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그는 머리가 남달리 좋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S대(大)를 입학하였고 졸업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겠습니까?

앞길이 창창하게 열리려는 그때 그는 뜻밖의 일을 만났습니다.

‘근육 무력증’에 걸려 8년간 침상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한창 일할 나이인 20대에 건강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훗날 헤아려보니 하나님은 건강 대신 놀라운 것을 주셨습니다.

8년간 하나님만 깊이 묵상하다가 건강 회복과 함께 작은 옷 가게를 차렸고

점점 성장한 사업은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큰 기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한 가지를 안 주실 때가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에 한 흑인 병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출세를 위해 힘을 구했으나,

당신은 순종을 배우도록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큰일을 하고자 건강을 원했으나,

당신은 그보다 선한 일을 하도록 병고를 주셨습니다.

저는 행복을 위해 부귀를 청했으나,

당신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비록 제가 당신께 기도한 것을 받지 못했으나,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을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원하는 그것을 지금 왜 안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 하나를 안 주실 때는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교인 수련회에 강사로 오셨던 조은아 교수님이 며칠 전 영상을 보내 주셨습니다.

교수님의 부친이신 故 조영택 목사님 임종 예배 영상이었습니다.

사모님과 자녀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그 가운데 목사님께서 자녀들에게 남기시는 유언(遺言)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으시고 나를 만드시고 나를 지켜 주십니다.

 세상 가운데서 끝날까지 지켜 주실 것을 꼭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대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대장입니다. 대장 노릇 하지 맙시다....”

 

대장이 누구냐에 따라 그 군대는 전혀 다른 운명을 맞이합니다.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6.25 전쟁 때 맥아더 장군이 없었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망하지 않으려면 어느 모임에서 이건 내가 대장 노릇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싸움에서 이기길 원한다면 하나님을 대장으로 모시면 됩니다.

노(老) 목사님이 일생을 사역하시면서 체득하신 가장 소중한 승리의 비결은

“대장 노릇 하지 맙시다”이셨습니다. 


새벽예배 드리려 교회에 나오다가 보면 여러 풍경을 스치게 됩니다.
먼저 보는 것은 이른 새벽부터 레이스 하듯 서로 바삐 달리는 자동차들입니다.

Highway를 빠져나오면은 철 따라 다른 옷을 입는 나무들도 보입니다.

“잘 잤냐?”라고 말을 걸 때 방긋 한 번 웃고는 나름 아침맞이에 여념(餘念)이 없습니다.

한때 분주하던 삶을 살다 지금은 고요히 누워있는 누군가의 묘지(墓地)들도 지납니다.

 

새벽, 아직 쓰임 받지 않은 길거리 공사 자재들이 지나가는 나를 부럽게 쳐다봅니다.

그러다가 새벽 풍경 가운데 숨 가쁘게 달리는 사람들도 봅니다.

어느 곳을 향해 달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립니다.

새벽 풍경 중 빼놓을 수 없는 감동은 바로 그“달리기”입니다.

 

수련회 때 많은 수고를 한 분이 지난 주간에도 여러 일로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의 계속 수고하심을 언급하였을 때 그분이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천국 갈 때까지 계속 달려야죠.”

아름다운 답변이었습니다.

 

새벽에 감동적인 달리는 풍경이 있듯이

천국 가는 길에 누가 봐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풍경을 만들면 어떨까요.

어떤 비바람이 불어도 천국 갈 때까지 우리 모두 함께 달리고 또 달리고,

누구라도 넘어지면 같이 일으켜 다시 달리는 장엄한 풍경 말이죠.

 


어렸을 적 가장 신기했던 물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우개였습니다.
잘못 쓴 글이나 감추고 싶은 내용을 지우개로 지우면 사라집니다.

우리 삶에는 지우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지우고 싶은 삶을 지울 지우개가 있을까요?

 

자기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발로 그림자를 밟았습니다. 그림자도 같이 발로 밟았습니다.

그림자로부터 빨리 도망쳤습니다. 그림자도 같이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림자가 사라졌습니다.

큰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갔더니 그림자는 오간 데가 없어졌습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로 가면 내 삶의 어두운 것들이 다 지워집니다.

이렇게 노래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셨답니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생명이 있네 .....
십자가로 만족케 하소서

 

그렇습니다. 십자가 그늘만이 내 삶의 더러움을 씻는 소망입니다.

십자가 그늘만이 새로운 삶을 여는 생명입니다.

 

아~~ 은혜의 놀라운 지우개, 십자가 그늘


오늘이 벌써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번 주는 올해의 반환점을 도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올해의 상반기를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보람도 있으시고 아쉬움도 있으실 것입니다.
상반기를 잘 보냈다고 방심해도 안 되고 아쉽다고 낙심할 일도 아닙니다.

 

2021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6개월이나 남아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에 충분하고 넉넉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지금 꼭, 정말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잠시 멈춤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계속 달리라고 부추깁니다.

그래야 성공한다고 몰아댑니다.
성공은 쉼 없이 달린다고 얻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목표도 아닙니다.
모든 운동 경기가 전반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경기는 후반전을 마쳐야 마지막 승부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의 하프타임은 너무 중요한 시간입니다.
잠시 멈추어 쉬면서 전반전을 돌아보며 새로운 전략을 세우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잠시 멈춤의 하프타임이 지나고 일어나는 반전의 후반전을 수없이 보았잖아요.

그러니 우리 모두 냅다 달리지도 말고, 아예 포기하지도 말고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갖고 하반기를 같이 힘차게 달려요. 함께 놀라움을 누려요.

그러자면 전교인 여름 수련회는 잠시 멈춤의 너무 멋진 시간이 아닐까요?


아버님은 요리사이셨습니다.
물론 전문 요리사도 아니시고 식당을 운영하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어렸을 적 저의 특급 요리사와 같으셨습니다.

여러 요리를 잘 만들어 주셨는데
제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밀 낭화(
浪花)입니다.

 

밀 낭화가 무엇인지 생소하다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모두가 잘 아는 음식이고 자주 드시는 음식입니다.
밀 낭화는 밀가루 반죽을 해서 다듬잇방망이 같은 것으로 넓게 편 다음
다시 그 편 것을 몇 겹으로 접어서 칼로 굵게 썰어 끓는 장국에 넣어 만듭니다.

입에서는 후루룩 거리며 뜨거운데
속에 들어가서는 시원한 칼국수가 바로 밀 낭화입니다.

 

아버님이 만드시고 아버님과 함께 먹던 밀 낭화.

적잖은 시간을 들여서 정성스레 만드시던 과정을 보았기에
천천히 아껴 먹어야 했는데 저의 밀 낭화 그릇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빈 그릇에 놀랍게도 가득 남아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늘 맛난 것을 먹이시려는 아버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 날.

밀 낭화를 맛있게 먹는 어린 아들을 기쁘게 바라보시던

아버님이 그리워 하늘을 바라봅니다.


단기선교 준비가 한창입니다.
끝나지 않은 팬데믹으로 올해도 역시 직접 현장을 갈 수는 없습니다.
작년에도 창의적으로 단기선교를 했었는데
올해는 또 다른 방법으로 현장 선교에 버금가는 단기선교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 해도 멈춤이 없었던 단기선교 대원들의 선교 이야기는
매년 준비부터 그 열매까지 뭉클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단기선교팀의 강력한 배후(背後)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선교바자회입니다.
모든 선교회 회원들과 교육부 그리고 모든 다민족 회중들이 함께하는 선교바자회.

부교역자 시절부터 보아왔던 선교바자회.
저는 보았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음을.
그들의 몸에, 시간에, 물질에, 직장에, 사업에, 그리고 가족에게 흔적이 있습니다.

여러 형태의 아름다운 예수의 흔적이 곳곳에 짙게 배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 날 몰라 줘도 이 세상 사람 날 몰라 줘도

이 세상 사람 날 몰라 줘도 뒤돌아서지 않겠네”

 

이 세상 사람 아무도 몰라주는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이 퉁퉁 부은 손을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결리고 아픈 어깨를 토닥여 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니? 얼마나 아팠니? 내가 다 지켜보았단다.

잘했다, 수고했다. 여기 너의 면류관이 있단다.”


“원래는 그 자리에 나오려고 준비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있었던 러시아권 예배 설립 5주년 감사예배 때
러시아권 형제 5명과 자매 5명이 바디워십을 하기로 준비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 형제 한 명이 빠진 채 9명 만의 바디워십이 있었습니다.
그 빠진 이유를 후에 송요한 목사님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함께 바디워십을 준비했던 24세의 형제가

지난 주일 하루 전에 직장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기계에 오른손이 절단된 것입니다.
다시 봉합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싸”라는 청년은 이란 출신인데 그의 가정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하려고

미국으로 이민 오게 되었고 가족 모두가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해했던 것과는 달리 그 가정은 신앙심이 깊은 가정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아버지가 장남의 사고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난과 신앙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사고를 당한 형제가 병원에서 김치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심방 대원들이 가져다준 갈비탕을 김치와 더불어 맛있게 먹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나가려는 아름다운 형제.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 먼저 한국 음식을 찾은 것은

어떤 비바람이 불어도 다민족 예배의 비전은 놓을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요.

 

 


내일은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입니다.
남북전쟁 때 숨진 군인들을 추모하는 날로 출발하여 지금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군인들을 기억하는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살아간다면 그들의 희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5년 전 메모리얼 데이 때에 이런 기억도 있습니다.

그날 전교인 한마음 축제는 비가 와서 교회 체육관에서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개회 예배 설교는 5분이었는데 20분이나 걸렸습니다.
한국어 설교 한마디를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로 이어서 통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좁은 공간에서 가득 모여 4개의 언어로 통역되는 예배에 감격했던 그날입니다.

바로 그 전날 있었던 러시아권 설립 예배의 벅찬 감동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날들을 살아가고 있고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중에 또렷이 기억하는 날들과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억할 뿐 아니라 무엇인가로 기억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긴 소년으로 기억합니다.
한나는 기도하는 여인으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선교사로,

그리고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아 소금 기둥 된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훗날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기억될까?”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러시아 말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Живи так, чтобы тебя запомнили.”

“남에게 기억되고 싶은 대로 살아라”


“어느 정도인지는 직접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심장혈관 검사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의사도 잘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저도 물론 알 턱이 없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한 시간여의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혈관이 99%가 막혀있고 1%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말의 심각성은 시술 후 의사가 보여 준 모니터를 직접 비교하고 실감하였습니다.

 

의사 말대로 동맥혈관 99%가 꽉 막혀있었던 시술 전의 끔찍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심장과 연관된 세 동맥 중 가장 중요한 혈관이라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스탠스를 넣어 혈관의 피가 힘 있게 흐르는 시술 후의 모습도

모니터를 통해 선명히 보았습니다. 사뭇 감격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었던 두 혈관 중 다른 하나는 회복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혈관을 회복했기에 생활과 일하는 데는 이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셋 중 하나의 혈관으로만 살아오셨다고 놀라워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의사가 밤새 어려움이 없었는지 저의 상태를 살피러 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본 환자 중에 가장 심각했습니다. 동맥 하나는 망가지고
중요한 하나는 1%만 남아 있었는데 벌써 어느 날 갑자기 숨을 멈췄을 것입니다.

제가 밤새 이런 환자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목사님이 믿으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1%의 기적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믿음이 없던 의사가 확신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저의 심장이 이런 상태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얼마 전 어깨가 더디게 회복되어 수영을 하다가 가슴이 아픈 것을 느꼈고
병원에 가서 심장에 문제가 있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년간 부족한 목사를 향한 교우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기도를 들으시고 그 1%의 기적을 허락하셨음을 깨닫고 병원에서 퇴원하였습니다.

 

1%의 기적은 서로 기도하는 우리 교우들에게도 있었고 또 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나님에게 1%는 사용하시기에 넉넉한 숫자이실 것입니다.


일 중심의 사람이 있고 관계 중심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 중심의 사람은 잠시의 쉼도 사치라며 일을 그 인생의 전부처럼 살아갑니다.

관계 중심의 사람은“일”보다“우리”라는 단어에 더 큰 가치를 둡니다.

 

마리아 앤더슨이라는 유명한 흑인 가수는“나”라는 단어보다“우리”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혼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에

나 혼자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작곡을 해주어야 하고
누군가 반주를 해주어야 하고 누군가 도와주어야 내가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의 무대는 자기의 잘남을 드러내는 무대가 아니라 함께 따듯함을 나누는

무대였습니다. 그가 떠난지 오래이지만 우리라는 따스함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어떤 관계입니까? 누군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우리는 아주 작은 몸짓 하나라도 느낄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 하나로 모두 알 수 있는 우리는~~

 

구구절절 아름다운“우리”입니다.

 

오늘 오후 우리는 함께 모여 가정의 달 연합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서로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영원합니다.

그러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부릅니다.


제 목양실에 본당으로부터 찬송이 들려오고 또 들려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경배와 찬양팀의 찬양 연습 소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님은 들려주셨습니다.
일년에도 스무 번 가까이 읽으시던 성경.
목회자가 길을 가기로 결단한
저에게 귀하고 귀한 성경말씀을 늘 들려주셨습니다.

 

저의 서재에는 수천 권의 책이 꽂혀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사랑하는 책은 단 한 권뿐입니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성경이 나의 가장 사랑하는 책이 되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을 펼치니 하늘 길도 펼쳐집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을 읽으니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을 연구하니 설교할 수 있게 됩니다.

 

귀한 성경을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신 어머니가 많이 그리운 날입니다.


4월의 자락에서 서성이던 5월이,
라일락 향기를 짙게 흩트리며 드디어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른다면
조금은 우쭐거리며 납시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요? 어린이들의 노랫소리이군요.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그동안 많이 눌렸었는지 5일은 우리들 세상이라고 목청을 높여 노래합니다.

연이어 들리는 가슴이 먹먹한 5월의 노래가 있네요.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아

 

5월의 노래는 끝나지 않아요. 존경과 감사가 배인 눈물의 노래로 이어집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찬란한 5월인데 5월의 노래들은 왜 이렇게 마음이 아리지요.

저는 그래도 부를 거예요.
어린이날에는 푸르렀던 지난 어린 시절과 그 때의 친구들을 회상하며,

어머니날에는 낳아 주신 어머니 길러 주신 어머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스승의 날에는 사랑으로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을 감사히 생각하며,

5월의 노래들을 목이 메어도 부를 거예요.


사람마다 약한 점이 있습니다.
약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약함을 수치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약함이 수치라면 저는 수치 덩어리 일 것입니다.

약함은 수치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함은 기회일까요?

맞습니다. 약함이 기회가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연주자였던 토스카니니는 글씨를 잘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보를 다 외워서 연주하였습니다.
어느 연주회 때에 지휘자가 무대에 설 수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악보를 다 외우고 있었던 토스카니니가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의 지휘에는 대찬사가 쏟아졌고 명지휘자로 발돋움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약함은 그것을 잘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회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약함은 또 무엇일까요?

바울사도가 말했습니다.
약함은 은혜라고.
약함이 아니었던들 기고만장(
氣高萬丈) 했을 인생들.
약함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고, 사람 앞에 겸손하게 되는 은혜.

약함은 은혜임이 틀림없습니다.

 

약함은 사명이기도 합니다.

나의 약함은 다른 약한 자들을 위한 사명을 일깨워줍니다.
나의 약함을 예수님이 감당하셨듯이 다른 자의 약점을 감당하라는....


한인 미국 이민자 누구에게나 눈물이 마르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 중의 하나가 영화“미나리”에서 펼쳐집니다.
서로의 가치를 내세우는 부부와 한국에서 오신 할머니가 불편한 손주.
뭔가 서로 잘 품어지지 않은 미국 교회와 한인 가정.

 

이민자들은 같은 가족 안에서도

나름대로 중요시 여기는 다른 가치가 있고, 서로가 몰라주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자신의 상처만을 아프다고 내세우면
부부 사이와 세대 간의 골짜기는 더 깊어진다는 것을“미나리”에서 보았습니다.

 

부부는 힘든 삶에서 서로를 구원해 주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힘든 서로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할머니는 딸과 사위, 그리고 아픈 손주와 손녀를 돕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민 땅에서 중요하다는 성공을 잃고 가장 중요한 가족을 함께 건져냅니다.

 

할머니가 한국에서 가져온 값싼 미나리 씨앗이 미국의 어느 강가에 심겨져

풍성히 자라 다음 세대들의 양식으로 전해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그러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우리 이민자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가슴에 맺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깊은 오열을

서로 끌어안고 눈이 짓무르도록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서로 닦아주면서,
질기게 함께 걸어가며 이 땅을 풍성케 하는 이민자 이야기는 여기서도 계속됩니다.

 

미나리는 어느 땅에서도 잡초보다 질기고 무엇보다 더 잘 자란다고 합니다.

미나리 이민자,

그대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모든 인생에는 쉼표와 마침표가 있습니다.
지난 9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공이 100세를

두 달 앞두고 인생의 마침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왕의 남편으로서 무수한 일들이 있었을 것이고
왕실의 자녀 후손들에게서 줄지었던 여러 일들
그리고 개인의 건강에도 부침(
浮沈)이 있어
인생길에서 잠시 서성거렸던 쉼표가 여러 차례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침표는 이제부터 말할 것입니다.
그가 마침표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장영춘 목사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꼭 일 년이 되었습니다.

일 년 전, 목사님의 짙은 아픔이 또 하나의 쉼표이기를 바랐으나

우리 모두의 아픔이 된 마침표였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목사님의 마침표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마침표 전의 삶들을 생각나게 하였고

그 의미를 우리에게 여러 차례 들려주었습니다.
목사님의 마침표는 복음의 이야기로 가득 채운 마침표였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는 쉼표가 이어지고 있지만

언젠간 마침표를 남기고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침표는 그 날부터 그 사람의 삶을 정확히 말하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삶이 그 마침표에 담길 정확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쉼표는 마침표에 담을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는 숨고르기 시간입니다.

쉼표는 아직 마침표가 아니며, 마침표는 결코 쉼표가 될 수 없답니다. 


그 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친구끼리 콧노래 부르면 놀러가는 길인가요? 아닙니다.

그들의 모습과 그 길을 이렇게 묘사한 분이 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이 세상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엠마오의 길은 일탈(逸脫)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그들은 그 날 새벽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하고
절망과 공포에 잠겨 끝없는 슬픔의 내리막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내리막 길에서 오르막 길로 돌이킨 것입니다.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낙심이 환희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 날 새벽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 길로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내리막은 멈추었습니다.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내리막 인생이 오르막 인생으로 바뀐답니다.


주님 가신 길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끝까지 따르겠다는 제자들은 줄행랑
귓가에 들려오는 군사들의 조롱소리, 사람들의 아우성

 

주님 가신 길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너의 죄, 나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

애잔하다 짓눌린 어깨, 애처롭다 비틀린 걸음

 

주님 가신 길

얼마나 아프셨을까?

손과 발에는 못, 허리에는 창,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

온 몸에 붉은 피 뚝뚝...

 

나의 가는 길

주님 가신 길 따라가고 있음이 맞는가?

아직도 봄바람은 차가운데 주님은 어찌하고

나는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시안 혐오 멈춰라”
요즘 여러 매체에서 볼 수 있는 문구입니다.
지난 16일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연쇄 총기 사건이 있었고
8명의 사망자 중 한국인을 포함 6명이 아시안인 이었습니다.

용의자로 체로된 청년이 요즈음 확신일로에 있는 인종혐오의 사건을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이민자의 땅입니다.

본토 인디안이 아니라면 이민자가 아닌 종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백인들의 기득권은 원래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수많은 물줄기가 흘러 들어와 하나의 바다를 이루듯이

어쨌거나 우리는 여러 군데서 모였으나 하나의 바다를 이루어

미합중국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갑니다.

 

멈추어야 합니다.

미움과 증오라는 삶의 방식을 멈추어야 합니다.

미국의 구성원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를

미워할 또는 증오할 이유도 권리도 없습니다.

 

멈추어야 할 것은 인종차별만이 아닙니다.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로 끌려가던 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해드렸던 모든 삶을 이제는 멈추어야 합니다.
멈춘 그 자리는 새로운 시작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멈춰라”에 복음의 진수와 미국의 가치가 담겨 있답니다.


“빠”를“바”로 살짝 바꾸었을 뿐인데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제가 살던 동네 태권도 도장에 이런 간판이 달려있었습니다.

“빠르게 보다는 바르게 가르치겠습니다”
얼마나 가슴에 와 닿은 글귀입니까?

 

“빨리 빨리”는 한국의 생활 문화라고 외국인들이 빗대어 말하곤 합니다.

한국 문화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은근과 끈기”가 원래의 문화였고
속성(
速成)보다 숙성(熟成)이 한국적인 것이었습니다.

 

“고추장”의 숙성을 “케첩”의 속성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김치”의 깊이를 “단무지”의 얕음이 어찌 견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속성이 다 그르고 숙성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속성은 바름을 간과(看過)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는 화요일 16일, 우리 교회 세분의 전도사님이 목사 안수 받으실 예정입니다.

요즈음 태평양 안수식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비행기 타기 전에는 평신도였는데 미국에는 목사님으로 내린답니다.
세 분은“태평양”이 아니라“뉴욕노회”에서 오래 시간을 거쳐 안수를 받습니다.

축하드리며 세분의 숙성이 펼칠 농() 깊은 사역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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