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어제 장례식을 마쳤습니다.
지난 목요일 새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권사님.
며칠 전 아흔한 번째 생신을 지내셨습니다.
어머님의 상황이 안 좋아지신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에 사시는 따님이 서둘러 뉴욕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 때문에 그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평소 일 년에 두 차례 찾아 뵐 때 걸리던 시간의 몇 배를 보내고야

뉴욕에 도착하여 그리운, 그리고 아프신 어머니를 뵙게 되었습니다.

따님이 미국에 체류하는 시간을 넉넉히 갖지 못한 상황에서

여러 날 식사를 드시지 못하여 점점 쇠약해지시던 권사님은

자신의 건강보다 더 걱정되시는 것이 있으셨습니다.
따님이 자신 때문에 힘들어지지 않으시길 바라신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 품에 어서 안기고 딸은 어려움 없이

자기가 사는 곳으로 안전히 돌아가길 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라”는 위대한 유언을 따님에게 남기신 권사님.

하나님 품에 안기시던 날 새벽,
따님에게 가슴이 답답하시다는 말씀을 하시고
따님의 손을 잡은 채 따님의 기도 속에

이 땅을 떠나신 권사님은 끝까지 따님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다 그러신가 봅니다.
살아생전 자신보다 애절히 자녀를 돌보시느라
그 몸이 약하고 약해지신 어머니들은
이 땅에서 호흡이 멈추는 마지막 순간에도 여전히 자녀 걱정이신가 봅니다.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을 출발하여 그 해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도착한 배가 있었습니다.
그 배가 항해하는 내내 밖에서는 풍랑, 안에서는 불평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배의 항해 일지는 매일 다음과 같은 글로 마감하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서쪽으로 전진했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가 이끈 배입니다.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온 그를 시기한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사람들에게 달걀을 세워보라고 했습니다.
다들 끙끙대며 달걀을 세워보려고 했지만 아무도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콜럼버스가 달걀의 한쪽 끝을 조금 깨뜨려서 세웠습니다.
사람들은“그렇게 라면 나도 달걀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세운 사람은 콜럼버스가 처음이었습니다.

남이 무엇인가 처음 한 것이 쉬워 보여도
실제 처음 그렇게 한 사람은 그 사람뿐입니다.
발상의 전환 없이는 새로운 길을 처음 갈 수 없습니다.

뚝심이 없이는 그 새로운 길을 쉽게 포기합니다.

달걀을 세우듯이 새로운 발상으로 출발한

서쪽으로의 항해를 포기하지 않았던 콜럼버스.
내일은 그의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도 콜럼버스의 달걀은 서쪽으로 계속 가는데

오늘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들으셨나요?
가을벌레 소리와 함께 왔는데 못 들으셨는가 보군요.
어느덧 다가 온 가을이 아직 우리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머지않아 가을은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우리 곁을 떠날 것입니다.

매년 가을이 우리 곁에 머무를 때
가을이 우리의 손을 붙잡고 이끌어 가는 곳이 있었습니다.

떠들썩한 가을 바자회였습니다.
성도 소리 가을 소리,
음식 냄새 가을 냄새가 한껏 어울려 있던 곳이지요.

그런 바자회가 올해는 힘들 줄 알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 가을에도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우들은 가을을 그냥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예년처럼 우리 교회 가을 바자회에서 같이 가을 노래를 부르자고 합니다.

저 건너편에서 오랫동안 땅을 다졌던 새 성전이
이제 막 고개를 살포시 들려고 합니다.
어제 시작되어 10월의 매 토요일마다 있을 가을 바자회는
예년보다 규모는 작아도
마음은 이 가을, 그 어느 날의 따가운 햇살보다 더 뜨거울 것이랍니다.


얼마나 추웠을까요?
찬 바다에서.
얼마나 그리웠을까요? 사랑하는 가족들이.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자기를 건져 줄 사람을.

그는 끝내 그는 그 찬 바다에서 숨졌습니다.
북쪽에서는 총을 쏘고, 남쪽에서는 바라만 보고.
아무도 그를 구하러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난주 한반도 저 북녘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날 그 시간, 그 바다를 지켜본

미상의 비행물체가 하늘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다시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그 사람.

누가 무엇으로 설명하고
누가 무엇으로 변명해도
우리 모두의 애통과 분노를 가눌 길 없습니다.

차갑고 무서운 바다 같은 세상에서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그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많고, 그들을 구경하는 자들도 적지 않은데.

그들을 구하러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하늘 하나님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실 것입니다.


올 가을 영성훈련 플러스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 가을 감사쏭 플러스를 부르고 싶습니다.

들어보셨나요? 먼저“감사쏭”을 들으셔야 합니다.

밝고 경쾌하게 부르지만 내용은 묵직합니다.

그래서 감사 그래도 감사

그러나 감사 그러므로 감사

그렇지만 감사 그럼에도 감사

그러니까 감사 아주 그냥 감사

그리하실지라도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이래도 저래도 감사

매일매일 감사 항상 감사

쉬지 말고 감사 범사에 감사

범사에 감사 범사에 감사

감사가 넘치고 있습니다. 너무 멋진 감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 대신, 불평 대신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사 몇 줄 더 넣을 수 있다면 다음 가사를 플러스하고 싶습니다.

있어도 감사 없어도 감사

남아도 감사 모자라도 감사

성공도 감사 실패도 감사

건강도 감사 아파도 감사

살아도 감사 죽어도 감사

여러분들도 플러스 하실 감사 내용이 많으실 것입니다.
가을이 조금씩 깊어집니다. 우리 모두 감사 플러스의 가을을 살아요.


저의 자리는 늘 약함의 자리였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것이 없는 자리였습니다.

내세우기는커녕 부끄러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올해 초부터 스멀스멀 다가오다 마침내 전 세계에 밀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우리도 사순절 중간 즈음부터 온라인 예배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저의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떠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교우들의 고통이 커져 갈수록 저의 아픔도 깊어졌습니다.

교우들이 이런저런 시름에 잠을 못 주무시는데
저 또한 잠을 깊이 이루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번 저의 약함의 자리도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루하루 말씀으로 저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의 넘치는 사랑과 뜨거운 기도로 흠뻑 젖는 축복의 자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지난 목요일 어깨 수술을 잘 마치고 회복의 시간으로 들어섰습니다.
많은 어려움 가운데 계신 우리 교우들의 회복이 저의 회복보다

더 앞서시기를 사랑과 기도에 빚진 약한 목사의 간절한 기원입니다.


가을에 뭘 하실 거예요?
가을에 하기 좋은 것이 있습니다.
염려입니다.
가을인데 딱히 열매는 없지....
낙엽은 한 둘 떨어지지....
정말 염려가 한 둘이 아닙니다.
시인들에게 가을에는 무얼 하는지 물어보세요.

가을이 내게 말하네
가을은 사랑하기 좋은 계절인데 뭘 하느냐고

나상국 시인은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하네요.

김현승 시인은 기도할 것이라고 하네요.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제게 염려 많은 가을에 뭘 할 거냐고 물으신다면

찬양으로 답하고 싶습니다.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가을 뜨락에서 염려를 뽑고 주님의 평화를 가꾸고 싶습니다.


아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아들이 어릴 적에 옆에서 나지막이 자장가를 불러 준 적이 있습니다.

노래 부르는 가운데 아들이 잠들기도 하고
때론 제가 먼저 잠들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소록소록 잠들라

하늘나라 아기별도 엄마 품에 잠든다

어제 아들을 위한 노래를 들었습니다.
팬더믹 때문에 가족만 모인 결혼식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아들을 보았습니다.

완전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 다함이 없는 사랑에 겨워
둘 한 몸 되어 보람 있게 살라 손 모아 주님 앞에 빕니다

하나님도 아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울려 퍼진 이 노래는
아들 예수님이 사역하시면서 힘드실 때마다 큰 힘이 되셨음이 분명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여러 상황 속에서 아들을 위해 짧게 부르는 아버지들의 노래이지만

그 아들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사닥다리에 올라가 보신 적이 있으시죠?

어떠셨나요?

사닥다리는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줍니다.

사닥다리 아래서는 결코 볼 수 없던 광경을 보게 하고,

결코 할 수 없던 일을 하게 하고, 결코 찾을 수 없던 것을 찾게 하는

보배로운 물건입니다.

 

사닥다리는 큰 어려움을 막기도 하고 사람을 구하기도 합니다.

1층에 세 들어 살 때, 2층에서 연기가 났습니다.

2층에 사는 사람이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은 것을 잊고

출타한 것입니다.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2층 창문으로 진입하여 화재를 막은

사람은 누구인지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겠습니다. ^ ^

 

사닥다리는 때때로 위험도 합니다.

그 위로 올라간 사람을 그 아래 있는 자들이

잘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 사닥다리를 밑에서 조금만 흔들어도

위에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이 땅의 어떤 사닥다리와도 견줄 수 없는

사닥다리가 멋지게 펼쳐집니다.

창세기 28장에 야곱 앞의 사닥다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늘에서 땅까지 세워진 사닥다리를 통해

이 땅 중심의 삶을 살던 야곱이 드디어 하늘 비전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사닥다리 중, 당신이 경험한 사닥다리는 어떤 사닥다리였나요?

 


오늘은 교육부 졸업 예배가 있는 날입니다.
각 부서에서 신앙교육을 받고 다음 부서로 올라가기도 하고

고등부를 졸업한 친구들 중엔 일부는 타주로 떠나기도 합니다.

졸업의 자리에서 꼭 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교역자님, 부장님, 선생님들의 희생과 수고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의 나를 향한 눈물 어린 기도와 끝없는 헌신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세우려는 모든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졸업의 자리에서 꼭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은
앞날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실 일들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순종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미래를 바라보십시오.

우리 교회의 자랑스러운 보물 같은 졸업생들이여,
졸업의 자리는 이렇듯
과거에 대한 회고와 미래를 향한 전망의 자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우리 졸업생들이 어디를 가나
하나님의 가호(
加護)하심이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문화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문화가 할 일이 아닙니다.
자연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자연에 잠긴 풍성함을 드러내는 것이 문화입니다.

문화 명령은 사람들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랍니다.

이런 까닭에 모든 문화는 종교성을 반드시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의 배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가 필연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느 문화이든 문화는 그 자체의 모습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지를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스핑거(His Finger)를 들어보셨습니까?
히스핑거는 주님의 손가락을 지칭합니다.
히스핑거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문화출판사 이름입니다.
히스핑거 몰(Hisfingermall)은 우리 교회 밖에 세운 회사 이름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효과적으로 잘 수행하고자 세운 기관들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손으로 세상을 창조(Creation)하셨습니다. (시 8:3)
주님은 주님의 손으로 세상을 구원(Restoration)하십니다. (요 8:8)
주님은 주님의 손으로 세상을 통치(Governance)하십니다. (사 40:10-11)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통치의 이야기를 문화 영역에서 펼칠
히스 핑거와 히스 핑거 몰에 대한 뜨거운 관심, 기도, 참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랍니다.


나폴리 민요 “오 쏠레 미오 (나의 태양)”을 들어보신 적

있으시지요.

적잖은 분들이 그러셨겠지만 저도 들어본 적도 있고

부른 적이 있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가사들이 기억납니다.
멋들어진 선율을 타고 오르던 가사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오 쏠레 미오 스딴 프론떼 아 테

(나의 태양 너의 얼굴 속에 있다)

오 쏠레, 오 쏠레 미오 (태양, 나의 태양)
스딴 프론떼 아 테! (너의 얼굴 속에 있다)
스딴 프론떼 아 테! (너의 얼굴 속에 있다)

8월의 태양만큼 작렬하는 멋진 태양이 어디 있을까요?

간간히 내리는 소낙비 뒤로 숨긴 하지만
8월의 태양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속에서 그런 태양을 본다는 것은

너무 벅찬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에게 광채가 임한 것이지요.
우리 얼굴 속에도 태양처럼 광채가 가득 차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중국의 신해혁명 때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하는 기준이

그 얼굴에 있는 광채였다고 합니다.
자 이제, 태양이 온 땅에 가득한 8월을 맞았으니
우리 얼굴의 광채도 더욱 빛나야겠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 더운 여름에도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육과 선교입니다.

이 여름에도 우리 교회에서 교육과 선교는

멈추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VBS를 통해 신앙을 훈련하는 교육이 펼쳐집니다.
각 교육부서의 준비는 예년에 비해 각별합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비대면 VBS는

상상 이상의 준비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각부 지도자들과 교사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선교도 여러 선교지의 선교사님들과 Zoom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들을 돕기 위한 선교 바자도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있을 것입니다.

팬더믹 상황을 구실 삼아 흘려보낼 수도 있었을

단기선교를 해외선교위원회를 주축 해서

창의적으로 이어가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올해 8월을 수놓을 신앙 교육과 복음 선교를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교육과 선교에 어떤 형태이든지 동참한다면
훗날, 가장 어려웠던 2020년의 VBS와 선교를 기억하여 말할 것입니다.

그날, 주님의 칭찬과 위로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집에 크고 작은 액자 여러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액자 속에는 그 크기에 맞는 그림이나 사진을 집어넣습니다.
큰 액자에 간혹 작은 그림을 넣을 수는 있어도
작은 액자에 큰 그림을 넣을 수는 없습니다.

나의 좁은 생각의 액자 속에 하나님의 큰 그림을

다 넣을 수는 없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으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시험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것을 보고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종족 밖에 몰랐던 하박국 선지자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큰 그림을 품으면서

그의 생각의 액자도 달라졌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을 모른 채 나 홀로 시험에 들지 말아요.
하박국 선지가가 그랬듯이 이제는 내 생각의 액자를 바꿀 때입니다.

나의 작은 액자에 하나님의 큰 그림을 넣을 수는 없으니까요.


1948년 7월 17일은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날입니다.
헌법을 기준으로 모든 법들이 세워졌고

사회질서가 유지됩니다.
기준이 없는 곳엔 혼돈이 깃듭니다.
잘못된 기준은 모두를 슬프게 만듭니다.
자기만의 기준을 모두에게 적용시키려면

많은 사람에게 괴로움을 줍니다.

일이 기준이 사람은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직업을 바꾸지 않습니다.

몇 대째 같은 일을 이어가는 가정도 적잖이 있습니다.
돈이 기준인 사람은 돈 따라 자리를 쉽게 옮깁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 깊이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사람을 채용할 때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빨리 출세한 사람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채용을 꺼렸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쉽게 출세한 사람은 독선적이기 쉬우며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남의 아픔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늘 기준으로 살다간 사람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7월 4일, 어제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이었습니다.
8월 15일. 다음 달에는 대한민국의 광복절이 있습니다.
두 단어, 독립과 광복은 같은 말일까요, 다른 말일까요?
독립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것에 예속하거나 의존하지 아니하는 상태로 됨”입니다.

영어로는“Independence”라고 합니다.
광복의 사전적 의미는“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입니다.
영어로는“Restoration of Independe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은 없었던 자유를 갖는 것이요,
광복은 잃었던 자유를 찾는 것입니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광복한 것이 아니라 독립한 것입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아니라 광복한 것입니다.

문화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활용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화는 출발과 과정과 결과가 철저히 종교적인 것입니다.

문화는 독립을 선언하거나 광복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화는 철저히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문화전쟁이란 인간의 자율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전쟁이란 하나님께의 의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와 문화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문화의 모든 영역이 자율을 추구하면서 속속들이 세속화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영역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문화가 종교,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문화전쟁을 위한 용사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미국독립과 대한민국광복을 위해 목숨 건 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문화전쟁에

목숨 건 자들은 쉽게 찾아 볼 수 없답니다.


오늘은 6월 28일 주일입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020년 전교인 여름 수련회 첫째 날입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삼삼오오 수련회 장으로 올라가는

풍경이 펼쳐졌을 날이지요.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을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항상 4부까지 예배를 드리고,

친교실에서 즐겁게 교제하던 예배당이

3개월 반 만에 오늘 다시 열리고
본당 수용인원의 25% 숫자가 모여서 두 번만 예배 드리고
아무런 교제도 없이 집으로 가게 될 줄

정말 아무도 몰랐습니다.

나의 일도, 우리의 일도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아무도 몰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한 분 있으십니다.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하나님만은 아십니다.

한해의 절반이 지나고 7월이 시작됩니다.
나는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는 하반기의 길을 걷습니다.

우리의 한계 밖에 계신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움 없이 아무도 모르는 길을

주저 없이 걸을 수 있습니다.


고요한 가을날 까치 한 마리가 뜰로 날아왔습니다.
치매기가 있는 노인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저 새가 뭐지.” “까치요.”

아버지는 조금 후 다시 묻습니다.
“얘야, 저 새가 뭐지.” “까치라니까요.”

아버지는 창밖을 보시더니 또 묻습니다.

“얘야, 저 새가 무슨 새라고 했지.”
“몇 번이나 대답해야 아시겠어요. 까치요, 까치라고요.”
그때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안타까운 듯 말씀하셨습니다.

“아범아, 너는 어렸을 때

저게 무슨 새냐고 100번도 더 물었단다.

그때마다 아버지는‘까치란다, 까치란다.’
100번도 넘게 대답하시면서 네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지.
그래서 네가 말을 배울 수 있었단다.”

아버지 날을 앞두고 읽었던 글입니다.
뭔가 부끄럽고, 왠지 울컥 이었고,

몹시 아버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님은 나를 키우실 때 많이 힘드셨을 텐데,

묵묵히 참으셨고
아버님이 연세 드셨을 때 나의 무례함에

마음 아프셨을 텐데도 받아 주셨습니다.

아버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애야, 저 새가 뭐지”라고 까치를 보고 두세 번 물으셨다면

저는“까치요, 까치라고요.”라고 대답 안 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버님, 아버님은 저 새 이름이 뭔지 모르셔도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어려운 일이 쉬지 않고 이어집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묻고 싶습니다.
“왜(why)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일어난 어려움이 왜 일어났는지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그 어느 누구의 설명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왜?라는 질문으로 뭔가 원인규명에 집착하는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 아닙니다.

“왜?에 집착하면 원망과 불신으로 가득 찬 소모적인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왜?라는 질문보다 현명한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how)?입니다.

“어떻게 이 어려움을 극복할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왜?는 과거지향적인 질문이고

“어떻게?는 미래지향적 질문입니다.
요셉이 어려움 속에서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는

질문만 하고 있었다면

노예와 죄수의 삶을 극복하여 총리로 세워지는 기적은

못 누렸을 것입니다.

“어떻게?라는 질문과 함께

“무엇을(what)?을 묻는 것도 미래지향적입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게 되는 기적이 이미 담겨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아직 어렵습니다.
이제 질문을 바꾸어봅시다. 상상 못 할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어려움이 왜?가 아니라,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그리고

“이 어려움에서 무엇을?이라고 질문을 바꾸어본다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6월이 오면
슬픔이 더욱 커집니다.
6월에는 현충일과 6.25,

그리고 연평해전이 있어서 더욱 그렇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름 모를 산하(山河)에서 죽어간 사람들.
모윤숙 시인은 이 아픈 시(
)를 절절히 써 내려갔습니다.

산 옆의 외 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 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얼마나 어머니 품이 그리웠을까,

얼마나 사랑하는 소녀가 보고 싶었을까.

그러나 죽어가는 순간에도 이렇게 말했던 그들이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이 6월에는 더욱 울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내 사랑, 미국을 위해
내 자랑, 교회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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