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하나님은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문화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문화가 할 일이 아닙니다.
자연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자연에 잠긴 풍성함을 드러내는 것이 문화입니다.

문화 명령은 사람들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랍니다.

이런 까닭에 모든 문화는 종교성을 반드시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의 배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가 필연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느 문화이든 문화는 그 자체의 모습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지를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스핑거(His Finger)를 들어보셨습니까?
히스핑거는 주님의 손가락을 지칭합니다.
히스핑거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문화출판사 이름입니다.
히스핑거 몰(Hisfingermall)은 우리 교회 밖에 세운 회사 이름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효과적으로 잘 수행하고자 세운 기관들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손으로 세상을 창조(Creation)하셨습니다. (시 8:3)
주님은 주님의 손으로 세상을 구원(Restoration)하십니다. (요 8:8)
주님은 주님의 손으로 세상을 통치(Governance)하십니다. (사 40:10-11)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통치의 이야기를 문화 영역에서 펼칠
히스 핑거와 히스 핑거 몰에 대한 뜨거운 관심, 기도, 참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랍니다.


나폴리 민요 “오 쏠레 미오 (나의 태양)”을 들어보신 적

있으시지요.

적잖은 분들이 그러셨겠지만 저도 들어본 적도 있고

부른 적이 있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가사들이 기억납니다.
멋들어진 선율을 타고 오르던 가사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오 쏠레 미오 스딴 프론떼 아 테

(나의 태양 너의 얼굴 속에 있다)

오 쏠레, 오 쏠레 미오 (태양, 나의 태양)
스딴 프론떼 아 테! (너의 얼굴 속에 있다)
스딴 프론떼 아 테! (너의 얼굴 속에 있다)

8월의 태양만큼 작렬하는 멋진 태양이 어디 있을까요?

간간히 내리는 소낙비 뒤로 숨긴 하지만
8월의 태양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속에서 그런 태양을 본다는 것은

너무 벅찬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에게 광채가 임한 것이지요.
우리 얼굴 속에도 태양처럼 광채가 가득 차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중국의 신해혁명 때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하는 기준이

그 얼굴에 있는 광채였다고 합니다.
자 이제, 태양이 온 땅에 가득한 8월을 맞았으니
우리 얼굴의 광채도 더욱 빛나야겠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 더운 여름에도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육과 선교입니다.

이 여름에도 우리 교회에서 교육과 선교는

멈추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VBS를 통해 신앙을 훈련하는 교육이 펼쳐집니다.
각 교육부서의 준비는 예년에 비해 각별합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비대면 VBS는

상상 이상의 준비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각부 지도자들과 교사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선교도 여러 선교지의 선교사님들과 Zoom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들을 돕기 위한 선교 바자도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있을 것입니다.

팬더믹 상황을 구실 삼아 흘려보낼 수도 있었을

단기선교를 해외선교위원회를 주축 해서

창의적으로 이어가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올해 8월을 수놓을 신앙 교육과 복음 선교를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교육과 선교에 어떤 형태이든지 동참한다면
훗날, 가장 어려웠던 2020년의 VBS와 선교를 기억하여 말할 것입니다.

그날, 주님의 칭찬과 위로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집에 크고 작은 액자 여러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액자 속에는 그 크기에 맞는 그림이나 사진을 집어넣습니다.
큰 액자에 간혹 작은 그림을 넣을 수는 있어도
작은 액자에 큰 그림을 넣을 수는 없습니다.

나의 좁은 생각의 액자 속에 하나님의 큰 그림을

다 넣을 수는 없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으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시험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것을 보고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종족 밖에 몰랐던 하박국 선지자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큰 그림을 품으면서

그의 생각의 액자도 달라졌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을 모른 채 나 홀로 시험에 들지 말아요.
하박국 선지가가 그랬듯이 이제는 내 생각의 액자를 바꿀 때입니다.

나의 작은 액자에 하나님의 큰 그림을 넣을 수는 없으니까요.


1948년 7월 17일은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날입니다.
헌법을 기준으로 모든 법들이 세워졌고

사회질서가 유지됩니다.
기준이 없는 곳엔 혼돈이 깃듭니다.
잘못된 기준은 모두를 슬프게 만듭니다.
자기만의 기준을 모두에게 적용시키려면

많은 사람에게 괴로움을 줍니다.

일이 기준이 사람은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직업을 바꾸지 않습니다.

몇 대째 같은 일을 이어가는 가정도 적잖이 있습니다.
돈이 기준인 사람은 돈 따라 자리를 쉽게 옮깁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 깊이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사람을 채용할 때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빨리 출세한 사람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채용을 꺼렸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쉽게 출세한 사람은 독선적이기 쉬우며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남의 아픔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늘 기준으로 살다간 사람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7월 4일, 어제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이었습니다.
8월 15일. 다음 달에는 대한민국의 광복절이 있습니다.
두 단어, 독립과 광복은 같은 말일까요, 다른 말일까요?
독립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것에 예속하거나 의존하지 아니하는 상태로 됨”입니다.

영어로는“Independence”라고 합니다.
광복의 사전적 의미는“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입니다.
영어로는“Restoration of Independe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은 없었던 자유를 갖는 것이요,
광복은 잃었던 자유를 찾는 것입니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광복한 것이 아니라 독립한 것입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아니라 광복한 것입니다.

문화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활용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화는 출발과 과정과 결과가 철저히 종교적인 것입니다.

문화는 독립을 선언하거나 광복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화는 철저히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문화전쟁이란 인간의 자율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전쟁이란 하나님께의 의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와 문화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문화의 모든 영역이 자율을 추구하면서 속속들이 세속화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영역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문화가 종교,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문화전쟁을 위한 용사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미국독립과 대한민국광복을 위해 목숨 건 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문화전쟁에

목숨 건 자들은 쉽게 찾아 볼 수 없답니다.


오늘은 6월 28일 주일입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020년 전교인 여름 수련회 첫째 날입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삼삼오오 수련회 장으로 올라가는

풍경이 펼쳐졌을 날이지요.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을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항상 4부까지 예배를 드리고,

친교실에서 즐겁게 교제하던 예배당이

3개월 반 만에 오늘 다시 열리고
본당 수용인원의 25% 숫자가 모여서 두 번만 예배 드리고
아무런 교제도 없이 집으로 가게 될 줄

정말 아무도 몰랐습니다.

나의 일도, 우리의 일도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아무도 몰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한 분 있으십니다.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하나님만은 아십니다.

한해의 절반이 지나고 7월이 시작됩니다.
나는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는 하반기의 길을 걷습니다.

우리의 한계 밖에 계신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움 없이 아무도 모르는 길을

주저 없이 걸을 수 있습니다.


고요한 가을날 까치 한 마리가 뜰로 날아왔습니다.
치매기가 있는 노인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저 새가 뭐지.” “까치요.”

아버지는 조금 후 다시 묻습니다.
“얘야, 저 새가 뭐지.” “까치라니까요.”

아버지는 창밖을 보시더니 또 묻습니다.

“얘야, 저 새가 무슨 새라고 했지.”
“몇 번이나 대답해야 아시겠어요. 까치요, 까치라고요.”
그때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안타까운 듯 말씀하셨습니다.

“아범아, 너는 어렸을 때

저게 무슨 새냐고 100번도 더 물었단다.

그때마다 아버지는‘까치란다, 까치란다.’
100번도 넘게 대답하시면서 네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지.
그래서 네가 말을 배울 수 있었단다.”

아버지 날을 앞두고 읽었던 글입니다.
뭔가 부끄럽고, 왠지 울컥 이었고,

몹시 아버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님은 나를 키우실 때 많이 힘드셨을 텐데,

묵묵히 참으셨고
아버님이 연세 드셨을 때 나의 무례함에

마음 아프셨을 텐데도 받아 주셨습니다.

아버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애야, 저 새가 뭐지”라고 까치를 보고 두세 번 물으셨다면

저는“까치요, 까치라고요.”라고 대답 안 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버님, 아버님은 저 새 이름이 뭔지 모르셔도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어려운 일이 쉬지 않고 이어집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묻고 싶습니다.
“왜(why)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일어난 어려움이 왜 일어났는지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그 어느 누구의 설명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왜?라는 질문으로 뭔가 원인규명에 집착하는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 아닙니다.

“왜?에 집착하면 원망과 불신으로 가득 찬 소모적인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왜?라는 질문보다 현명한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how)?입니다.

“어떻게 이 어려움을 극복할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왜?는 과거지향적인 질문이고

“어떻게?는 미래지향적 질문입니다.
요셉이 어려움 속에서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는

질문만 하고 있었다면

노예와 죄수의 삶을 극복하여 총리로 세워지는 기적은

못 누렸을 것입니다.

“어떻게?라는 질문과 함께

“무엇을(what)?을 묻는 것도 미래지향적입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게 되는 기적이 이미 담겨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아직 어렵습니다.
이제 질문을 바꾸어봅시다. 상상 못 할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어려움이 왜?가 아니라,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그리고

“이 어려움에서 무엇을?이라고 질문을 바꾸어본다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6월이 오면
슬픔이 더욱 커집니다.
6월에는 현충일과 6.25,

그리고 연평해전이 있어서 더욱 그렇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름 모를 산하(山河)에서 죽어간 사람들.
모윤숙 시인은 이 아픈 시(
)를 절절히 써 내려갔습니다.

산 옆의 외 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 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얼마나 어머니 품이 그리웠을까,

얼마나 사랑하는 소녀가 보고 싶었을까.

그러나 죽어가는 순간에도 이렇게 말했던 그들이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이 6월에는 더욱 울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내 사랑, 미국을 위해
내 자랑, 교회를 위해


2020년 봄, 역사상 유례(流例) 없었던 어려움의 시간을 보내며

오늘은 5월의 마지막 날을 맞게 되었습니다.
힘든 시간이 지나며 수많은 것들이 함께 떠내려갔습니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니, 지금 내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알렉산더 대왕이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땅과 전리품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걱정스러운 신하들이 물었습니다.
“대왕이시여, 이렇게 다 나누어 주시니 대왕 것은 아무 것도 없나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바로 희망이다.

내겐 희망이 있다.”
꺼지지 않는 희망이 그를 역사의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도 인종차별의 어려운 상황에서

“내겐 희망이 있다고”라고 말함으로써 역사의 방향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내도
지금 내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희망입니다.
지금, 희망이 있으면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자, 희망을 돛을 달고 6월의 여름 바다를 힘차게 저어갑시다.


먼 길을 돌아가던가, 낡은 다리를 건너던가.
고민 끝에 그 사람이 드디어 낡은 다리를 건너기로

결정했습니다.

명색이 크리스천인지라 이 다리를 안전하게 건너면
100불을 감사헌금하기로 굳게 다짐했습니다.

아무 일 없이 중간 즈음 이르렀을 때
마음에서 감사헌금 액수가 50불로 조정되었습니다.
안전하게 거의 다 건널 즈음 드려야겠다는 감사헌금이

20불로 재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막판에 갑자기 돌풍이 불면서 이 사람이 흔들거리는 다리에서
거의 떨어질 지경이 된 것입니다. 사색이 된 이 사람이 황급히 말합니다.

“아이고~~백 불입니다요....”

다리 위에서 마음이 바뀌고 또 바뀐 사람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는 아닌지요.

아무리 잘 흔들리는 다리 위를 걷는다하여도
나의 결단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흔들거리는 세상입니다.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마침내 나를 구원하시고 끝내 이 땅을 고치실

것이라는
믿음만큼은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꼭 찾아와라”

“네. 알겠습니다”
친구와 나는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은
우리 반 친구를 찾으러 갔습니다.
그 친구가 사는 동네는 교회에서 아주 멀었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우리가 가본 적도 없는 동네에서

친구를 찾는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오며가며를 포함 몇 시간을 들였지만 결국 못 찾았습니다.

미안해요, 선생님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잊었지만 그 친구를 잊지 못하셨던 선생님.

훗날 선생님도 직접 찾아 나서신 것으로 짐작은 되었습니다.
한 아이라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려는 선생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음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사해요, 선생님

 

지난 15일은“스승의 날”이었습니다.
나를 힘써 빚어주셨던 교회 선생님들을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보겠노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시면서도
자신들은 돌보지 않으셨던 교회 선생님들. 

사랑해요, 선생님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기억해요, 선생님


어머니날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아직까지도 굳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계신 아이는 빨간 카네이션을 달고

어머니가 안 계신 아이는 하얀 카네이션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어머니날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꽃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노래도 그랬습니다.

2절이 특히 그랬습니다.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주시고

 자라선 문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학교에서 돌아와도 문기대어 기다리는 어머니는 제게 없었습니다.

한 때는 어머니날의 꽃이 싫었고 노래가 슬펐었으나

하나님이 좋으신 새어머니를 보내주셔서 저를 보듬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그 어머니도 안 계시지만

이제는 어머니날이 너무 좋습니다.

어머니날의 꽃과 노래가 너무 좋습니다.

 

어머니날의 꽃은 온 땅에 그윽한 어머니들의 아름다운 향기요,

어머니날의 노래는 자녀를 살리는 어머니들의 정결한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로 기도한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전쟁영웅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아버지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의 아이를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 자기를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항거할 줄 알게 하시고

폭풍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알며 패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알도록 해주소서.

 

그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목표를 높게 하시고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리게 하시며

미래를 지향하게 하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게 하소서.

 

그 위에 유머를 알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아가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과

자기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한데 있다는 것과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그의 아비인 저는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나직이 속삭이게 하소서.

 

우리에게 자녀를 위한 눈물이 있습니까?

우리는 자녀를 위해 무엇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제자훈련, 전도 폭발 훈련은 계속되고 있답니다.

제자 훈련 가운데 성경암송 훈련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암송하는 구절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 젊은이가 선배 그리스도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배 그리스도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을 하였습니다.

 

 “그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네.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오직 한 방향으로 향하며

         뒤를 돌아볼 수 없다는 뜻이고

 둘째,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세상과 이별하였으므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나타내고

 셋째,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더 이상 자기의 계획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암송하시든 그렇지 않으시든

나는 정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맞는지

사순절과 고난 주간을 품고 있는 이 4월이 다 지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퍼즐을 맞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큰 퍼즐은 더욱 그렇습니다.

지난 금요일 밤, 드디어 퍼즐을 맞추었습니다.

목사님의 장례예배 가운데

목사님을 추모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보니

한 큰 인물의 퍼즐이 맞추어진 것입니다.

 

고(故) 장영춘 목사님에 대한 각 사람의 퍼즐을 모아보니

사람 숫자만큼 형형색색이었으나 주제는 하나였습니다.

모두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누구에게나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입니다.

목사님의 생애는 사랑의 퍼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후일에 생명 그칠 날이 있을 터인데,

어떤 퍼즐을 남길 것인지

목사님도 추모 하면서

스스로의 모습도 깊이 생각했을 지난 금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공하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고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공인생을 빚으려 살지 말고

사랑인생을 빚으며 사는 것이 진정한 인생임을

누구라도 깨달았을 지난 금요일 밤이었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셨습니다.

수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그 앞에 굴복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셨으나 사람 앞에 비굴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유주의 사상이 신학과 교회를 물들일 때도

보수의 기치를 내리기는커녕 더 담대히 싸우셨습니다.

한 번 맡으신 일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내 결과를 보셨습니다.

 

질책을 받아도 즐거웠던 것은 그의 사랑이 의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입가에는 수줍은 미소와 그 가슴에는 따듯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의 끝이 어딘지 궁금했습니다.

그의 시선은 늘 힘든 자와 열방에 두루 닿았습니다.

 

이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며

우리를 응원도 하시고 우리를 기다리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장영춘 목사님.

남기신 믿음과 보이신 리더십의 빈자리가 큽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툭툭 털고 여덟 번 일어나셨던

불굴의 목사님이 우리의 목사님이셨던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 비록 힘들지만 목사님처럼 꼭 일어날게요.

존경하는 목사님, 그 날 천국에서 뵈어요.


고등학교 때 이 찬송을 부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입으로 찬송을 부르면서 머리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찬송을 왜 부르지? 나는 거기 없었는데...”

한절 한절 부를수록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이 찬송가에서는 열 번이나 묻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놀라운 깨달음을 준 것입니다.

 

 내가 그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군병일 수도 있구나....

 내가 그때에 예수님을 향해 고함치던 무리일 수도 있구나....

 내가 그때에 예수님을 조롱하던 강도일 수 있구나....

 내가 그때에 예수님을 놔두고 도망간 제자일 수도 있구나....

 

이제는 그 질문에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죄가 그때에 거기에 있었다고,

그러니 내가 내 죄와 함께 그때에 거기에 있었던 것이 맞다고


이상화 시인이 1926년에 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런 중간 글이 있습니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1926년 이상화 시인의 염려가, 2020년 우리에게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들도 빼앗기고 봄도 빼앗겼습니다.

화사하고 향기로울 봄 꽃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봄의 뜨락을 올해는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지만 슬퍼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 상황을 다스리시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밖의 봄은 즐길 수 없어도 마음의 봄은 누릴 수 있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주님의 밀어(密語)가 들리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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