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퀸즈장로교회 | 20206월 셋째주 | 621() 패밀리타임 성경: 요나 3

 

매일성경 (성서유니온) 묵상순서를 따릅니다

6/22() | 고전 14:1-19

더 좋은 은사 (찬송가 193)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추구해야 할 더 좋은 은사가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방언과 예언의 가장 큰 차이는, 방언이 자기 덕을 세우는 반면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점입니다. 방언이 무익한 것은 아니지만, 공적 예배 중에 알 수 없는 말로 길게 기도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말로 조리 있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이 훨씬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가지 비유로 예언의 유익을 가르칩니다. 피리와 거문고의 소리, 전쟁의 나팔 소리, 그리고 외국인과의 대화를 예로 들어 모든 말이 알아들을 수 있을 때 의미가 있고 유익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영으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과 그 열매를 강조하는 것은, 특별히 예배 중에 알 수 없는 언어나 미사여구, 지나친 형식으로 치장한 예배는 그것을 다 깨닫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형식적이고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 뜻을 이해하며 드리는 진정한 예배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6/23() | 고전 14:20-40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찬송가 420)

자신의 유익을 따르는 세상의 처세에는 한없이 어리석은 자가 되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일에는 장성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삶의 모습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예배 가운데에도 모든 예배의 행위가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예배의 순서는 품위가 있고 질서 있게 진행되어야 하고 덕을 세우는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차례와 순서를 지키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며,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침묵하고, 예언은 다른 계시가 있다면 그 말을 중단하고 듣는 등의 배려가 필요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질서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어떤 모습일지 고민해 봅시다.

6/24() | 고전 15:1-11

복음과 부활 (찬송가 310)

고린도 교회의 기초는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아 그들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성도가 그 기초 위에 뿌리내리고 굳게 서면, 구원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이라는 단서를 붙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절반의 복음만 믿는 것이며, 이런 반쪽 복음으로는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부활 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으로 부활을 확증하셨습니다. 당시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 중 대다수가 살아있었고, 그 중 하나가 바울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여전히 살아 계셔서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시고 부활을 증언하게 하십니다. 우리 또한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6/25() | 고전 15:12-19

부활이 없다면 (찬송가 162)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지만,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를 지배하던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몸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에 맞게 복음의 진리를 수정하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가치관이나 정치성향, 행동양식에 거침이 없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왜곡한 말씀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말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구원을 완성하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을 것이고, 바울이 전한 복음도 헛된 것이 됩니다. 또 그것을 믿고 전하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증언도 거짓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한다면, 우리의 믿음을 형성하는 모든 것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6/26() | 고전 15:20-34

부활의 첫 열매 (찬송가 164)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첫 열매는 이후에 있을 수많은 열매들을 보장합니다. 범죄한 아담의 죽음이 죄 아래 있는 모든 인류의 죽음을 가져온 것처럼, 의로우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를 믿는 수많은 의인들의 부활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믿음의 보증이 되며, 우리가 거듭난 백성의 삶을 미리 앞당겨 사는 근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든다면, 십자가의 길도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절제하고 희생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이유는 우리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을 통해 지속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고난을 자처하며 산 것입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원수를 멸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앞에 복종하게 하시며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분을 영원히 찬송하며 섬길 것입니다.

6/27() | 고전 15:35-49

영광스러운 몸 (찬송가 165)

하나님은 타락한 몸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부활의 몸은 예전 몸과 달리 썩지 않고 강하며, 신령할 것입니다. 죄로 오염되지 않고, 더 이상 사망이 주관할 수 없는 새로운 형상을 품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육신의 몸을 먼저 죽음에 내어주어야 영의 몸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 곧 부활의 영이 되셨습니다. 이는 첫 사람 아담과 같이 흙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어서 다시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연약한 육신의 몸이 죽으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을 소망하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닮아가며, 날마다 죽었던 바울의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6/28() | 고전 15:50-58

사망을 삼키는 부활 (찬송가 455)

부활의 몸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혈과 육 썩어 소멸될 것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이들의 몫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변화를 위한 과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마지막 나팔 소리에 다 깨어날 것입니다. 고치를 뚫고 나와 아름다운 나비로 변화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홀연히 변화된 모습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썩을 육체는, 반드시 썩지 않고 죽지 않을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잠을 자는 것처럼, 이 땅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썩어 없어질 육신을 자랑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을 죽음의 권세에 휘둘리지 않고 담대히 믿음을 경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