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올해 단기 선교를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올해 단기 선교를 할 수 있었다. 해마다 여러 곳의 단기선교를 섬겨왔는데 올해는 한 곳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았다.

 

예전처럼 많은 사람이 한 번에 모일 수 없는 터라 작은 규모의 선교 바자를 여러 차례 열어 각 선교지로 보내기로 했다. 현지 선교사님들과 단기선교를 기다렸던 성도들이 함께 ‘줌’에 모여 예배와 기도, 교제와 격려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며칠 전에는 미국 퀸즈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알마티 선교사님과 협력하는 키르기스스탄 선교사님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알마티 선교사님이 설교하시면서 여러 차례 우셨다. 처음에는 ‘다른 불’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셨다.

 

그날 설교 본문(레 10:1~7)에서 아론의 아들들이 다른 불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다가 죽게 된 장면을 말씀하셨다. 선교지에서 예배마다 오직 ‘진리의 불’ ‘예수님의 불’로 예배를 드리시겠다며 우셨다.

 

성도 중 한 분이 “죽고 싶지 않아요. 살고 싶어요”라는 전화를 하셨다며 또 우셨다. 최근 알마티에 창궐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여러 가족이 죽었는데 그 죽음이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으니 죽고 싶지 않다며 절박한 목소리로 전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가 환난을 당한 자들에게 이처럼 꼭 필요하다며 눈물 흘리셨다.

 

선교사님의 눈물은 그 눈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외국인과 선교사가 철수하는 가운데 자신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이번에도 현지인과 함께 그 자리에 남아 있으시겠다며 우셨다.

 

감동적인 예배를 마치고 곰곰 생각해 봤다. 그리고 보니 우리는 예배에서 눈물을 잃어버린 지 오래됐다. 예배 중에 춤을 추기도 하고 찬양도 드렸던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눈물을 넘어 통곡으로도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다윗만 사죄의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우리 중 누구도 오늘에 이를 수 없었다.

 

그 사죄의 은총을 깊이 깨달은 자들은 예배 가운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예전에는 모든 예배에 특히 성찬 예배에 곳곳에서 흐느껴 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성찬이 너무 홀대를 받고 있다.

 

성찬은 교회가 1년에 몇 차례 마지못해 시행할 행사가 아니다. 예수님이 지키라고 명령하신 성찬은 어떤 시간인가. 식탁 위의 떡과 잔을 내가 보고 먹고 마시며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이 나의 개인적 구원임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감격의 시간이다.

 

나아가 성찬은 옆에서 나와 함께 떡과 잔을 먹고 마신 자들이 예수님이 세우신 새 언약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전율의 시간이다. 성찬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는 소망의 시간이다.

 

성찬은 성찬에 담긴 생명의 복음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잘 전하라는 사명을 확실하게 다짐하는 비전의 시간이다. 그리고 성찬은 너무 신비로운 바로 그 성찬을 통해 성화가 확연하게 일어남을 경험하는 축복의 시간이다.

 

그런데 말랐다. 눈물이 말랐다. 예배에서 눈물이 말랐다. 무엇보다 성찬에서 흐르던 회개와 감사와 결단의 눈물을 이제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희귀한 일이 돼가고 있다.

 

눈물을 포기하지 말자. 예수님이 초청하신 식탁, 그 상 위에 펼쳐진 떡과 잔을 예수님이 어떻게 만드셨는지, 그리고 그 떡과 잔은 나에게, 그리고 교회에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으면 말랐던 눈물의 강이 다시 흐르지 않겠는가.


1917년이었다. 그러니 백년도 훌쩍 넘었다. 1917년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해다. 놀랍게도 그가 쓴 책은 아직도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다. 그는 누구인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이다. 그의 책은 무엇인가.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다.

 

이 책은 성도들이 1년 365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살도록 돕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원래 제목이 예배에 대한 가장 선명한 정의를 보여준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My Utmost For His Highest’다. 곧이곧대로 번역한다면 ‘최고의 하나님을 향한 나의 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수없이 예배를 드렸을 당신은 예배를 한마디로 무엇이라 정의하시는가. 사람마다 예배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겠지만 ‘최고의 하나님께 나의 최선을 드리는 것’보다 더 탁월한 예배 정의가 있을까.

 

하나님이 한없이 높으신 분이고 사람이 가장 낮은 자임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자리가 예배 자리다. 예배 모든 순서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존재임을 단언하고 고백한다.

 

예배의 다양한 순서는 예외 없이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 보여주고 사람이 얼마나 낮은 자인가를 너무 잘 드러낸다.

 

예배 가운데 누가 누구에게 찬양을 드리는가. 사람이 하나님께 찬양 드린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게 높고 위대하신 분이고 사람은 가장 정성 어린 찬양을 드려야 할 만큼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찬양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을 찬양하는 것같이 느껴진다. 물론 예배의 유일한 판단자는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이 볼 때 가사는 분명히 하나님을 향하는데 초점은 자기가 받으려는 심사같이 여겨지는 찬양도 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찬양 외에 다른 모든 예배 순서에서 산만한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찬양 후 다른 순서를 뒤로하고 과감히 밖으로 나감으로 그가 진정한 예배자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입증하기도 한다. 예배의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한없이 높음과 인간의 철저히 낮음이 확실히 보이지 않는다면 그 찬양은 무엇보다 통곡의 회개가 절실하다.

 

기도도 그렇다. 기도도 찬양처럼 하나님의 높으심과 사람의 낮음을 보여주는 예배순서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호칭이 전혀 없이 시작하는 기도가 있다. 도대체 누구를 향한 기도인가.

 

설교 같은 기도도 있다. 하나님을 훈계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목사님이나 성도들을 기도를 통해 가르치려는 것인가. 속절없이 긴 기도도 있다. 모 교회에서 있었던 실화다. 수요 예배 대표기도를 맡았던 권사님의 기도가 십 분이 지나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뒤에 계시던 담임목사님이 권사님의 옷자락을 끌어당겨 겨우 대표기도를 끝내게 했다.

 

누구 편에 설지 고민하지 말자. 대표기도는 개인기도와 다르다는 것만은 잊지 말자. 긴 대표기도에는 교만이 깃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머리를 숙이고 예배의 대표기도에 참여하자.

 

모든 교회의 그 날 대표 기도는 그 날 그 교회의 영성을 보여준다. 기도 가운데 지금 하나님이 그 교회에서 얼마나 높으신지 사람이 얼마나 겸비하는지 엿들을 수 있다. 100년 넘은 고백 ‘최고의 하나님을 향한 나의 최선’은 예배가 무엇인지 오늘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예배는 동사다. 예배는 행하는 것,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행동이 그 가운데 있을까. 찬양하다, 기도하다, 설교하다, 봉헌하다 등은 정적인 게 아니라 모두 동적인 행동들이다. 진정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우상들처럼 아무런 의식 없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시다. 예배는 경이로운 행동을 이미 보여주신 하나님에 대한 행동(감사, 찬양)이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생생히 말씀하시며 찬양에 기뻐하시며 기도에 응답하신다. 예배에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동사와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의 동사가 함께 어울려 장관을 펼친다.

 

기독교의 예배는 공허한 명상이 아니라 놀라움으로 가득 찬 이야기의 자리다. 이 땅에서 예배를 동사로 본다면 ‘항해하다’를 빼놓을 수 없다. 예배는 항해다.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사 42:10)

 

항행하는 자들은 예배드리는 자들이 돼야 한다. 이 땅에서 예배는 천성을 향해가는 항해다. 이 항해는 온갖 풍랑을 만나지만, 그 가운데 펼치시는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들을 목도하고 찬양하다가 마침내 영원한 항구에 이른다.

 

그 항해 중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는 자들 가운데 조직이 있음을 볼 수 있다.(시 107:23~32) 왜 조직이 필요할까. 항해 가운데 여러 역할을 맡은 조직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천국 항해 가운데, 항해 조직 가운데 선장이 계시다. 예수님이 선장이시다.(마 8:23~27) 사랑과 능력이 많으신 탁월한 선장이시다. 그는 사랑으로 배 안에 있는 자들을 품고 능력으로 그 항해의 장애물을 제압하신다.

 

‘그레이하운드’는 2차 세계대전 때 해상수송 중 독일군과 연합군의 치열한 해상전투를 그린 영화다. 그레이하운드는 해상수송선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전투함이었다. 연합군의 해상수송을 막기 위해 가끔 얼굴을 드러낼 뿐 숨어서 공격하는 독일의 잠수함과 그레이하운드의 전투장면은 긴장 속에 영화를 보게 했다.

 

톰 행크스는 이 영화에서 그레이하운드의 선장 역할을 맡았다. 그의 리더십은 탁월했다. 그러나 더 눈부신 것은 리더십 안에 있는 그의 믿음이었다. 영화 가운데 몇몇 성경 구절이 짧게 등장한다. 아주 짧은 기도장면도 여럿 있다. 무서운 전쟁영화가 따듯한 종교영화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원작은 CS 포레스터의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다. 힘든 항행 중에 선한 목자 예수님이 우리의 선장이시니 두려워 말라는 메시지를 이 영화는 외치는 것 같았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세 척의 배를 이끌고 팔로스항에서 인도를 향해 출발했다. 날씨, 음식, 선원들의 불만, 두려움 등 문제가 많았지만 콜럼버스의 항해 일지는 항상 이렇게 끝마쳤다. “오늘도 우리는 서쪽으로 항해했다.”

 

그렇다. 예배는 항해다. 예배는 천성을 향해 전진한다. 유라굴로 같은 광풍이 몰아치지만 낙심하지 않는다. 바울도 유라굴로가 몰아치는 항해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배의 자리였다. 오늘의 우리도 예배 가운데 몰아치는 의심과 두려움의 영들을 제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송축하면서 천성을 향해 간다. 오늘의 항해일지에 우리는 무엇이라 적을까. “오늘도 우리는 천국으로 항해했다.”


“쇼핑하는 동안 카타콤을 방문하실 분들은 손들어 주세요.” 나와 함께 6명이 손을 들었고 얼마 후 우리는 일행들과 다른 차를 타고 카타콤으로 향했다. 독실한 크리스천 관광가이드가 아니었다면 그런 제안은 없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의 지하 묘지인 카타콤은 크리스천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가 예배도 드리고 생활도 했던 곳이다. 그곳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마음은 계속 뜨거워졌다.

 

카타콤 곳곳에는 당시 성도들이 가졌던 구원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중에 믿음을 지키다 죽은 여인 체칠리아의 마지막 모습을 빚은 조각에 대한 설명은 압권이었다.

 

옆으로 누운 조각 한 손에는 세 개의 손가락이 펴져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손가락 하나를 펴 그 세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신앙을 고백하며 죽은 것이라고 한다.

 

그 밖에 여러 설명을 들은 후 예배를 드렸다. 그 카타콤 안에 성찬 예배를 드리거나 여러 모임을 갖기에 적절해 보인 공간에서 드린 예배였다. 목사는 나밖에 없어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말씀을 전했다. 그때 예배 중에 불렀던 찬송이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였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내내 북받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너무 불편한 로마 지하의 카타콤에서 드렸던 그 날 예배의 가슴 저민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곳이 믿음을 지키려는 자들이 찬송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들은 장소였음을 기억하며 드린 예배였기 때문이리라. 삼위일체 교리에 충실한 자리였기 때문이리라.

 

하나님의 임재가 확실히 있던 자리, 다시 오실 주님을 낮이나 밤이나 기다렸던 자리,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오롯이 보여준 자리, 믿음의 공동체가 서로를 보듬은 이야기를 남긴 자리였기 때문이리라.

 

사람이 예배드리기에 편리한 곳을 최적의 예배 장소라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임하시기에 합당한 곳이 최고의 예배 자리다. 한때 ‘구도자 예배’ 열풍이 있었다. 구도자 중심의 예배는 꽤 설득력 있어 보이는 단어다.

 

그 예배는 구도자를 VIP로 여기는 어설픈 철학을 담고 있다. 사람들이 듣기에 불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구속, 화목제물, 칭의 등의 용어들을 치우고 쉬운 용어나 이미지를 사용하자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이전의 모든 성도는 그런 단어들을 직접 들으며 신앙을 올곧게 키웠다. 예배의 중심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중심이다. 예배의 공간이 아름다워야 아름다운 예배가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예배자가 드리는 예배가 아름다운 예배이며 그들이 있는 공간이 가장 아름다운 예배 자리다.

 

빌립보 감옥의 깊은 자리가 가장 멋진 예배 자리였음을 바울과 실라도 일깨워 주고 있지 않은가.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4~26)


특별전시회 이름부터 마음을 설레게 했다. ‘천하제일 비색청자(天下第一 翡色靑磁) 전’. 송(宋)나라의 태평노인이 ‘수중금(袖中錦)’에서 고려청자는 천하제일의 비색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2012년 가을 한국에 있을 때였다. 설렘을 가다듬고 천하제일의 비색인 고려청자를 감상하기 위해 대전에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깊이 감상할 수는 없었으나 수백 개의 비색청자로부터 받은 감동은 분명히 있었다. 그때 전시관을 거닐며 떠올린 것은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이었다.

 

‘세상의 토기장이도 저런 빛을 빚을 수 있다면 주님께서 빚으신 나의 빛은 어떠할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빚으시는 그릇이 모두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오래전 도자기를 굽는 곳을 간 적이 있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중요함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에 진흙만큼 중요한 것이 ‘뜨거운 불’이라고 했다.

 

예배는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그릇으로 빚으시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예배에 꼭 필요한 것은 ‘뜨거운 불’이다. 불은 불순물을 제거할 뿐 아니라 그릇 자체를 견고케 하고 그릇의 빛을 아름답게 만든다.

 

교회의 빛은 설(雪)빛이리라. 설빛이란 ‘하얀 눈’ 빛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사 1:8)

 

백색은 뜨거운 불의 복음을 통해 만들어진 색깔이다. 하늘 성도들의 하얀색도 불같은 고통을 견딘 자들이 입은 옷 색깔이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3~14)

 

그래서 8년 전 마음과 시선을 두었던 ‘천하제일 비색청자’의 생각은 ‘천하제일 백색제자(天下第一 白色弟子)’로까지 확대됐다. 그리고 아예 ‘그 백색제자가 나도 되고 싶다’는 열망에 이르렀다.

 

나는 불이 없는 예배를 참을 수 없다. 뜨거운 하늘 불이 없는 예배를 어찌 예배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렇게 힘주어 말하지만 부끄럽게도 그동안 불 없는 예배의 자리에 수없이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그런 냉랭한 예배 말이다.

 

엘리야는 외쳤다. “불로 응답하소서, 불로 응답하소서!” 하나님은 엘리야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가 쌓은 제단 위에 하늘의 불을 부으셨다. 아무런 불도 붙여지지 않는 예배에 익숙한 성도나 그런 광경을 늘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목사는 엘리야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지 않는다.

 

온 세상의 교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큰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지금은 부분적인 현장 예배를 드리고 있다. 불 없이 드려지는 예배는 멈춰야 한다. 하나님께 우리의 예배 가운데 불로 응답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 회복되는 예배마다 하늘의 불이 임해 더러움은 태워지고 정결함은 타올라야 한다. 마침내 그 하늘의 불은 교회를 ‘천하제일 설빛교회’로, 성도를 ‘천하제일 백색제자’로 빚을 것이다.


“맞다, 맞아. 똑같다.” “저 눈 좀 봐, 똑 닮았잖아.” 방송 카메라가 두 사람을 각각 클로즈업했다. 흥분에 찬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생방송 중인 KBS홀에 있던 사람들과 전국에서 시청하던 사람들이 함께 눈물과 탄성을 쏟아냈다.

 

어제가 6월 30일이니까 지금부터 꼭 37년 전, 1983년 6월 30일에 시작해 그해 11월 14일까지 138일, 총 453시간 45분 동안 가장 긴 생방송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던 프로그램, KBS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이야기다.

 

6·25전쟁이 가져다준 크나큰 상처는 이산가족 문제였다. 전쟁 통에 부모·자식이 헤어지고 형제자매를 잃어버린 이산가족의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산가족임을 확인하는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찾고자 하는 자들이 서로 닮았냐는 것이었다.

 

예배는 헤어졌던 자들이 만나는 자리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의 뚜렷한 특징이 하나 있다. 서로 닮았다는 점이다. 서로 닮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모든 예배자가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닮았기 때문이다.

 

예배자는 예배의 대상과 점점 닮게 돼 있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에 보면 어느 마을에 사람의 얼굴 모양 같은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습의 고결함과 온화함은 바라보는 자들에게 평온을 가져다 줬다. 그 바위를 매일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던 어니스트라는 소년 자신이 바로 그 바위를 닮은 사람이 돼간다는 이야기다.

 

사람은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닮아간다는 교훈을 주는 소설이다. 우상숭배자들의 특징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지각이 없다.(렘 5:19~21) 왜 그럴까. 그들이 예배하는 우상이 지각이라곤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4~8)

 

우상숭배자들이 이처럼 자기의 우상을 닮아가듯, 예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예수님을 닮아간다.(고전 1:2, 11:1)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그와 닮은 세상의 빛이라 부르신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예배는 하나님과 닮음을 확인하는 자리요,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는 자리다. 예배 가운데 예배자 서로가 이질감을 느끼고, 모든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서 생소함을 감추지 못한다면 그 예배를 어찌 하나님 가족의 모임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30~40년 넘게 하나님을 예배했는데 하나님을 닮아감이 전혀 없다면 그동안 마음속에 숨겨진 다른 것을 예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처럼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숨을 죽이고 이산가족을 찾는 현장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맞다, 저들이 가족이 맞아”라고 서로 닮음을 보고 흥분해서 말했다. 이처럼 “맞다, 맞아. 서로 똑같다” “저 예배자를 봐, 꼭 하나님 닮았잖아”라는 흥분에 찬 수군거림이 우리의 예배를 지켜보던 천사들 사이에서 번져야 하지 않겠는가.


나무도 몸살을 앓는다. 나무를 옮겨 심으면 새로운 땅에 적응하기까지 큰 진통을 겪는다. 태평양을 배로 건너보았는가. 비행기도 힘든데, 배로 이동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몸살과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에 첫발을 디딘 언더우드 선교사다. 그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선교는 이렇듯 숱한 장애물을 건너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조선 땅에서 만난 어둠과 무지 때문에 그의 기도는 탄식처럼 이어지다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잖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그가 태평양을 건너는 위험을 불사하고 선교하려 했던 목적은 조선의 무지한 자들로 하나님께 예배케 하려는 것이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선교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맞는 말이다. 선교의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선교는 구제사업도, 정의구현도, 교회성장도, 아니 그 어떤 것도 목표가 될 수 없다. 방심하는 사이에 선교는 세속화될 수 있다. 선교는 오직 구원을 지향하며 그 최후목적은 예배다.

 

아름다운 선교로 거둔 구원의 진정성은 참된 예배로 화려한 꽃을 피워야 한다. 참된 예배자가 세상을 바꾼다.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 사이에 있었던 영생의 이야기가 예배의 이야기로 전개되고 그 여인이 살던 마을을 변화시킨 이야기는 언제나 어디서나 적실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으로 구원받고 날마다 모여 예배드렸을 때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돼야 할 말씀이다.

 

왜 진정한 예배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의 칭송을 받는가. 예배자들은 자기들처럼 세상이 열심히 추구하는 것에서 자유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에 있는 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 선교본부를 방문한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다. 그곳 지하창고에 유명한 물건이 있다는 이야기를 미리 듣고 안내하는 분에게 그 창고를 구경시켜 달라고 하셨단다. 마침내 그 창고에 가보니 수많은 가방이 보관돼 있었다.

 

가방은 WEC에서 파송돼 세계 각지로 흩어진 선교사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가방을 그곳에 맡겨놓고 다시는 찾으러 오지 않았다. 선교현장에서 바로 하늘나라로 갔기 때문이다. 그 설명을 들으시면서 목사님의 가슴이 미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이 세상 ‘가방’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우선이 아니었다. 예배가 없던 곳에 예배를, 틀린 예배가 있던 곳에 바른 예배를 드리게 하려는 선교에서 가방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웠으리라. 가방을 두고 떠난 그들은 지금 하늘에서 무엇을 할까. 선교지에서처럼 예배를 드리리라.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여전히 이 세상의 가방을 붙잡느라 선교의 길을 떠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래서 예배를 세우는 일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비목(碑木)은 비장하게 흐른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가슴 먹먹한 노래이다.

 

이름 모를 깊은 계곡에 비목 하나 남기고 떠난 그들은 누구인가.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군인들이다. 6월은 그래서 마음이 저민다. 현충일과 6·25전쟁, 연평해전 등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위해 소중한 생명을 기꺼이 계곡에 묻고 바다에 던진 젊은 군인들을 기억하게 한다.

 

모든 아름다운 열매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다. 열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뿌리는 얼마든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라는 열매는 젊은 군인들의 어둠 속 뿌리 됨에 있다.

 

하늘과 땅에는 자유보다 더 멋진 열매가 있다. 예배다. 자유는 사람이 누리는 것이지만 예배는 하나님이 누리신다. 모든 열매가 그렇듯이 예배라는 열매도 어둠 속의 뿌리에서 기인한다.

 

어둠 속 뿌리는 어둠 속에 돌아가셨던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희생제물 되셨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예배가 가능하다. 예배에는 더 이상 희생제물이 필요 없지만 다른 차원의 희생이 요청된다. 그 희생은 예배드리는 자들의 몫이다. 예배드리는 자들이 지불할 희생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시간이 희생되어야 예배가 가능하다.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예배는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예배처럼 비생산적인 일에 더 이상 시간을 들이지 말라고 한다. 마르바 던은 ‘고귀한 시간 낭비 예배’(A Royal Waste of Time)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배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처럼 보이지만 그 시간은 결코 낭비의 시간이 아니며 오히려 시간을 가장 고상하게 사용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말이 맞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 중에는 정작 예배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는 듯싶으면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는 표정에 잠기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시간을 아낌없이 쓴다. 그 사람이 어디에 시간을 많이 쓰는지를 알면 그 사람이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사랑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우리에게 쏟아부으신다.

 

예배는 시간을 희생해 영원을 만나는 사건이다. 전도서 3장은 시간에 관한 이야기로 출발한다. 그 모든 시간은 영원을 향해 달려간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1) 모든 시간이 영원을 사모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예배의 시간이 영원을 지향한다는 말에 무슨 변증이 더 필요하겠는가.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된다. 예배는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기도 하고 미래의 소망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배가 희생을 요구하는 시간은 현재, 바로 지금의 시간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이때’ 곧 오늘, 지금, 현재의 예배자다.(요 4:23)

 

예배가 시간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그 시간은 다름 아닌 ‘지금’이다. 예배의 부름에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자.


만델라를 기다렸다.

너무나 처절한 차별과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이유 없는 죽음의 슬픈 현실을 끝내고 자유를 가져다주리라 믿는 만델라를 그들은 기다렸다.

 

뮤지컬 영화 ‘사라피나’에서 흑인 학생들의 간절한 바람은 만델라가 오랫동안 투옥돼 있던 교도소에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행됐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 헤이트’에 항거하던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를 본 지가 꽤 오래됐 는데요즘다시생각난다.

 

왜 그런가. 오늘의 미국에서 흑인들은 누구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 사건이 얼마 전 백인 경찰에 의해 안타깝게 죽음에 이른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었다.

 

인종차별을 멈추라는 ‘시위’와 한인 이민자들도 피해를 많이 보는 ‘폭동’ 사이의 현장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도대체 미국뿐아니라 전세계에 여전히 만연한 인종차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가운데 ‘사라피나’가떠올랐다.

 

그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다. 학생들과 선생님(우피 골드버 그)이 함께 춤추며 불렀던 ‘주기도문’ 이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주기도문’은 인종차별에서 진정한 소망이 하나님을 우리 모두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예배 가운데 있음을 다시깨닫게해줬다.

 

하나님은 모든 인종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모든 만민의 왕이시다.(시 47:1~2) 예배는 우리 모두의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알고 기뻐하는 자리다. 하나님이 우리모두의 왕이심은 복음중의복음이다.

그 왕에게 구원이 있고 돌봄이 있고 지킴이 있고 베풂이 있고 변치 않는 사랑과 다함 없는 은혜가 영원히 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진정 기쁘지 않은가.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는 그 앞의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른다. 여기에 어떤 차별이 있겠는가. 큰 왕 앞에서 그 왕의 은혜로 부름 받고 그 왕의 사랑을 덧입고 사는 사람이 서로 차별하는 처사는 얼마나 가소로운 태도인가.

하나님은 성전 문을 닫을 자를 찾으 셨다. 열린 성전 문으로 들어와 예배 드리는 자들의 가증한 예배를 도무지 참으실 수 없었기 때문이셨다. 그때 하나님이 원하셨던 예배는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모든 민족이 함께 드리는 예배였다.(말 1: 10~11)

 

예배는 인종차별을 불허한다. 모든 인종이 같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드리는장엄한 하늘예배를 보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앞에 서서.”(계 7:9)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는 차별이없다. 예배자는누구나 동등하다. 아니 모든 예배자는 동등을 뛰어넘는 (more than equal) 그 무엇을 공유해야 한다. 예배자가 모두 공유해야 할 그무엇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인종차별은 싸움으로 철폐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이시요 영원한 왕으로 믿으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받은 존재요 서로 사랑할 존재로 인정하며 나아가는 예배에서 해결된다.


문패를 보곤 했다. 그 집에 전세를 사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물론 사글세를 사는 사람의 이름도 아니다. 문패는 그 이름의 사람이 그 집의 주인이며 그 집안에 지금 살고 있음을 나타낸다.

 

지나가다 대궐같이 크고 멋진 집에 걸린 문패를 볼 때 나도 저런 집에 내 이름을 새긴 문패를 걸고 살았으면 했던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도 그 이름을 걸어두고 싶으신 집이 있으셨다. 어딜까. 성전이다.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왕상 8:16, 20)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어떤 이름을 갖고 계신가. 세상의 문패처럼 하나의 이름만 갖고 계신 것이 아니다.

 

“알파와 오메가, 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엘로이(감찰하시는 하나님), 엘올람(영원하신 하나님), 엘엘리온(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이레, 여호와닛시, 여호와샬롬, 여호와라파, 여호와삼마, 임마누엘, 창조자, 구원자, 심판자, 아버지, 주, 목자, 피난처, 산성, 요새, 소망, 힘, 용사, 방패, 기업….”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을 일러준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행사(行事)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이름은 지극히 거룩한 이름이며 우리가 부르고 부르다 죽어도 좋을 이름들이다. 그 찬란한 이름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는 곳이 성전이요 자랑스레 붙어있는 곳이 교회다. 모든 집 앞의 문패는 언제가 그 이름이 바뀐다. 그러나 성전에 걸려 있는 여호와의 이름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예배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있는 성전에서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배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 29:2)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대상 16:8, 10)

 

자기의 이름을 자랑하고자 하는 콘서트(concert) 끝에는 말 못 할 공허함이 찾아오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자 하는 예배의 마지막은 형용 못 할 기쁨으로 채워진다. 요란했지만 콘서트 같은 예배도 경험했고 조용했지만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예배도 참석했다. 무엇이 그 차이였을까.

 

예배의 플러그(plug)에 그 비밀이 있었다. 땅에 플러그를 꽂는 예배는 여지없이 콘서트다. 땅에 플러그를 꽂음이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예배라는 말이다. 찬양 사역자가 주목을 받고, 설교자가 거의 추앙을 받고, 사람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계속 강조되는 예배는 땅에 플러그를 꽂았기 때문이다.

 

하늘에 플러그를 꽂은 예배는 온전히 하늘의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은혜로우신 이름들이 예배 가운데 계속 찬양을 받으신다.

 

지난주일 예배 때였다. 헌금 특송을 하던 자매가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다 목이 멨다. 나도 강단 뒤에서 함께 울었다. 너무나 힘든 뉴욕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니 위로와 소망이 넘쳤다. 그 자매가 부른 찬송의 가사는 이렇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의 요새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그날 나는 분명히 예배를 드렸다. 하늘로 플러그가 꽂혀있는.

 

‘수학의 정석’ ‘성문종합영어’ ‘한샘 국어’ 거의 고전에 가까운 학습교재들이다. 어려운 문제들을 어떻게 풀 것인지 가르침을 주는 교재다. 이뿐이겠는가. 모든 교재에는 많은 문제가 실려 있다.

 

그러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에는 답도 있다. 인생의 문제는 학습지 안에 자리 잡은 고정된 문제보다 더 복잡하다. 아무리 복잡한 인생의 문제라도 확실한 답이 있다. 그 답안지는 어디에 있나. 여기에 있다. 예배다.

 

예배에 모든 답이 있다. 이삭은 이해 못 할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들은 문제를 부여안고 예배의 자리로 갔다. 답을 얻었다. 과연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 예배의 자리에 번제물로 드릴 숫양이 준비돼 있었다. 숫양이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도무지 세상에서 답을 찾지 못하던 자가 성전에 올라가면서 이렇게 외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예배자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답을 주실 것을 확신한다.

 

예배에 출석하는 것으로만 스스로 위안 삼는 사람이 있다. 예배출석에의 무거운 책임감을 완수하는, 괜찮은 사람들이 아닐까.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예배는 출석 이상의 것을 풍성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를 출석함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다. 예배에는 인생의 난제에 대한 “답”이라는 찬란한 선물이 준비돼 있는데 이 선물은 어찌하고 왜 매번 빈손으로 돌아오는가.

 

캄캄할 때였다. 예배에 나갔다. 빛을 찾았다. 두려울 때였다. 예배를 드렸다. 담대해졌다. 서러울 때였다. 예배에서 엎드렸다. 위로가 쏟아졌다. 예배에서의 답은 이처럼 포괄적일 때도 있지만, 구체적인 답을 주실 때가 더 많다.

 

수많은 예배자가 같이 있었는데 마치 나만을 위해 준비된 것과 같은 말씀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 곧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무엇을 준비하시는가. 답을 준비하신다.

 

“밑줄 쫙”을 기억하시는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분들도 많으리라. ‘한샘 국어’ 서한샘 선생의 학습방법이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밑줄 쫙”은 많은 사람의 뇌리에 남았다. 이것이 확실한 답이니까, 너무 중요한 것이니까 그 답 밑에 “밑줄 쫙” 그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밑줄 쫙”보다 더 선명한 답을 예배에서 주신다. 그러므로 예배를 ‘집중’이 아닌 ‘산만’으로 드리는 자는, 인생의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더 ‘답답’해진다.

 

학습지에서 문제가 어렵다고 답안지를 빨리 찾아보는 것은 금물이다. 학창시절, 나는 그 금물을 자주 어겼다. 물론 안 좋았다. 인생 문제의 답을 예배에서 찾지 않고 방황하는 것은 금물이다. 나는 그 금물을 어기고 싶지 않다. 안 좋은 일을 내 생애에서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불의 선지자 엘리야의 사자후가 갈멜산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렇다. 예배는 전쟁이다. 참 신을 섬길 것인가 거짓 신을 섬길 것인가의 가장 치열한 전쟁터가 바로 예배인 것이다. 마귀는 대담하다. 예수님에게도 거짓 신을 예배하라고 유혹했으니 말이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8~9)

 

성경은 예배전쟁사요, 인류의 역사도 영적으로 예배 전쟁의 역사다. 오늘날도 그 전쟁이 계속되는 것은 거짓 신들의 약속이 매우 현실적이고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그토록 빼앗았던 바알만 해도 그러하다.

 

바알은 비와 구름을 몰고 다니며 농사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극심한 가뭄이 있던 아합왕의 때에 사람들은 바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바알은 힘도 있고 다산(多産)에도 관여한다고 생각했다. 바알은 이렇듯 자본과 권력과 정욕이라는 인간의 현실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들을 약속하는 거짓 신이다.

 

이런 거짓 신을 예배한 자들은 어떻게 됐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브올의 바알)에서 정욕의 신 바알을 따라 음행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민 25:1~5) 바알의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자본의 신 바알에게 부르짖다가 죽임을 당했다.(왕상 18:40) 요시야 왕 때에 권력의 신 바알에게 제사했던 자들에게 남은 것은 그들 무덤 위에 뿌려진 우상 가루였다.(대하 34:4)

 

하나님과 더불어 신의 자리를 겨루려던 다른 모든 신은 바알의 아류들뿐이다. 잠시의 쾌락을 약속했던 모든 거짓 신들은 그들의 예배자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이끌지만, 구원을 약속하시는 유일한 참신 하나님은 그의 예배자들을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신다.

 

예배의 자리에 견고한 진(陣)처럼 자리 잡은 거짓 신을 몰아내는 싸움 없이는 참 신께 예배드릴 수 없다. 예배 전쟁에서 거짓 신과 싸울 무기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회개다.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정욕의 바알과 자기의 높은 지위를 이용해 거짓과 살인을 자행했던 권력의 바알이 하나님보다 크게 보였던 다윗. 그가 진정한 예배자로 돌아서는 데 가장 먼저 필요했던 것은 통회 자복하는 회개였다.

 

“하나님이여…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17) 예배 전쟁의 승리는 놀랍게도 회개에 있다.

 

예배 전쟁을 이기게 하는 무기가 또 하나 있다. 거짓 신을 예배하라는 유혹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내세우셔서 이기셨다. 거짓 신은 정확한 말씀이 있는 예배의 자리에서 물러간다. 말씀이 흐릿했던 하와는 마귀를 이길 수 없었다.

 

예배에서 다른 것을 붙잡지 말자. 예배에서는 진리만 붙잡아야 승리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전쟁은 승리 아니면 패배다. 얼마 전 비무장지대에서 우리 군 감시초소를 향한 북한군의 총격이 있었다. 우리 군이 즉각 대응 사격을 시도했으나 격발되지 않았다고 한다. 총을 미리 점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배 전쟁에서 승리하길 원하시는가. 회개와 진리라는 두 개의 강력한 무기가 녹슬지 않게 하자.

 

아이 같은 남자가 있다. 남자 같은 남자가 있다. 그리고 족장(族長) 같은 남자가 있다. 여전히 자기 앞가림을 못 하는 남자라면 나이가 어떻든 아이 같은 남자다. 어이없다.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고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자들은 남자 같은 남자다. 괜찮다. 수많은 사람을 품고 수많은 사람을 먹이는 남자는 족장이다. 멋지다.

 

하나님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즐겨 소개하신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족장이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의 관계인 그들이 삼대(三代)에 걸쳐 족장이 됐는데 무엇이 그들을 족장 되게 했는가.

 

단순히 족장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걸까. 아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이 그들을 족장 되게 한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놀라운 예배자였다는 데 있다. 그들의 예배는 남달랐고 그런 예배를 통해 엄청난 축복을 받았고 수많은 자에게 복의 통로가 되는 족장이 됐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는 순종의 예배를 드렸다.(창 22) 아브라함은 이해가 됐기 때문에 순종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지체 없이 순종한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머뭇거림 없는 순종의 예배에 큰 감동을 받으신 하나님이 다급히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삭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주의 제단에 드리는 희생의 예배를 드렸다.(창 22) 아버지의 칼을 묵묵히 받으려 했던 이삭의 마음은 도대체 어땠을까. 울고 불며 “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를 외치거나 아예 아버지를 밀어제치고 도망을 갈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그 이삭을 어찌 잊으시겠는가.

 

온전한 희생의 예배자였던 그는 마침내 창대하고 왕성하며 거부인 족장으로 살았다.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과 이삭의 예배는 같이 있었다.(창 26)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 지라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야곱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벧엘로 올라가는 결단의 예배를 드렸다.(창 35) 하나님이 오랫동안 기다리셨던 예배였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와 예배를 드리겠다고 스스로 약속해 놓고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수십 년간 기다리셨던 야곱의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은 그가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사실 별 볼 일 없는 남자들을 위대한 족장으로 만든 예배는 하나님께 큰 순종, 큰 희생, 큰 결단으로 드렸던 예배였다.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어 예배자를 족장으로 만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예배가 정녕 오늘에도 있는가. 오늘날 아이 같은 남자를 많이 보고 남자 같은 남자는 적잖이 보지만, 족장 같은 남자를 보기 힘든 이유는 예배에 있음이 분명하다.

 

예배는 복음을 진술하는 시간이다. 예배 가운데 복음을 들을 수 없다면 무엇을 위한 예배이겠는가. 복음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어마어마한 구원 이야기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복음이 진술되고 나타나는 순간마다 예배자들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 가운데 용서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죄인이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아 의롭다고 불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돼 하늘의 모든 유업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무런 감동 없이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예배 가운데 엄숙한 예전(禮典)이 화려한 축제(祝祭)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복음은 예배 중에 예전의 틀에서 축제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예배에는 복음만 있는 게 아니다. 문화도 예배 곳곳에 잔뜩 스며있다. 복음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다. 예배 안에 있는 복음과 문화를 혼동하면 불필요한 논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강대상에서의 말씀은 불변의 복음이다. 강대상의 재질은 바꿀 수 있는 문화다. 찬양은 예배에서 절대로 제외시킬 수 없는 복음이다. 찬양의 스타일은 변화가 가능한 문화다. 성찬은 대치불가(代置不可) 복음이다. 성찬 중 사용되는 빵은 고정되지 않은 문화다.

 

우리는 처절한 문화 전쟁을 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다. 기독교 문화는 하나님을 떠난 세속 문화와 싸움을 피할 수 없다. 문화의 목적은 분명하다. “문화는 자연을 상대로 한 인간 활동의 결과”라는 사전적 정의에서 문화의 목적을 다 찾을 수 없다.

 

문화란 인간의 활동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이다.(창 1:27~28, 2:15) 문화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연을 깨우는 종교적 의무다. 그러므로 인간 중심의 세속 문화와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 문화 사이에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 안에서는 서로 싸울 필요가 없고 싸워서도 안 된다. 나와 찬양하는 스타일이 다른 사람이라고 ‘구원받은 사람 맞나’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을 뭘 모르는 저급한 크리스천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양복을 입지 않은 젊은 설교자의 설교는 귀담아들을 필요조차 없는 연설일까. 아니다. 기독교 문화 안에서 세대 간의 차이(gap), 지역 간의 차이, 교단 간의 차이는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할 영역이지 반목하고 단절할 이유가 될 수 없다.

 

더 이상 예배 안에 있는 문화의 문제로 힘들어하지 말자. 하지만 예배 안에서의 기독교 문화는 그 시대의 하위(下位)문화에 짝해서는 결코 안 되고 상위(上位) 문화까지도 훌쩍 뛰어넘어야 한다는 점만은 잊지 말자. 가장 고상한 복음에 지극히 천박한 문화의 옷을 걸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직접 들어 보라.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 29:2)

 

진정한 예배에는 온전한 복음이 항상 존재하며 거룩한 문화가 늘 함께한다. 지금 잠시 뉴욕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으로 볼품없이 됐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뮤지컬 도시다. 하지만 세계인들이 와서 열광하는 세계적 뮤지컬이라 해도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니, 어설픈 장난 수준이다. 하나님이 직접 쓰신 온전한 복음과 믿음의 사람들이 순종으로 빚은 거룩한 문화가 조우(遭遇)해 예전과 축제로 표현되는 예배라는 진짜 드라마에 비교하면 말이다.

 

잠겨야 한다. 푹 잠겨야 한다. 예배는 말씀에 푹 잠겨야 한다. 예배는 성령에 푹 잠겨야 한다. 잠김이란 충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에는 진리에 잠김이 있어야 한다. 예배에는 성령이 충만해야 한다. 진리의 잠김이 없고 성령의 충만이 없다면, 일어나야 할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말씀대로 요단강 물에 몸을 일곱 번 잠그자 그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왕하 5:14)

 

예수님이 물에 잠기셨다가 나오실 때 성령이 임하셨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렸다.(마 3:16~17)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을 때 오순절 성령 충만은 그 충만을 받은 모든 자를 변화시켰다.(행 2:1~4) 진리의 잠김이 없는 예배, 성령의 충만이 없는 예배는 상상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다반사다.

 

에스겔 47장을 보자. 성전 제단에서 나온 물이 발목을 적시다가 무릎에 이르고 허리까지 차오른 다음에는 능히 헤엄치지 못할 정도로 차오른다. 그리고 그 물결이 흘러가는 곳마다 엄청난 회복의 역사와 놀라운 생명력을 보인다. 말씀의 잠김, 성령의 충만이 아니고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해변에 가보라. 가장 시끄러운 사람들은 발목에 바닷물을 찰싹찰싹 적시며 뛰어다니는 자들이다. 무릎이나 허리에 물이 있는 자들은 제한적이긴 하나 나름 자기 폼을 잡는다. 푹 잠긴 자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으니 떠들거나 무게 잡을 일이 없다. 푹 잠긴 자들은 놀랍고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잠김은 놀라움을 지향한다. 충만은 변화를 일으킨다.

 

살짝 담그기만 했던 예배로 만족하지 말자. 예배 내용은 어떻든 예배가 끝나는 것에 가장 큰 기쁨을 보이는 신자들도 간혹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예배 가운데 푹 잠김이 없이 나오는 것을 거부하자. 하나님을 예배에서 만나고 나온 자는 마땅히 “깊도다 진리의 부요함이여, 넘치도다 성령의 충만함이여”라고 고백하며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성도라면, 우리가 교회라면 잠김을 맛보지 못하고 충만을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거룩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거룩한 불만과 무책임한 비판은 전혀 다르다. 거룩한 불만은 목회자에 대한 끝없는 판단, 여러 사람이나 교회의 많은 사역에 대한 한없는 비평이 아니다. 거룩한 불만이란 더 이상 잠김이 없는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회개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충만하지 못했던 것의 반복을 당연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리의 잠김에 대한 경험이 없었는데, 여태까지 성령의 충만에 대한 체험이 없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예배를 똑같이 맞이하려는 용기는 무엇인가. 잠김과 충만에 대한 비전이 없기 때문인가. 잠김과 충만의 방법을 모르는 까닭인가. 예배의 수심(水深)이 어느 정도이지 정직하게 헤아릴 필요가 있다.

 

너무 척박하다면 지금까지 이 지경으로 만든 낡은 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길이란 이전에 없던, 전혀 다른 길을 예배에서 찾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오랫동안 잊었던 기본을 다시 찾자는 것이다. 잊었던 기본 속에 잠김의 길이 있고 충만의 도(道)가 있다. 말씀을 전하고 전하면 말씀에 잠긴다. 주님만 높이고 높이면 충만에 이른다. 말씀만 전하는 예배, 주님만 높이는 예배의 자리로 향하자.

 

다시 돌아온 예배의 자리. 너무나 감격스럽다. 그러나 잃었던 예배를 다시 찾은 감격에만 젖어 있다면 우리는 진짜 중요한 것을 잃은 것이다. 새롭게 돌아온 예배 자리에서 우리는 예배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주일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늘 양식을 맛있게 만들어 먹는 소중한 자리다. 그러나 예배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일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훈련의 자리이기도 하다.

 

특별히 다시 찾은 공예배에선 후자(後者)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여기에 합리적 질문이 생긴다. 어떻게 그 짧은 예배 시간 가운데 ‘양식 먹음’과 ‘신앙 훈련’의 기능을 같이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짧은 예배시간이지만 그 안에 사도신경으로 드리는 신앙고백과 축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신앙 훈련 시간이다. 사도신경 속에는 신앙의 풍성한 유산이 담겨 있다.

 

사도신경은 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대로,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거룩한 지식을 내가 믿는 것이며 그 믿음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다. 사도신경을 교회 안, 예배 시간 안, 그리고 입안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말고 세상으로 가져가도록 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점이 놀랍게도 짧은 사도신경에 정확히 담겨 있다. 그러므로 창조로부터 계획된 미래의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오늘의 세상에서 만난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록 사도신경은 삶에서 함께해야 한다. 주일예배 가운데 신자의 관점 훈련을 하면서 확신 있는 생활까지 훈련하는 것이 사도신경 고백 시간이다.

 

축도는 어떤가. 단순히 예배를 끝내는 공식적 멘트인가. 아니다. 축도는 우리의 신앙을 예배 마지막에 담금질하여 그 뜨거운 하나님의 사람을 세상에 파송하는 자리다.

 

필자가 대학부를 지도할 때 이렇게 축도한 적이 있다. 청년들에게 강대상을 바라보지 말고 동서남북 세상의 네 방향을 향하라고 한 뒤에 축도했다. 세상은 저주로 가득 찼다. 절망의 세상이다. 미움의 세상이다. 상처의 세상이다. 마귀의 세상이다.

 

청년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이제 이 축도를 안고 세상에 나가 저주를 끊고 축복으로 바꾸라.” 세상을 이길 하나님의 강한 군사로 훈련시키는 축도의 시간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동행으로, 짧지만 강하게 성도들을 무장하는 시간이 축도 시간이다. 삼위(三位)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을 이길 세상은 없다.

 

그렇다. ‘양식 먹음’과 함께 ‘신앙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이 예배이고 교회다. 교회가 만약 ‘양식 먹음’에만 집중하면 수동적이고 나약한 신앙인을 만들 것이다. 혹시라도 함께 모여 예배를 못 드리는 상황이 또다시 온다 해도 휘청거리지 말아야 한다. 견고해야 한다.

 

교회는 평소에도 물론이려니와 지금보다 더 극한 상황이 온다 해도 스스로 든든히 서 있도록 철저히 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담대히 이기는 ‘신앙 훈련’이 회복된 예배 가운데, 그리고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을 한다. 아브라함의 말이다. 들어보자.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세기 22장 5~6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함께 예배드리러 갔다가 온다고 한다. 지금 이삭을 그 예배에서 번제물로 바치러 가는 길인데 어찌 다시 같이 온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지금 이상한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예배를 부활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배는 그 자리에서 죽음으로 다시 사는 것이다. 예배에서 죽지 않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 매우 계산적인 사람이다. 잃는(lost) 것과 얻는(gain) 것의 대차대조표를 잘 그린다.(빌 3:8) 그는 진짜 장사꾼, 영적 장사의 고수(高手)였다. 죽음(lost)과 부활(gain)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권능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 길은 먼저 죽어야 가능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기 전에는 부활을 알 수 없다.(빌 3:10~12) 예수님의 철저한 죽음과 그 부활의 영광은 예배 가운데서 가장 잘 볼 수 있다.(빌 2:5~11) 예수님이 잃은(lost) 것과 얻은(gain) 것이 무엇인지 예배는 말해준다. 예배를 바르게 드리면 예수님의 죽음을 본받을 수 있고(lost)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 권능을 가질 수 있다.(gain)

 

요한계시록 1장을 보자. 밧모섬에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있었다. 노(老) 사도 요한이었다. 어느 주일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죽은 자같이 됐다. 예배자의 모습이다.

 

그를 찾아온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이었다. 예배의 자리에서 자신을 죽은 자같이 내놓았던 요한은 놀라운 계시의 기록자로 일어섰다.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렸던 작은 예배자 요한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을 받았다.

 

뉴욕에 노 사도 요한과 같은 분이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에 감염돼 지난 성금요일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분이다. 그는 유학생 시절 중국인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그에게 그 웨이터 자리는 너무 소중한 자리였다.

 

어느 토요일 자정이었다. 그는 웨이터들이 목에 매고 일하는 보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일을 멈췄다. 새벽 2시까지 영업을 하는 식당에서 일을 멈춘 것은 그 식당을 그만두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유학생은 왜 그렇게 했을까. 성수 주일을 위해서였다. 토요일 자정마다 그러기를 두 달 후, 식당주인이 그를 불렀다. “이젠 우리 식당 그만두게”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식당 매니저 일을 맡아주게”라고 했다. 자신의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청년에게 신뢰를 보낸 것이다.

 

그 청년은 예배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도 좋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죽고자 하는 그를 부활시켜 점점 상상도 못 할 큰일에 쓰셨다. 그는 미주 한인교회 역사에 큰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세계 선교에 다양한 영향력을 끼치고 영원한 나라로 가셨다.

 

그분의 이름은 장영춘 목사님이다. 예배에서 죽고 예배에서 부활의 권능이 무엇인지 아셨던 그분은 필자가 섬기는 퀸즈장로교회 원로목사님이셨다. 그는 이 땅에 바른 예배를 남기고 영원한 예배의 나라로 떠나가셨다.

 

예배의 중심엔 십자가가 있다. 이 땅에 수많은 예배가 있다. 하지만 십자가가 중심이 아닌 예배는 참 예배가 될 수 없다.

 

예배에서 예수님의 위치는 정말 독특하다. 십자가를 지신 어린 양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시다.(계 7:10) 그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예배를 드리시는 대제사장이었고 동시에 예배의 희생제물이었다.(히 9:11~12)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예배를 드리는 분이고 예배의 제물까지 된다는 말이 상상이나 되는가. 이런 삼중(三重) 역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는 예수님이 대제사장, 곧 중보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피 흘리는 자가 찌른 자를 용서해달라는 중보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십자가에서 대제사장의 기도는 참소자들을 일거에 잠재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희생제물이심을 보이신다. “제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버림받은 제물은 하나님의 깊은 침묵 속에 천지를 진동케 한다.

 

십자가는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 대제사장의 십자가, 희생제물의 십자가로 놀라운 삼중 기독론이 담겨 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는 예배 가운데 찬송의 주제가 된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대제사장의 십자가는 예배 가운데 기도의 길을 연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처럼 대제사장의 인도하심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가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대면한다. 그리고 흡족한 은혜를 받아 나온다.

 

희생제물의 십자가는 예배 가운데 설교의 핵심이 된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설교자의 절절한 외침은 십자가뿐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배의 중심에 오늘도 서 있다. 십자가 중심 예배에는 세속적인 타협이나 사람을 향한 아첨이 있을 수 없다. 예배에서 타협하는 것은 삶에서 백기를 드는 것과 다름없다. 예배에서 아첨은 모든 관계에서 비열한 자리로 내려가기로 작정한 것과 같다.

 

다윗은 그가 드리려는 예배에 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다른 것을 놓으려는 유혹을 받았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려던 이 일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냈고 징벌로 전염병이 퍼지면서 7만명이 죽었다.

 

전염병의 재앙이 마감될 때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했다. 장소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다. 아라우나는 예배의 제물을 값없이 제공하려 했다. 하지만 다윗은 덥석 그가 거저 주는 제물을 받아 예배드리지 않았다.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자기가 말한 대로 비싼 값을 치르고 마당과 희생제물을 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 예배 이후 전염병이 완전히 그쳤다. 희생제물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예표한다.(삼하 24:1~25)

 

그리스도가 중심인 예배가 아니라면 다윗처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우리 주변엔 자기가 제안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라우나 같은 이들이 곳곳에 있다.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거룩한 자리다. 언약의 성취에 놀라고 언약의 신실함에 감격해 하고, 보잘것없는 인생과 언약을 맺어주신 하나님을 견고히 신뢰하리라는 자리, 그 하나님을 크게 말하고 송축하는 자리가 예배의 자리다.(시 105:1~10)

 

오늘날 많은 예배가 언약을 기억하는 기능을 잃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오랜 언약은 가벼이 취급되고 오늘 떠오른 생각들과 새로운 방식이 아주 묵직하게 다뤄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언약궤를 빼앗겼다. 그 언약궤는 어디로 갔는가. 블레셋 사람들이 아스돗 다곤의 신전에 두었다. 그들은 불길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자 언약궤를 돌려보내기로 한다. 이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서 수십 년간 머물러 있었다. 사울왕은 그의 통치 기간 이 언약궤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다윗왕은 달랐다. 왕이 된 다윗은 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열망이 있었다. 마침내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실어 옮기려 했다. 그 계획은 대실패로 끝났다. 새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뛸 때 언약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었던 웃사가 죽은 것이다.(삼하 6:1~11)

 

언약궤는 새 수레에 실어 옮기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어 옮겨야 했다. 3개월 뒤 말씀의 방법을 따라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예배를 드렸다. 언약궤 앞에서의 예배가 얼마 만인가. 통탄할 세월이었다. 언약궤 없이 드린 예배의 세월을 말한다.

 

언약궤가 블레셋에 빼앗긴 세월, 언약궤가 아비나답 집에서 무시된 세월, 언약궤가 한때나마 다윗에게 잘못 다뤄진 세월은 예배의 암흑기와 같았다. 우리도 우리의 예배가 언약을 빼앗긴 예배, 언약을 무시하는 예배, 언약을 잘못 대하는 예배가 아닌가 둘러봐야 한다.

 

그렇다. 우리가 진정한 예배자라면 인디아나 존스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 인디아나 존스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레이더스’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고학자다. 그가 언약궤를 찾고자 하는 이유는 정치적이며 군사적이다. 우리는 어떤가. 신앙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음에도 예배 가운데 잃어버린 언약을 찾고 또 찾는가.

 

찬송가 14장은 의미심장하다. 2절은 이렇다. “주 언약하신 것 끝까지 지키니 저 하늘나라 향하여 곧 가리라 주 얼굴 뵈올 때 내 맘이 기쁘고 영원히 주의 영광을 찬양하리.” 찬송가 370장 4절은 이러하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두 찬송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언약을 품은 찬송들이다. 예배에서 하나님과 맺은 불변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그 언약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이 같은 하나님의 언약들을 예배 가운데 다시 기억하고 다시 붙잡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지푸라기 같은 것을 붙잡고 위안으로 삼거나 그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게 된다.

 

우리는 세상 나라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똑똑히 보고 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결코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언약 백성이다. 예배 가운데 언약의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하고 언약의 백성들은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위풍당당함을 되찾아야 한다.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시시각각 어려움이 더해지고 있다. 확진자와 사망자의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행정명령의 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거리는 날로 황량해지고 자영업자들은 계속 문을 닫고 있다. 학생들이 등교하지 못한지는 꽤 여러 날이 됐다. 500명 이상 모일 수 없다고 한 지 며칠이 안 돼 50명 이상 모일 수 없다고 했다. 필자가 사는 미국 뉴욕의 상황이다. 뉴욕에 이웃한 뉴저지는 현재 야간 통행금지 중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 하나님만 아신다.

 

필자가 섬기는 퀸즈장로교회는 50명으로 숫자를 제한해 사순절 새벽예배를 계속 드리고 있다. 매일 예배를 드리며 미국 대통령과 정부, 한국 대통령과 정부, 각 나라의 의료진과 환자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이럴 때 교회가 사회적 거리 두기에 앞장서며 집에 머무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왜 안 듣겠는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책임과 사회의 안전을 아우르는 의견임에 동의한다. 이런 위기의 때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 있고, 의료진의 생명을 건 역할도 있다. 그리고 교회의 역할도 분명하다.

 

하늘의 문을 두드리며 자복하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는 교회의 독특한 역할이다.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겠지만, 정부의 방침을 준수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지키심을 구하며 모여서 기도하는 길을 간다.

 

아무튼, 숫자 제한 때문에 예배에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다. 성도들은 너무나 예배를 그리워하고 있다. 눈에는 주렁주렁 눈물로, 목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예배를 갈망한다. 그렇다. 예배는 갈망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예배를 별 갈망 없이 드린 적이 많았는데, 갈망이 없는 자는 예배자로 적합지 않음을 이번 기회에 온몸으로 깨닫게 됐다.

 

예배자라면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영광스러운 예배에 갈망으로 응답하며 나가야 한다. 영혼의 갈망은 물론 육체의 앙모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1~2)

 

예배는 갈망이다. 특별히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임재(presence)를 갈망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편재(遍在)하신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임재하시지 않으신다.

 

예배드리면서 나를 갈망할 수 있다. 내가 만족할 예배, 내 필요를 충족하게 해줄 예배, 나를 위로할 예배를 갈망한다. 일견 그럴듯하지만, 예배의 갈망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임재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간이 “쉭쉭” 소리를 내거나 눈물을 쥐어짜면서 조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만들려고 조작하는 것과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전심으로 갈망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임재는 땅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말씀 가운데, 찬양 가운데, 기도 가운데, 성례 가운데, 그리고 모든 예배 순서 가운데 하나님은 다양하게, 강력하게, 따듯하게 임재하신다. 그 임재는 나를 압도해 반드시 나의 생각을 충만케 하고 나의 감정을 뜨겁게 하며 나의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나의 전(全) 존재가 ‘업그레이드’ 되므로 명백히 알 수 있다.

 

복음이 확실하게 이해되고 말씀에 찔림이 크고 회개가 쏟아지고 감사가 넘치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이 전개된다. 하나님의 임재는 특정 교회와 어떤 시대의 큰 부흥을 통해서도 확실히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갈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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