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예배는 복음을 진술하는 시간이다. 예배 가운데 복음을 들을 수 없다면 무엇을 위한 예배이겠는가. 복음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어마어마한 구원 이야기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복음이 진술되고 나타나는 순간마다 예배자들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 가운데 용서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죄인이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아 의롭다고 불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돼 하늘의 모든 유업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무런 감동 없이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예배 가운데 엄숙한 예전(禮典)이 화려한 축제(祝祭)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복음은 예배 중에 예전의 틀에서 축제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예배에는 복음만 있는 게 아니다. 문화도 예배 곳곳에 잔뜩 스며있다. 복음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다. 예배 안에 있는 복음과 문화를 혼동하면 불필요한 논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강대상에서의 말씀은 불변의 복음이다. 강대상의 재질은 바꿀 수 있는 문화다. 찬양은 예배에서 절대로 제외시킬 수 없는 복음이다. 찬양의 스타일은 변화가 가능한 문화다. 성찬은 대치불가(代置不可) 복음이다. 성찬 중 사용되는 빵은 고정되지 않은 문화다.

 

우리는 처절한 문화 전쟁을 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다. 기독교 문화는 하나님을 떠난 세속 문화와 싸움을 피할 수 없다. 문화의 목적은 분명하다. “문화는 자연을 상대로 한 인간 활동의 결과”라는 사전적 정의에서 문화의 목적을 다 찾을 수 없다.

 

문화란 인간의 활동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이다.(창 1:27~28, 2:15) 문화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연을 깨우는 종교적 의무다. 그러므로 인간 중심의 세속 문화와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 문화 사이에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 안에서는 서로 싸울 필요가 없고 싸워서도 안 된다. 나와 찬양하는 스타일이 다른 사람이라고 ‘구원받은 사람 맞나’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을 뭘 모르는 저급한 크리스천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양복을 입지 않은 젊은 설교자의 설교는 귀담아들을 필요조차 없는 연설일까. 아니다. 기독교 문화 안에서 세대 간의 차이(gap), 지역 간의 차이, 교단 간의 차이는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할 영역이지 반목하고 단절할 이유가 될 수 없다.

 

더 이상 예배 안에 있는 문화의 문제로 힘들어하지 말자. 하지만 예배 안에서의 기독교 문화는 그 시대의 하위(下位)문화에 짝해서는 결코 안 되고 상위(上位) 문화까지도 훌쩍 뛰어넘어야 한다는 점만은 잊지 말자. 가장 고상한 복음에 지극히 천박한 문화의 옷을 걸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직접 들어 보라.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 29:2)

 

진정한 예배에는 온전한 복음이 항상 존재하며 거룩한 문화가 늘 함께한다. 지금 잠시 뉴욕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으로 볼품없이 됐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뮤지컬 도시다. 하지만 세계인들이 와서 열광하는 세계적 뮤지컬이라 해도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니, 어설픈 장난 수준이다. 하나님이 직접 쓰신 온전한 복음과 믿음의 사람들이 순종으로 빚은 거룩한 문화가 조우(遭遇)해 예전과 축제로 표현되는 예배라는 진짜 드라마에 비교하면 말이다.

 

잠겨야 한다. 푹 잠겨야 한다. 예배는 말씀에 푹 잠겨야 한다. 예배는 성령에 푹 잠겨야 한다. 잠김이란 충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에는 진리에 잠김이 있어야 한다. 예배에는 성령이 충만해야 한다. 진리의 잠김이 없고 성령의 충만이 없다면, 일어나야 할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말씀대로 요단강 물에 몸을 일곱 번 잠그자 그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왕하 5:14)

 

예수님이 물에 잠기셨다가 나오실 때 성령이 임하셨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렸다.(마 3:16~17)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을 때 오순절 성령 충만은 그 충만을 받은 모든 자를 변화시켰다.(행 2:1~4) 진리의 잠김이 없는 예배, 성령의 충만이 없는 예배는 상상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다반사다.

 

에스겔 47장을 보자. 성전 제단에서 나온 물이 발목을 적시다가 무릎에 이르고 허리까지 차오른 다음에는 능히 헤엄치지 못할 정도로 차오른다. 그리고 그 물결이 흘러가는 곳마다 엄청난 회복의 역사와 놀라운 생명력을 보인다. 말씀의 잠김, 성령의 충만이 아니고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해변에 가보라. 가장 시끄러운 사람들은 발목에 바닷물을 찰싹찰싹 적시며 뛰어다니는 자들이다. 무릎이나 허리에 물이 있는 자들은 제한적이긴 하나 나름 자기 폼을 잡는다. 푹 잠긴 자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으니 떠들거나 무게 잡을 일이 없다. 푹 잠긴 자들은 놀랍고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잠김은 놀라움을 지향한다. 충만은 변화를 일으킨다.

 

살짝 담그기만 했던 예배로 만족하지 말자. 예배 내용은 어떻든 예배가 끝나는 것에 가장 큰 기쁨을 보이는 신자들도 간혹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예배 가운데 푹 잠김이 없이 나오는 것을 거부하자. 하나님을 예배에서 만나고 나온 자는 마땅히 “깊도다 진리의 부요함이여, 넘치도다 성령의 충만함이여”라고 고백하며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성도라면, 우리가 교회라면 잠김을 맛보지 못하고 충만을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거룩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거룩한 불만과 무책임한 비판은 전혀 다르다. 거룩한 불만은 목회자에 대한 끝없는 판단, 여러 사람이나 교회의 많은 사역에 대한 한없는 비평이 아니다. 거룩한 불만이란 더 이상 잠김이 없는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회개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충만하지 못했던 것의 반복을 당연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리의 잠김에 대한 경험이 없었는데, 여태까지 성령의 충만에 대한 체험이 없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예배를 똑같이 맞이하려는 용기는 무엇인가. 잠김과 충만에 대한 비전이 없기 때문인가. 잠김과 충만의 방법을 모르는 까닭인가. 예배의 수심(水深)이 어느 정도이지 정직하게 헤아릴 필요가 있다.

 

너무 척박하다면 지금까지 이 지경으로 만든 낡은 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길이란 이전에 없던, 전혀 다른 길을 예배에서 찾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오랫동안 잊었던 기본을 다시 찾자는 것이다. 잊었던 기본 속에 잠김의 길이 있고 충만의 도(道)가 있다. 말씀을 전하고 전하면 말씀에 잠긴다. 주님만 높이고 높이면 충만에 이른다. 말씀만 전하는 예배, 주님만 높이는 예배의 자리로 향하자.

 

다시 돌아온 예배의 자리. 너무나 감격스럽다. 그러나 잃었던 예배를 다시 찾은 감격에만 젖어 있다면 우리는 진짜 중요한 것을 잃은 것이다. 새롭게 돌아온 예배 자리에서 우리는 예배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주일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늘 양식을 맛있게 만들어 먹는 소중한 자리다. 그러나 예배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일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훈련의 자리이기도 하다.

 

특별히 다시 찾은 공예배에선 후자(後者)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여기에 합리적 질문이 생긴다. 어떻게 그 짧은 예배 시간 가운데 ‘양식 먹음’과 ‘신앙 훈련’의 기능을 같이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짧은 예배시간이지만 그 안에 사도신경으로 드리는 신앙고백과 축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신앙 훈련 시간이다. 사도신경 속에는 신앙의 풍성한 유산이 담겨 있다.

 

사도신경은 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대로,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거룩한 지식을 내가 믿는 것이며 그 믿음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다. 사도신경을 교회 안, 예배 시간 안, 그리고 입안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말고 세상으로 가져가도록 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점이 놀랍게도 짧은 사도신경에 정확히 담겨 있다. 그러므로 창조로부터 계획된 미래의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오늘의 세상에서 만난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록 사도신경은 삶에서 함께해야 한다. 주일예배 가운데 신자의 관점 훈련을 하면서 확신 있는 생활까지 훈련하는 것이 사도신경 고백 시간이다.

 

축도는 어떤가. 단순히 예배를 끝내는 공식적 멘트인가. 아니다. 축도는 우리의 신앙을 예배 마지막에 담금질하여 그 뜨거운 하나님의 사람을 세상에 파송하는 자리다.

 

필자가 대학부를 지도할 때 이렇게 축도한 적이 있다. 청년들에게 강대상을 바라보지 말고 동서남북 세상의 네 방향을 향하라고 한 뒤에 축도했다. 세상은 저주로 가득 찼다. 절망의 세상이다. 미움의 세상이다. 상처의 세상이다. 마귀의 세상이다.

 

청년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이제 이 축도를 안고 세상에 나가 저주를 끊고 축복으로 바꾸라.” 세상을 이길 하나님의 강한 군사로 훈련시키는 축도의 시간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동행으로, 짧지만 강하게 성도들을 무장하는 시간이 축도 시간이다. 삼위(三位)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을 이길 세상은 없다.

 

그렇다. ‘양식 먹음’과 함께 ‘신앙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이 예배이고 교회다. 교회가 만약 ‘양식 먹음’에만 집중하면 수동적이고 나약한 신앙인을 만들 것이다. 혹시라도 함께 모여 예배를 못 드리는 상황이 또다시 온다 해도 휘청거리지 말아야 한다. 견고해야 한다.

 

교회는 평소에도 물론이려니와 지금보다 더 극한 상황이 온다 해도 스스로 든든히 서 있도록 철저히 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담대히 이기는 ‘신앙 훈련’이 회복된 예배 가운데, 그리고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을 한다. 아브라함의 말이다. 들어보자.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세기 22장 5~6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함께 예배드리러 갔다가 온다고 한다. 지금 이삭을 그 예배에서 번제물로 바치러 가는 길인데 어찌 다시 같이 온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지금 이상한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예배를 부활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배는 그 자리에서 죽음으로 다시 사는 것이다. 예배에서 죽지 않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 매우 계산적인 사람이다. 잃는(lost) 것과 얻는(gain) 것의 대차대조표를 잘 그린다.(빌 3:8) 그는 진짜 장사꾼, 영적 장사의 고수(高手)였다. 죽음(lost)과 부활(gain)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권능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 길은 먼저 죽어야 가능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기 전에는 부활을 알 수 없다.(빌 3:10~12) 예수님의 철저한 죽음과 그 부활의 영광은 예배 가운데서 가장 잘 볼 수 있다.(빌 2:5~11) 예수님이 잃은(lost) 것과 얻은(gain) 것이 무엇인지 예배는 말해준다. 예배를 바르게 드리면 예수님의 죽음을 본받을 수 있고(lost)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 권능을 가질 수 있다.(gain)

 

요한계시록 1장을 보자. 밧모섬에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있었다. 노(老) 사도 요한이었다. 어느 주일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죽은 자같이 됐다. 예배자의 모습이다.

 

그를 찾아온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이었다. 예배의 자리에서 자신을 죽은 자같이 내놓았던 요한은 놀라운 계시의 기록자로 일어섰다.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렸던 작은 예배자 요한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을 받았다.

 

뉴욕에 노 사도 요한과 같은 분이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에 감염돼 지난 성금요일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분이다. 그는 유학생 시절 중국인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그에게 그 웨이터 자리는 너무 소중한 자리였다.

 

어느 토요일 자정이었다. 그는 웨이터들이 목에 매고 일하는 보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일을 멈췄다. 새벽 2시까지 영업을 하는 식당에서 일을 멈춘 것은 그 식당을 그만두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유학생은 왜 그렇게 했을까. 성수 주일을 위해서였다. 토요일 자정마다 그러기를 두 달 후, 식당주인이 그를 불렀다. “이젠 우리 식당 그만두게”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식당 매니저 일을 맡아주게”라고 했다. 자신의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청년에게 신뢰를 보낸 것이다.

 

그 청년은 예배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도 좋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죽고자 하는 그를 부활시켜 점점 상상도 못 할 큰일에 쓰셨다. 그는 미주 한인교회 역사에 큰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세계 선교에 다양한 영향력을 끼치고 영원한 나라로 가셨다.

 

그분의 이름은 장영춘 목사님이다. 예배에서 죽고 예배에서 부활의 권능이 무엇인지 아셨던 그분은 필자가 섬기는 퀸즈장로교회 원로목사님이셨다. 그는 이 땅에 바른 예배를 남기고 영원한 예배의 나라로 떠나가셨다.

 

예배의 중심엔 십자가가 있다. 이 땅에 수많은 예배가 있다. 하지만 십자가가 중심이 아닌 예배는 참 예배가 될 수 없다.

 

예배에서 예수님의 위치는 정말 독특하다. 십자가를 지신 어린 양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시다.(계 7:10) 그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예배를 드리시는 대제사장이었고 동시에 예배의 희생제물이었다.(히 9:11~12)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예배를 드리는 분이고 예배의 제물까지 된다는 말이 상상이나 되는가. 이런 삼중(三重) 역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는 예수님이 대제사장, 곧 중보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피 흘리는 자가 찌른 자를 용서해달라는 중보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십자가에서 대제사장의 기도는 참소자들을 일거에 잠재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희생제물이심을 보이신다. “제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버림받은 제물은 하나님의 깊은 침묵 속에 천지를 진동케 한다.

 

십자가는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 대제사장의 십자가, 희생제물의 십자가로 놀라운 삼중 기독론이 담겨 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는 예배 가운데 찬송의 주제가 된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대제사장의 십자가는 예배 가운데 기도의 길을 연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처럼 대제사장의 인도하심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가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대면한다. 그리고 흡족한 은혜를 받아 나온다.

 

희생제물의 십자가는 예배 가운데 설교의 핵심이 된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설교자의 절절한 외침은 십자가뿐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배의 중심에 오늘도 서 있다. 십자가 중심 예배에는 세속적인 타협이나 사람을 향한 아첨이 있을 수 없다. 예배에서 타협하는 것은 삶에서 백기를 드는 것과 다름없다. 예배에서 아첨은 모든 관계에서 비열한 자리로 내려가기로 작정한 것과 같다.

 

다윗은 그가 드리려는 예배에 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다른 것을 놓으려는 유혹을 받았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려던 이 일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냈고 징벌로 전염병이 퍼지면서 7만명이 죽었다.

 

전염병의 재앙이 마감될 때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했다. 장소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다. 아라우나는 예배의 제물을 값없이 제공하려 했다. 하지만 다윗은 덥석 그가 거저 주는 제물을 받아 예배드리지 않았다.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자기가 말한 대로 비싼 값을 치르고 마당과 희생제물을 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 예배 이후 전염병이 완전히 그쳤다. 희생제물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예표한다.(삼하 24:1~25)

 

그리스도가 중심인 예배가 아니라면 다윗처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우리 주변엔 자기가 제안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라우나 같은 이들이 곳곳에 있다.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거룩한 자리다. 언약의 성취에 놀라고 언약의 신실함에 감격해 하고, 보잘것없는 인생과 언약을 맺어주신 하나님을 견고히 신뢰하리라는 자리, 그 하나님을 크게 말하고 송축하는 자리가 예배의 자리다.(시 105:1~10)

 

오늘날 많은 예배가 언약을 기억하는 기능을 잃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오랜 언약은 가벼이 취급되고 오늘 떠오른 생각들과 새로운 방식이 아주 묵직하게 다뤄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언약궤를 빼앗겼다. 그 언약궤는 어디로 갔는가. 블레셋 사람들이 아스돗 다곤의 신전에 두었다. 그들은 불길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자 언약궤를 돌려보내기로 한다. 이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서 수십 년간 머물러 있었다. 사울왕은 그의 통치 기간 이 언약궤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다윗왕은 달랐다. 왕이 된 다윗은 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열망이 있었다. 마침내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실어 옮기려 했다. 그 계획은 대실패로 끝났다. 새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뛸 때 언약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었던 웃사가 죽은 것이다.(삼하 6:1~11)

 

언약궤는 새 수레에 실어 옮기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어 옮겨야 했다. 3개월 뒤 말씀의 방법을 따라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예배를 드렸다. 언약궤 앞에서의 예배가 얼마 만인가. 통탄할 세월이었다. 언약궤 없이 드린 예배의 세월을 말한다.

 

언약궤가 블레셋에 빼앗긴 세월, 언약궤가 아비나답 집에서 무시된 세월, 언약궤가 한때나마 다윗에게 잘못 다뤄진 세월은 예배의 암흑기와 같았다. 우리도 우리의 예배가 언약을 빼앗긴 예배, 언약을 무시하는 예배, 언약을 잘못 대하는 예배가 아닌가 둘러봐야 한다.

 

그렇다. 우리가 진정한 예배자라면 인디아나 존스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 인디아나 존스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레이더스’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고학자다. 그가 언약궤를 찾고자 하는 이유는 정치적이며 군사적이다. 우리는 어떤가. 신앙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음에도 예배 가운데 잃어버린 언약을 찾고 또 찾는가.

 

찬송가 14장은 의미심장하다. 2절은 이렇다. “주 언약하신 것 끝까지 지키니 저 하늘나라 향하여 곧 가리라 주 얼굴 뵈올 때 내 맘이 기쁘고 영원히 주의 영광을 찬양하리.” 찬송가 370장 4절은 이러하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두 찬송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언약을 품은 찬송들이다. 예배에서 하나님과 맺은 불변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그 언약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이 같은 하나님의 언약들을 예배 가운데 다시 기억하고 다시 붙잡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지푸라기 같은 것을 붙잡고 위안으로 삼거나 그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게 된다.

 

우리는 세상 나라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똑똑히 보고 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결코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언약 백성이다. 예배 가운데 언약의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하고 언약의 백성들은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위풍당당함을 되찾아야 한다.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시시각각 어려움이 더해지고 있다. 확진자와 사망자의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행정명령의 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거리는 날로 황량해지고 자영업자들은 계속 문을 닫고 있다. 학생들이 등교하지 못한지는 꽤 여러 날이 됐다. 500명 이상 모일 수 없다고 한 지 며칠이 안 돼 50명 이상 모일 수 없다고 했다. 필자가 사는 미국 뉴욕의 상황이다. 뉴욕에 이웃한 뉴저지는 현재 야간 통행금지 중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 하나님만 아신다.

 

필자가 섬기는 퀸즈장로교회는 50명으로 숫자를 제한해 사순절 새벽예배를 계속 드리고 있다. 매일 예배를 드리며 미국 대통령과 정부, 한국 대통령과 정부, 각 나라의 의료진과 환자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이럴 때 교회가 사회적 거리 두기에 앞장서며 집에 머무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왜 안 듣겠는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책임과 사회의 안전을 아우르는 의견임에 동의한다. 이런 위기의 때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 있고, 의료진의 생명을 건 역할도 있다. 그리고 교회의 역할도 분명하다.

 

하늘의 문을 두드리며 자복하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는 교회의 독특한 역할이다.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겠지만, 정부의 방침을 준수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지키심을 구하며 모여서 기도하는 길을 간다.

 

아무튼, 숫자 제한 때문에 예배에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다. 성도들은 너무나 예배를 그리워하고 있다. 눈에는 주렁주렁 눈물로, 목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예배를 갈망한다. 그렇다. 예배는 갈망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예배를 별 갈망 없이 드린 적이 많았는데, 갈망이 없는 자는 예배자로 적합지 않음을 이번 기회에 온몸으로 깨닫게 됐다.

 

예배자라면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영광스러운 예배에 갈망으로 응답하며 나가야 한다. 영혼의 갈망은 물론 육체의 앙모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1~2)

 

예배는 갈망이다. 특별히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임재(presence)를 갈망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편재(遍在)하신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임재하시지 않으신다.

 

예배드리면서 나를 갈망할 수 있다. 내가 만족할 예배, 내 필요를 충족하게 해줄 예배, 나를 위로할 예배를 갈망한다. 일견 그럴듯하지만, 예배의 갈망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임재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간이 “쉭쉭” 소리를 내거나 눈물을 쥐어짜면서 조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만들려고 조작하는 것과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전심으로 갈망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임재는 땅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말씀 가운데, 찬양 가운데, 기도 가운데, 성례 가운데, 그리고 모든 예배 순서 가운데 하나님은 다양하게, 강력하게, 따듯하게 임재하신다. 그 임재는 나를 압도해 반드시 나의 생각을 충만케 하고 나의 감정을 뜨겁게 하며 나의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나의 전(全) 존재가 ‘업그레이드’ 되므로 명백히 알 수 있다.

 

복음이 확실하게 이해되고 말씀에 찔림이 크고 회개가 쏟아지고 감사가 넘치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이 전개된다. 하나님의 임재는 특정 교회와 어떤 시대의 큰 부흥을 통해서도 확실히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갈망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예배는 사람의 고안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초청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예배를 알지도 못했고 시작도 못 했을 것이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 55:1~3)

 

하나님의 초청은 돈 없이, 값없이 오라는 초청이다. 왜 돈 없이 값없이 오라고 초청하셨을까. 예배가 값싼 것이어서 그럴까. 아니다. 예배에는 어떤 값(price)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가치(value)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 왕이 죽은 개와 같던 므비보셋을 왕의 식탁으로 초청한 것은 요나단이 있어 가능했다.(삼하 9:1~8) 요나단의 아름다운 가치는 그 어떤 값으로 매길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신 것은 당신 아들의 죽음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값으로 매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가장 고귀한 가치를 지니신 분이시다. 초청자가 가장 고귀한 가치를 치르고 값없이 초청한 것이 예배다.

 

어떤 분의 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직접 차려준 음식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겼으며 맛도 일품이었다. 초청자의 후덕함을 그가 차려준 음식을 보고 알게 됐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초청자와 만남이었고 즐거운 대화였다. 초청자와 직접 만날 수 없고 그 누군가를 통해 전달해준 음식을 먹었다면 그런 자리를 진정한 초청의 자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초청이란 말 속에 직접 초청, 간접 초청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초청은 직접 초청, 단 하나뿐이다. 예배는 후덕하신 하나님의 초청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후덕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기독교인 사이에 화제로 떠오르는 것이 미디어 예배다. 미디어로 예배드리는 것은 진짜 예배일까. 하나님은 과연 미디어 예배로도 초청하시는가.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나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을 여러 번 보았다. 사진집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도 보았다. 인터넷에서. 물론 사진집과 인터넷이 도움이 됐다. 가장 중요한 도움은 언젠가 진짜 작품을 보고 싶다는 동기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유럽 여행을 갔다. 드디어 나도 시에스타 성당에서 천지창조를 직접 봤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진품 모나리자도 직접 봤다. 작품에 대한 짙은 감동은 물론 그런 위대한 작품을 그린 작가에 대한 경외감마저 떠올랐다.

 

미디어 예배로는 설교자를 매개로 한 인격적 교감이 난망(難忘)하다. 그리스도의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것을 확인할 길도 없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한자리에 모여 시행해야 할 성찬식도 할 수 없다.

 

어려운 현실이라고 미디어 예배가 또 하나의 완전한 예배라고 주장한다면 코로나19 사태는 탈교회(脫敎會) 시대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런 주장은 가견적(可見的) 교회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미디어로 참여하는 예배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그 도움 중에 백미는 진짜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열망을 주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직접 초청이다. 그러므로 미디어 예배는 진짜 예배로 초대하는 좋은 도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예배는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신과 인간의 만남, 이보다 더 역설적인 사건이 어디 있는가. 예배에 가득 차 있는 역설은 다음과 같다.

 

예배는 높임과 낮춤이 필요하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끝없이 높이는 것이 예배이고 동시에 질그릇 같은 인간을 한없이 낮추는 것이 예배다. 그래서 예배는 높임과 낮춤의 역설이다. 예배는 강함과 약함이 조우한다. 예배는 내 약함 가운데 깃든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예배는 강함과 약함의 역설이다.

 

예배는 은혜와 의무의 조화다. 예배 가운데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 부어지지만, 사람들이 준비해야 하고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할 의무를 면제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배는 은혜와 의무의 역설이다.

 

예배는 또 열림과 닫음을 함께한다. 예배 중에 하늘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기도가 공중에서 사라지고 찬양은 사람들의 귀에만 떨어지고 말씀은 하늘에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강연에 종교적 언어를 입힌 정도라면 이런 시간 낭비가 어디 있겠는가. 예배 중에 마귀의 정죄와 세상의 소리에 귀를 닫지 않는다면 차라리 콘서트에 가서 잠시 기분이나 푸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예배는 열림과 닫음의 역설이다.

 

예배는 버림과 채움이 절실하다. 우리가 이렇게 부르지 않는가.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주소서 넘치도록 채워 주소서.”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잔을 채워주시길 원하시는데 우리 잔에 여전히 헛된 것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하늘의 것을 부어 주시겠는가. 그래서 예배는 버림과 채움의 역설이다. 예배는 기쁨과 애통이 교차한다. 지상 최고의 기쁨이 예배에 있다.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 때문이다. 지상 최대의 애통이 예배에 있다. 공의의 하나님 앞에 내가 행한 일 때문이다.

 

다른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 예배 중에 듣는 복음 때문에 기뻐하라. 다른 것으로 애통하지 말라. 예배 중에 보는 나의 죄악 때문에 애통하라. 그래서 예배는 기쁨과 애통의 역설이다.

 

예배는 용서와 책망을 반복한다. 예배에는 예수님의 보혈이 흐른다. 나의 죄를 씻고 나를 용서하는 보혈이다. 예배에는 성령님이 운행하신다. 나를 날카롭게 책망하시는 성령님이시다. 예배를 드리면서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를 목쉬도록 부르고 또 부른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를 목 놓아 부르고 또 부른다. 그래서 예배는 용서와 책망의 역설이다.

 

예배는 수직과 수평의 만남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다는 점에서 수직이라는 방향을 갖고 있다. 예배는 함께 드린다는 점에서 수평이라는 방향도 갖고 있다. 예배실의 의자가 빙 둘러 있어 하나님보다 사람들이 서로 너무 잘 보이거나 친교실의 의자가 다정스럽게 둘러 있지만, 마음의 의자는 뒤로 돌아 놓여 있다면 수직과 수평을 거꾸로 적용한 예배일 것이다. 주만 바라보는 수직, 서로 돌아보는 수평. 그래서 예배는 수직과 수평의 역설이다.

 

예배는 과거와 미래의 연결이다. 오늘의 예배는 오늘만 생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시간이요 미래를 바라보는 시간이 오늘의 예배 가운데 있다. 오늘 드리는 예배 가운데 자꾸 들려온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또 들려온다. “기대하라, 기대하라, 기대하라.” 그래서 예배는 과거와 미래의 역설이다.

 

예배는 ‘오라’와 ‘가라’를 요청한다. 예배는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고 부른다. 예배는 “가라 가라 세상을 향해”라고 명한다. 그래서 예배는 오라와 가라의 위대한 역설이다.

 

사라졌다. 예배의 자리를 채우던 예배자들이 사라졌다. 여전히 예배당은 있지만, 그 많던 예배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지금 우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상상 못 한 일들을 곳곳에서 보고 있다.

 

전염병이 창궐한 이때 예배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세상 나라가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곳인가, 스스로 물러가 숨죽이고 숨어 있는 곳인가. 그 쓰라린 결정을 이해 못 할 자 아무도 없다. 하지만 텅 빈 예배당에서 예배자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은 그 어떤 상항 속에서도 주저 없이 우리를 찾아오시지 않으셨던가.

 

다른 쪽은 넓은 예배당에 예배자가 넘친다. 문제는 그 넓은 곳에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편리함이나 교회 성장이 주된 관심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실 곳은 도무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다. 자기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신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참 예배자가 온 세상에 곳곳에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참 예배자가 곳곳에만 있지 아니하고 온 세상에 그리고 천상에 가득 차야 한다.

 

우리는 이런 꿈을 갖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천상의 예배는 무엇인가.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은 무언가를 예배한다. 물론 그들 모두가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는 아니다.

 

참된 예배의 원형은 어디에 있을까. 초대 교회 안에 있을까. 인류의 타락 이후 구약 아벨의 예배가 예배의 원형일까.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예배는 예배의 원형을 반영한 예배일뿐이다.

 

예배가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반응이라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다 이루시고, 안식하셨던 첫 안식의 날,(창 2:2) 이 땅 모든 안식일의 원형(출 20:8~10)이었던 그날, 모든 만물을 새롭게 이루신 완성의 출발점(계 21:5~6)이었던 그날은 원형 예배의 날이었다.

 

하나님은 첫 안식일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 2:3) 복을 주신다는 단어 ‘바라크’는 경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첫 안식일은 예배드리고 복 받은 ‘바라크’의 날이었다.

 

잠언 8장에는 지혜가 의인화돼 있다. 의인화된 지혜는 바로 창조주 예수님이심을 드러낸다. 천지창조의 나날에 지혜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창조를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사람들도 지음 받은 후에 그 기쁨에 참여했다.

 

천지창조의 반응으로 드려진 예배에는 이 땅의 사람은 물론 천상의 천사와 우주 만물도 함께한다.(시 148:1~14) 창조의 반응으로서의 예배만이 아니라 구속의 반응으로서의 예배가 천상에 있다.(빌 2:5~11, 계 7:9~17) 실상 이 땅의 예배는 이미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히 12:22~29, 계 5:7~14)

 

참된 예배는 사람들이 스스로 고안해 발전시킨 게 아니다. 이 땅의 예배는 창조와 구속의 감격으로 가득 찬 천상의 예배를 투사하고 참여토록 하신 하나님의 찬란한 작품이요 보배로운 선물이다.

 

예배는 그때그때 끊어지는 졸렬한 세상의 단편극이 아니라 창조부터 영원까지 펼쳐지는 장엄한 천상의 대하드라마다. 오늘의 나의 예배, 우리의 예배가 그 이음 속에 생생히 살아있어야 한다. 모든 예배자는 이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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