은 일단 막을 내렸으나 성도와 교회의 무한도전은 끝낼 수 없습니다.

놀라운 상상력으로 무한도전의 삶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천지를 멋지게 만드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손가락을 헤아려 보세요.

열 개이지요?

손가락이 왜 열 개인지 생각해 보셨나요?

그런 생각도 안 해보셨고 또 그 이유도 잘 모르시겠지요?

함민복 시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보셨네요.

 

아기의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열 달 수고를 헤아리는 손가락 열 개.

뱃속에서처럼 어머니의 수고를 헤아리며 산다면 그 어머니 앞에서 아무렇게나 살 자녀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열 손가락을 다시 펴고 또 펴도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이 찬송을 지은 분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시고 독생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손으로도 헤아릴 수 없고, 붓으로도 기록할 수 없다면 그 하나님 앞에서 아무렇게나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싶으십니까?

최고의 선물을 소개해 드립니다. 다름 아닌“관심”입니다.

그분에게 관심을 가지세요. 그분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마르틴 부버가 주창했던“나와 너”의 삶이 아닌 “나는 나, 너는 너”의 삶이 팽배해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누가 어려움을 당해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물론 아는 사람의 아픔에도 눈을 감고 사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관심하셨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끝없는 관심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영생과 축복과 앞으로 누릴 영원한 유업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오는 주간은 날 위해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 발자취를 따르는 고난주간입니다.

설마 예수님의 고난에는 무관심하지는 않으신가요?

사순절 서원 새벽기도회 마지막 한 주간,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을 찾아오신 고난의 예수님께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함께 새벽기도회에 나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고난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 진정한 예수님 사랑임이 분명합니다.


anon이라는 작가의 짧은 글,“긴 침묵(the long silence)”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힘들었던 과거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저런 억울한 사연들로 항변합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심판할 하나님이 사람들의 이런 사정을 아시기나 하냐면서 하나님에 대해 의구심과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심판의 내용을 말씀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내용을 말씀하시는 대신 길게 침묵하셨습니다.

그“긴 침묵”은 어떤 말보다, 어떤 심판보다 더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긴 침묵”으로 말해보십시오.

긴 침묵은 어떤 웅변보다 강할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지혜보다 빛날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행동보다 바를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시간보다 멋질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감정보다 깊을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변명보다 찰질 것입니다.

긴 침묵은 어떤 책망보다 아플 것입니다.

 

오늘날, 수다쟁이(talkative)는 많아도“긴 침묵”의 사람은 드뭅니다.

사순절(四旬節), 묵언(黙言)의 계절(季節).

긴 침묵을 훈련하기에 더없이 좋은 절기(節氣)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억울해도, 어이없어도, 예수님처럼, 긴 침묵으로만 말하며 사순절을 걷고 또 걸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수요일은 예고된 대로 폭설이 바람과 함께 쏟아졌습니다.

그 날 예정되었던 선교회 헌신예배와 지도원 성경공부 등을 연기하고 교역자들과 몇몇 성도들이 모여 수요 기도회를 했습니다.

저는 그날“폭풍우 속의 은혜”에 대해 말씀을 전하였고 또 같은 주제로 토론도 하였습니다.

 

폭풍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마르지 않았음을 서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물의 밝은 면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풍경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도 창조하셨습니다. 힘든 것도 그가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 속에서도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이사야 45:7)

 

그 날 기도회가 끝나고 로비에서 헤어지는 시간에 그 날 헌신예배를 드리려던 선교회회원이 그 날 폭설로 헌신예배가 연기된 것에 대해 한 마디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회 헌신예배를 연기하셨네요.

미루어지는 것은 싫은데”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교회 헌신예배를 연기하셨네요.

우리의 준비가 덜 되었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다면 믿음의 눈이 확실히 열려있는 것입니다.


삼월이 되었습니다.

삼월의 하늘은 어떤지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늘이 제 눈에 보이기 전에, 한 노래가 제 귀에 울려 퍼졌습니다.

어린 시절, 뭔지도 잘 모르면서 목이 메게 불렀던 그 노래였습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3.1운동을 주도하였다가 만 18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 땅의 삶을 마감한 꽃다운 소녀.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민국 만세!

대한독립 만세!

 

“다른 사람이 당신을 그리워할 수 있도록 살라”

그 소녀는 선교의 삶을 살다가 29세 청년의 나이로 주님 품에 안긴 robert murray mccheyne 의 이 말을 알았는지 그 소녀가 떠난 지 오래 되었는데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 소녀가 그립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고 또 불러봅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오늘은 우리 교회 설립 4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44년 동안 우리 교회에 베푸신 은총은 44년의 천배, 만 배의 시간이 주어져도 다 헤아릴 수 없는 은총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눈물로 교회를 섬겨 오신 선진(先進)들의 수고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원로목사님과 모든 믿음의 선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뜻 깊은 날에 우리의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의 화합의 장(場)이 되어야 할 올림픽이 시작부터 그러하더니 마지막까지 점점 더 국론(國論)이 분열되는 양상(樣相)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 조국이 일제의 강점기 아래 신음할 때 교회와 성도들은 분연(奮然)히 일어나 3.1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6.25 남침으로 우리 조국이 공산화가 되어가려 할 때 부산 초량교회에 모인 교역자와 성도들은 우리 대한민국을 공산화(共産化)에서 건져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구국(救國)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의 주제로 진행되는 사순절 둘째 주간입니다.

99주년 삼일절도 이 주간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설립되던 해인 1974년도를 비롯해 몇 차례 대한민국을 사랑으로 찾아가 복음을 전하셨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장례식도 이 주간에 있습니다.

44세의 퀸즈장로교회가 이 주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자명(自明)합니다.

표류(漂流)하는 조국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퀸즈장로교회여!

조국을 위해 울라.


사순절을 앞둔 최근에 여러 차례 들으면서 마음에 감동이 된 “너는 결단하라”는 제목을 가진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내가 도적처럼 왔을 때 너는 자신 할 수 있느냐

내가 한밤중에 왔을 때 너는 나와 갈 수 있느냐

말씀의 등불이 네 삶에 꺼져 있진 않느냐

성령의 기름이 오래전 말라 있지는 않느냐

너는 결단하라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너는 그 자리에서 다시 거듭나야 한다

너는 결단하라 세상 소리를 닫고 말씀의 불을 켜야 한다

불을 가진 자만이 그 날에 그 날에 나와 간다

 

내일부터 사순절 서원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이번 주간에도 플로리다 고교에서 17명이 총기로 사망하는 등 세상의 어려움은 멈추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의 기도가 멈추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기도 무릎이 강해지면 모든 어려운 상황이 역전(逆轉)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에 우리가 힘쓸 일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합심 기도의 위력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성경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 44년의 여정 속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순절 새벽 기도, 결단하셨습니까?

내일부터 시작인데 아직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교우들은 없으시겠지요?

그 결단의 실행을 우리 주님이 내일 새벽부터 매일 보실 수 있으시겠지요?

당장 내일부터 결단의 사람들에게 역전승의 은혜가 쏟아지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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