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오늘, 우리 교회는 새로운 선교역사(宣敎歷史)의 장(章)을 열게 되었습니다. 중국어예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중국어 예배는 매 주일 오전 9 시 45 분 양순관에서 드려집니다.

낯선 미국 땅에서 우리처럼 이민자(移民者)로 살아가는 중국인들을 애틋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부터 우리도 중국이민자들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몇 달 동안 기도하며 준비해 온 중국어 예배가 드디어 오늘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하나님은 그를 불러 중국 복음화의 문을 열도록 하셨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삶의 법칙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뜻 앞에 순종하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습니다.

그의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의 후손을 비롯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 선교사로 자원을 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국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중국어 예배, 우리의 시작은 미약합니다. 우리는 시작이 미약하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또 시작하며 가는 길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반드시 창대케 될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시작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롭게 결심하며 해보시려는 일들이 각자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미약한 일들이 대부분일터인데, 그 미약함을 함부로 멸시하지 마십시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는 약속의 시각, 미래의 눈으로 오늘의 미약함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앞에는 더 크고 더 좋은 일(bigger and better) 이 약속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미약함 속에 깃든 창대한 미래를!


짐 지고 가는 자, 우리 모든 인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짐이 있습니다. 보이는 짐도 있고 보이지 않는 짐도 있습니다.

무거운 짐도 있고 가벼운 짐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있는데 너무 무거워 감당할 수 없다고 이렇게 신음하고 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시 38:2). 우리 모두의 신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죄의 짐을 대신 져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아십니까?

날마다 우리의 죄의 짐을 지시는 분의 이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 58:19).

 

자신이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짐, 죄의 짐을 계속 지고 가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죄의 짐은 주님께 맡기십시오.

무거운 그 죄는 심판까지 기다리고 있기에 무서운 짐이기도 합니다.

그 옛날 바라바는 놀라고 또 놀랐을 것입니다.

흉악한 죄의 값으로 죽어야 할 사형수 바라바 자기 대신 예수님께서 사형수로 돌아가시고 자기는 자유롭게 된 사건,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의 그 바라바입니다.

 

우리 짐 가운데는 이렇듯 맡길 짐이 있는가 하면, 맡은 짐이 있습니다. 사명의 짐입니다.

이 짐은 다른 자에게 떠맡길 수 없습니다.

남편으로의 사명, 어머니로서의 사명, 누가 대신해 주겠습니까? 내가 맡은 직분, 누구에게 떠넘기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날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맡은 사명의 짐이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내 등의 짐"이라는 시를 이렇게 시작하고 이렇게 마칩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를 못했을 겁니다.

내 등에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 내 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 짐, 슬픈 이별의 짐들이 내 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시인은 맡은 짐들이 선물이라고 합니다.

 

.... 성도는 자기가 맡은 짐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지난 수요일 예배 후, 모(某) 집사님을 제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집사님의 부친께서 한국에서 소천 하시어 위로 차 뵙게 된 것입니다.

올해 아흔이 되신 그 부친께서는 북한이 고향이라고 하셨습니다.

20 세 때 떠나온 고향을 70 년 동안 그리워하셨고 마지막에는 북에 계신 어머님을 그토록 부르셨다고 합니다.

 

이산가족의 문제는 아직도 우리 민족에게는 크나 큰 고통의 현실입니다.

현재 1,000 만 명 이상의 관객이 보았다는 영화 ‘국제시장’도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온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 흥남에서 미군 함정에 올라타려는 수많은 피난민 중에 나이 어린 덕수의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배에 오르면서 덕수는 등에 업었던 여동생을 잃어버립니다.

덕수의 아버지는 그 딸을 찾으려고 이미 올랐던 배에서 다시 내립니다.

그 때 자기의 저고리를 어린 장남 덕수에게 건네주면서 아버지가 없으면 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남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줍니다.

 

덕수, 그는 한평생 홀로된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묵묵히 험한 길을 걸으며 아버지가 부탁한대로 모두가 행복해 하는 가정을 일구어 냅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노는 그 시간, 할아버지 덕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쓸쓸히 놓여 있는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목 놓아 흐느낍니다.

“아버지, 내 약속 잘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그 옛날 아버지가 건네준 저고리를 껴안으면서 그의 통곡은 계속됩니다.

 

저는 이 영화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절망 중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버지, 내 약속 잘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살았지예....”라는 덕수의 독백에서 예수님의 치열하셨던 구속사역이 가슴 저미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저와 우리 교우들도 이 땅의 소명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아버지를 뵈올 그 날 “이만하면 내 잘살았지예”라고 눈물 콧물 흘리며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생각도 함께 떠올려 보았습니다.


고(故)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는 한 살 때 소아마비가 걸려 평생 두 발을 쓰지 못하였고 암에도 걸리고 또 재발도 하여 투쟁 이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서 그 제목을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기적이란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단지 하나님에 의해 행해졌다고 굳게 믿어지는 기이한 일을 지칭합니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기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어 기적을 펼치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닌 사건들이 우리의 지난 삶이었고 또 우리들 앞날의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어린 아이의 점심 도시락,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 오병이어는 수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을 충분한 재료였습니다.

내 인생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계산하지 마십시오. 상상 못할 기적도 있습니다.

 

장영희 교수는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생생하게 제 생애에 기억되는 사람입니다.

어디선가 ‘장영희’하면 하던 것을 멈추고 ‘장영희씨에게 또 무슨 아름다운 일이 있었다는 거야?’ 궁금해 하면서 둘러보게 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는 분이 기억되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모습을 인간의 관점으로만 보지 않고 그 모습 위에 펼쳐질 기적을 기대하며 노래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삶이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기억이 된다면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은 삶을 산 것입니다.

 

올 한해도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우리에게 기적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살아온 것이 기적인데 살아갈 것도 기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경이로운 열매를 거두는 기적의 삶,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루어 가실 나의 삶이 될 것입니다.

현실을 탓하지 않고 기적을 기대하며 기적을 베푸실 하나님을 노래하며 살 때, 먼 훗날 나의 삶을 아름다운 삶으로 기억해 줄 사람들이 몇이라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아니~ 벌써~♬

2 월이 되었습니다. 신년하례 예배 드리고, 제직수련회 지나고, 청년수련회 잠간 갔다 왔더니 한 달이 훌쩍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이 시간입니다. 농부들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더 빠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아직 겨울이지만 농부들의 마음은 밭으로 나가 있겠고 파종을 하기 위한 여러 준비를 할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파종 했다고 그의 일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부터 바쁜 일이 진짜 시작되는 것입니다.

농부는 수시로 밭을 드나들며 심은 작물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 둘러볼 것입니다.

만일 어느 농부가 게을러서 밭을 둘러보지 않는다면 그의 가을 들녘에서는 부를 노래가 없을 것입니다.

후회의 탄식과 눈물이 볼품없이 자란 작물에 뚝뚝 떨어질 것입니다.

부지런히 돌본 농부의 밭은 자신이 먹기에 넉넉함은 물론 그 풍부함을 함께 누릴 이웃들의 존경어린 눈길을 받을 것입니다.

 

이 땅의 밭이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예민합니다.

돌보지 않고 가꾸지 않는 영혼은 겉으로는 잘 표시가 나지 않는 것 같지만 곧 비틀거리다가 조그마한 시련에도 쓰러질 것이요,

잘 돌본 영혼은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영적 열매를 함께 나눌 것입니다.

 

2 월은 영혼을 부지런히 돌볼 계절입니다. 이번 주면 제자훈련과 영성훈련이 시작됩니다.

사순절도 2 월에 시작됩니다.

영혼 가꾸는 일, 나중에 해도 괜찮으려니 하다가는 자신의 육신도 거하기 싫다고 외칠 황폐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영혼을 부지런히 가꾸세요. 영혼을 가끔 돌보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 삼지 마십시오.

너무 빠르게 다가온 2 월, 그나마 2 월은 삼일 먼저 도망가니 영혼을 잘 가꾸어 거두셔서 풍성한 2 월의 가을을 만들어 봅시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서로 인사할 때 “마라나타!”라고 외쳤습니다.

원문 성경 고린도전서 16 장 22 절에 나오는 “마라나타”는 우리 성경이 번역한 대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제 곧 우리 주님이 오십니다.

어떤 어려움도 잘 참고견딥시다.”라는 의미로 마라나타를 그들의 인사로 삼은 것입니다. 

오늘날은 초대 교회의 상황이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외칠 것도 마라나타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요한계시록을 강해합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에도 마라나타를 풀어 쓴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22:20)라는 간절한 외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나타의 신앙을 일깨워 줄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잘 이해하시고 요한계시록 전체를 읽으시며 사순절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험한 세상을 넉넉히 이기시는 모든 교우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1-3 장에는 서론과 일곱 교회 이야기가 있다 

4 장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 예배 광경이 보인다

 

5,6 장에는 일곱 인이 떼어진다 

7 장에는 많은 무리가 예배드리는 광경이 있다

 

8,9 장에는 일곱 나팔 이야기가 있다 

10 장에는 일곱 우레 소리가 있다

 

11 장에서는 두 증인이 죽는다 

12 장에는 용과 여자의 싸움이 나온다

 

13 장에는 666 숫자가 나온다 

14 장에는 144,000 명이 나온다

 

15 장에는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가 있다 

16 장에는 일곱 대접이 부어진다 

17 장에서는 음녀가 망한다 

18 장에서는 바벨론이 망한다

 

19 장에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있다 

20 장에는 천년왕국 이야기가 있다 

21 장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인다 

22 장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우리 모두가 가슴 저미게 외치고 외칠 그 말, 마라나타! 마라나타!

   


 

사순절, 기도의 계절이 다가 왔습니다.

기도는 항상 해야 하지만 사순절은 구약의 미스바 성회처럼 우리 온 교회가 하나님께 나아가 전심으로 부르짖는 특별한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사순절 기도는 개인의 회복, 가정의 축복, 교회의 부흥, 선교의 확장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은 세 사람이 함께 조를 짜서 참여하는 삼겹줄 중보기도회로 진행 할 것입니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많은 분들이 삼겹줄 중보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먼저 세 사람이 한조를 짜서 그 이름을 교역자에게 제출해 주시면 됩니다.

유의하실 것은 한 사람은 꼭 한 그룹에만 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쁘실 테니까

겹치기 출연은 삼가 주세요.

 

중요한 것은 사순절 동안 세 사람이 자주 만나 서로 격려하고 서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만남이란 의미는 새벽기도회 시간에 꼭 같이 앉으라는 것이아닙니다.

매일 새벽기도회 후에 친교실에서 베이글과 커피를 앞에 두고 만나실수 있고, 밖에서 만나셔서 삼겹줄 중보기도모임답게 삼겹살, 삼계탕, 삼선짬뽕 또는 삼합 등 ‘삼’자가 들어간 음식을 먹는 것도 참 좋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을 불러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8b)"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깨어 기도하라”는 명령이 이번 삼겹줄 중보기도에 참여하는 우리 모든 교우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졸지마시고, 포기마시고, 안 된다고 하지 마시고 깨어 기도합시다.

깨어 기도할 때 나 자신도 깨어나고, 내 가족도 깨어나고, 교회도 세상도 깨어날 것입니다.

세 사람의 중보기도, 세 사람은 물론 세상을 새롭게 바꿀 기적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b).”

그렇습니다.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오늘 우리는 교회 설립 41 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위대한 사도행전의 역사를 재현하는 교회가 되게 하자”는 기치를 들고 중단 없이 달려왔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이민 땅에서 많은 교회가 넘어지고 흩어지는 가운데 우리 교회는 그 초점을 잃지 않았기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초점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동안 절대 진리인 성경의 자리를 대신하여 이성(理性) 또는 과학(科學)이 절대 진리인 것처럼 행세하여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왔습니다만 이제는 그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절대 진리에 대한 관심보다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세상의 “절대 진리”에 대한 태도는 무관심이 아니라 실망에 가깝습니다.

오늘에 지친 삶에 대한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하고, 현대의 혼돈스런 삶을 조금도 변화시켜 주지 못하는 진리에 더 이상 소망을 두고 싶지 않다는 애절한 절규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진정성을 보여 준다면 세상은 다시 그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그 말씀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간다면 초점 없이 상대주의에 빠져 살던 사람들이 다시 귀를 쫑긋일 것이며 눈의 초점을 그 하나에 모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라는 목표는 그렇게 세워진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변화시킬 진리를 기다려 왔습니다.

척박한 이민 땅에서 우리 교회의 41 년이 “사도행전 역사의 재현”이라는 선명한 초점에의 승리였다면, 상대주의가 편만한 시대에서의 지속적 승리를 위해 “말씀으로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라는 초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른 초점과 그 초점을 향한 타협 없는 헌신을 보여주신 우리교회 1 세대의 어른들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다음 장(章)의 역사를 힘 있게 쓰기 시작한 새로운 세대(世代)에게 뜨거운 사랑을 전합니다.


일주일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2015 년 사순절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한 걸음씩 내디딘 걸음이 머잖아 부활절을 지날 것이요, 그 언젠가는 주님의 존전 앞에도 이를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으실 질문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기철 목사님은 이런 글을 옥중에서 남기셨습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른 것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이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리이까?”

목사님은 주님께서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할까를 늘 생각하면서 이 땅을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목사님은 5 년의 옥고(獄苦)를 치르면서도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시고 47 세이시던 1944 년 4 월, 가장 아름다운 고난의 잔, 순교(殉敎)로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아흔 여섯 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2015 년 삼일절을 맞고 있습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그 해 열일곱 살 꽃다운 나이의 여학생 유관순은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소망의 미래로 일깨우기 위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조선의 해방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다 함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나는 대한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 만 18 세가 되기도 전(前)인 1920 년 9 월 순국(殉國)한 어린 소녀의 마지막 말은 이랬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어느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이상한 욕을 듣고 살게 되었답니다.

간암 말기 진단을 받은 그는 3 개월 밖에 못 산다는 최후통첩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시한부 인생임을 자신도 주변의 모든 사람도 다 알고 눈물로 하루하루 지내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를 보고 “살 놈!”이라고 외치고 지나 간 것입니다.

놈이란 욕을 들어 언짢았으나 그 앞에 있는 수식어에 너무 감동이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곧 “죽을 놈!”이라고 여기며 지내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말은 안 해도 자기와 똑같은 시각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뜬금없이 “살 놈!”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이 시한부 인생의 시각은 그 때부터 바뀌었습니다.

“나는 죽을 놈이 아니다.

나는 살 놈이다.

나는 살 수 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삶에 대한 뜨거운 용기를 가지고 말이나 태도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없이 들어도 좋은 나는 “살 놈!”

 

그 시한부 인생에게 “살 놈!”이라고 욕(?)하신 분은 다름 아닌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시한부 인생에게 “살 놈!”이라고 욕한 것이 아니라 “샬롬!”이라고 인사한 것입니다.

평안을 기원한다는 “샬롬”을 “살 놈”으로 잘 못 들었으나 아무튼 그는 교회도 다니고 기도도 하면서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샬롬”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로 화목의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미안한 표현이긴 합니다만 우리 모두는 “살 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크게 이해를 간구하며 인사합니다.

오해 없이 들어주십시오.

하지만 그 내용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살 놈이여 샬롬!


스펙은 제품설명서를 뜻하는 specification 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펙이 좋다는 것은 남다른 기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펙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남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궁금해 하고 스펙이 많고 다양한 사람일수록 대단히 여기는 풍토가 있습니다.

 

스펙으로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의 화려한 스펙보다 더 찬란한 스펙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두바이에는 세계 최고의 칠성급(七星級)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최고의 호텔이었던 5 성급 호텔을 누른 7 성급 호텔이 탄생했다면 그 언제가 9 성급 호텔도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라 스토리입니다.

스토리는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스토리가 쏟아져도 걱정하거나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스토리를 빼앗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시간과 장소는 스펙처럼 특별한 곳과 특정한 때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日常) 속에서도 남다른 특이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낫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펙의 사람이고, 남들과는 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토리의 사람입니다.

스펙을 지향할 것인가 스토리를 지향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은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스펙보다 스토리가 자신을 더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조금 더 다가가면 모든 일상 속에서 나의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간다면 위대한 영적 스토리–간증까지 생긴답니다.

스펙의 시대에 스펙이 없어도 당당함을 뛰어 넘어 압도하는 사는 길, 스토리의 삶입니다.


스펙은 제품설명서를 뜻하는 specification 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펙이 좋다는 것은 남다른 기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펙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남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궁금해 하고 스펙이 많고 다양한 사람일수록 대단히 여기는 풍토가 있습니다.

 

스펙으로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의 화려한 스펙보다 더 찬란한 스펙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두바이에는 세계 최고의 칠성급(七星級)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최고의 호텔이었던 5 성급 호텔을 누른 7 성급 호텔이 탄생했다면 그 언제가 9 성급 호텔도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라 스토리입니다.

스토리는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스토리가 쏟아져도 걱정하거나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스토리를 빼앗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시간과 장소는 스펙처럼 특별한 곳과 특정한 때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日常) 속에서도 남다른 특이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낫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펙의 사람이고, 남들과는 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토리의 사람입니다.

스펙을 지향할 것인가 스토리를 지향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은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스펙보다 스토리가 자신을 더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조금 더 다가가면 모든 일상 속에서 나의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간다면 위대한 영적 스토리–간증까지 생긴답니다.

스펙의 시대에 스펙이 없어도 당당함을 뛰어 넘어 압도하는 사는 길, 스토리의 삶입니다.


내일부터는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자 고난주간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지만 그 너무나 힘겨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이토록 아름다운 일곱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첫째 말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고통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품으신 용서의 십자가여!

 

둘째 말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지옥 갈 도적을 천국으로 초청한 구원의 십자가여!

 

셋째 말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26,27)

새로운 가족 관계, 교회를 탄생시킨 사랑의 십자가여!

 

넷째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

내 죄 때문에 하나님께 대신 버림받은 희생의 십자가여!

 

다섯째 말씀: 내가 목마르다 (요 19:28)

주님의 목마름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사명의 십자가여!

 

여섯째 말씀: 다 이루었다 (요 19:30)

맡으신 일들을 온전히 이루신 승리의 십자가여!

 

일곱째 말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모든 것을 의탁할 아버지를 알게 해 준 안식의 십자가여!

 

생각해 보니 이천년 전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울려 퍼진 일곱 말씀은 모두가 우리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애절한 그 사랑의 말씀이 너무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아 시린 가슴을 눈물로 쓰다듬어 봅니다.

 

2 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철물점을 경영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 이른 아침 거칠게 생긴 로마군인이 들어와 아주 커다랗고 뾰족한 못을 찾았습니다.

마침 한 구석에 처박아둔 뾰족하고 큰 못이 생각났습니다.

오랫동안 팔리지 않아 녹슨 큰 못 세 개가 있어 내 보였습니다.

군인은 그거면 되었다고 돈은 던지듯, 못은 빼앗듯 하며 가져갔습니다.

철물점 주인은 안 팔리던 못이 팔리게 되어 수지맞았다고 생각하며 녹슨 세 개의 못을 가지고 뒤돌아 가는 군인에게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 녹슨 못을 무엇에 쓰려고 합니까?”

군인이 그 주인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를 못 박으려고, 왜?” 철물점 주인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판 못으로 예수님을 못 박는데 사용하려한다니.

“이봐요, 군인양반. 안 됩니다.

내가 판 그 못으로 예수님을 못 박는다고요?

그 것만은 안 돼요. 돈은 여기 있으니 그 못을 돌려주세요.

제발.” 군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며 가던 길을 갑니다.

“한 번 팔았으면 끝나거지 뭘 물러달라는 거야!”

 

얼마 시간이 지난 후 골고다 언덕에서 망치 소리가 철물점 주인의 귀에 들려 왔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자기가 판 녹슨 못을 망치로 내리치는 소리가 들였습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그 철물점 주인의 가슴에 져며왔습니다.

그는 몸부림치며 외쳤습니다. “아아, 내가 저 못을 팔지 말아야 했는데...”

 

“팔지 말아야 했는데...” 가롯유다도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후회했습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영원”을 팔아 “잠시”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혼”을 팔아 “육체”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어 버리라고 팔아버린 예수님,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을 값싸게 판자들은 내가 왜 그랬을까하며 벌벌 떨 것입니다.

끝까지 그 무엇으로도 예수님을 팔지 않은 자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팔지 말아야 했는데...” 후회의 탄식이 우리 것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여성들이여, 관계에서 성공합시다”라는 주제로 여선교회 연합 수련회가 quality inn 에서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가졌던 작년과 달리 오랜만에 외부에서 갖는 수련회이어서 그런지 모두 새로운 분위기 속에 은혜롭고 즐거운 2 박 3 일의 일정을 보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강사 정정숙 전도사님의 네 차례에 걸친 말씀은 모든 여선교회 회원들에게 매우 유익한 교훈이요 지침이었습니다.

사실, 강사 전도사님의 줄기찬 외침은 하나였습니다. 모든 성공적인 관계는 나의 변화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의미 있게 회자(膾炙)되던 말이 있었습니다.

“내 탓이요”라는 단 네 글자의 짧은 구절입니다만 그 구절이 끼친 선한 영향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내 탓이오’라는 뜻은 영어로는 ‘my fault’로 표현하고 라틴어로는 ‘메아 쿨파/mea culpa’라고 말합니다.

‘내 탓이오(메아 쿨파)’는 문제의 원인을 다른데서 찾지 않고 자기성찰(自己省察)로부터 출발하는 태도로서 사회를 한결 밝게 해주었습니다.

 

젊은이들의 즐겨 부르는 ‘나로부터 시작되리’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그 가사의 마지막 부분은 ‘주의 꿈을 안고 일어나리라 선한 능력으로 일어나리라 이 땅의 부흥과 회복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가사는 교회부흥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가정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밝게 만들고, 교회도 부흥시키는 비결에는 모두 “내”가 담겨 있습니다.

“네 탓이다”하면 모두 무너지지만 “내 탓이오”하면 같이 살아납니다.

자, 이제 그대는 모두 무너지는 길로 가시겠습니까, 같이 살아나는 길로 가시겠습니까?

너무 고민 마시고 오늘 배운 라틴어 그 한 마디를 외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렇게 말이죠.

“메아 쿨파!”


저는 지난 주간에 올랜도에서 있었던 the gospel coalition conference (복음주의 연합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미국 전역과 세계 각국에서 모인 6,000명의 복음주의 목회자, 신학자, 선교사, 신학생 등이 모여 강의, 찬양, 패널토의 형식으로 진행된 컨퍼런스였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듯이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도“복음”밖에는 없음을 선포하고 그 선포에 걸맞은 내용들로 가득 찬 집회였습니다.

 

이번 집회에 참석하면서 아직 미국에는 순수한 복음에 대한 열망을 품은 목회자들과 교회가 많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내에 동성연애자들의 목사안수 허용을 비롯해 세속화된 신학 및 신앙이 보여주는 반성경적(反聖經的) 흐름이 만만치 않으나, 미국 전체의 영적 상황은 아직 절망할 수준은 아닌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린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또 하나 느낀 것은 서구(西歐)인들에게는 신앙의 내면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여러 면에서 엿보였는데 그중 하나, 집행부의 어느 누구도 무엇인가를 아무것도 당부하지 않았지만 수천 명이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에게서 배우려는 높은 공동체 의식은 장엄한 화음이었고 성숙한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임이 분명했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그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모였는데 뜨거운 기도의 시간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컨퍼런스에서 채워지지 않았던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기도 영성이 탁월한 한국에 맡기실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인 목회자 1세들은 많이 눈에 뜨이지 않았으나 1.5세, 2세의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적잖이 보였습니다.

그들이 향후 이런 큰 복음주의 집회에 리더십을 발휘하여 복음에 대한 강의뿐 아니라 복음을 복음 되게 하고 복음을 전진케 하는 기도의 불을 붙여 나간다면 복음주의는 이 시대에 결코 마이너리티(minority/소수)가 안 될 것입니다.

돌아와 금요일부터 다시 함께한 우리 교회 새벽기도회는 영적 호흡을 다시금 가파르게 해주었고, 다음 세대 가운데 균형 있는 복음주의 리더십 배출을 위한 기도제목을 더 추가시켜 주었습니다.


선교에 대한 열심이 특심하여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남미 과테말라로 달려간 미국의 젊은이 캐머런 타운센드(cameron townsend)는 그곳에서 사용하는 스페인어로 된 성경을 보급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과테말라 안에 사는 칵치퀼(cakchiquel) 인디언족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종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추장이 캐머런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똑똑하다면, 왜 우리 말은 할 줄 모릅니까?”

1917 년의 일입니다.

이 질문은 세계 선교역사를 새롭게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선교는 모두“나라”를 단위로 하여 접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 이후 선교는“언어종족” 단위로 접근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나라 안에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많은데 어떻게 그 나라의 공용어로 된 성경만을 가지고 선교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성(自省)이 캐머런에게 일어났습니다.

그 자성의 열매로 1929 년에는 칵치퀼 종족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1942 년에는 모든 종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다는 뚜렷한 비전을 가진 위클리프성서번역회(wbt: wycliffe bible translators)가 설립되었습니다.

선교의 최종 목표는 모든 나라, 족속, 백성, 방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요한계시록 7:9-10). 

이렇듯“종족 복음화”에 대한 개념은 이미 성경에 있음에도 교회역사는“종족 복음화”에 오랫동안 눈이 감겨 있었고 귀가 닫혀 있었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perspectives 훈련은 선교에 대한 관점을 매우 새롭게 해준 유익한 훈련이었습니다.

그중에 선교가“나라”보다“종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도 새롭게 깨달은 점입니다.

그리고“나라”에서“종족”으로 선교 초점을 바꾼 역사적인 질문을 100 년 만에 다시 받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당신들은 선교 대상을 이미 여러 차례 돌아보았고 또 많은 교회들이 반복해서 찾는 지역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왜 우리 같이 아무도 찾아보지 않는 땅과 종족에는 계속 무관심한 것입니까?”

자성과 함께 우리가 진지하게 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성경 암송대회가 있었습니다.

연세 많으신 사모님으로부터 신학을 꿈꾸는 고 3 학생까지 여러 교우가 사순절 때 주어진 36 구절의 요한계시록 말씀을 외워 펼친 열띤 암송대회였습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긴 성도들의 모습이 참 귀했습니다.

그 날, 긴장과 흥미 속에 진행되던 암송대회에 출연한 유아부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

드레스 또는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어린이들이 나름 진지한 눈빛에 작은 입을 열어 말씀을 곡조에 실어 암송한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교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아, 예뻐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이들은“아, 예뻐라”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5 월은 가정의 달인데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가 예쁘다고 노래한 믿음의 시인이 있습니다.

임종호 시인의 “어린이”를 들어 보십시오.

 

어린이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보배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상으로 보내어 행복의 웃음꽃

피우게 하는 신비로운 보배

 

이 세상의 희망

우리나라의 희망

우리 교회의 희망

우리 마음의 희망

우리 집의 희망

 

알아줘야 하고

믿어줘야 하고

기대를 걸어줘야 하고

기다려줘야 하고

돌봐주고

사랑해줘야지

 

아, 예뻐라

 

시인은 어린이를 보고 예쁘다고 감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알아줌과 믿어줌, 기대와 기다림, 그리고 돌봄과 사랑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오늘뿐 아니라 언제나 벅찬 감탄과 복된 행동이 우리 어린이들에게 부어진다면 그들이 빚을 미래는 참 맑고 밝을 것입니다.


“이사라 집사의 묘” 저는 오랫동안 어머님의 이름이“사라”이신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묘지 앞 비석에 그렇게 분명히 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본명이 따로 있었습니다.

어머님의 본명보다 사라라는 이름이 마지막 묘비에 남아 있게 된 것은 어머니가 저를 서른아홉에 낳으셨기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처럼 늦게 아들을 낳았다고 주위 분들이 붙여 준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머니가 젊으셨을 때부터 “사라”라고 부르셨다고 합니다.

저를 낳으신 어머니는“성국이는 어떻게 하고?”라는 사람들의 외침과 여섯 살 반이었던 저를 뒤로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저에게는 그 낳으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보다 상상이 훨씬 많습니다.

“사라”라는 이름을 남기신 어머니가 어떻게 사셨을까 어떻게 기도하셨을까를 상상해보곤 하였습니다.

개나리 진달래가 흐드러진 봄날에 헤어진 낳으신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험한 시험 물 속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노한 풍랑 지나도록 나를 숨겨 주소서 주여 나를 돌아보사 고이 품어 주시고 험한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 주소서”

저의 새 어머니가 가장 많이 부르신 찬송입니다.

때론 눈물도 흘리시면서 부르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점점 그 곡조와 가사, 그리고 그 눈물이 저의 것이 되어 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섯 명의 자녀가 있는 가난한 집에 오셔서 몸도 마음도 힘드시고 어려우 실 때마다 그 찬송은 위로가 되셨을 것입니다.

저를 길러주신 새 어머니는 제가 태평양같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불 같이 뜨겁게 설교하는 목사가 되길 기도해 주셨습니다.

살아생전 태평양 같고 불같은 아들의 모습을 못 보셨고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언제나 그렇게 될까 바라보고 계실 기르신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훗날 천국에 올라가 낳으신 어머니와 기르신 어머니를 다시 뵈올 때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도 복음을 들고 달려갈 길을 달리겠노라 다짐해봅니다.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길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 합니다 어머님!!


스승, 그 위대함이여!

 

5월 15일, 스승의 날. 언제부터인가 스승의 날은 부끄러운 날이요 잊고 싶은 날이 되었습니다.

부모들로부터 촌지(寸志)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 아예 스승의 날에 부모가 학교를 찾는 것을금지시키는가 하면, 스승들이 가르치는 제자 또는 그 부모들로부터 폭행 폭언을 당하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이 서글프다 하여도 스승의 위대한 가치를 손상(損傷)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이 그 척박한 상황 속에서 말과 문화와 신앙을 유지하며 각 시대에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자들을 계속 배출한 것은 유대인 교육에 있고 그 교육의 자리에 랍비(스승)들이 견고히 자리 잡고 있는 것에 있습니다.

위대한 스승 없이 의미 있는 인물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묵묵히 기도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수고하시는 교회학교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힘든 뿌리가 되어 나무 같은 영광을 우리 아이들이 누리라고 희생해 오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뿌리가 나무에게

이현주

 

네가 여린 싹으로 터서 땅 속 어둠을 뚫고 태양을 향해 마침내 위로 오를 때

나는 오직 아래로 아래로 눈 먼 손 뻗어 어둠 헤치며 내려만 갔다.

 

네가 줄기로 솟아 봄날 푸른 잎을 낼 때

나는 여전히 아래로 더욱 아래로 막힌 어둠을 더듬었다.

 

네가 드디어 꽃을 피우고, 춤추는 나비 벌과 삶을 희롱 할 때에도

나는 거대한 바위에 맞서 몸살을 하며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바늘 끝 같은 틈을 찾아야 했다.

 

어느 날 네가 사나운 비바람 맞으며, 가지가 찢어지고 뒤틀려 신음할 때

나는 너를 위하여 오직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었으나

나는 믿었다. 내가 이 어둠을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있는 한 너는 쓰러지지 않으리라고

 

모든 시련이 사라지고 가을이 되어 네가 탐스런 열매를 가지마다 맺을 때

나는 더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잎 지고 열매 떨구고 네가 겨울의 휴식에 잠길 때에도

나는 흙에 묻혀 가쁘게 숨을 쉬었다.

봄이 오면 너는 다시 영광을 누리려니와

나는 잊어도 좋다. 어둠처럼 까맣게 잊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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