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저는 밥을 빨리 먹습니다. 밥만 빨리 먹는 것만은 아닙니다.

빨리 걷고 빨리 말하고.... 모든게 빠릅니다.

 

저 스스로 많이 질문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왜 모든 것을 빠르게 하려는지 말입니다.

모든 빠름에는 쉼표의 미학이 없어 볼품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빠름, 특별히 빨리 먹는 모습이 보여주는 수많은 볼품 없음 가운데도 두 가지 고상한(?) 의미가 있음을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면서 드디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래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미래로 빨리 가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미래가 항상 궁금합니다.

“이 시간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런 물음이 제 안에 깊숙이 자리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밥을 먹고 주님을 위해 죽고, 교인들이 주는 밥을 먹고 교인들을 위해 죽으라는 선배 목사님의 가르침도 제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미래로 빨리 가려고 빨리 먹는다는 것은 어이없는 논리일 수 있지만, 혹시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동안은 별로 그렇지 않았더라도 주님이 다시 오실 미래의 촉박한 시간 앞에, 빨리 밥을 먹고 주님과 교인을 위해 일할 시간을 조금 더 확보하는 것이 가능할지 말입니다.


죽기를 연구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삶이 너무 힘들었을 때 죽기를 살짝 생각해 본 적이 있으셨을지는 몰라도 그 누구도 본격적으로 죽기를 연구해 본 적은 없으실 것입니다.

 

며칠 전 찾아가 만난 분이 몸이 아픈 것을 비관하여서 한 달 이상을 본격적으로 죽기를 연구하였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담담하고 상세하게 일러 주셨는데, 병실에서 뛰어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머리를 벽에 세게 부딪히는 것 등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몸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어~어~ 이제는 살아야 하나?”를 생각하셨답니다.

 

아직 그분은 몸의 한 부분이 아프십니다.

그 아픈 곳을 부여잡고 여전히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날 저는 말씀을 전하면서 그분의 안 아픈 곳을 하나하나 집어가면서 물었습니다.

“여기 아프세요?” “아뇨.”

“여기는 어떠세요?” “괜찮아요.”

“여기는요?” “안 아픈데요.“

“안 아프신 곳이 훨씬 많으시군요?” “....그렇네요.”

 

그분은 이제 죽기를 연구하길 포기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대신 잘 살기를 각오하였음을 보았습니다.

“빨리 나아서 교회 갈게요.”

교회와 담쌓고 살던 그분이, 그의 병실을 나서는 우리에게 아픈 곳을 잡고 있던 그 손으로 사랑의 표시를 몇 차례 하였습니다.

그분의 병실 창문 밖에는 올해의 첫눈이 하얗게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없다 song을 아십니까?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 20:6下)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처한 환경을 둘러보며 이곳에 다섯 가지나 없다고 외칩니다.

 

영국의 조지 허버트라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의 마음에 없는 한 가지를 이렇게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한 가지만 더 주시옵소서

감사하는 마음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면 “환경”에 있는 “그 어떤 것들”이 아니라 “마음”에 꼭 있어야 할 “감사”가 아닐까요?


파가니니를 아십니까? 니콜로 파가니니.

10대 초 이전의 연주기법을 다 마스터하고도 계속 하루 10시간 이상 격심한 연습으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17세에 큰 명성과 부를 이루었던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그런 일찌감치의 성공이 오히려 파국에 이르게 했다가 다시 일어난 사람.

 

그에게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의 연주회 때 바이올린 줄이 하나씩 끊어지면서 마지막 한 줄이 남았지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 남은 줄 하나로 화려한 연주를 마쳤다는 이야기.

 

11월 달력을 뜯어내셨다면 이제 달랑 한 장만 남아 있는 달력.

그 한 장 남은 달력을 바라보며 “올해도 이렇게 아쉽게 끝나네....”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달력 한 장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 올해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달력 한 장으로 멋진 올해의 마무리를 하십시오.

그렇다면 보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2018년 피날레를.

 

가나 혼인 잔치가 큰 어려움에 빠져 낭패의 잔치로 막을 내릴뻔 했으나 거기 계신 한 분 예수님 때문에 happy ending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잊지 마십시오.

한 줄 바이올린 줄도 소망이 되고, 한 장 달력도 소망이 될 수 있다면, 한 분 주님은 가장 확실한 소망이심을.


키 153m, 몸무게 48kg.

40대까지만 해도 몸이 허약해 골골했던 출판 편집자.

무언가 제대로 할 수 없던 자신의 바닥난 체력이 부끄러워 시작한 운동을 매일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하다가 지금은 50살이 넘어 철인 3종(옥외수영, 사이클, 마라톤) 경기를 취미 삼게 된 이영미 씨의 이야기를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강연 프로그램)에서 들었습니다.

 

그의 강연 가운데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운동하라는 말이 너무 와닿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체력 약한 그 누구도 몸짱으로 만들어 주는 보석 같은 세 단어들입니다.

매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운동한다면 모두의 몸 안에 깊이 잠자고 있던 건강이 조금씩 깨어나 마침내 놀라운 강인함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언젠가 제주도에 있는 세계적인 분재정원(盆栽庭園)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수십 년 전 돌로 가득했던 척박한 땅이 아름다운 나무들로 가득한 정원으로 바뀌는 과정에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이였음을 기억합니다.

 

지금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영적 성장이든,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직장 생활이든, 가정을 돌보든, 아니면 건강을 회복하려거든 매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해보세요.

그 어떤 분야이든 극심한 스트레스 없이 머잖아 견고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저부터 매일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그 옛날, 겨울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분주하곤 했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 때문이죠.

겨울나기 준비의 최고봉은 역시 김장김치를 담그는 것이었습니다.

식구 수에 따라 100포기 200포기, 또 그 이상을 담그게 됩니다.

잘 담근 김장 김치는 온 겨울을 든든하고 행복하게 해주었지요.

밥에는 물론, 칼국수, 수제비 같은 밀가루 음식에도 제격이었답니다.

 

김장김치를 만드는 전(全) 과정에 참여해 본 적은 없지만 오가며 김장김치 만드는 것을 보면서 잘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배추 절임과 김장 속 버무림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친 김장김치들이 장독 속에 들어가고 땅에 파묻혔다가 적절한 때에 꺼내져 한 포기씩 또는 반 포기씩 상위에 얼굴을 내밀게 됩니다.

 

겨울나기 김장김치에만 아니라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절임과 버무림입니다.

절임이란 배추로 더 이상 뻣뻣하지 않고 부들부들하게 만듭니다.

우리 각자가 배추 절임처럼 겸손해져야 합니다.

버무림이란 여러 김치 속 재료들을 함께 섞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가 함께 너도나도 없이 어울려져야 합니다.

 

절임과 버무림이 잘 되면 인생 겨울나기 준비는 ok입니다.

이렇게 한 번 외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절여지고 우리는 버무려진다.


지금은 21일, 금요일 이른 새벽입니다.

창밖에 비를 동반한 바람 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요란합니다.

저는 방 안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한 겨울에 불어대는 저 비바람을 밖에서 직접 맞이한다면 누구라도 많이 서럽고 두렵고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일정한 범위 밖에 있는 자들을 아웃사이더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이름이나 처한 위치는 무언가 소외되고 어딘가 힘겨움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사는 어느 곳이든 아웃사이더는 존재합니다.

이천 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때 베들레헴 지역 밖에서 한 밤을 보내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에 그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인류 최대의 소식이 들려졌습니다.

한 밤에, 밖에 있던 그들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천사로부터 직접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구주를 급히 찾아뵙고 돌아가는 길에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들이 성탄 새벽송의 효시(曉示)였을 것입니다.

나는 아웃사이더라고 주눅 들고 슬퍼할 일만이 아닙니다.

세상 나라의 아웃사이더가 하늘나라의 인사이더가 되는 것이 성탄이기 때문입니다.

 

컬럼은 다 써가는 데 비바람은 유리 창밖으로 더 거세집니다.

문득 박인환 시인의“세월이 가면”이 생각나는군요.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최근에 언제 날아가는 새를 보셨나요?

저는 지난 목요일 청년대학부와 함께 겨울수련회 가는 길에서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새떼를 보았습니다.

그들에겐 방향과 속도에 있어서 모두가 함께하는 감탄할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또 중요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어느 새도 뒤돌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인이 이미 갈파한 대로 새는 날아가면서 결코 뒤돌아 보지 않습니다.

사도바울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3:13)

롯의 아내가 뒤돌아보다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한 해가 다 저물어 갑니다. 마지막 시간과 함께 아쉬웠던 것도, 잘못된 것도, 꽤 괜찮았던 것도 다시 오지 못할 과거로 점점 사라져 갑니다.

앞으로 날아가는 새처럼 뒤돌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사라지는 것들 다시 보겠다고 뒤돌아 보다가 우리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묶여있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또 비바람이 몰려올 것입니다.

때때로 먹구름이 펼쳐지기도 할 것입니다.

앞으로 만날 일들이 저만큼 오고 있는데 뒤만 돌아보고 땅을 칠 겨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희망의 날개를 활짝 펴서 높이 치솟아 앞으로 날아 갑시다.

우리 앞의 어떤 먹구름이나 비바람도 점 같이 보이다가 점점 지나가도록.

 

2019.01.06 00:00

[2019-1-6] 첫 단추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단추를 꿸 곳이 없고 옷 모양새는 아주 우스워집니다.

새해의 첫 단추가 이상하면 올해의 전체도, 그 마지막도 이상하게 됩니다.

당신에게 새해의 첫 단추는 무엇입니까?

건강? 재물? 학위? 결혼?

 

“단지 15분”이라는 어느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장래가 유망한 청년이 박사논문을 제출하여 놓고는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진찰 결과 그는 15분 후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죽기 10분이 남았을 때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가져왔는데 억만장자인 그의 삼촌이 죽었으므로 와서 재산을 상속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9분이 남았을 때에 도착한 것은 박사학위 논문 합격 통지서였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애인에게서 결혼을 승낙하는 편지도 배달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15분은 다 되어 죽게 되었답니다.

 

새해에 사람마다 건강, 재물, 학위, 결혼 등등이 필요하지만 이 땅의 것들이 새해의 첫 단추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성도들에게 그럴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첫 단추는“위엣 것”이 되어야 합니다.

 

위엣 것을 첫 단추로 삼으면 올해의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뒷 순위의 가치를 첫 단추로 삼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가“위엣 것”은 밀리고 밀려 끝내 꿸 자리도 없을지 모릅니다.

당신이 새해에 입을 옷이 5개 구멍밖에 없는 옷이라고 합시다.

“위엣 것”은 당신의 몇 번째 단추입니까?


누가 지혜론 사람입니까? 할 것과 말 것을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용감한 사람입니까? 할 것과 말 것을 결단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할 것과 말 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할 것을 하면 귀(貴) 해집니다.

할 것을 말면 천(賤) 해집니다.

말 것을 말면 정(淨) 해집니다.

말 것을 하면 추(醜) 해집니다.

 

기뻐하세요. 기뻐하면 열려요. 축복의 통로가

기대하세요. 기대하면 커져요. 하늘의 소망이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몰라요. 낙심의 탄식을

 

비교하지 마세요. 비교하면 열려요. 서글픈 미래가

염려하지 마세요. 염려하면 커져요. 불안한 마음이

불평하지 마세요. 불평하면 몰라요. 한없는 은혜를

 

할 것과 말 것을 혼돈(混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것과 말 것에 갈등(葛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것과 말 것도 타협(妥協)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 11:53)

그들은 할 것과 말 것을 구분하지 못하여 잘못된 것을 결단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행했고 암흑의 역사를 빚었답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할 것과 말 것을 구분하고, 결단하고, 실천하여

자신의 행복과 빛의 역사를 만드는 그들은.


지난주, 멀리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이었습니다.

만난 지는 십 수년, 통화한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전화하는 즉시 우리는 그 오랜 시간이 서먹하지 않게 함께 시간여행을 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물론 과거의 이야기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아직 녹슬지 않은 저의 '아재 개그'를 간간히 섞어 이야기하니 친구는 스마트폰이 깨지듯 웃었습니다.

 

그 친구는 노숙자 사역을 합니다.

그 친구가 위로해 줄 사람은 많아도 그 친구를 위로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힘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 날 친구와 함께 터뜨린 웃음은 분명코 한 겨울에 핀 봄날의 기쁨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박인수 씨가 부른 이 노래를 들었습니다.

 

많지 않아도

그리고 자주 만날 수 없어도

나에게 친구가 있음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멀리 있어도 가만히 이름 불러볼 수 있는

친구가 나에게 있음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내 좋은 친구를 만날 때면

웃음마다 봄날 기쁨입니다

보고픈 친구를 생각할 때면 그리움은

잔잔한 행복입니다

 

 

바쁘셔도 잠시 옛 친구에게 전화해 보세요.

그와 함께 웃노라면 한 겨울인데 봄날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2019.01.27 00:00

[2019-1-27] 후츠파

다음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빌 게이츠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

윌리엄 로젠버그 (던킨 도너츠 창업자)

 

같은 학교 선후배라고요?

같이 부자 동네 산다고요?

아닙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혁신적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느냐하면 어렸을 적부터 질문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겐 후츠파 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후츠파(הפצוח)는 무례, 당돌, 철면피 따위를 뜻하는 낱말입니다.

이 단어는 용기, 진취, 도전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무례할 정도로 묻고 또 물으면서 전혀 새로운 관점들과 실험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형식파괴, 질문권리, 상상력과 섞임, 위험감수, 목표지향, 끈질김, 실패학습 이라는 7가지 정신이 후츠파에 있습니다.

 

우리에겐 침묵을 미덕으로 여기며 궁금한 것도 없고 따라서 질문도 없이 지나치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요?

침묵이 그 자리에선 예의가 있어 보이지만 앞이 캄캄합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질문을 던지는 후츠파가 당시에는 무례하고 당돌하지만 환한 미래를 여는 중요한 열쇠라고 확신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난 주간에 신학교가 개강했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첫 삼일 동안 개강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개강 부흥회에는 y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높으신 연세에도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월요일 첫날에 목회 중에 있으셨던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른 교단 교회에 잠시 파송 사역을 하시게 되었답니다.

아주 젊으셨을 때였죠. 그런데 그 교회 제직들이 희한(稀罕)했다는 것입니다.

맥주도 마시고, 고스톱도 치고, 사교(社交) 댄스도 추는....

원래 정치운동 색깔이 짙은 교회였지만“이것은 결코 아닌”제직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사교댄스를 추려던 그들에게 y 목사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셨답니다.

“댄스든지 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시오.”

그들이 잠시 의논한 후 답을 가져왔답니다.

“우리는 댄스를 택하겠습니다.”

 

쿵짜작 짝짝~~

음악과 함께 사교댄스를 추는 그들에게 목사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등짝을 때리면서

“들어가시오”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댄스는 멈춰지고 목사님은 집으로 돌아 오셨답니다.

그날 저녁,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 전화를 많이 받으셨답니다.

성도들이“목사님, 잘하셨습니다. 도대체 제직들이 그게 무슨 짓입니까?”

그 후 교회는 변화되었고, 그 제직 가운데 사역자들도 나오게 되었답니다.

 

“우리는 댄스를 택하겠습니다.”

“들어가시오”

저와 젊은 신학도(神學徒)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노(老) 목사님의 목회 단상(牧會斷想)이셨습니다.


올해가 77세이신 아버지는 건강하셨답니다.

급작스런 아버지의 담도암 소식을 듣고 황급히 한국으로 날아갔습니다.

일주일간 간호해드리는데 어느 토요일 아침 그의 눈앞에서 아버지는 떠나신 것입니다.

목사님이신 아버지의 죽음.

많은 일을 하셨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의외로 짧았습니다.

“천국에서 만나자”

 

장례식이 예배로 가득 찼답니다.

하루에도 20번 정도의 예배가 드려진 장례식.

많은 분들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한결 같았습니다.

“네 아버지는 훌륭하셨다.”“네 아버님은 좋으신 분이셨지.”“네 아버지는....”

 

장례식을 다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 온 그는

아름다운 삶을 남기신 아버지의 죽음 앞에 자기의 삶을 돌이켜 보게 되었답니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세상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좋다고 먹고 마셨던 것들이 다 부질없었어.”

“천국에서 아버지를 어떻게 뵐까.”

 

그에게도 아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자기 아들이 사람들에게 들을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 아버지는....”“네 아버님은....”“네 아버지는....”

훗날 천국에서 만날 아버지. 훗날 자신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를 들을 아들.

두 시간 가까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 갖게 된 상념을 나직이 말한 던 그가, 스스로 밝힌 나이는 올해 50입니다.

50세면 삶을 바꾸기에 늦은 것일까요?


습관은 버릇이 되고 버릇은 점차 익숙한 것이 됩니다.

습관도 버룻도 버리기 힘든데 익숙한 것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익숙의 영역은 다양합니다. 보는 것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만 보려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대한 발전은 더딥니다.

 

10년 20년을 같은 길을 다녀도 그곳에 언제나 있었던 가게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다가“이런 가게가 여기 있었어?”하고 놀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익숙한 것만 보이는 안타까움의 현장입니다.

 

1990년 지구궤도에 발사된 허블우주망원경이 있습니다.

지상의 우주망원경과는 달리 더 높은 해상도의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 허불망원경이 관찰하는 행성은 익숙한 것만 관찰합니다.

로버트 윌리암스는 허블망원경의 각도를 틀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방향을 관찰해 보자고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방향을 주시하고 주시하였더니 그동안 물랐던 아름다운 은하계를 발견한 것입니다.

1995년의 일입니다.

 

성경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들인데, 성경 전체를 읽긴 읽어도 익숙한 이야기만 보면서 그 수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지나쳐 가곤 합니다.

익숙함을 넘어설 때 우리의 삶과 신앙은 더욱 풍성해 질것입니다.

저는 지금 멀리서 익숙함을 넘어서는 성경 읽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죄가 사람에게 안겨준 것은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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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저 외로움을 견디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요?

여리고 성에 살던 삭개오는 외로웠습니다.

돈은 있었지만 친구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비난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도 뽕나무 위에서 싸늘히 흐르는 고독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런 자기에게 다가와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신 분이 있으셨습니다.

그분은 삭개오에게 구원과 공동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애에 언제나 나를 품어주는 공동체,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어디선가 외로움에 지쳐 울고 있을 것입니다.


2019.03.03 00:00

[2019-3-3] 기대하라

“고도를 기다리며”는“고도(高度)를 기다리며”가 아닙니다.

“고도(godot)를 기다리며”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제목입니다.

이 책에서는 두 친구가 날마다“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고도”라는 사람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서“고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紛紛)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어떤 대상을 말한다고도 하지만 그러나 원작의 제목에 쓰인 단어를 유심히 보면 “고도(godot)”는“신(god)”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을 기다리지 말라, 그는 결코 오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기대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가졌기 때문일까요, 기다려보았자 별것 없기 때문일까요.

이런 세태를 거슬러 가야 합니다.

“기대하라”는 오는 3월 11일 월요일부터 시작될 올해 사순절의 주제입니다.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서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6주간 동안 진행될 사순절에 6개의 소주제가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기대하라.

지금, 어떤 상황이든지 기대하라.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라.

여기, 어떤 곳이든지 기대하라.

놀라운 회복과 기적을 기대하라.

십자가를 기대하라.

 

사무엘 베케트는“고도(godot)”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고 슬퍼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대하는 모든 자에게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숨이 막혀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미세먼지 때문에 한국에서 울려 퍼지는 탄식입니다.

유치원에 가는 어린아이들까지 마스크를 쓰여 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 오가는 사람이 없어 장사를 할 수 없다는 상인들의 마음은 참담하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먼지들은 교육, 경제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심각하게도 사람들에게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거나 그 목숨을 앗아 갑니다.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한국을 다녀오시는 많은 분들이 뉴욕의 공기가 이렇게 좋다는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공기가 맑고 좋은 곳을 청정지역이라고 합니다.

조사(調査)를 통해 보니 뉴욕은 미세먼지 농도가 낮은 청정(淸淨) 도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난날 뉴욕도 최악의 미세먼지로 시달렸으나 그런 먼지들을 방출(放出)하는 원인들을 꾸준히 퇴출(退出)시킨 결과입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입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영적 미세먼지도 있습니다.

마귀의 변함없는 전략은 영적 미세먼지입니다.

마귀는 사소(些少)한 이유들로 영적 미세먼지를 빚어 성도들의 기도를 조금씩 틀어막다가 마침내 치명적인 영적 손상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날 기도의 호흡이 전혀 막히지 않는 최고의 영적 청정지역은 어디일까요?

더 이상 마귀의 영적 미세먼지 전략이 조금도 먹히지 않는 곳입니다.

내일 새벽에 이 시대에 최고의 영적 청정지역이 어디인지 볼 수 있을까요?


겨우내 닫아 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창 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던 봄이

왜 이제야 문을 여느냐는 듯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봄은 따스함입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녹이는 따스함입니다.

봄은 소리입니다.

아니 함성입니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예쁜 꽃들의 함성입니다.

 

봄은 희망입니다.

각양 씨앗들이

녹은 땅을 찾아들어 희망을 싹 틔우려고 들썩이고 있습니다.

 

봄은 향기입니다.

살짝 머리 아픈 샤넬 파이브가 아닌

가슴까지 싱그러운 자연산 향기입니다.

 

봄은 그대 앞에 와 있습니다.

봄의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봄과 함께 사순절의 여정을 즐기십시오.

 

벌써 봄이 그대 앞에 와 있는데

왜 아직 겨울 자락을 덮고 있습니까?

이제는 그렇게 춥지 않잖아요?

어서 겨울 자락을 거두고 우리 같이 봄을 노래해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수년 전에 높은 시청률을 보였던 프로그램 제목입니다.

유아들의 여러 문제들을 고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아이들의 문제는 아이들 자신보다 부모의 문제가 더 크다는 전체 결론이 기억됩니다.

 

“내 몸이 달라졌어요”

누구나 외치고 싶은 말입니다.

모두가 군더더기 살 대신에 근육질 몸매가 되고, 골골했던 몸이 회복을 넘어 강건하게 되길 고대하지만 거기에 걸맞는 운동을 꾸준히 하는 자를 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내 영이 달라졌어요”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영적 약골(弱骨)이 즐비한 시대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한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근육질 사람은 가끔 보았는데 이제는 깊은 영의 사람, 강한 영의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사순절이 2주가 지났습니다.

내 영이 변화되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닙니다만 내 영이 변화되는 강력한 조짐을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그동안에 동참했던 분들은 꾸준히, 아직 참여하지 않은 분들은 아무도 늦지 않았으니 내일부터라도.

그리하여 부활절을 절기로만 맞지 말고, 실제 내 영이 변화되어 가슴 벅찬 그 날을 모두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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